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조회 수 1994 추천 수 122 2004.08.10 06:03:25
마태복음 강해(113) 8/8/04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가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최후에 믿을 곳 교회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려 길 가거나 일하거나 항상 자기 귀에다 대놓고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미칠 지경이 되었다. 누군가 교회 나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 나간다고 권해 그대로 했더니 정말 완전히 치유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이후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인데 내 몰라라 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래도 그는 아무 탈 없이  세상에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말기 암이나 귀신이 들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이 더 이상 없음을 절감하면 최후의 방편으로 예수님, 부처님을 찾거나 심지어 무당을 의지하기도 한다.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초자연적 어떤 힘이나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벙어리를 치유해 주셨다. 벙어리면 벙어리지 성경은 왜 귀신들린 벙어리라고 했을까? 감기마저 감기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어떤 이단처럼 모든 질병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고 인정한 것인가? 아니다.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은 오히려 현실의 고난과 질병을 하나님이 정죄한 것의 증거로 해석했다.

귀신들린 벙어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날 때는 멀쩡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괴한 말과 행동을 하더니 벙어리가 된 것을 동네 사람들이 잘 알고 있거나 예수님이 고칠 때에 그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소리치며 반항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이 사건을 지켜 본 모든 사람이 귀신들린 벙어리였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치유를 지켜 본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 보였다. 평범하고 영적으로 미숙한 일반적 유대인들 한 마디로 무식한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33절) 사람이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을 능력자로 인정했는지 여부는 둘 째 치고 너무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도층이자 성경에 능통하고 영적으로 깨인 자들 한 마디로 유식한 자인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을 빙자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벙어리 속에 있는 귀신보다 힘이 더 센 귀신을 불러와 쫓아 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무당이나 영매 수준으로 비하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영적으로 가장 신령하고 고상한 것으로 자부했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요즘 식으로 하자면 신학교도 졸업 못한 목수의 아들에게 나타난 것을 시기하고 질투한 것이다. 자신들의 영적인 열등감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해 악한 감정을 갖고 예수님을 완전히 멸시한 것이다. 나아가 당시로선 가장 똑똑했던 자들이라 무당이 아닌 정상인이 초자연적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은 자기들 이성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귀신을 불러 복을 비는 불신자들

유식하든 무식하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분명히 자신들의 눈 앞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과 귀신의 존재까지는 인정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신에 대해선 제대로 알아 보는 자가 없었다. 물론 아직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인지라 별 볼일 없는 시골 출신의 랍비가 아무리 말씀에 권세가 있고 몇 가지 이적을 보였다고 해서 바로 하나님 당신이자 메시야 본인이라고 인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예나 지금이나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남종이든 여종이든 무식하든 유식하든 모든 인간은 귀신이 쫓겨 나고 암이 낫고 벙어리가 말하는 일에만 오직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능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어떤 이유로 고쳐 주시는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불신자들이 새벽마다 장독대에다 정한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할 때에 누구를 부르는가?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로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유일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신들이여라는 의미다. 이왕이면 신들의 능력을 다 합치면 더 큰 능력이 나타날 것 같고 또 혹시라도 그 중의 한 명의 신에게라도 잘못 보이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것이다. 자기가 빌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돈을 벌고 내 병을 낫게만 해주는 신이라면 그 앞에 내 열심과 치성과 제물과 희생을 전부 다 바치겠아오니 제발 나를 도와 이 화액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뿐이다. 신이 누가 되었던 상관 없이 다만 액땜을 해 달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귀신을 부르고 사탄에게 빈 셈이다.    

불신자들이 최후의 경우가 닥치면 그 중에서도 교회를 가장 많이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신들이 다 대동소이하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가 믿는 신이 가장 센 것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에 관해선 관심조차 없다. 교회 신이 가장 강하긴 하지만 평소 때는 주일마다 예배 참석하라, 헌금하라, 착하게 살아라, 술 담배 끊어라 등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하니까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다 막상 죽게 되었으니 일단은 살고 보자는 심보로 다른 귀찮은 것들은 다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불치병을 고침 받고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를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한히 마음씨가 좋고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어서 그러신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병 낫고 먹고 마시는 것을 채우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오직 그런 이유로만 당신을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 쪽에서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징계나 형벌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런 이유가 아닌 것으로 찾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제대로 깨달아 그 분의 거룩하심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오직 주님만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자이다. 이런 자는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더 큰 열심과 정성으로 찾으시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부어주시길 그 분께서 먼저 간절히 소원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잘 알다시피 죄와 사망과 사탄이 권세 아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주제와 연결해서 해석하자면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그저 천지신명이시여 비나이다 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 자기 운명을 맡기고 있는 인생이 불쌍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직접 보여 주려 오신 것이다.  

창조주요, 홀로 하나요, 스스로 자존하시는 절대적인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차원 안으로 낮추어 들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나아가 바리새인들 같이 지성적, 종교적, 합리적인 사람들이 초자연적 능력과 은혜가 인간에게 직접 나타날 수도 없고 또 절대자로부터 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틀렸음을 깨우쳐 주러 오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인간과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이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저들은 물질적 풍요와 현실적 형통을 바라며 복만 달라고 하고 우리는 고상하고 거룩한 것만 찾기에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선 그들이 우리보다 더 수양하고 정진하여 신령하고 고상해지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방적으로 인간의 노력과 수고만 요구 받고 있다. 설령 그것이 선행, 희생, 고행, 묵상 등 고급하고 선한 형태일지라도 오직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것 뿐이다.  

엄격히 따지면 사실은 그 신이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인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비는 까닭은 세상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아니까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나 존재를 빙자하여 내 마음대로 그 힘을 움직여 보자는 것이다. 어쨌든 바쳐서 얻어내겠다는 생각뿐이다. 당연히 그 바친 것의 양과 질에 따라 돌아오는 반대급부의 양과 질도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신과 그 추종자 사이에 쌍방 간의 대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신이 말한 것을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인간의 생각에 그럴 것이라고 짐작해 한 것뿐이다. 이 세상에 신은 하나님 외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는 어느 누구도 신을 알거나 만난 적이 없다. 오직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탐욕으로 신을 만들고 자기의 생각에 자기가 복종한 것 뿐이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이방인들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이다.(엡4:17,18)  

사무엘상 3:7-9로 가 보자.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성전에서 수직하던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선지자의 소명을 주는 장면이다. 사무엘이 선지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품고 하나님께 제물이나 희생을 바친 적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당신의 말씀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직접 들려 준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신이시여 신이시여 제발 내 소원을 좀 들어 주시옵소서”이다. 인간이 하는 말을 신이 제발 들어달라고 일방적으로 메어달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 반대다. “주여 말씀 하시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천지의 주재되시는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에 불과하며 버러지 같이 무지하고 무능한 인간과 일대일 개인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를 지으시고 택하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께서 먼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영육간에 약한 것을 감싸 안으시며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자로 일으켜 세우셨다. 지금도 주님은 똑 같은 모습,  똑 같은 사랑, 똑 같은 은총, 똑 같은 권능으로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특별히 똑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수호 천사로 전락한 하나님

그런데 오늘 날의 신자는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단순히 신자 앞에 있는 위험을 막아 안전을 책임지는 수호천사 정도이다. 모든 간구의 내용이 기껏 오늘도 교통 사고가 없게 해 주시고 시내 다운타운을 나가더라도 갱들 사는 동네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고 혹시라도 우범지대를 들어가도 갱들이 다 파티하러 외출하고 없게 해 달라는 식이다. 여전히 액땜만 의뢰하는 수준이지 주님의 말씀을 내가 듣겠나이다는 전혀 없다.

또 간혹 신자 중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적극적, 능동적, 낙관적,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이웃과 잘 지내면 바로 그 곳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심하고 앞 뒤 사방이 막혀 비탄에 빠져 있고 수동적인 사람 곁에도 계신다. 어쩌면 그런 사람 곁에 더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을 수호천사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맺는 관계의 의미와 내용을 현실의 먹고 마시는 부분에만 한정 지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내용이 기껏 현실에서의 형통뿐이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살이가 더 메마르고 힘들어 가니까 하나님에게 더 세게 메달려야 더 큰 액땜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단정 짓게 된다.

천국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마찬 가지다. 마음을 더 크게 먹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더 커진다고 생각한다. 더 착하게 살고 더 긍정적으로 살고 더 봉사하면 자신의 마음의 만족은 커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은혜와는 무관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당신의 뜻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 소원, 섬기는 헌신의 크기를 더 크게 하는 것이 나쁘니까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커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다. “주여 말씀 하시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가 없으면 신자가 보이는 어떤 열심도 여전히 비나이다 수준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 당신이 분명한 제 3의 실체적 존재로 신자 곁에 항상 함께 있다는 뜻이다. 종교적 훈련으로 인한 무의식적 맹신이거나, 의지적 결단으로 인한 사고의 전환이거나, 내면적 영성이 어떤 신령한 경지에 오른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기독교를 믿었으니 막연하게 기도하면 우리를 지켜 주시는 수호천사로 보아선 더구나 안 된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 곁에 최종적, 궁극적, 절대적, 완전한 모습으로 영원히 함께 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더 크게 함께 하거나 더 적게 임재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목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제일 세고 그 다음 전도사, 장로, 집사 순으로 해서 평신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제일 약하다는 법은 없다. 교계의 최고 지도자 원로 목사나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초신자나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동일한 모습으로 임재해 계신다.

신자가 정작 따질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임재해 있음을 제대로 확신하여 그에 맞게 반응하는가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임재해 있는가 얼마나 적게 임재해 있는가는 아예 성립조차 안 되는 말이다. 하나님의 광선 한 줄기만 우리 심령에 비춰도 전 인생이 변하고 엎드러진 물도 다시 담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난다. 광야가 옥토로 바뀌고 사막에 강물이 흐른다.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치유했던 그 모습 그대로 단 한치도 모자람이 없이 또 다른(different가 아닌 another의 뜻) 보혜사 성령님이 지금도 우리를 직접 가르치시고 치유해준다. 그 능력과 은혜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이천년 후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바리새인들이나 불신자들이 생각하듯 더 세고 덜 센 신이 따로 없다. 신들끼리 우열이 가려지면 벌써 그것은 신이 아니다. 천지 신명이 신이 아니라 상천하지에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외아들도 한 분이시며 지금 신자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도 오직 한 분이시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의 유일한 주인 되시는 절대자 바로 그 분이다.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한 선이요 사랑이신 분으로 100% 충만한 모습 그대로 신자가 언제, 어디로 가든 우리 곁에 동행하신다. 그래서 심지어 기도하고 말씀보고 금식한다고 해서 더 센 하나님이 어떤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려 더 큰 능력의 모습으로 따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이 곁에 계신데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불러 낼 필요가 없다. 그래도 신자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은 단지 신자의 기도를 통해 활동하시고  또 신자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역사하기 원하시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제가 주 앞에 서 있나이다.

그러나 사무엘에게 말한 것 같은 모습의 직접적 대화가 매번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신자가 삶의 매 순간 가장 먼저 생각하고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나를 항상 곁에서 보고 있다는 확신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거룩한 주님 앞에 서 있다는 철저한 인식이다. 샤워를 해도, 밥을 먹어도, 공부를 해도, 사람을 만나 교제를 해도, 직장에서 일을 해도, 사업을 해도 주님은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 액땜을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뜻과 계획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다.    

천로역정을 지은 존 번연이 영국 국왕의 미움을 사 감옥에 갇힌 중에 갑자기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 평소부터 번연을 존경하고 그 인격을 믿고 있던 옥사장이 자기 재량으로 집에 잠시 다녀 오라고 풀어 주었다. 그런데 번연이 집으로 가던 도중에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이 생각되어 다시 감옥으로 돌아 갔다. 그러자 곧 바로 얼마 안 되어 국왕이 감옥 시찰을 나왔다. 옥사장과 번연 둘 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창세기의 요셉은 노예로 팔렸고 감옥에 갇히는 등 온갖 고생을 겪은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국민과 자기 식구들을 기근에서 살려 내었다. 그렇게 된 연유는 알다시피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제대로 해몽했고 기근에 대한 대책을 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현실적으로는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요셉을 되려 형통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시기해 죽이려고 웅덩이에 빠뜨려진 이후부터 항상 하나님의 자기 일생에 관한 계획과 뜻을 물었고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려고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번연도 성령이 “지금 국왕이 감옥으로 오고 있다 오바. 곧 5분 내로 되돌아 가라. 오바”라는 음성 자체를 들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번연도 평생을 걸쳐 항상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라는 자세로만 살았기 때문에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자기 영혼의 귀로 들은 것이다. 성도의 안위와 형통과 영광을 위해 근심하시는 그 근심이 자기도 모르게 느껴진 것이다.

신자는 누구에게나 절대자이신 하나님 당신이 분명한 실체로 임재해 계신다.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하셔서 당연히 수호천사의 역할도 해주신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하나님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기 자녀를 기쁨으로 기꺼이 수호신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그러나 그렇게 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 당신이 신자와 참 사랑과 온전한 신뢰의 관계를 맺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신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깨닫게 하여, 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보여주고 들려주어, 그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하고 싶어서다.

그런데도 신자가 먹고 마시는 것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분을 수호신의 자리로 끌어 내리는 것일 뿐 아니라 그 분과 신자와는 아무런 의미 있는 개인적 관계를 맺지 못한다. 간혹 기도 응답이 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이거나 도저히 자기 자녀가 또 다시 사탄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봐주신 것뿐이다.

신자가 겉으로 천지신명에서 하나님, 예수님으로 이름만 바꿨지 속으로는 여전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구호는 이제 완전히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항상 우리 기도를 들으시려 기다리고 계신데 더 큰 능력의 하나님을 따로 부를 이유가 없다. 대신에 신자는 “내가 주 앞에 서 있나이다”라는 고백을 매순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신 주님 앞에 서 있나이다. 십자가에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 앞에 내가 서 있나이다. 영원하신 생명의 원천이신 절대자 앞에 제가 서 있나이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이자 백성의 자리에서 평생을 통해 단 한 순간도 절대로 벗어나지 않겠나이다.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신자는 밥을 먹든,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든 그 일과 사람을 상대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매사를 정말 두렵고 떨리며 더욱 겸비해진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를 끝 없이 사랑하시는 그 분이 함께 함으로 정말 담대하고 기쁘고 즐겁고 신나게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온전한 하나님의 임재 의식으로 살아갈 때만이 매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 해 놓으신 축복과 영광을 제대로 맛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빛 한 줄기 만으로도 전 우주를 뒤 엎을 수 있다. 자꾸 불신자시절의 버릇 대로 더 큰 능력으로 임재해 달라고 소원할 필요가 전혀 없다. 자신이 주님 앞에 진정으로 서 있는가만 매 순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손을 벌리기 전에 먼저 주님을 보려고 눈을 크게 뜨고 그 음성을 들으려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눈과 귀를 열지 않고는 아무리 손을 크게 벌려 봐야 매번 빈손으로 돌아 올 뿐이다.

사라의 웃음

2011.09.15 10:21:19
*.161.100.136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맘을,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려는 그 맘을, 그리고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시며 하나님 왕국의 일군으로 부르시는
그 음성에 귀를 쫑끗 세우며 감격하며 무릎을 꿇는 오늘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9.23 17:36:26
*.14.99.253

주님의 무한한 긍휼과 사랑에 붙들려 있음에 감사와 찬양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매순간 온전히 순종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를 그렇게 이끌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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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2] 운영자 2004-09-14 2371
74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572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485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895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1] 운영자 2004-08-17 2264
»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1994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63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474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1] 운영자 2004-07-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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