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08) 7/4/04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참람한 예수
본문은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치유한 또 하나의 이적 사건이지만 저자 마태는 예수님이 병자 본인은 제쳐두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대화가 마치 선문답 하듯이 알 듯 모를 듯한 내용이 있어 몇 가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하시지는 않고 대뜸 죄사함부터 받아라고 하자 서기관들이 참람하다고 했다. 참람(僭濫)이란 ‘거짓 참’자와 ‘외람되다는 람’자로 된 한자 말로 하나님을 거짓 된 것으로 모독하는 죄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 하지 않은 일과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죄를 말한다.유대인들은 윤리적 죄를 포함하여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죄 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를 사한다고 선포하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과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대한 반박으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반문한 뜻이 흥미롭다.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죄가 분명히 사해졌는지 아닌지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가 없어 말로만 공수표를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직접적인 도화선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 로마 교황이 면죄부를 판 사건 때문이었다. 카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살아서 테레사 수녀 같이 위대한 업적을 쌓아 성자라는 칭호를 받지 못한 자는 신자라도 죽어 천국으로 바로 가지 못한다. 이 땅에서 고해성사로 회개를 다 하지 못했거나 선행으로 갚지 못한 죄에 대해 연옥에 가서 그 형벌을 치러야 하며 그 곳에서 부활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다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그 형벌이 감면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로마 교황은 죽고 난 후 그 죄가 사해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증명할 수 없으니 이런 성경에도 없는 교리를 만들어 내어 참람한 짓을 한 셈이다.
대신에 일어나 걸어 가라고 하는 말은 그 자리에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나므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그래서 예수님이 서기관더러 너희가 방금 나를 가시적 증거가 필요 없는 면죄부나 발행하는 사기꾼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둘 중에 더 하기 힘든 말을 직설적으로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만약 고통이 완전히 가시고 병이 나았더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도 증거로서 약하다. 체력이 회복되지 못해 평생 누워 있었던 습관 때문에 근육과 뼈가 굳어져 있다면 사람들이 믿지 못한다. 반드시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침상을 들어라고 했다. 병 나기 전의 체력 이상으로 더 강건하게 해 주신 것이다. 또 집으로 가라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 활동에 바로 복귀하라는 뜻이다. 주님은 단 번에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더 좋게 해 주신다. 신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와 권능의 보편적 특성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포함하여 집을 가득 메운 유대인들(막2:4)의 바로 눈 앞에서 침상에 들려 왔던 중풍병자를 그렇게 변화시키겠다고 선언하셨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신18:22)라고 했다. 지금 너희들의 생각이 맞는지 틀렸는지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
사탄의 생각
그런데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기에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서기관들이 생각한 것을 두고 왜 예수님은 악한 생각이라고 야단 치셨을까? 그것도 영어 성경에 따르면 ‘악한 생각’을 ‘wrong’이나 ‘bad’라고 하지 않고 ‘evil thinking’ 사탄의 생각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과연 그 정도까지 잘못된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인간의 죄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잘못을 범한 상대에게 ‘용서해 줄게’라고 말할 때 어떤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가? 피해 보상을 충분히 받았고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니 그 사과를 받아주겠다는 정도이지 죄까지 용서해 준다는 의미는 사실 별로 없다. 실제로 그런 인식조차 잘 하지 못한다.
역으로 우리가 잘못을 범한 자의 입장이라고 쳐도 마찬가지다. 삭개오처럼 4배까지 손해를 배상하고 손에 지문이 닳을 정도로 싹싹 빌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화해했다 해도 여전히 찜찜한 기분은 남게 마련이다. 상대와의 사이가 이전과 100% 똑 같이 회복되지 못하고 무엇인가 서먹서먹한 상태가 된다. 설령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그 관계가 잘 회복되었다 쳐도 내 자신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에 더럽혀진 흔적은 영원히 지울 수 없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를 피해자인 그녀의 남편 우리야는 제쳐두고 ‘내가 주께만 범죄’(시편 51:4)하였다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불신자나 신자를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죄책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의식하여 입술로 겸손하게 고백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 뿐이다. 죄로 헝클어졌던 인간 관계가 다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다는 것은 인간이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또 자신의 죄의 흔적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선행과 공적으로 그 죄 값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죄를 없애고 인간을 변화시켜 인간끼리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 또 모든 인류의 죄 값을 감당한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의 더러운 흔적을 깨끗케 할 수 있다.
외식의 실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의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 원인을 우리는 단순하게 그들이 형식에 치우치는 위선적 외식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 언젠가 말씀 드린 대로 외식이란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을 뜻한다. 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외식이 아니다. 행동이 나쁜가 그른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를 문제 삼는 것이다. 갱이 총 들고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어느 누구도 외식이라 탓하지 않는다. 조직 폭력배가 점잖은 사업가 흉내를 내면 외식이다.
지금 서기관들은 인간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에게 불경한 죄를 지었다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대로 반응했다. 그들은 외식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생각에도 전혀 하자가 없다. 성경적으로 딱 맞는 아주 좋은 생각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을 야단치신 근본적 이유는 따로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 세력을 잠식하는 경쟁자로 의식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신자가 자꾸 늘어남에 따라 자기들이 행사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이 힘을 잃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 누려왔던 경제적 기득권이 줄 것을 염려했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들 돈을 지키려 예수님을 미워한 것이다.
그들이 속으로 경건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거룩한 척 해서 외식이라고 야단 맞은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도덕적 잘못은 없었고 오히려 경건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는 칭찬을 받았을 정도다. 종교적 형식으로 흐르기 이전에 속으로는 돈이라는 목표를 깊숙이 감춘 채 겉으로는 돈이 목표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과 교세 다툼할 신흥종교의 창시자쯤으로 간주하여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판과 구원을 행사할 메시야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방해하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죽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해석 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은혜마저 거부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그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마23:15)하였고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그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마23:13)한 것이다.
지금 예수님과 중풍병자 사이에는 서로 손해 끼치거나 잘못한 것 하나 없었다. 이 사건 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 속에 죄가 개입될 여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네 죄 사함을 받아라고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또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21세기 세계 최고 하바드 의과대학의 신경외과 과장이라도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예수님이 두 말 중에 어느 것이 하기 쉽겠느냐라고 표현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에 맞추어 말씀 하신 것이지 사실은 두 말다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절대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희대의 사기꾼, 완전히 미친 사람, 과대 망상증 환자, 눈 가리고 아웅하는 마술사가 아니고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 두 말을 당당하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루어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 특별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 이제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왜 사탄의 생각인가?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하나님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믿는 생각을 탓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 본 것을 두고 악한 생각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진 분인 줄 몰라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생긴다. 서기관들은 틀림 없이 한 젊은 랍비가 말씀을 잘 가르치고 온갖 불치병을 치유하는 이적을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정말인가 아닌가 알아 보러 그 곳에 왔을 것이다. 중풍병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그 때 처음 대면 했을 것이며 아직 가르침을 듣거나 기적을 보기 전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인 줄 단박 알아챌 수 있겠는가? 어쩜 몰라 보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이 야단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맞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야단치셨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라고 했다. 우리는 ‘악한 생각을 하느냐’라는 지적 때문에 야단 친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데 그것은 야단이 아니다. 만약 그른 생각(wrong) 혹은 나쁜(bad) 생각이라고 하셨다면 분명히 서기관들의 잘못이 맞다. 자신들의 지정의 범위 내에서 잘못 판단했거나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사탄(evil)의 생각이라고 했다. 서기관들더러 악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그들 고유의 생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사탄이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마저 자기들의 노예로 삼아 영적인 봉사로 만들어 놓았다. 에스겔 선지자는 인자가 오면 “그들은 패역한 백성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여호와의 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겔2:7) 본문의 대화가 선문답처럼 알 듯 모를 듯하거나 천국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몰라 배척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인자되심에 관한 본질과 핵심을 놓쳤다.
사탄은 그들을 노예로 삼아 사람들끼리 시기 질투 미워하며 당장 서로 찔러 죽이고 온갖 더러운 짓거리로 미치게 만들어 노예로 삼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자이심을 모르게 한 것뿐이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유대인들로 하여금 육신적 질병이나 현실적 불행 모두 하나님에게 죄 지은 결과로 인식하게끔 한 것이다. 중풍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이 심판하신 결과이므로 죄가 사해지려면 병이 반드시 나아야 한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들로선 아직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하기 전이니까 본문 3절의 단계에선 당연히 참람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인간을 죄의 노예로 삼은 것의 실체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하게 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너무나 선한 논리로도 무장시켰다. 그리하여 온갖 선행과 제사를 하나님 앞에 바치도록 했다. 절대로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에 두 번의 시험까지 그러했듯이 말이다.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에서 노골적으로 자기를 경배하라고 요구하듯이 사람을 자기 종으로 만들기 위해 동원한 모든 방법이 실패할 때만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든 방법에는 세상의 형통, 윤리적 의로움, 심지어 종교적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마저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하든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사람의 눈과 귀를 막아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사람으로 하여금 못 알아 차리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진 권세의 실체
반면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모든 사역의 초점은 꼭 병이 나아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요 현실에서 망한 것이 인간 쪽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탄으로 인하여 막힌 인간의 눈과 귀를 열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을 보내시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셨다.
본문 2절에 보면 병을 고치기 전에 이미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셨다. 병이 치유 되기 전에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를 먼저 베푸셨다. 서기관들이 중풍병이 죄와 연관이 있다고 믿고 있기에 그 생각을 고치려면 병이 낫기 전에 죄를 사해야 한다. 만약 병을 고친 후에 네 죄 사함을 받아라고 했다면 그들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 사탄의 생각을 공인해주는 셈이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잘못 한 것 하나하나를 그 자리에서 벌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의 인자는 무한하시며 인간을 향한 본심은 오직 긍휼과 자비뿐이다. 재앙과 심판이 본심이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끝까지 참으신다. 어디까지 참으셨는가?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참으셨다. 인간이 당신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배반할지라도 정죄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당신과 원수가 되었어도 사랑하셨다. 왜? “내가 너희를 지었고 너희는 나의 자녀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본문의 중풍병자도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거나 싫어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죄를 지어 그 벌로 중풍병이 걸린 것도 아니다. 병과 아무 상관 없이 주님은 그를 택하셨고 사랑하셨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서기관들을 야단치신 것이 아니다.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치는 것도 목적이 아니었다. 심지어 병을 낫게 하는 권세를 가졌음을 선포한 것도 아니다. 오직 당신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모든 인류 앞에 선포하신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탄의 흉계를 짓 밟으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죄인 된 인간을 대하는 진정한 본심을 보여 주시려 하셨다. 얼마 안 있어 사탄의 실체를 온 천하에 발가벗길 것이다. 사탄을 완전히 죽여 없애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구세주 당신이 대신 죽으시는 모습으로 말이다.
사탄은 십자가 이전의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짓기만 하면 벌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완전한 모습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선행과 구제와 제사와 희생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 지우고 사람들 앞에 천국 문을 닫았다. 인자가 와도 고향에서마저 환영 받지 못하게 했고 인자의 제자들 중에서조차 인자가 로마를 당장 무찌르지 않는다고 배반하게 만들었다.
사탄에게 사로 잡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을 바꾸려면 주님 당신이 모든 피를 흘리고 죽으시기까지 인간의 죄와 상관 없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셔야 했다.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룸으로 언제든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라도 나갈 수 있도록 만드셔야 했다.
예수님이 알 듯 모를 듯한 대화를 하시면서 중풍병자를 낫게 하신 뜻은 알기 쉽게 한 마디로 말해 “제발 병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의 질병과 현실의 불행이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면 병에 안 걸리고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찾고 믿는 이유가 병과 불행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여전히 사탄에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참람한 오늘날의 신자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을 주로 어디에 동원하는가? 오직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줄이거나 없애는 데가 아닌가? 그럼 누가 참람한가? 예수님이 참람했는가? 서기관들이 참람했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바로 오늘날의 신자가 참람하다고 야단치고 계신 것이다.
서기관들은 미처 예수님을 몰라 봤기 때문에 속으로 잠시 참람한 자가 아닌가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다 8절에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그 말은 사람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권세를 사람이 가졌다는 뜻이다. 사람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권세는 병을 낫게 하는 권세가 아니다. 간혹 무당도 비록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지만 중풍병을 고친다. 그러나 죄를 사하는 권세만은 서기관들이 믿은 대로 인간이 절대 가질 수 없다. 사사건건 죄로 이끄는 무당과 사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속에 품은 생각마저 아시고 또 말씀하신 두 가지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응하는 것을 보고 그 젊은 랍비가 인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은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본문의 상황 하에선 서기관들은 분명 참람하지 않았다.
반면에 우리는 이 본문을 볼 때 어떻게 가르치고 또 적용하는가? 이 사건을 더 자세히 기록한 마가나 누가의 복음서에 따르면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야자수 잎과 얇은 흙으로 엮어 놓은 천장을 뚫고 침상을 줄에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리자 주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우리도 어떤 환난에 처하더라도 주님 앞에 우리가 가진 모든 열심과 정성을 다해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혹시 주님을 만나는데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믿음으로 뚫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치유해 줄 뿐 아니라 이전 보다 더 강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침상을 들고 일어나 집으로 가게 하시는 권세를 가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에만 초점을 둔다.
서기관들의 경우처럼 이 생각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인자 되심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님이 6절에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했지 ‘중풍병을 낫게 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 하신 일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참람이라면 역으로 하나님 하신 말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으로 하는 것도 참람이다. 주님이 분명히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엿장수에게 팔아 먹었는지 교회에서 잘 선포하려 들지 않는다. 성경마저 우리 입맛에 댕기는 대로 해석한다. 사탄도 그렇게 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참람이 아니고 무엇인가가? 주님은 타락한 이 땅에 죄를 사하려 오셨지 열심히 믿기만 하면 병을 고쳐 주신다고 하신 적이 없다.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
기독교 믿음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중풍병과 상관 없이 택하신 자에게 완료형으로 미리 죄 사함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중학교 영어 배울 때에 완료형의 예문으로 제일 먼저 드는 것이 무엇인가? “너는 서울에 가 본 적이 있는가?(Have you ever been in Seoul?)” 과거에 한 번 서울에 가본 사실과 그 경험은 계속해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신자란 이 땅에서 자신의 불행과 영적인 상태와 상관 없이 오직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완전한 죄 사함을 벌써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다. 현재에도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을 베푸셨던 그 사랑과 뜻에 절대 변경, 가감, 취소가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미 의와 생명과 거룩의 길에 들어섰고 빛과 소금이 되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 분의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이 믿음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에 현재 쓰임 받고 있음을 확신하고 그 일을 간절히 소원하여 전 인생을 걸고 반응하며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이미 들어서 있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 분의 영광이 자기 인생과 삶을 통해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순종함과 겸비함과 경배함과 감사함으로 매일매일 그 분의 손을 잡고 한 걸음한걸음씩 그 영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자라야 신자다.
예수님은 인간의 해열제나 진통제 혹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 분은 오직 우리 죄를 사하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사실을 믿어 당신의 인자 되심과 그 권세를 제대로 인정하는 자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분이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우리를 통해 당신의 거룩이 땅 끝까지 확장하게 하시는 일만 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신자가 할 일은 오직 날마다 그 분의 십자가 밑에 자기의 생명과 전 인생을 바쳐 죽어야 한다. 아프리카 선교 가서 순교하거나 전재산 팔아 교회 바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자기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정확하게 살펴 보라는 것이다. 돈을 지키는 것이 속에 깊숙이 감추인 참 목적이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는지 매일 아침마다 점검하라는 것이다.
만약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배경에 돈이 참 목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참람이다. 주님의 은혜와 권세가 신자의 중풍병만 낫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그런 양 하니까 그렇다. 매일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죄 사함을 완전히 받아 주님의 영원하신 길에 이미 들어선 그 분의 자녀 된 권세를 확인하고 주님 당신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내도록 그 분께 하루하루를 완전히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삶에서 굳어 지고 막혀 있는 현실적 중풍병까지 고쳐 주신다.
몸은 좀 어떠한지요? 전 연휴에 중가주에 있는 사촌네에서 잘 지내고 돌아 왔습니다. 내일 예정대로 찾아뵐 수 있는지요?
새로 올린 설교를 읽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나 또는 강해서에서 듣고 보지 못했던 가르침이더군요. 몇 년 전에 혼자서 마가복음 공부하면서, 이 사건의 기록 목적은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으신 분, 즉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결론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사탄의 계책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위기 때문이었고 또 늘상 바리새인들이 꾸짖음 당했기 때문에 으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참람한 사람은 우리"라는 목사님의 질책에 가슴이 뜨끔하군요.
읽다가 두 군데 오타를 발견했습니다. 옥의 티 같아서 안타까워 알려드립니다. "외식의 실체" 다섯 째 단락 첫째 줄에 "예수님 대심"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그 하나이고, 네 번째 줄에 "그들보다 내나 더"라고 적혀 있는 것이 그 둘입니다. "되심"과 "배나"로 바로잡아져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