마태복음 강해 (103) 5/30/0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화끈한 은혜만 좋아하는 한국 신자.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치신 직후에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는 세 가지 치유의 이적을 베푸셨다. 그 뜻은 본문 16,17절의 결론대로 말씀으로 귀신을 쫓고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음을 보이시고 나아가 산에서 가르치신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그대로 인간의 연약함을 감당하셨다.
그런데 본문의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사건에선 앞의 두 경우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 데 무엇이겠는가? 문둥병과 중풍병에 비해 감기 몸살 같은 가벼운 병을 낫게 해 주신 것이 그 차이점인가? 그렇지 않다. 아마 그 열병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로 추정이 되는 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항생제가 발명되기 이전 약 백년 전만 해도 치명적인 병이었다. 이천 년 전에는 당연히 죽을 병이었다.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복음에 따르면 ‘중한 열병’이라고 했고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낫기를 간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4:38,39)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도 죽기 직전에 고쳐 주신 것이다.
문둥병자와 백부장은 본인들이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먼저 나와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베드로 장모의 경우는 열병으로 의식이 없어 주위 사람이 간구하긴 했지만 베드로나 장모 직접 당사자가 기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무슨 의미가 되는가? 앞의 두 기사에 비해 본문이 신자에게는 훨씬 더 은혜와 위로가 된다는 뜻이다. 한국 신자들은 항상 화끈한 간섭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왕이면 병도 문둥병이나 중풍병처럼 죽을 병에 걸렸는데도 극적인 치유 과정을 거쳐 단번에 완치되는 모습만 보면 그저 눈물 흘리며 감격하여 어쩔 줄 모른다.
본문이 신자에게 더 위로가 되는 이유는 이렇다. 신자가 아파 누워 비몽사몽간이라 기도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우리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시자 나은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신자 된 특권이 어디 있겠는가?
저자 마태가 이 세 기적을 의도적으로 차례로 기술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둥병자는 본인이, 백부장은 본인 대신 가장 가까운 사람이 기도했지만 베드로의 장모의 경우는 본인도 가장 가까운 베드로도 기도하지 않았다. 주님은 병자의 기도에 상관 없이 우리 연약함을 다 아시고 고쳐 주신다는 의미다. 또 문둥병자는 유태인, 백부장과 그 하인은 이방인, 베드로의 장모는 여자였다. 헬라인이든 유태인이든, 자유자든 노예든, 남자든 여자든 구분하지 않으셨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계급과 지위의 구분에 하나님은 전혀 구애 받지 않으시고 사랑하실 자를 반드시 사랑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교통사고에서 생명을 건져 주고 백혈병을 낫게 해 주고 부도난 사업을 재기케 하는 일들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나님 당신의 마음이 아파서라도 그렇게 안 하신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신자가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뜻이 있어 안 고쳐 주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울 사도가 경고한대로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롬6:1) 시쳇말로 바꾸면 화끈한 것 좋아하다 바로 골로 가는 수가 있으니 좋은 말로 할 때에 평소에 잘 믿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 진리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는 기도도 안 했는데 왜 고쳐주셨는가? 간단하다. 베드로의 장모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평소에 예수님을 잘 따르고 열심히 섬겨서 그의 체면을 봐서 고쳐 주셨다는 뜻이 아니다. 갈릴리 호수 가의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예수님은 자주 기거하셨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선교본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장모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였음에 틀림 없다. 단지 신자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고쳐 주신 것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다.
기적은 기적을 믿지 않는 자에겐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을 믿는다는 것이 신비한 능력만 특별히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신자가 환난 중에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끝까지 몰라라 내버려 두는 법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기적의 출발이자 전부다.
신자가 이 땅의 삶에서 승리하려면 평소 때에 제대로 된 신앙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에 언제나 달렸다. 그런 뜻에서 오늘은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의 내용을 한 번 점검해 보기로 하자.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진리를 간단하게 몇 문장으로 표현하겠다. 제가 말씀 드리는 한 문장이 끝날 때 마다 그 내용을 100%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는다면 속으로 아멘 하시기 바란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시고 하나님 대신 이 땅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셨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그 소명은 잊어 버리고 대신 스스로 교만해져 이 땅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하나님을 배반했다.
-배반의 결과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해졌고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심판을 면할 길이 없었다.
-여전히 죄악 중에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고 부활 하심으로 인간의 죄악, 수치, 고난을 다 감당하셨기에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서 살아 역사하시며 공의와 사랑으로 전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
아마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무 거리낌 없이 아멘 하셨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니라면 정말로 큰 일 난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이제 신자가 되었으니 현실의 어려운 문제를 기도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또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얻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자.” 혹시라도 이 말씀에 아멘 하셨는가? 그렇다면 문제다. 단 하나도 틀린 것은 없다. 아멘 하셔도 된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음의 내용으로 붙들고 있어야 할 진리는 아니다. 이 진술은 믿음의 바탕 위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적용에 관한 것이다.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할 진리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자, 하나님을 힘껏 사랑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신자다워야 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해가 되는가?
또 하나님 다우심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어떻게 다스리며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다.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리에 있어 당신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라곤 눈곱 만큼도 없음에도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구원해주신 그 원리로만 이 피조세계와 인간을 통치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더러 십자가 복음을 신앙의 원리로 갖고 있으라고 하면 “나는 예수 믿었다. 나는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죽어도 천국 간다”는 것으로만 그친다. 십자가가 구원 받은 이후의 신자의 삶과 인생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다. 또 하나님이 천국으로 인도하기 전까지 이 땅에 사는 신자의 인생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도 모른다. 구원을 받았으니 천국 가는 티켓을 확보한 것으로 끝이다. 기도하여 골치 아픈 문제들 해결 받고 하나님을 내 여유와 형편이 닿는 대로 적당히 섬기면 그만이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
신자가 구원 이후 갖고 있어야 할 복음의 진리는 ‘기도하자, 하나님을 사랑하자’가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다. 창세기 17:1-8로 가보자.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유의 표현 양식이 있다. 무엇인지 알겠는가? “내가 너로 … 하리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열왕이 네게 좇아 나리라,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에게 가나안 땅을 주리라. 이 언약의 발단도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다. 모든 동작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주어이고 문장 형태는 능동태다. 아브람은 목적어로만 등장한다. 만약 아브람이 주어가 되려면 전부 수동태로 바꿔야 한다.
아브람의 입장에선 아마 번성하고 싶은 마음은 틀림 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되거나 열왕이 자기에게서 좇아 난다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고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본처 사라와 사이에 날 아들에 관한 약속을 받은 지도 어언 24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고 이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무슨 잠꼬대 같은 말씀인지 그에게는 하나님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정말 고집스럽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내가, 내가, 내가… 하리라”고만 하셨다. 반면에 아브람더러는 무엇을 하라고 했는가? 기도 열심히 해서 복 받고 하나님 당신을 힘껏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그런 뜻은 일언반구도 없다. 다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가 전부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신 바로 일년 뒤에 인간적, 생물학적으로는 100% 불가능한 외아들을 아브람에게 주셨다. 대신에 하나님 당신은 하나 뿐인 아들을 아브람과 우리를 위해 아낌 없이 내어 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를 복 주시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다. 열국의 아비가 되어 세상에서 왕 노릇하게 하신다. 형통하는 왕이 아니라 믿음의 왕으로서 말이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한 것은 우리를 그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엡1:4) 하나님의 신자에 대한 궁극적 관심은 신자가 세상 속에서 의와 거룩과 생명이 충만하게 살아 숨 쉬는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택한 자의 전 존재, 전 인격, 전 인생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꾸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지 택한 자가 처해 있는 환경을 바꾸어 편하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권면하신다.
27번의 열병을 앓은 리빙스턴
그럼에도 신자가 거룩하지 않고 흠이 많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구원이 취소되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죄악 속에서 신나게 놀고 그저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추구했던 우리를 당신과 원수 되었을 때에 불러 내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잘 아신다. 신자의 속에는 아직도 죄의 본성이 싱싱하게 살아 펄떡이며 세상에는 공중 권세 잡은 사악한 세력이 설쳐 대고 있고 우리의 체질과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다 알고 계신다.
인간이 이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는 모든 부분에선 능력을 잘 발휘한다. 이 땅을 정복하는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바벨탑 같은 광대한 건물을 짓고 컴퓨터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 대체하고 유전공학이 새 종자도 만들어내며 다른 행성에 탐사선을 보낸다. 가히 무엇이든 못해 낼 것이 없다. 창조주의 고유의 영역에까지 밀고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 고유의 지성과 이성이 발달해도 못하는 것이 단 하나 있다. 바로 거룩과 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단순히 도덕적 선행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그 마음에 합당해지는 것은 죽어도 못한다. 피조세계를 힘으로는 다스리나 의로서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영혼이 부패되어 생래적(生來的)으로 빛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이 우리를 갈고 닦고 깎을 수 밖에 없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일을 우리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신다.(빌1:6)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사였던 데이빗 리빙스턴은 16년간의 사역 기간 동안 말라리아 같은 중한 열병에 27번이나 걸렸지만 살아 남았고 심지어 사자에게 물려도 죽지 않았다. 사자에게 물린 한 쪽 팔이 의수처럼 덜렁덜렁 붙은 채로 사역을 마치고 고향 스코트랜드에 돌아와 글래스고우 대학생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가졌다. 그 힘든 사역을 자기가 지탱할 수 있었던 근거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예수님의 약속이었다고 고백했다.
사자에게 물려 살아 난 후에도 그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완수할 때 까지는 나는 절대로 불사(immortal)다”라고 어찌 보면 교만할 정도로 큰 소리 쳤던 근거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그 의지와 열심과 힘보다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면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리에 반드시 세우시고야 마는 그 의지와 열심과 힘에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평생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오른 손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것에 대해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다.
잘못 붙들고 있는 신앙의 진리
신자가 구원 이후에 붙들고 있어야 할 믿음의 진리는 하나님께 기도해 고통을 해결하고 받은 축복에 감사해 하나님을 사랑하자가 아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 없다. 몽땅 당장 죽어 마땅한 자들 뿐이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선택해 주셨다. 우리 쪽에서 선택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직 우리로서는 짐작도 못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세상의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뽑혔다. 단지 뽑힘을 받은 것 뿐 구원 후의 우리 모습은 여전히 연약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움 뿐인데도 그 분은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 받은 새사람을 입기를 원하신다.(엡4:24)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유일한 소원이자 목표다. 그 일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신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을 당신 혼자서 우리를 갈고 다듬고 계시며 결국은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구원 이후 신자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며 그 일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두 가지다. 이런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로 신자가 신자다워야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따라 나오게 된다. “어찌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우리를 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자가 신앙 생활에서 힘이 없고 실패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 두 가지 진리는 놓치고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을 사랑하자”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구원 받자마자 바로 천국을 확보하려 든다. 거룩과 의의 자리에 이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든 현실의 어려운 문제만 기도해 해결 받기 원한다. 하나님의 본심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평가만 두렵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어 주실 리가 없으니 신앙 생활이 힘들 수 밖에 없다. 논리적으로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일부러 어렵게 하거나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의와 거룩의 자리에 서는 것만이 신자의 진정한 행복이자 당신의 온전한 자녀가 되는 길임을 그 분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 당신의 본성이 거룩과 의와 생명이므로 그렇지 않은 것과는 절대 공존(共存)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가 거룩과 의의 자리에 되돌아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죄를 안 짓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복 주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ABC같은 원리다. 구원 받은 신자가 계속 그것만 자기 신앙 생활의 금과옥조로 붙들고 있어선 안 된다. 마치 구구셈을 처음 배운 국민학생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 있어서 중학교, 고등학교 가도 그저 “삼삼은 구, 삼구 이십칠” 외우고 다니는 꼴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하나님의 이름만 다르다 뿐이지 기도하면 응답 받고 그 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기도도 하지 않은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고쳐 주시는 만큼 다르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택한 자에 대해 갖고 있는 당신의 계획과 뜻을 절대 변경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택한 자를 당신이 원하시는 자리에 이끌어 놓으실 때까지는 절대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왜 하나님 당신이 나무 위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는가? 문자 그대로 내가 죽더라도 너희를 하나님의 복된 자녀의 자리에 되돌려 놓겠다는 뜻이 아닌가?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희를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형통하고 성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온전하게 붙잡힌 바 되어야 한다. 그 분의 깎고 다듬는 작업에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계시므로 우리 또한 그 분을 끝까지 붙드는 길 뿐이다. 진정으로 내 존재 전부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해 놓으신 수준까지 변화 받기를 소원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병이 낫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기도하면 구원은 취소되지 않겠지만 지금껏 우리 모두 경험했듯이 매번 힘들고 고달플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신앙을 다시 점검해보자. “저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기를 진정 소원합니다. 저를 더 거룩하고 더 의롭고 더 온전한 진리 위에 서게 해 주시옵소서. 오직 이것만이 제가 평생을 두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유일한 기도 제목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저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그 영광의 자리로 이끌 때 까지 저를 떠나지 않을 줄 믿습니다.” 지금 이 기도를 100% 이해하고 동의하며 확신하는가? 또 그렇게 당장 실천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