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09) 7/11/04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회심 하더냐 화를 내더냐?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는 전도에서 돌아 온 제자들에게 항상 묻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회심하더냐 아니면 화를 내더냐?” 둘 중 어느 쪽의 반응도 아니었다면 제자들이 전도를 잘못했다고 야단쳤다. 새로 시작한 교단의 세를 불리기 위해 애쓰다 보면 다른 종교와 마찰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은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반드시 사람들의 반응이 완전히 항복하거나 극도로 배척하거나 양 극단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종교를 택해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그 종교가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유익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유익에 대해 잘못 정리하고 있다. 종교를 가지려면 세상에서 종교가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는 줄 수 없고 종교만이 줄 수 있는 혜택을 목표로 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수단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그 종교를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인생살이의 염려와 불안을 없애려면 마인드 콘트롤, 성격 교정, 극기훈련 등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많다. 세상의 형통과 출세가 목적이라면 일요일도 가게를 열어 뼈빠지게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살고 권세자의 연줄을 잘 잡으면 된다. 또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면 집에서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회개하고 위인들의 삶을 본받으며 욕심을 비우는 연습을 쌓으면 된다. 그럼에도 그런 목적들 때문에 종교를 갖는 것은 종교의 고유 목적이 그런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거나 염려를 더 확실하게 제거하고 돈을 벌어도 왕창 떼 돈 벌고싶다는 욕심을 속에 감춘 것 둘 중 하나다.
사람이 신앙을 가져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것이다. 내세(來世)를 믿는 것에는 이미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자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과 그 속한 영역을 영원토록 통치하신다. 반면에 인간은 죽음으로 그 존재가 완전히 멸절(滅切)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實在)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된다.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언젠가 있을 하나님과의 맞대면을 잘 준비하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천국 가기 위해 신앙을 갖는다. 따라서 모든 종교인들은 자기가 믿는 그 종교로 인해 자기는 틀림 없이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너무나도 ABC 같은 근본적 원리를 다른 종교에선 별로 강조하지 않고 불신자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전도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으면 누구든지 천국 갈 수 있습니다”라고 너무나 확신에 차서 기쁨으로 전한다. 그러니 그 동안 자기 죄에 대해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보고 구원에 대해 갈급해 있던 자는 회심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기 싫거나 죄인이라도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찾고 있는 자로선 극렬하게 거부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도 외면한 자들
본문은 예수님이 본서의 저자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 가서 그의 동료들과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는 장면이다. 언뜻 보면 불쌍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사랑하지 않고 율법의 형식에 매달린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야단치는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내 보였고 반면에 예수님과 식사를 나눈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심한 자들의 원조였다. 예수님에 대해 양극단의 반응을 보인 대표적 케이스다.
예수님은 분명 그의 전생애에 걸쳐 행하신 그대로 본문에서도 격식과 형식을 따지지 않으셨다. 이방인과 죄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가난한 피지배 계층 사람들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으로 섬겼다. 그런데 문제는 선행과 구제와 금식과 기도에 열심이었던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왜 그런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느냐는 것이다. 선을 베풀고 있는 주님을 함께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11절에 의하면 그들은 특별히 세리와 죄인과 식사한 것을 문제 삼았다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교제해도 되지만 그들만은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들은 과연 어떤 자들이었기에 선행과 교제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의 로마 총독이나 분봉왕 헤롯은 유대인을 세워서 유대인들의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9절) 있는데 말 그대로 세관(稅關)이다. 갈릴리 해안 도시와 다메섹을 연결하는 길목에서 육상이나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마을 입구 대로변에 지어 놓은 간이 건물이었다. 마태는 그곳에서 관세를 포탈하기 위해 혹시 곡식자루에 밀수품을 숨겨 가는지 찔러보기 위해 칼날이 붙은 길쭉한 막대기를 들고 모든 통행 객에게 세금을 매기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관원들은 적당한 재량권을 갖고 있어 적당히 눈 감아 주며 뇌물을 받거나 자기 권세를 내보이기 위해 강제로 부당 징수하는 것이 예사다. 그래서 세리는 유대 사회에선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취급되었다. 일제 시대에 일본 고등계 앞잡이 노릇 하는 한국인 끄나풀이 한국 사람들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면 세리의 당시 위치를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죄인은 감옥에 갇혀 있는 범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 사회의 도덕적 규범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규례를 모아 놓은 ‘할라카’ 율법이라는 것이 있다. 성경의 율법을 확대하여 더 세밀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어라,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 안식일에 화장하지 말라는 것들이 규정되어 있는데 그런 의식법 상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자들을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도 세리, 창녀, 포주 등을 가장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했다. 단순하게 비판하고 벌을 준 정도가 아니라 멸시하고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유대 사회 안에서 정상적인 사람과 일상적인 교제는 불가능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로 세상에서 무슨 선한 짓을 해도 절대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로 완전히 낙인 찍혀버린 자들이었다. 심지어 성전에서 동물의 희생제사도 드릴 수 없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 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율법의 이 말씀으로 그들의 신분조차 하나님에게 저주 받은 양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예수님이 누구랑 식사 교제한 셈인가?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천국 가기는 아예 틀렸다는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오사마 빈라덴, 사담 후세인, 김정일, 최근에 쓰레기 만두소를 팔아 자기 배만 채운 악덕 식품 업자 등과 식사하며 교제한 셈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거부감을 표시한 뜻도 명색이 하나님을 알고 천국을 가르친다는 랍비가 어떻게 지옥에 떨어질 자와 함께 먹고 마시며 히히덕거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도대체 저런 선생 밑에서 너희들이 배울 것이 무엇 있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답변했는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뜻을 배우라고 했다. 이는 특별히 그 뜻을 배우라고 예수님이 강조할 정도로 대단한 의미를 지녔다. “나는 형식적인 제사를 받치지 않을 것이며 대신 불쌍한 사람을 찾아가 도우겠다” 혹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선행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거나 제자더러 형식을 따지지 말고 선행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13절 말미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해 해석하자면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입장이 아니라 구세주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부터 제사를 받는 입장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심판하실지에 관한 기준을 설명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기독교 복음을 극렬하게 배척하는 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만점을 받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 합격 점수를 받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착한 자가 천국 가야지 왜 예수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천국 가느냐가 그들의 2천 년에 걸친 불만이다. 그 불만을 다른 말로 하면 세리, 창녀, 포주는 지옥 가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에 불과하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다. 하나님 당신의 기준과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이라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하나님의 구원 기준은 오직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우선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와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바 대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판단력으로 인간의 도덕성에 근거하여 더 착한 자는 합격시키고 더 악한 자는 떨어트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의 도덕성에 아무 차이가 없고 똑 같다고 보는 개신교의 기준이다. 만약 도덕성으로 판단할 것 같으면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자 없이 다 죽어야 한다. 그 사실을 스스로 겸비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진정으로 항복하여 하나님 당신이 베푸시는 구원을 애타게 소원하는 자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몽땅 심판 받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외는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별다른 구원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그럼 과연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하나님다우신 구원의 기준이겠는가?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었다고 가정해서 생각해보라. 바리새인들의 판단으로는 창녀, 포주, 세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천국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을 절대 구원하지 않고 영원토록 외면한다는 뜻이다.
타종교인들이나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고집 하느냐는 데 있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는 바로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인정하라고 하나님께 생떼 쓰는 것과 같다. 이 두 기준은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틀리게 마련이다. 타협이나 중재할 수 없으며 서로 양보하여 제 3의 기준이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의 진리에 어느 종교가 더 포용력이 있고 어느 종교가 더 배타적인가를 따지는 문제가 개입 될 수 없다. 인간끼리 관용력의 크기를 서로 비교한다고 해서 하나님 당신의 인간 구원의 진리가 바뀔 리도 없다.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대우하고 구원하는 기준이 포용적인지 배타적인지를 따져야 한다. 타 종교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절대로 관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자기들 교리는 덜 착한 자는 구원에서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는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한다. 하나님은 어떤 천하의 흉악한 죄인이라도 관용하는 하나님이지 모든 종교를 무조건 다 포용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과 또 지성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목사님 두 분이 거의 동시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들의 본심이 보도된 대로라면 이제 저는 설교를 접고 나무십자가 교회라는 간판도 내려야 할 것 같다. 선배 목사님이 맞고 제가 틀렸기 때문에 더 이상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제 자신부터 그 준비를 해야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 준비도 당연히 십자가 복음을 더 열심히 증거 하는 일이 되어야 하겠지만 임박한 재림을 대비해 평상적 교회 활동보다 길거리에 나가서라도 천국과 지옥에 대해 외쳐야 할 판이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시겠는가? 당신이 반드시 스스로 나타나셔야 할 필요가 있을 때이다. 그때는 필연적으로 예수님 당신에 대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잘못 전해지고 있을 때다. 세계 최대 교회의 목사와 가장 영향력이 큰 목사 두 분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에게 필수적 사항이 아니라 단지 선택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실 필요가 이보다 더 절실할 때가 어디 있겠는가? 저 같이 연약한 교회의 무명 목사가 소리쳐도 별 효용이 없으니 설교마저 접어야 할 때가 되어가는 것 같다.
고춧가루를 젓가락으로 건지는 목사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심판을 받는가? 의인이 심판을 받는데 그는 제사를 긍휼보다 더 좋아 하는 자다. 제사와 긍휼 앞에 각각 ‘인간의’와 ‘하나님의’를 넣어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보다 인간의 제사가 앞선다고 생각하는 자다. 인간끼리 평가된 상대적 도덕성의 우월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고개 쳐들고 제사 드리려 나가는 자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다.
반면에 구원을 받을 자는 죄인인데 그는 인간의 제사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바라는 자다. 마태는 시쳇말로 목 좋은 곳에서 크게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슬쩍슬쩍 모른 척만 해주어도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의 나를 좇으라는 말 한마디에 그 직업을 당장 던져버렸겠는가? 물론 예수님의 신적인 영향력과 권세에 꼼짝 못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그러나 마태쪽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평소 때부터 “과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정말 바리새인들이 나를 평하는 것처럼 지옥에 떨어지며 구원은 기대조차 해선 안 되는가?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시 하나님이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면 모를까?”라고 내내 갈등하고 고민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얼굴에서 비취는 신적 영광과 말씀에 드러나는 한 없는 사랑이 그 고민과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지남철에 이끌리듯 따라 나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불러 내셨다. 돈 많은 제자를 뽑거나 일부러 유대사회 규범을 무시하는 혁명적 본을 보인 것도 아니다. 택하신 자가 계속해 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실 수 없었던 것이다. 마태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는 세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제사보다 긍휼이 절실히 필요함을 아는 죄인이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파를 전혀 못 먹는다. 저는 반대로 파를 너무 좋아 한다. 그래서 식당에 가 함께 식사하면 저로선 신난다. 못 먹는 파를 전부 건져 나에게 건져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분이 파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건져 내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속으로는 남자가 참 좀스럽다며 비아냥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별다른 죄의식도 없이 그런 마음을 먹곤 했다.
저는 5년 반 전에 받은 혀 수술로 인해 그 동안 자극적인 음식을 전혀 못 먹다가 두 달 전쯤 처음으로 매운 신라면을 먹는 데 성공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젓가락으로 스프 국물에 들어 있는 고추 가루를 젓가락으로 건져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정말 깜짝 놀랐다. 파 조각보다 더 작은 고추 가루를 하나하나 건지고 있다니 누가 더 좀스러운가?
예수 믿은지 20년 목사가 된지 10년의 경건 생활도 도덕적 의인으로 바뀌는데 큰 힘을 발휘 하지 못했다. 이런 식의 잘못은 제가 매일 짓는 여러 죄 중에 아주 경미한 것에 불과하다. 불완전하며 죄에 젖어 있는 인간끼리는 누가 더 착하고 덜 착한가 따질 수 없다. 정말 얼굴 두껍게도 남들보다 더 착하다는 한 가지만을 근거로 천국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덜 착하다는 반증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조차 못 깨달으니 하나님에게서 어떤 긍휼이 베풀어지리라 기대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구원이란 인간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제대로 인정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신자가 신앙 생활이 힘든 이유
스스로의 도덕성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쟁취할 만큼 합격 점수 안에 들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무든 시험과 고통과 죄악을 체휼하시고 십자가에 그 죄를 몽땅 짊어지고 올라가 우리 대신 죽으신 주님의 보혈 외는 인간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도 절대 없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당신의 등뒤로 던지시고 동에서 서로 옮겨 주시지 않으면 그 분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스스로 선해질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지만 반면에 하나님이 용서 못해 줄 자도 아무도 없다.
인생에 있어 가장 불쌍한 자는 누구인가? 가난에 찌들인 자인가? 암 같은 치명적 병에 걸린 자인가? 마태처럼 동족의 배반자요 도저히 함께 상종 못할 자로 왕따 당하는 자인가? 아니다. 세상에서 다 떨어지고 뒤쳐진 것과 하나님의 그 사람을 향한 은혜와 영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스스로의 공적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나 최소한 나 정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열심히 노력하여 합격 점수 안에 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만큼 불쌍한 자가 없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의원이신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총을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토록 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어떤 인생도 삶의 승리는커녕 그 의미와 가치도 모른다.
솔직히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보자. 주일 날 교회 나와 예배 보는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라도 속으로 좀 찔리는 것이 있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천국 가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 그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단순하게 착하게 살든지 이 땅에서 불안을 없애려면 구태여 종교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교회는 세상 처세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죽음 이후 내세에서의 자기 운명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곳이다. 내세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과 그곳으로 가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성령님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주일 날 여러분이 나와 앉아 있는 이 교회가 바로 천국이자 천국을 미리 맛 보고 연습하는 곳이다. 우리가 이미 들어선 거룩한 천국 여정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이정표를 확인하고 또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안식을 통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재충전해야 한다. 지난 주도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기 합당한 자로 준비시키기 위해 우리 속에 거룩과 의와 생명이 자라도록 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반면에 지금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큰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권력과 명예를 양 손에 다 움켜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이 가는 길은 완전한 멸망이요 지옥임을 안다. 우리는 천국 가니 나중에 누가 더 잘되는가 보자 분풀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란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 온 것에 관해 진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고 이미 확정된 천국에서의 영원한 운명만이 삶의 위로와 능력이 되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이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실 것임을 믿는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육신의 죽음마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함을 확신한다. 그래서 살아 갈수록 더욱 겸손과 두려움으로 주님 앞에 경배하러 나아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고 누린다. 그러니 이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그 맛도 모르는 교회 밖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고 불쌍할 수 밖에는…
그럼에도 신자가 신앙 생활 하면서 힘이 빠지고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신자라는 신분이 이미 영원한 존재로 바뀌었음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세상에서 형통하는 처세술이나 도덕적으로 칭찬 받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법이나 가르치고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종된 교회나 신자가 승리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신자를 지금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에 관해선 관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안절부절해선 절대 승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가장 근본적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제대로 알기 때문이다. 신자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졌어야 하는 옛 사람이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다. 신자에게는 이제 빛나고 거룩한 천국 여정 길을 부활하셔서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 길을 가로 막거나 방해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