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18) 9/12/04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목적이 선하면 만사 오케이다.
간혹 신자들 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적이라면 방법은 무리해도 좋다는 사람이 있다. 계속해서 살펴 보고 있는 주제인 전도에 있어서도 불신자들이 하자는 대로 다해주고 일단 호감을 얻어 무조건 교회로 데리고 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이다. 물론 나이트클럽이나 도박장에 가서 전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술 마시고 춤추고 노름하면서 전도할 수는 없다. 형무소에 있는 살인범이라도 전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감옥에 가야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사기치고 강도 짓 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신자들이 이런 간단한 원리를 잘 모르고 있는 이유는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절)는 본문 말씀의 뜻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자기기 갖고 있는 지식을 잘 활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방법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또 뱀이라는 동물이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간교하고 음흉하다.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는 영악한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해버린다. 반면에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으니 목적과 동기와 의도만 순수하면 예수님도 그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고 착각한다.
“뱀같이 지혜롭게”라는 말은 고대 중동 지방에서 흔히 쓰는 관용구로 사려 깊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라는 아주 좋은 뜻의 말이다. 나아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제자들이 천국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 겪게 될 핍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가르친 말씀이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목적과 수단을 구분해서 적용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그럼에도 종교적 핍박 없이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잘못된 방법으로 전도하는 것은 심하게 말해 하나님의 일을 핑계 삼아 드러내놓고 죄를 짓겠다는 심보다. 대표적인 예로 많은 교회들이 선교 헌금 마련 음식 바자회를 자주 한다. 그 때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이니 맛이 좀 없더라도 비싸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 부친다. 선교를 핑계 삼아 사람들에게 바가지 쒸우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환전상과 제물을 파는 장사치들에게 만민이 기도하는 우리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야단치며 쫓아 내셨다. 그들이 장사했다고 야단 맞은 것이 아니었다. 먼 거리에서 온 여행객이나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해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도록 도와주는 선한 목적으로 하는 장사였다. 그런데도 폭리를 취하고 또 그런 장사할 권리를 얻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핍박이 없어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다고 아무 방법이나 다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방법을 다 쓸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
삼십육계가 최고의 방법이다.
유대인들은 결론을 먼저 제시한 후에 그런 결론이 나오게 된 배경과 이유와 적용하는 방법들을 설명하는 두괄식(頭括式)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따라서 16절의 말씀의 뜻은 17-23절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하다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첫번째 사람은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 계층이다. 그들에게 어떻게 대처하라고 하셨는가?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라는 것이다.(19,20절) 둘 째는 내주에 배울 내용으로 가족들로부터 오는 박해다. 그들에게 또 어떻게 대처하라고 하셨는가? 끝까지 참든지 아니면 다른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다.(22,23절)
따라서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는 것은 세상의 핍박에 굴복하거나 타협하기 위해 믿음을 바꾸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것은 그래도 세상이 자꾸 굴복하라고 요구하면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세상적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는 그 속에 전혀 없다.
주님을 세 번 배반했던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불경스럽고 자기 같은 죄인이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기에 일부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그런 그도 사역 중에 감옥이 저절로 열리는 기적을 맛보고도 핍박을 피해 슬그머니 숨어버렸다.(행12:1-17) 또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도 복음의 진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바울도 밤중에 우리 상식으로는 참으로 치사하게도 박해를 피해 다메섹에서 성벽을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야반도주 했다.(고후11:32,33) 한 마디로 예수님의 뜻은 핍박에는 삼십육계가 최고라는 것이다.
본문 17절에도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때는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반대하는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목자 없이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는 것을 정말 안타까워 하신다. 그래서 신자더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중에는 복음에 대놓고 대적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 그럴 때는 그런 자보다 마음이 가난하고 자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해 갈급해 하는 자부터 찾아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 예수 믿는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에 목마른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 스스로 똑똑하고 의로우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따로 도와줄 일이 없으니 당장 섬길 필요는 없다. 복음을 전해 봐야 오히려 마음 문을 닫고 대적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누가 마음 문이 열렸는지 아니면 강퍅하고 완악한지 알 수 있는 신통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복음에 대적하는 자가 나타나 회당에 넘겨주고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겪게 된다. 오늘 날 식으로 말하면 전도하면 자꾸 반발하고 시비를 거는 불신자가 있다. 그 때는 차라리 피하든지 아니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말하라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러나 성령은 귀신 들린 무당처럼 말하는 사람의 의지와 생각과는 다른 말을 신자의 입술을 통해 술술 나오게 하는 법은 절대 없다. 사도행전 4:18-20으로 가보자.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 그 기적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시기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는 증거하지 말라고 두 번씩이나 다그치는 장면이다.
이 때 성령이 베드로에게 어떤 말을 하게 했는가? 방언을 하게 하거나 아주 거룩하고 고상한 도덕적 교훈이나 심오하고 고차원적인 교리를 강론하게 한 것이 아니다. 오직 보고 들은 것만 증거 하게 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그 분이 은혜를 주셔서 앉은뱅이가 일어서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전파한 복음에 대해 굳이 변명할 것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차한 변명이나 복잡한 설명은 언제 필요한가? 오직 두 가지 경우뿐이다. 말하는 사람에게 숨은 의도가 있어서 상대를 조종해 이용하려거나 말하고 있는 내용이 거짓일 때다. 한 마디로 두 경우 다 진실이 아니다.
미국의 고등 학생들이 차를 몰고 일요일 날 야외로 놀러 나갔다. 너무 재미 있어 학교를 빠지고 하루 더 놀다 가기로 했다. 선생님께는 타이어가 펑크나 돌아 오지 못했다고 입을 맞추고 실제 그렇게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님이 흰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면서 각자가 따로 자동차의 어느 쪽 타어이가 펑크 났는지 표시하라고 했다.
거짓은 아무리 변명하고 핑계를 대어도 반드시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자기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것만큼 분명한 진실은 따로 없다. 거짓말 할래야 할 수 없다. 구태여 변명이 필요 없고 미리 무슨 말할지 염려할 것도 없다. 이미 다 체험했던 사실이라 훤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핍박을 참고 견딜 때에 내 한 몸 바쳐 주를 위해 순교하리라는 식으로 대단한 결심과 의지력을 동원해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다. 아마 제가 일제 때 태어났더라면 신사 참배한 목사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물론 신자의 순교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고 기쁘게 받으신다. 그러나 정작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다. 또 그것도 하나님이 미리 예비 해 놓으시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신에 하나님은 한 명이라도 더 당신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의 품 안으로 돌아 오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핍박이 오면 삼십육계를 놓더라도 가능한 오래 살아 더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신다. 기독교라는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한 명이라도 더 복 주시고 참 인간답게 잘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초대 교회 신자들이 당시에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겠는가? 로마서에 설명된 대로 사람은 자기 선행과 공적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교리를 전했을까? 그렇지 않다. 아주 간단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그 한마디다. “그 분은 살아 계신 주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너희를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낼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들은 대로 증거 했다.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인 본문의 첫 전도 여행에서도 그들에게 망설임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나사렛 동네에서 한 젊은 선지자가 나왔다. 그가 군대 귀신을 쫓아내었다. 손을 얹은즉 문둥병이 나았고 말씀 한 마디에 중풍병자가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었다. 혈루병으로 12년간이나 고생하던 여인은 그 분의 옷 자락만 만지고 나았다. 그 분이 성경을 풀어 줄 때에 그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 내 영혼에 찔림을 받았다. 그 동안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내 삶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고 하나님 앞에 저절로 눈물 흘리며 지난 모든 죄를 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동안 세상에선 도저히 맛 볼 수 없었던 평강과 기쁨이 흘러 넘쳤다. 무식한 어부요 갈릴리 이방 땅의 죄인들인 우리 같은 자들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셨다. 우리는 종교와 율법과 제사 규정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그 분과 함께 있으면 항상 충족하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 분의 말대로 천국이 가까이 왔고 우리는 이미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을 매일 확실히 체험하고 있다. 제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나오라. 그러면 누구든지 바로 우리와 동일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제자들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성령이 할 말을 전해 준다고 해서 특별히 신령한 내용도 없으며 그들의 속으로부터 무슨 엄청난 능력이 샘 솟듯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자기들이 체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아주 평범한 이야기로 전했을 뿐이다.
십자가 복음은 따로 변명이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최고로 우수한 종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 선하고 옳아서만도 아니다. 전도란 그 자체가 하나님 당신이 직접 한 불쌍한 영혼에게 자신의 은혜를 쏟아 부어주어 그를 새롭게 살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한 불신자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가 닿으면 그의 육체, 정신, 영혼이 망라된 전 존재가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며 그 인생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옮겨지게 된다.
본문 18절 끝에 주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제자들이 핍박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단순히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예언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전도가 그런 핍박을 통해 이뤄지도록 계획하셨고 연출하셨다는 의미다. 제자들의 고생과 희생을 제물 삼아 기독교를 창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세상 어떤 힘도 그 분의 영역을 침범해 제자들을 뺏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회당의 채찍질이나 총독과 임금들의 문초로도 그들이 예수님께 보고 듣고 받은 은혜에 대해 진실 되게 말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전도의 본질
성령이 전도하는 신자들에게 할 말을 심어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자들의 말로 불신자들이 전도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도란 불신자를 인간의 말로 설득하여 어떻게 하든 예수 믿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 믿게 만들겠다고 덤비니 세상적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고 착각한다.
전도란 신자가 주님께 보고 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한치의 가감이나 변경 없이 전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신자가 보고 듣는 것이 진실되고 많아야 제대로 전할 수 있다. 그 말은 전도란 불신자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기 보다 신자가 바뀌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후, 또 예수를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신자가 바뀌어진 모습을 불신자가 보고 부러워하고 시샘을 내어야 한다.
신자는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예수님 하나고 나머지 세상적으로 안 가진 것이 백 개가 넘을 수 있다. 반면에 불신자는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백 개가 넘고 안 가진 것이라고는 예수 뿐이다. 그래도 불신자가 자기가 안 가진 바로 그 하나가 자기 인생에 가장 크게 부족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해 주어야 한다. 신자가 사는 방식이 옳고 진정한 승리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가 지금까지 살아 왔던 방식이 너무나 헛된 실패임을 자인토록해서 자기도 신자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근래 교회마다 다양한 형태로 전도 잘하는 법을 훈련시킨다. 불신자를 처음 만났을 때에 첫인상을 좋게 심어주고 그들의 호감을 얻는 법을 가장 먼저 가르친다. 다 옳고 좋은 일이며 그렇게 훈련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절대 착각해선 안 되는 것은 그렇게 한다고 그들과 대화를 이끌어 가는 데는 도움은 될지언정 전도 자체가 잘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억지로 뱀처럼 지혜로워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둘기처럼 순결하기만 하면 된다. 진리는 항상 진리로서 빛을 발한다. 별다른 테크닉이나 변명이 필요 없으며 오히려 그런 것들이 따라 붙으면 진리는 빛을 잃는다. 신자가 복음의 진리를 전해 놓고 살기는 그 진리와 다른 모습으로 살면 신자 스스로 자기가 전한 진리를 부인한 셈이며 나아가 거짓이 되어 버린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진리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최근 기독교가 힘을 잃고 교인이 늘지 않는 이유가 전도를 적게 해서 그렇겠는가? 아니면 신자가 빛 가운데 서 있지 못한 것이겠는가? 어느 쪽이 더 큰 원인이겠는가? 전도는 흘러 넘치고 있되 참 생명은 찾기 힘들다. 신자가 입으로는 진리를 몸으로는 거짓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란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전도 훈련이나 중보 기도에 앞서 예수님만이 참 생명이다는 것을 신자 각자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역으로는 자기 인생의 참 주인이 세상 사람이 주인으로 모시는 돈, 명예, 권세, 자존심, 체면, 교양, 종교, 도덕성 등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는 양, 또 스스로 의인인척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 없는 자 없다. 불신자들 모두가 영혼의 내면이 텅 비어 참 평강이 없으며 자기 인생의 방향과 의미를 붙들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 나타내는 반응과는 달리 속으로는 신자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과연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과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인생을 완전히 의탁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열심히 탐색한다. 이런 그들에게 윤리적 계명이나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교리가 일차적으로는 아무 힘도 발휘 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신자가 진짜 하나님을 붙들고 진짜로 믿으며 그 믿은 대로 사는가 점검한다. 세상의 것들과는 구별된 영원한 생명력에 의지해 어떤 환난과 핍박과 상처와 고통이 오더라도 평강과 기쁨과 자유를 유지하는지 열심히 체크한다. 대부분의 불신자들도 자기들의 인생이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있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붙고 있는 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가 사는 모습을 보아도 자기들과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코방귀만 끼는 것이다.
전도에 특별한 은사나 재능이나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 예수 믿기 전의 삶이 완전 실패였다면 예수 믿고 난 후의 삶은 세상에 그런 성공이 따로 없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예수 믿기 전의 인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기 보다 싫다는 것이 확고하게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모습이 언제 어느 곳 누구를 만나도 자기 삶의 구석구석에서 비춰져야 한다.
세상은 지금도 신자들을 핍박하고 있다. 물론 이곳 미국에선 더 이상 예수 믿는다고 채찍질하거나 감옥에 넣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꾸 “예수를 모시고 사는 인생이 재미 있느냐? 그렇게 사는 것이 진짜냐? 세상에 뒤 처지는 것 같지 않느냐? 예수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참 생명이냐?”라고 질문 공세를 퍼 붓는다. 불신자들이 물질적으로 현실적으로 형통하는 모습과 성취와 실적에만 바탕을 둔 세상 조류와 유행이 쉴 새 없이 삶의 모든 방향에서 무차별적으로 신자에게 그런 의심이 들게끔 파고 든다.
그럴 때 어떻게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가? 기도해서 그런 시험과 유혹에서 견딜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하는가? 아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님이 대답할 말을 주시는 대로 따르면 된다. 방언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보고 들은 그대로 말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삶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참 생명인가 또 내 인생의 참 주인인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면 된다. 신자 자신이 빛과 어둠 가운데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해서 어느 쪽이 더 신나고 좋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는 것이다.
예수가 참 생명이 아니면서 절대 전도할 수 없다. 예수가 신자 본인에게 참 생명이 되어 있다면 그렇게 살기만 해도 전도는 절로 된다. 어떤 핍박이 와도 그 참 생명으로 이겨내는 모습 말고는 뱀 같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것뿐이다.
비둘기 같이 순결함과 아주 동일한 의미인 것이군요.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