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15) 8/22/04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 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전인미답의 길
1958년 미국 NASA에서 우주 탐사 계획을 세우고 조종술, 체력, 전문지식, 정신력, 소명감등 모든 테스트를 거쳐 미국 공군 최고의 엘리트 중에서 최초 우주 비행사 7명을 뽑았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역사상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 그야말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들 앞에는 어떤 도전과 시련과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생명을 걸어야 했었다.
이보다 1930여년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바로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택하는 사건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증거하지 못했던 참 하나님과 그 분이 예비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을 사탄의 결박 아래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했다. 이들 앞에도 어떤 육체적, 정치적, 종교적 박해와 위험이 따를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신자들이 전도를 하다 보면 누구나 느끼는 아쉬움 내지는 불만이 하나 있다. 기도하면 불신자의 병이 낫고 손을 얹은 즉 앉은뱅이가 일어나면 전도하는 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믿을 수 있을 것인데라는 생각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주신 권능을 우리는 갖지 못해 말씀 앞에 불신자가 항복하기는커녕 수긍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발만 한다. 또 선교사가 테러범에게 잡혀 참수형을 당하며 그 자녀는 무슨 죄가 있어 풍토병에 걸려 오히려 부모보다 먼저 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초대교회 시절에는 예수님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기적을 나타내 보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 알 수 있는 성경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게하는 성령님이 와 있다. 또 예수를 믿는 것이 병이 낫고 현실에서 형통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꼭 동원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해는 한다. 그래도 여전히 이왕이면 그런 능력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더 쉽게 예수를 믿지 않겠나 싶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열 두 제자에게 주신 권능은 신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식의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다. 아니 성경에 분명히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말인가? 바로 그것이다. 권능이라고 했지 능력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같은 것처럼 보여도 다른 말이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던 특정한 일을 매번 할 수 있는 힘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는 것, 수영하는 것 같은 것들인데 한 번 배우면 평생을 잊지 않고 언제든 할 수 있다. 따로 새롭게 연습할 필요가 없다. 열번 시도해서 몇 번 실패하면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 열번 해서 열번 다 할 수 있어야 능력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은가? 그럼 정말 여러분이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9:17,18) 예수님의 제자들이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 것을 두고 서기관들이 설왕설래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데려 온 것은 그들이 귀신을 쫓아 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이 쫓겨 갈 때도 있고 안갈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 제자들이 귀신을 쫓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반면에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떠했는가? 귀신이 예수님이 아직 기도하거나 말씀도 하시기 전인데 주님을 본 것 만으로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물게 했다.(20절) 그리고 주님의 한 마디 꾸중에 단박 물러 갔다.(25절) 그럼 예수님에게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초자연적 능력 자체를 주신 것이 아니다.
NASA에서 인간을 최초로 우주로 보낼 때는 모든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비했다. 산소, 기압, 중력, 온도 등 우주선내의 모든 생존 여건을 지구와 동일하게 했다. 또 위험이 발생할 확률을 제로가 열 두개 붙은 일조분의 일까지 점검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주선이 지구로 귀환하여 대기권에 재 진입할 때에 그 진입 각도가 조금만 모자라도 튕겨나가 영원히 우주 미아가 되어 버리며 그 반대일 경우는 마찰열이 너무 높아 우주선 자체가 타버리는 것을 막아야 했다. 개와 원숭이를 여러 번 먼저 보내어 건강과 생명에 지장이 없는가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식의 실험을 했다. 최초 우주인 중의 한 명이었던 존 글렌 상원의원이 작년에 팔순이 넘은 나이에 우주를 다시 갔다 왔을 정도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오면 승진과 명예가 보장 되었고 혹시라도 순직하면 국민적 영웅이 될 뿐 아니라 유족에게는 막대한 보상이 따랐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파송할 때는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어떤 장치도 예비하지 않았다. 또 임무를 완수했을 때에 돌아갈 보상도 전혀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전대에 금이나 은을 갖고 가지 말며 여행용 짐 보따리, 여분의 옷이나 신발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10:9,10) 심지어 고대 사회에선 여행 길에 만날 들 짐승이나 강도들에게 일차적인 호신용 무기로 쓸 수 있는 지팡이마저 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것이 비춰 나와 돌을 떡 덩어리로 만들거나 성벽 같이 높은 데서 떨어져도 하나도 안 다치는 능력은 전혀 주시지 않았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다메섹에서 박해를 피해 치사하게 야밤에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도망치게 했다. 옥에 갇히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등 천신만고의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게 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며 고생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그 고생을 덜어주라는 권능이었지 능력이 아니다. 제자들을 영웅으로 만들거나 그들에게 돌아 오는 개인적인 보상은 전혀 없었다.
기도와 주문
그럼 왜 성경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었다고 기록해 마치 제자들이 능력과 권세를 받은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제자들이 어떤 때는 귀신이 쫓겨 가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아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고 대답하셨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기도란 따로 연습하고 훈련할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환경이라도 기도할 수 있다. 기도를 하려고 10번 시도했는데 7-8번은 실패했고 2-3번만 성공했다는 말은 아예 성립이 안되지 않는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그 능력(能力)을 사용할지 안 할지 주권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세(權勢)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자들이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동원하시되 당신께서 판단하고 결정해서 사용해 달라는 청원을 드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權能)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그런 권능을 분명히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여 권세 있게 기도해야 능력이 따른다는 것이다. 또 너무나 잘 아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기도하지 말고 권세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기도를 하되 권세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시 열 두 제자가 기도도 하지 않고 귀신을 쫓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간단하게 한 두 마디 꾸중하거나 심지어 귀신들린 자를 쳐다 보는 것만으로 귀신이 쫓겨간다고 해서 그대로 흉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그들을 파송 하기 전에 그 원리를 가르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가지 않는데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가르쳤다면 주님의 직무유기요 제자들을 야단 칠 근거 또한 없다. 제자들이 기도했는데도 귀신이 쫓겨가지 않은 까닭은 권세 있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들은 기도라기보다 오히려 주문을 외운 것이다.
주문(呪文)은 어떤 것인가? 미리 정해진 형식에 따라 어떤 문구만 외우면 자동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빌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누가 어떤 능력을 갖고 왜 그 소원을 들어 주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동굴 속의 보물은 도적들의 것인데 그들과 아무 상관 없는 아리바바가 “열려라 참깨!”만 외우면 동굴 문이 열리고 보물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주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몇 번 기도해서 귀신을 쫓는데 성공하니까 단순히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알았고 심지어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줄 착각했을 것이다. 기도에 권세가 떨어지고 주문으로 변했다.
신자의 기도는 다르다. 정해진 형식과 문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마음에 소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구해도 된다. 무엇이든 기도하라고 슈퍼 로또 걸리게 해 달라는 것까지 기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도하는 자가 자기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 분이 갖고 있는 권세와 능력이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응답하시는지, 응답한 목적과 결과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만 응답이 된다. 동굴 속에 분명히 보물이 있는데 보물의 주인이 누구이며 왜 기도하면 그 보물을 나눠주며 받은 보물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해야 할지를 알아 그 주인의 뜻대로 하겠다고 헌신한 자에게만 동굴이 열린다.
권능의 원어적 의미
신약 성경 전체로 보면 본문에 권능이라고 표현된 헬라어 원어 ‘엑소시아’는 권능보다 능력이라고 번역된 예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그 때의 능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특별히 환난 을 잘 견디는 힘을 뜻한다. 그러나 본문처럼 권능이라고 번역된 뜻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 말로는 권리 내지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
특권은 어떤 것이며 언제 주어지는가? 가장 먼저 어떤 모임이든 멤버쉽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회원제 골프장이 비싼데도 좋은 이유가 무엇인가? 회원은 부킹에 우선권을 주어 골프를 치고 싶으면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 칠 수 있고 또 무료로 여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특권이란 어떤 모임에 가입해 그 모임의 회장이 누구인지 또 어떤 규약이 있는지 잘 알아서 회원으로서 임무와 책임을 다할 때에 그에 따르는 특별한 대우다.
그렇지만 그 특권을 찾아 먹고 안 먹고는 전적으로 회원의 자유 재량에 달렸다. 골프장 회원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 달에 한 번도 치지 않는다고 벌금을 물리거나 강제로 끌고 나와 치라고 하지 않는다. 신자가 동굴 앞에서 기도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고 해서 동굴 문이 자동으로 열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벌 주시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나 오늘 날의 신자에게 준 권세 있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위치와 소속을 본인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자 특권이다. 그 자유를 행사하지 않으면 이미 받은 구원이 취소되거나 또 행사했다고 해서 구원을 자꾸 새롭게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쉽게 말해 구원 이후의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사탄 편에 설 것인가는 신자의 자유 재량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며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인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예수님만 바라 볼 것인가를 신자더러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제 열 두 제자가 천국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갈 때에 온갖 시련, 도전, 시험, 유혹, 방해, 조롱, 멸시, 궤휼, 핍박 등이 앞을 가로 막을 것이다. 그 모든 순간순간마다 귀신을 쫓으며 병을 낫게 하고 이 세상을 거룩과 생명과 빛으로 변화시킬 능력과 권세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주님께로부터임을 확신한다면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리고 병든 자들을 만나면 그들 속에 하나님의 참 생명이 없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절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기 전의 상태가 바로 그들과 같았음을 알아 그들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기 위해 이미 받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고 특별히 귀신이 쫓겨가고 병이 낫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그들에게 비추어 그들도 예수님이 세우실 이 땅의 신령한 공동체에 멤버로 가입시키라는 것이다. 천국을 이 땅에 확장 시키는 일에 자기들의 삶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자유이자 특권을 모든 인류 가운데 역사상 처음으로 이 열 두 제자가 받은 것이다.
신자가 전도할 때에 기도만 하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가면 불신자들이 팍팍 믿고 얼마나 신이 날까라고 아쉬울 때에 신이 나는 주체로 누구를 상정하여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인가? 불신자인가? 전도자 자신인가? 신자가 전도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그 의도마저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신자가 세상 앞에 폼 잡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거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신자가 기도만 하면 병이 낫고 그러면 전도가 팍팍 잘 될 것인데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절대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먼저 불신자가 신이 날 수 있어야 하고 다음에 하나님이 기뻐해야 한다. 신자는 오직 불신자가 새 생명을 얻어 거룩한 새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할 뿐이다. 전도할 때에는 불신자에게 진정으로 하늘에서 주시는 기쁨이 넘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신자에게서 능력이 뻗쳐 나오게 해달라고 해선 안 된다. 치유와 기적이 펼쳐지는 대상은 불신자이지 신자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신자가 신이 나야만 전도를 하겠다고 하는가 말이다.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열려라 참깨라고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의 유일한 목적은 무엇인가? 동물 속의 보물을 차지하겠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보물에만 관심이 있는 자는 방법만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방법만 동원하면 당연히 능력이 따라오는 그런 방법 말이다.
신자들이 전도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 생활에서 기도를 이렇게 간절히 했는데도 왜 아직도 아무 결실이 없고 내 형편은 이 모양 이 꼴인가 생각하는 것도 결국 보물에만 마음이 가 있다는 증거다. 어떻게 하든 내 신세를 때 빼고 광 내겠다는 목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열심히 주여주여 하면서 기도라는 형태를 취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열심이 주문을 외운 것밖에 안 된다.
기도라는 방법을 동원했으니 자연적으로 능력이 나타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구구절절한 사연을 아뢰었어도 열려라 참깨만 되풀이 한 셈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 자체에 응답하시는 법은 없다. 신자가 정말 하나님 왕국의 멤버쉽을 정식으로 확보하고 있고 능력과 권세는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확신하여 그 왕국의 규약대로 살고 있을 때에 자기 백성에게만 주는 특권을 허용할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 왕국의 법대로 하실 뿐이며 마찬가지로 그 왕국의 백성이 그 왕의 다스림을 제대로 받는 길도 그 법대로 사는 길 뿐이다.
물론 신자가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할 때에 귀신이 쫓겨가고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되풀이 해서 강조하건대 예수님이 전도하는 신자에게는 어떤 안전 보장과 차후의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다.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 하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신에 신자가 이 땅에 살 동안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기도할 수 있는 능력 즉 사탄과 하나님 둘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자의로 선택해서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뿐이다. 나머지 모든 사항들, 전도하는 신자를 형통케 할지 후패케 할지, 초월적 능력이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불신자가 복음 앞에 항복할지 안 할지는 오직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 아래 감쳐진 비밀일 뿐이다.
그럼 신자 앞으로 떨어지는 어떤 가시적 결과나 보상도 없이 왜 전도해야 하는가? 아니 보상은 없다 치더라도 하나님이 전부 다 결정하면 도대체 신자가 누리는 보람은 하나도 없지 않는가? 예수님이 너희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성령으로 권능을 입혀 주신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신자가 가질 수 있는 이 마지막 모든 질문에 관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담대함’이다. 현실에서의 어떤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보상과는 관계 없이 오직 신자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 오는 평강이다.
무식한 어부 베드로가 오순절날 복음을 전하자 삼천 명이 회심했다. 그 많은 청중 앞에서 당당하게 전할 수 있도록 배짱이 당당해졌다는 뜻인가? 아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재하자 처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은 항상 무조건 옳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분에게서만 절대적인 공평과 의로움과 선이 나오고 그 분이 신자에게 베푸시는 모든 일에 사랑과 위로와 능력과 은혜가 한 치라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확신하기에 삶의 어떤 순간에도 주님 편에 설 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비로소 그에게 생긴 것이다.
신자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권능의 궁극적 모습은 세상에 어떤 방해와 핍박이 있더라도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즐겁고도 기쁘게 주님 앞에 맡겨 드릴 수 있는 담대함이다. 세상과 죄악과 사탄과 사망 앞에 당당하게 맞서는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 입어 간절히 하나님만 의지하며 불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그 불쌍하고 고통 중에 있는 영혼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광채가 비취어 그들의 인생과 삶이 변화되게 하는 특권이다. 죄악으로 황폐해진 이 땅도 성령이 불의 혀 같이 내려와 뒤집어 엎고 부흥시킬 수 있는 그 일에 자신의 남은 일생을 헌신하기로 선택하는 자유다. 불신자들은 절대 가지지 못하고 예수를 아는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이다.
예수를 알고 나면 신자는 세상 사람은 알지도 가보지도 못한 전인미답의 길이자 그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기 전에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스스로 기쁘게 가게 된다. 또 그 길을 가는 동안 주님이 부어 주시는 재미와 보람과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알아 진리 안에서 더욱 자유로워진다. 주님은 신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일조에 또 다시 일조를 곱한 것 분의 일의 오차도 허락치 않으시고 완전한 길로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는 이런 담대한 권능을 이미 다 가졌다. 구원 이후 신자에게 남은 일은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나가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