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12) 8/1/04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전도할 때마다 듣는 이야기
전도할 때 누구나 겪는 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 설명하고 토론하다 보면 말이 막힌 상대가 마지막으로 꼭 하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있으면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여 봐. 그러면 믿겠다.” 제가 바로 20년 전에 그랬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정말 하나님이 저에게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다. 또 그 10여년 후에는 처음 보여 주신 것의 의미까지 완전히 계시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본문의 봉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보았다. 저처럼 이미 멀쩡한 눈을 갖고 하나님의 실체가 아닌 형상으로 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봉사는 아마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왜 그런가? 그가 눈을 뜨자마자 이 세상에서 맨 처음 본 자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자기 눈에 비취는 것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완전한 판단력을 가진 성인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그 전에는 더럽고 추하고 죄악 된 세상과 탐욕과 부정과 궤휼과 위선에 가득 찬 인간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이처럼 행복한 자가 더 있겠는가? 그러니 예수님이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 했건만 시력을 찾은 기쁨과 메시야를 만난 감격을 어찌 발설하지 않고 속에 묻어 둘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근거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너희 믿음 대로 되라”(29절)고 했다. 예수님은 또 다시 믿음을 신자가 겪는 현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키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신자의 신앙생활의 실상은 매번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신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딜레마다.
그래서 신자가 믿은 대로 해결되어지지 않는 경우가 자꾸 늘어나면 보이는 잘못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박이나 요행을 바라게 된다. “언젠가 한 번은 하나님이 큰 건수로 봐주시겠지.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바친 열심과 정성과 진심을 하나님은 알고 계실 거야.” 무엇을 구해야 하고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구분도 없이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신앙이다.
둘째는 나태로 흐른다. 믿음 따로 생활 따로이기 때문에 믿음이 현실의 삶에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믿음을 포기하자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천벌이 두렵고 또 지금까지 믿은 것이 아깝다. 최소한의 종교적 형식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체면치레로 적당히 때운다. 주일 예배는 봐 준다는 식이다. 대신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 크게 안 봐주셔도 되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을 방해는 마시고 혹시라도 훼방하는 세력이 있으면 막아만 주십시오”다. 신앙 내용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
둘 다 아주 잘못 된 신앙이다. 그런 식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신앙을 계속 유지해 보아야 헛된 낭비에 불과하다. 낭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투자(input)한 것에 비추어 적합한 산출(output)이 나오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만약 투입한 자재가 정확한 데도 산출이 적다면 단지 생산성이 낮은 것이므로 투자와 산출을 적절하게 구조 조정하면 낭비를 절감할 수 있다. 갈급한 마음이 결여 되거나 성령 충만 없이 신앙 생활하다가도 어떤 계기로 영적 부흥이 이뤄지면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투자에 따라 나와야 하는 산출을 전혀 엉터리로 계산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교 들어간 첫날 자기 강의실을 잘못 찾아 다른 과의 교실에서 하루 종일 보낸 것과 같은 경우다. 그야 말로 완전히 쓸데 없는 곳에 투자한 셈이다. 기독교 신앙이 아닌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이리로 오지 말고 그야말로 절로 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세가지
신자가 자기가 믿은 것과 현실의 결과 사이에 괴리가 있는 까닭은 믿음이 신자에게 제공하는 축복과 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지는 결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 말하자면 투자에 따르는 산출을 엉터리로 계산한 것으로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절에 가 있는 꼴이다.
에베소서 1:3-6으로 가보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 마디로 잘 설명해 놓은 구절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크게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내 선행과 결단으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안에 든 자로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믿는 것이다.(5절) 둘째는 그 구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3절) 셋째는 그 모든 복을 주시는 목적이 크게 두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신자를 흠없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세우려는 것(4절)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며 주위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6절)이다.
이 세가지 핵심에 견주어 우리 신앙을 분석해보면 첫째 내 공적이 아니라 은혜로만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다들 확신한다. 그런데 둘째 번 모든 복을 주신다는 것에 항상 걸린다. 무엇이든 구하라고 했고, 구한 것은 받은 줄 생각하라고도 했으며 나아가 자기 외아들을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신다(롬8:32)고 까지 하셨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가 항상 우리의 불만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은 절대 무조건적이 아니다. 3절 끝에 ‘복 주시되”라고 표현되어 있다. 복을 주긴 주되 조건이 달려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고 주위에 증거하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이 제대로 은혜를 베푸실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방금 말씀 드린 것까지는 어지간한 신자는 다 알고 실천하고 있다. 자신이 거룩하게 변화되길 힘쓰고 주위에 빛과 소금으로 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자 열심히 노력한다. 그런데도 왜 믿음대로 소경이 눈을 뜨는 것 같은 은혜와 승리의 감격은 제대로 맛보지 못하는가?
에베소서 1:3절의 후반부를 다시 큰 소리로 읽어보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우리 믿음의 결정적 하자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할 수 있겠는가? 잘 모르겠다면 방금 읽은 구절 중에 가장 관심이 먼저 가는 단어들이 무엇인가? ‘모든’과 ‘복’ 둘이지 않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에 속한’과 ‘신령한’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부분에 자꾸 더 신경 쓸 것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만큼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공짜)로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롬8:31,32) 그러나 이런 약속의 말씀에 앞서 분명히 밝혀 놓으신 것이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따라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란 영원한 구원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에서 지켜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롬8:35)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 이런 모든 고통이 아예 없고 항상 편안한 삶으로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아니다.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한 모든 것은 바로 에베소서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같은 것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무엇인가?
그럼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겪었던 고통, 질병, 시기, 질투, 분노, 상처, 궁핍, 죽음 등이 전혀 없는 복인가? 혹은 도덕적으로 착해지고 우리 심성이 온유해지는 것인가? 물론 그런 복들도 결과적으로 누린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 땅에서도 조금씩 맛을 보지만 완전하지 못하다가 천국에 가면 완성되어지는 복이다.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첫째 가는 복이 따로 있다. 천국에 가지 않으면 절대 누릴 수 없는 복이다. 하나님을 직접 바라 보는 것이다. 본문에 봉사가 눈을 떠 예수님 당신을 보았던 바로 그 복이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해 보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서 24장로와 천사들과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며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찬양하는 복이다.(계4:8-11)
성도는 언제 찬양하는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능력을 맛 본 자라면 당연히 그 분을 찬양하게 된다. 천국에 가면 우리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분의 거룩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직접 볼 수 있으므로 항상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자가 예수를 믿은 후에 누리는 축복과 은혜의 본질이 무엇인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믿기 전과 믿음 후에 신자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가? 신자의 곳간 문을 믿음으로 열어 놓으면 하늘에서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주시는 것인가? 아니다. 장차 천국에 가서야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미리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천국에선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는가? 당연히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는 복에 그런 복이 없을 수 밖에 없다. 대신에 신자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아는 복을 주신다. 당신의 품성과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고 그것들을 신자에게 어떤 식으로 베푸는지 배우게 된다. 또 하나님은 신자 각 사람을 향한 목적이 따로 있으며 그 목적을 어떻게 이뤄나가시는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신자가 거룩하신 그 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깨닫게 해주시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라고 주위에 거룩과 생명과 의를 증거 하는 일에는 하나님은 절대 부족하신 분이 아니다. 언제든지 무엇이든 하나님께 복을 빌 수 있고 하나님은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1;2,3)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순전히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한 가지 부끄러운 개인적인 고백을 하겠다. 이번 여름 방학이 되기 전에 한국에 아주 어려운 사이로 아는 분이 한 가지 부탁을 해 왔다. 미국에 소위 원정 출산을 오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저희 집에 한 두세 달 와 있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마침 방도 하나 비워 있고 출산 뒷바라지에서 시민권 취득에 미국 여권까지 내어 주면 하숙생 하나 두는 수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려운 관계이기도 하지만 돈에 욕심도 생겨 아무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막상 대답을 해 놓고 보니 도저히 목사로서 양심에 꺼려 속이 편치 않았다. 어쨌든 원정 출산이란 정당하지 못한 치사한 짓이지 않는가?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이 문제를 주님이 오지 못하게 해 주시든지, 입국 심사에서 거절 당하게 해 주시든지 자연스럽게 좀 해결해 달라고 계속 기도했다. 그러다가 입국 심사에 거절 당하는 것은 만삭의 임산부에게 가혹한 짓이니까 만약 정 오게 되면 목사 집에 보내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불신자인 그 분이 저희 전도로 구원 받는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는가? 며칠 후면 도착 예정일인데 아무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출산 예정일 근 한달 반 전인데 갑자기 양수가 터져 도저히 비행기를 못 타고 한국에서 출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속으로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가 자연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신 것이다. 어려운 사이인데 괜히 번복하여 사이가 이상해지지 않도록 해 주셨다. 아이는 건강하게 출산했다. 목사가 지탄 받을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딱 하나 안 된 것이 있었다. 최소한 몇 천불의 수입은 날라갔다.
신자가 진정으로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십자가 사랑으로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게 해달라는 소원은 하나님은 단 한번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법은 없다. 또 그런 일을 함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은 넘치도록 항상 함께 하신다. 제가 믿은 후 특별히 주의 종이 된 후로는 죄 짓지 않도록 해주며 하나님의 일을 잘 하도록 해주셨던 기도응답의 간증은 얼마든지 많다. 이 일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반면에 솔직히 신자들이 믿고 난 이후 하는 대부분의 기도의 속 깊은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을 합력해서 돈으로 바꿔달라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데 다른 것으로는 다 합력해도 돈으로는 만은 합력하지 않으신다.
왜 먹고 마시는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신자도 선행과 사랑을 한 번 베풀려면 속에서 젓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단단히 결심하지 않고는 힘들다. 그것도 일년에 기껏 한 두 번 하는 것이 그렇다. 반면에 죄를 향해 달려가기는 너무 쉽다. 아무 노력 없이도 저절로 된다. 신자가 죄를 향한 걸음이 어쩌면 세상 사람보다 더 빠르다. 세상적인 실력에다 이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보배까지 갖추었으니 더 빨리, 더 쉽게, 더 많이 세상의 형통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니까 그렇다. 구역모임에서 형식적으로 성경공부를 간단히 해치우고 그 다음부턴 전부 돈 버는 이야기뿐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한 기도는 응답하시지 않는 줄 아는가? 그런 일은 하나님이 구태여 도와주지 않으셔도 우리 모두 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방법과 기술은 스스로도 잘 터득하고 있으며 그 열심과 정성은 노력하지 않아도 크기만하다. 대신에 거룩과 생명과 의를 이루는 데는 아직도 우리 속에 죄의 본성이 훼방을 하고 사탄의 방해가 있으며 우리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 주님이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어떤 일이든, 얼마든지, 끝까지 책임지고 도와주시는 것이다.
신자가 항상 갖는 불만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믿은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신자가 좀 더 형통하면 어디 덧나는가 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더 잘 증거할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몰라 주는 것 같아 야속하기 까지 하다. 하나님은 절대 신자가 세상에서 형통하는 모습으로 당신을 증명하시지 않는다.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으시는 모습만으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신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와 고통뿐 아니라 심지어 신자가 되어서도 세상의 형통으로 주를 증거 하는 수단으로 삼겠다는 그 완악한 생각까지 다 감당해 짊어지는 모습이다.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음란한 세대라고 하면서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다.(마12:39) 성적으로 타락한 세대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돈을 함께 섬긴다는 뜻이다. 돈이 있어야 잘 믿은 표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음란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 왜 내가 믿은 대로 현실이 안 따라 주는가 의심과 불평을 쏟아 놓은 자들에게 물어보자. 솔직히 얼마나 많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려는 소원과 열심을 가졌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얼마나 자주 간구하며 부르짖었는가? 돈을 달라고 할 때는 눈물 콧물 흘리며 모든 것을 다 바칠 듯 해 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해 본 기억이 까마득한 자가 과연 하나님에게 원망과 의심을 꺼내 놓을 수 있는가?
신자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왜 좀 화끈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이지만 주님은 절대 그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를 아는가? 정말 화끈하게 보여 주려면 우리가 그 자리에서 바로 콱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록 완악하고 무지하고 피조물로서 감히 창조주에게 할 요구 사항이 아니지만 괘씸죄로는 죽이지 않는다. 더럽고 추한 인간이 거룩하신 그 분의 실체를 바로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타 없어진다. 하나님은 죄와 더러움과는 절대 공존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다.
제가 믿은 후에 돌이켜 보면 전도 받을 때 하나님 계시면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여봐라 큰 소리 쳤던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두려운 짓을 했는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저 같은 자도 주의 종으로 세우기 위해 바울의 고백대로 주님이 먼저 일절 오래 참아 주셨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신학교 교수가 될 공부를 하고 있는 어떤 분이 당시 집사로 죄송한 이야기지만 제가 술 안 먹고는 원체 말이 없으니 술을 사주면서 전도를 했다. 서로 토론을 벌리다 제가 말이 막히면 술이 취한 체 하나님 살아 계시면 지금 당장 보여 보라고 다그쳤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 하셨던 주님이 바로 그 새벽 닭이 우는 때에 온갖 고초를 받으면서도 자기 제자를 원망하지 않고 자비와 긍휼로 바라만 보셨다. 하나님을 데려와 보라는 억지가 하나님 입장에선 얼마나 말도 안 되며 귀가 찼겠는가? 그럼에도 제가 술주정(?) 하고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도 주님은 와 계서서 베드로를 바라본 그 눈으로 저를 바라 보고 계셨을 것이다.
그 후 제가 교회 나간지 얼마 안 되어 금빛 십자가 형상으로 주님은 저를 찾아 와 자신을 보여 주셨다. 부활 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며 스승을 세 번 부인했던 죄를 용서하시고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베드로를 향한 뜻을 풀어 주셨다. 마찬가지로 제게 보여 주셨던 금 빛 십자가를 그 후 10년이 지나 주의 종이 된 후 새벽 기도 시간에 다시 보여주셔서 십자가의 의미와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을 재확인 해 주셨다. 주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자신이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고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우리에게 복 주시고 역사 하신다.
세계 최고인 한국 신자들
왜 예수님은 봉사에게 그 치유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신신 당부하셨는가? 간단하다.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면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병을 낫게 하고 배불리 먹게 할 것이라고 오해할까 봐 염려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 귀찮게 할까 봐 사전에 막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들이 기대하는 식의 복을 신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우하는 방법은 십자가 외에는 없다. 신자에게 허락하시는 복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와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 유일한 것이자 그 전부다.
신자는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된 자다. 그래서 풍부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나아가 고난 가운데도 더욱 감사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은 풍부도 궁핍도 둘 다 아니다. 본문의 봉사를 주님이 만나 주셨듯이 오직 신자로 하여금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주님을 제대로 보게 하는 것이다. 본문의 봉사가 눈을 뜨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엄격히 말해 그의 믿음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당신이 그를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기에 눈을 뜬 것이다.
한국 신자의 믿음을 보면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에 있어선 세계 최고다. 또 거룩하게 살려는 열심과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소원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으려는 갈급함도 세계 최고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문제는 그 축복의 내용을 잘못 계산한 것이다. 세계에서 최고로 노력을 많이 하는 신자지만 전부 헛수고 한 셈으로 믿음의 승리는 세계에서 제일 적다. 다른 과 강의실에 가 앉아 있으니 성적이 오를 리가 없는 것이다.
신자가 믿음으로 투자하여 산출해 내는 결과는 오직 하늘의 신령한 복이다. 주님을 알아 나가는 복이다. 예수를 모르는 자나 세상의 타 종교인들이 복을 비는 모습과 내용이 무엇인가? 오직 이 땅에서의 먹고 마시는 문제 뿐이다. 조금 고상한 사람들은 물론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강건해지길 소원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남보다 우월함을 증거하기 위해 소원하는 것뿐이다. 하나님 당신의 뜻과 목적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떠했는가?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어떻게 변했는가? 믿기 전에는 우리도 오직 세상의 형통만 바랐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나선 정말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졌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를 위해 하겠다는 소원이 생겼지 않는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생각도 못했고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 만으로 세상에선 줄 수 없는 신령한 복을 하늘로부터 이미 모두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은 있지도 않은 신을 대상으로 자기가 빌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복, 복, 복 하고 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보았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부터 거룩, 거룩, 거룩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알고 나도 그 분을 알게 된 것 그 이상 신자에게 줄 복은 따로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향해 오직 한 가지 소망만 갖고 있다. 하늘에 가득 찬 신령한 복을 부어줄 참 믿음의 신자를 찾는 것이다. 누가 믿음이 좋은 신자인가? 봉사, 헌금, 구제, 전도, 기도 많이 하는 신자인가? 아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서 살아 계신 주님이 역사하고 은혜를 베풀고 계심을 볼 줄 아는 자다. 그래서 주님을 갈수록 더욱 깊이 알아가는 자다. 그런 자만이 주님이 하셨던 대로 십자가의 방법으로만 하나님을 주위에 제대로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