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06) 6/20/2004
“배에 오르사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가장 성공한 인생
저는 여러분에게 제 인생은 성공했다고 감히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간단하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주일이 기다려지고 또 꼬박꼬박 지킨다는 것만큼 인생의 큰 성공은 없다. 그렇다면 저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도 크게 성공했다. 별로 그런 실감을 못하는 듯한 얼굴들을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예수를 믿은 것이 가장 큰 성공이 되는 이유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다. 망망대해를 작은 돛단배를 타고 가는 것 같은 인생 길에서 어떤 폭풍우를 만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는 듯 했던 이유는 구원을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어 여전히 파도가 흉흉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논리적으로 따져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어떠한 폭풍우에서라도 건져 낼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님께 지적 받은 제자들처럼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이 말에는 여러분이 만장일치로 수긍하는 듯한데 이것도 사실은 문제다.
도대체 믿음이 적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신자인데도 힘든 일만 생기면 불안해 하는 것인가? 기도가 서툰 것인가?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인가? 헌금 수표를 쓸 때마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인가? 여전히 세상에서 내 욕심대로 살고 가끔 죄도 짓기 때문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믿음이 적다고 스스로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어떤 근거가 반드시 몇 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이제 역으로 여러분에게 질문 해보자. 믿음이 약하게 된 그런 잘못들이 완전히 고쳐졌다고 가정했을 때에 믿음이 좋아졌다는 확신이 생기겠는가? 어떤 폭풍우가 닥쳐도 예수님이 구원해주시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믿음이 적은 것의 근거로 스스로 분석한 것이 틀렸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믿음이 적다고 동의한 것은 무조건 겸손을 떤 것이거나 여러분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도는 사실 조금만 연습하면 막히지 않고 술술 잘 하게 된다. 순수한 마음을 갖고 진실되게 하느냐가 문제지 미사여구와 성경 용어 많이 인용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잘 벌면 헌금 수표를 좀 더 부드럽게 쓸 수 있다. 힘든 일이 생겨도 불안하지 않은 것은 성격 상의 차이일 수 있다. 그런 것들로는 기독교 신앙을 평가할 수 없다.
믿음 지상주의
거의 대부분의 한국 신자들은 성경을 너무 단순하게 표면적으로 대충 눈으로 읽고 치운다. 신학용어와 교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은 당연할지라도 앞 뒤 문맥, 당시 상황, 등장 인물의 입장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읽은 후 문자적인 해석으로 그친다. 그러다 보니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서 읽는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은혜와 권능을 베푼 내용, 잘 믿고 기도하면 능력 주신다는 구절만 기억한다.
흔히들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을 논리적으로 따지면 잘못이라고 매도한다. 시쳇말로 필(Feel)이 꽂히고 감정상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머리로 믿지 말라는 것은 기독교 교리를 학문적 지식 대하듯 암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가슴으로 믿으라는 것은 실제 삶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라는 의미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열심과 정성을 힘 닿는 데까지 최대한 동원하여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지정의 전부를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의심 가고 불만이 많고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지성을 동원하여(성품을 다해) 끝까지 씨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는 가슴을 열고 진정으로 받아 들여 충만한 감정으로(마음을 다해)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가 변화되길 원하는 모습과 하길 원하시는 일은 의지를 동원해(힘을 다하여) 실천해야 한다.
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103:1)고 했다. 찬양할 때도 감정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지정의를 동원해 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일반 신자들이 흔히 이해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가슴으로 믿지 말고 머리로 믿어야 맞다.
아무 생각 없이 성경을 읽고 또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결과에 다다르는가 하면 한 마디로 믿음 지상주의(至上主義)다. 하나님이 의심스러워도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 현실에 조금만 불평해도 기도 안 해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 닥치면 무조건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가르치는 자나 배움을 받는 자 모두 기독교 신앙의 핵심 되는 근본 진리를 모르니까 믿음을 만병통치약으로 취급한다. 하나님의 능력에다 신자의 믿음을 보태면 못할 일이 없다는 단순한 공식(하나님+믿음=만사형통)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든다.
그런데 실제로 신앙 생활을 해보면 그 공식이 작동되는 때보다 되지 않는 때가 더 많음을 체험한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능력에는 절대 이상이 없을 것이니까 계속해서 내 믿음이 적은가 보다라고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른다. 그 공식 자체가, 내가 붙들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생각하려고 마음조차 먹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의 목표가 오직 문제를 해결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것에만 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절대 변할 수 없는 상수로 고정해 놓았기 때문에 변수는 언제나 신자의 믿음이다.
사실과 믿음
본문도 신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표면적으로 읽어 치우는 대표적 구절이다. 문자적인 의미 만으로 믿음 지상주의로 해석한다. 예수님이 왜 믿음이 적다고 제자들을 야단치셨는가 하면 주님이 바로 곁에 계시는데도 그저 불안해서 호들갑 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도 어떤 폭풍우가 닥쳐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참고 견디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우리의 불안과 염려를 없애 주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라고만 가르친다. 이 해석이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점수로 따지자면 10-20점 정도 밖에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이다.
폭풍우가 바로 눈 앞에 닥치는데 불안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다. 내일 모레 당장 끼니거리가 없는데 염려하지 않는 자는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자말고는 없다. 믿음의 위인 사도 바울도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염려한 것 때문에 야단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직업이 무엇인가? 대부분이 어부다. 매일 배를 타는 직업이다. 갈릴리 바다는 손금 들어다 보듯이 훤하게 꿰뚫고 있는 자들이다. 갈릴리 바다는 지구의 배꼽이라고 불릴 만큼 지표면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표면보다 240미터나 낮기 때문에 호수 주위는 높은 고원으로 둘러 쌓여 있다. 그래서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하면 기압골이 형성되어 갑자기 돌풍이 불고 큰 파도가 인다. 당시 열 두서너 명 겨우 타는 작은 돛단배 정도는 쉽사리 전복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익사한다는 것을 그들만큼 잘 아는 자들이 없다. 아무리 배를 모는 솜씨가 날고 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공포에 질린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에는 26절의 ‘어찌하여’ 다음에 ‘아직도’라는 뜻의 말이 들어 있다. ‘아직도’라는 단어는 어떤 사실을 의미하는가? ‘그 앞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나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앞에서 내가 분명히 믿음에 대해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아직도 믿음이 자라지 않고 그대로냐?”라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믿음이 적다고 야단치셨겠는가? 문둥병, 중풍병, 심한 열병 같이 당시나 지금이나 불치병들을 고치는 이적을 보고도 주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 때문일까? 아니다. 제자들이 바람과 바다도 잠재우는 모습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27절) 했듯이 병을 고치는 것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것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가끔 마술사나 무당들도 기적적으로 고친다. 심지어 병자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겨내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이 세 번의 병 고치는 이적을 보인 기록 순서에 쉽게 지나쳐선 안 되는 중요한 내용이 하나 숨겨져 있다. 처음에는 환자 본인이 직접 나와 고쳐 달라고 했고 두 번째는 그 대리인이 왔지만 마지막 세 번째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사건에선 동네 사람들이(눅4:38)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이적을 벌써 두 번이나 봤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은 일상적 사실(Fact)의 차원으로 넘어 왔기 때문에 구태여 믿음이 요구 되지 않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폭풍우를 잠재우는 일은 지금껏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해 보인 적이 없었다.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27절)하고 기이히 여겼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뜻이다. 폭풍우를 잠재우고 나서야 예수님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믿음의 시초가 싹튼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바람을 잠재우는 이적을 한 두 번 이미 맛보았고 세 번째 갈릴리 바다를 항해 할 때에 똑 같은 사건이 났다고 하면 절대 호들갑을 떨 리가 없다. 예수님이 곧 잠재우시겠지 하고 어쩌면 주님보다 더 태평할 수도 있다.
기독교 신앙이 가슴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믿어야 한다고 말씀 드린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수십, 수백 번 맞보았는데 그것들을 일일이 기억해 되새긴다면 믿음이 흔들려 불안과 염려에 빠질 리 없다. 지금 이 자리에까지 이끌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앞장 서 가셔서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실 텐데 더 이상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아직도 꼭 가슴이 찡해야 은혜가 되고 대박이 터져야 감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것인가?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아직도 믿음이 적은 까닭은?
예수님이 ‘아직도’라고 구태여 토를 단 이유는 바로 직전에 있은 사건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자는 죽은 자이며 예수님을 따라야만 세상에 머리 둘 곳은 없지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 주었다. 본문 23절 끝에 보면 ‘제자들이 좇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가르침에 완전히 동의하고 믿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25절에 와선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다. 이제 예수님이 믿음이 적다고 꾸중하는 이유가 조금 감이 잡히는가?
예수님의 뜻은 이것이다. “방금 전에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이라 하더냐? 나를 따르면 세상에선 죽을 것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러나 그것은 잠시 죽는 것일 뿐 영원히 사는 길이라고 했지 않느냐? 나를 믿고 따르면 호화 요트 갑판에 드러누워 망고 주스를 마시고 선탠(Suntan)하며 카리브해를 왔다 갔다 유람이나 할 줄 알았더냐? 작은 돛단배로 매일 풍랑에 휩쓸리며 사는 것이라고 하지 않더냐? 아직도 나를 따르는 것, 믿음의 본질을 모르겠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반면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고 계셨는가?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될 때(24절) 즉 배가 전복되기 직전까지 주무셨다. 제자들이 깨울 때까지 배 고물에서 잠에 골아 떨어져 계셨다.(막4:38) 배를 타기 직전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20절)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분이 지금 어디에 머리를 두고 계시는가? 폭풍에 흔들리는 쪽배의 갑판 위에 침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로다. 그것도 거의 모든 자가 항해술에 도사인 어부 출신들이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 와중에 배와 바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목수 출신이 천하 태평 곰돌이처럼 주무시고 계셨다. 이것이 도대체 우리의 지정의 수준으로 판단이 되며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광경인가?
예수 믿는 것이 중병에 걸리거나 어떤 긴급한 문제가 발생하면 기도로 해결 받는 차원이 절대 아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고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힘들고 병들었을 때 기도하셔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지니셨고 신자를 향해 무한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Fact)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사실(事實)을 믿으십시오”라고 가르치는 자나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는 자 모두 아무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믿음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일 수 있다. 아직도 엄연한 사실조차 사실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이 치유와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일반화된 진리, 객관적 사실이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어떤 경우나 어느 때고 자동적으로 100% 그 능력이 발휘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객관적 진리를 자신의 주관적 체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묵은 신자라면 이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꾸 믿기만 하면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정말 고집불통인지 순진한(?) 것인지 (아마 전자일 확률이 훨씬 높지만) 믿음 지상주의를 금과옥조로 붙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깔려 있는 대체적인 믿음의 태도와 내용은 기실 이번 사건에는 언제 주님의 능력이 발휘될 것인가 어떻게 하든 빨리 알아 맞추려는 점쟁이 식이거나, 주님 이번만 봐주시면 다음부터 잘 믿겠습니다 하고 반 협박 반 아부 내기하는 식의 둘 중 하나다.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이 매번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신자의 기도는 오히려 이뤄질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별하여 분석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치유를 받으면 단순히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렇게 큰 은혜를 주신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씨름하여 알아내고 그 뜻에 자기 전 인생을 걸고 반응해야 한다. 반면에 구원되지 않고 있는 문제에 대해선 하나님의 계획을 겸허하게 물을 뿐 아니라 그 계획에 지금 자신이 분명히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아가 자기가 당장 편해지기보다 주님의 계획이 이뤄지기 소원해야 한다. 말하자면 머리를 써서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이 동원되어야 할 부분은?
따라서 믿음이 동원되어야 할 부분은 아직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여태 발생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으며 인간 지정의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들이다. 본문의 경우에 비추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세상에서 형통해야 당연할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지만 세상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머리 둘 곳이 없으며 육신적으로 죽는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나아가 그 말씀을 마치자마자 주님은 바로 제자들을 세상과는 완전히 격리된 바다 한 복판에서 마치 군대에서 뺑뺑이 돌리듯이 광풍과 큰 파도라는 수단을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를 체험토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매일의 삶이 흉흉한 바다 위에서 광풍을 맞으며 보내게 하시는 분이며, 그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만으로 당신의 제자 된 신분을 가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그 열성과 진지함이 뜨겁다 할지라도 여전히 적은 믿음일 뿐이다.
돛단배를 타고 광풍을 맞으며 항해해야 하는 흉흉한 바다가 신자의 인생 전부가 아니다. 참된 실체도 아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것들의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을 뿐이다. 신자가 살아야 할 이 땅의 삶은 나그네의 신분을 갖고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 땅에 사는 것이 가치가 없고 무의미 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현실적 삶이 비록 세상적 형통과 거리가 멀고 그 겉 모습이 날로 후패해 갈지라도 신자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죽는 것인 줄 알게 된 자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구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생관 가치관이 이전과는 완전히 180도로 바뀐 자다. 단순하게 도덕적으로 고상해지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제라도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는 죽을 준비가 된 자가 신자다. 천국을 소망하고 영원을 목표로 하며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존귀케 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 뿐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천국 소망에는 이 땅에서 죽도로 고생했으니 천국에서 반드시 보상 받아야만 한다는 기대의 뜻은 포함될 수 없다. 이 땅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자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가 누리는 위로와 능력과 은총이 얼마나 고귀한지 익히 알고 체험해 보았기에 당연히 천국을 더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란 이 땅에선 나를 흔들거나 넘어뜨리거나 죽일 수 있는 세력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다. 반면에 자신을 이 땅에서 흔들거나 넘어뜨리거나 죽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안다. 그렇지만 그 분이 그렇게 하시는 데는 선한 목적과 보장된 승리의 결과와 궁극적 영광을 예비해 놓지 않고선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라 확신하며 실제로도 지난 주간 동안의 그런 승리를 감사하기 위해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신자가 이 땅에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광풍이 그칠 새가 없다. 두렵고 떨리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 마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장이 터질 정도로 심히 두려워 하셨다. 그러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는 그 광풍 같은 삶 속에서도 세상 사람과는 달리 오직 믿음으로 살 뿐이다.
그들은 광풍이 끝나야 겨우 안도의 한 숨을 쉬지만 우리는 그 광풍을 맞바람으로 안고 있으면서도 안도의 한 숨을 쉴 수 있다. 아무리 세상 최고 전문가인 어부들의 눈에도 지금 당장 배가 전복되어 몰살 할 것 같이 생각될지 라도 예수님이 비록 주무시고 계서도 곁에만 계셔도 우리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이 당장 없더라도 내 일생이 이미 주님을 따라 나섰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은 울음이 그쳐야 웃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울고 있는 중에도 웃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웃을 거리가 없어지면 울음이 따르지만 우리는 웃으면서도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서 또 아직도 그 은혜를 모르는 그들이 불쌍하여 울 수 있는 자다. 세상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 모순, 이 역설만이 참 진리임을 믿는 자가 신자다.
아직도 예수 믿은 것이 가장 큰 성공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가? 예수 믿었다고 항상 웃을 수 있다는 법은 없다. 착각 중의 착각이자 그런 생각으론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울면서 웃을 줄 아셔야 한다. 웃으면서 울 줄 아셔야 한다. 또 그렇게 사는 것만이 신자의 참 행복이자 최고 유익임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시기에 언제나 우리를 바로 지금 그 장소 그 모습으로 두시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