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19) 9/19/04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부모를 따르랴 하나님을 따르랴?
본문의 내용은 목사가 자주 상담을 받는 주제 중의 하나다. 불신자 집안에서 어쩌다 먼저 예수를 믿으면 부모 형제의 반대에 부딪힌다. 주일날 교회 가는 것마저 극력 반대한다. 심한 경우 교회 가면 부모 자식 간의 연마저 끊자고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자니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 같고 부모를 따르자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 같아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여러분이 그런 처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목사로서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문제를 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의 기본적 의무라는 너무 좁은 차원으로만 접근한다는 것이다. 불신자였다가 예수를 처음 믿은 입장에선 주일 성수를 잘 준수하겠다는 그 의도는 순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도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교회 출석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초월하는 영역에 속한 것임을 신자라면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라. 만약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었다면 과연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까지 반대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신자는 이 사실이 뜻하는 깊은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는 근거가 기독교인들 스스로 말만 앞서고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지 못한 것에 일차적인 책임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라면 다른 종교인들도 대동소이하다. 절간의 스님들도 몽둥이 들고 서로 싸우며 천주교 사제들은 아동들을 상대로 성적 추행을 했다. 반면에 세계 곳곳에 빈민이나 난민을 숨어서 구제하는 일에는 예수 믿는 신자가 가장 열심이다. 나아가 교회 나가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죄를 적게 짓고 생활에 질서가 잡힌다. 그럼에도 예수만 믿는다고 하면 막무가내로 반대한다. 위선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인생의 영원한 숙제 두 가지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가? 첫째는 지난 주 살펴 본 왕과 총독과 회당의 지도자들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겐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직업과 수입과 지위를 결정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들의 눈 밖에 나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심한 경우 목숨까지 잃는다. 둘째 부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가족이다. 가족이란 이 땅에서 맺는 모든 인간 관계 중에 가장 서로 신뢰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한 마디로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유독 이런 사람들이 신자를 핍박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기는 어떤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하며 또 그것들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이다. 인생살이의 외적인 면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도덕, 종교로 다룰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또 피는 물보다 진한 그런 섬김과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는 뜻이다.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 느꼈던 기분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보라. 아직 부모님이 생존해 있다면 친척이든 친구든 아주 가까웠던 분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감상이 어떠했었는가? 당장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대단하다. 이 땅에선 더 이상 관계를 가질 수 없으며 살아 생전에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했고 정말 더 잘 대해 주지 못한 것 때문에 가슴이 메인다. 아무리 후회해도 이젠 도저히 어찌 해 볼 수가 없으니 더 미친다.
그런데 그런 슬픔에 잠겨 있는 짬짬이 아니면 그런 기분이 잠시 진정된 후에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죽는구나. 죽음 앞에는 돈과 권력과 명예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구나. 결국 나도 언젠가는 같은 길을 가겠지. 고생과 수고가 끊일 날 없는 인생을 죽도록 열심히 살아봐야 어차피 죽고 만다면 얼마나 인간이 불쌍하고 허망한가? 사람끼리 서로 상처주고 받으며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아가 “어쩌면 이미 죽은 사람이 더 행복하고 아직도 살아 있는 내가 더 불쌍할지 몰라. 차라리 일찍 잘 죽었다”라는 생각까지 누구나 한다.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에는 혈연관계로도 도저히 충족되어질 수 없는 허망하고 갈급한 부분이 있다. 이상하지 않는가? 방금 전에 가장 사랑하는 부모를 사방 몇 자 안 되는 차디찬 땅에 파 묻었고 이제 곧 흙 속에서 썩어 들어 갈 것인데도 잘 죽었다는 말이 감히 나오다니 말이다. 이 세상에 부모 자식만큼 이해타산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관계는 없다. 각자의 고집, 자존심, 체면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유일한 관계다. 그런 부모를 잃어도 오히려 잘 죽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부모 잃은 슬픔보다도 더 슬프고 허망한 것이 인간에게 따로 있다는 뜻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과학자가 된 후에 이런 고백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해졌는데도 아직도 외롭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세계 최고 석학의 자리에 올랐고 부귀영화도 손에 쥐었다. 언제 어디를 가나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고 더 이상 다다를 곳이 없을 정도로 인간으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그 모든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보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추구하고 누려야 할 더 큰 기쁨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과일을 먹지 못하는 동물들
이런 감정을 느끼며 밤새 갈등하고 고민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동물은 절대 그렇지 않다. 동물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동물은 입맛이 없어 굶는다는 법은 없다. 동물에게는 오직 배가 고프거나 포만감이나 둘 중 하나만 느낄 뿐이다. 맵고 짜고 달고 시고 싱거운 맛을 전혀 모른다. 동물이 과일을 따 먹고 먹이에 양념 발라 먹는 것 보았는가? 그저 허기와 갈증만 채울 뿐이다.
입맛이 없어 밥을 굶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자연세계와 동식물은 창조하신 후에 단순히 좋기만 했지만 인간을 지으신 후에는 심히 좋아 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했기 때문이다. 맵고 짜고 달고 신 맛 자체를 창조하신 분께서 인간에게도 그런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맛을 주신 이유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느끼라는 것이다. 인생에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픈 일도 있음을 알아라는 것이다. 인생의 온갖 단맛 쓴맛을 맛 볼 때에 이 세상이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님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피조물 중에 가장 위대한 인간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 때에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따로 있음을 알고 그 분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어라는 것이다. 그저 맛있는 것만 골라 식도락을 즐기라고 미각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맛을 창조하셨다면 당신께서도 그런 맛을 잘 아신다는 뜻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죄와 사탄과 사망의 멍에 아래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속으로 민망히 여기시며 통분해 하셨다. 인간을 지으시고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분이라 인생살이의 달고 쓴 맛을 인간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인간더러 그 분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도 인생의 쓴맛 단맛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는 충족되어지지 않는 존재다. 그렇다고 마냥 신나고 재미 있는 일만 즐기거나 단지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만 하는 존재는 더구나 아니다. 살다 보면 가장 쓸쓸했던 적이 언제인가? 참으로 이상하게도 가장 좋은 일이 방금 끝이 난 바로 직후이지 않는가? 밤새 더 이상 화끈하고 신나게 놀래야 놀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던 다음 날 아침이 얼마나 씁쓸했던지 우리 모두 잘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부분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의 참 사랑과 온전한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권능으로 붙들어 주고 채워주어야만 충만해지는 곳이다.
부모님의 장례식에서조차 오히려 잘 죽었고 멀쩡히 살아 있는 내가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 절대 불효가 아니다. 그렇다고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도 아니며 값싼 감상주의는 더구나 아니다. 인간으로서 너무나 인간 다운 자연스런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만은 당신의 영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절대 평강과 자유함이 없도록 본질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류를 구원한 것이 인간더러 착하게 살고 종교적 계명을 잘 지키면 복을 주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너희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으로 돌아오라고 하나님 당신이 모든 것을 바쳐가며 호소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으로 부어주어 당신의 영원한 자녀로 삼아 주신다. 더 이상 인생의 갈급함과 허망함과 방탕함에 헤매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채워 주셔서 거룩하고 흠 없게 보존하시고 하늘의 영원한 안식에 참예하도록 해 주신다.
신자를 핍박하는 이유
예나 지금이나 예수를 믿는다면 이상하게도 사생결단 하듯이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예수 믿는 것이 바로 사생결단(死生決斷)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살고 죽는 것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렸다.
반면에 다른 종교를 믿는다면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이 아무리 고상한 사상과 심오한 교리를 앞 세울지라도 결국 세상에서의 형통과 성공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며 걸어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같은 길을 함께 가겠다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 한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유독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자기들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영향력 아래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되기 전의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을 때 하늘에서 홀연히 빛이 비춰 사흘간 그 눈을 멀게 했다. 그 때 빛 가운데서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천국에 계셨으므로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느냐 하지 않고 바로 당신을 핍박한다고 하셨는가? 예수 믿는 모든 자에겐 당신의 영이 와 있어 신자가 어디로 가나 살아 계신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에겐 하나님의 영이 와 있지 않다. 그들은 예수 믿는 신자들과 그 영이 다르다. 본인들의 지정의로는 의식할 수 없지만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의 조종 아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이 자기들과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출발점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며 그래서 그 종착지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종교적 교리의 내용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불신자들은 분명한 이유도 없이 그저 예수만 믿는다면 무턱대고 싫어 한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억지를 부리거나 어떤 때는 어떤 반대 이유도 대지 못한다. 그들의 지정의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싫다는 뜻이다. 불신자 속에 있는 신자와는 다른 영이 시키는 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대하는 것이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사탄이 자기 부하 한 명을 예수님에게 뺏기기 싫어서 불신자를 미혹 시켜 기를 쓰고 핍박하게 만든 것이다.
주일을 빠져도 된다.
그렇다면 저들의 그런 반대와 핍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일 날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를 가야 하는가 가지 말아야 하는가? 종교의 자유를 왜 방해하느냐고 싸워야 하는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죽어도 주일을 지키겠다고 고집해야 하는가? 너희는 사탄의 자식이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아예 상대조차 말아야 하는가? 사탄의 자식아 내 뒤로 몰러 가라고 저주해야 하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가장 먼저 주일을 빠지면 혹시 하나님께 벌 받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 주일을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절대 줄거나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가지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하나님과 맺는 그 친밀한 일대일 사랑의 관계는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방해 하지 못한다.(롬8:38,39) 왕이든 총독이든 종교 지도자든 심지어 부모라도 관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신자의 신분과 위치와 소속과 특권을 절대 바꾸지 못한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저들 앞에 부모를 잃는 슬픔보다 더 큰 인생 본연의 슬픔을 예수 안에서 완전히 해소 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나아가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보다 더 생생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있는 모습도 함께 보여줘야 한다.
반면에 저들은 아직도 인간으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이 두 갈등 가운데서 아직도 허덕이며 붙잡혀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 저들 또한 조만간 죽음으로 서로 이별할 것인데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한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며 불쌍한지 알아야 한다. 영원한 진노와 형별 아래 떨어질 것이 빤히 보이는 그 결과 때문에라도 그 영혼을 안고 주님 앞에 나가 눈물로 기도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핍박에 어떻게 대처하라고 하셨는가? 끝까지 참아라고 하셨다.(22절) 그리고 도저히 그 핍박을 정신적 영적으로 이겨낼 자신이 없거든 자꾸 분쟁을 야기시키지 말고 피하라고 했다.(23절) 말하자면 부모와 분가해서 따로 살아라는 것이다.
그럼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교회 가라고 허락할 때까지인가? 더 이상 잔소리 하지 않을 때까지인가? 둘 다 아니다. 집안 식구 모두가 예수 믿는 신자 한 사람 때문에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하고 돌아 올 때까지 참아야 한다. 그래서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부적, 전통, 자랑, 내력, 심지어 가훈까지 몽땅 쓰레기 통에 담아 불사르고 전 가족이 함께 모여 성경 보며 찬양 부르고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까지 참아야 한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아버지가 돼지 머리 갖다 놓고 제사 지내면 자식이 참여해 절했지만 이제는 예수 믿는 자식이 말씀을 전하고 가정 예배를 인도하면 부모가 눈물로 아멘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다. 누가 먼저 믿었느냐 나중 믿었는지 신앙 연륜을 따지거나 부모 자식 간의 권위를 따르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 없다. 부모 자식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분의 자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사탄에게 절하지 말라는 한 가지 이유만이 아니다. 불신자 식구들을 이처럼 예배에 참석토록 만들라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사 안 지낸다, 나는 어떤 반대가 있어도 주일 성수는 꼭 지킨다는 것이 신자의 자랑이 되어선 안 된다.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께 바칠 의무와 충성을 다하느냐 못하느냐 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가 된 이상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가감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신자가 자꾸 내가 하나님 편에 붙어야 한다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그 분은 절대로 우릴 떠나지 않으신다. 어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쉽게 그 분이 우릴 포기하시겠는가? 대신에 신자는 이런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구원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핍박할수록 저들이 더 불쌍하고 그럴수록 끝까지 참아내어 저들에게도 내가 누리는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
그럼 전 가족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그 때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아내어야 하는가? 단순히 침묵하고 무저항 주의로 일관해야 하는가? 아니다. 주일날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를 간다면 그 교회 가는 것이 세상의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신나고 즐거운 일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 갔다 오면 얼굴 빛이 달라지고 더욱 큰 사랑과 인내와 충성과 헌신으로 식구들을 대해야 한다. 교회 출석하여 하나님께 충성한 것으로 다른 것이 희생되어선 절대 안 된다. 그 반대다. 모든 일상사를 더욱 성실하게 살아 교회 가는 시간 만큼 혹시라도 소홀히 하여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간혹 반대가 너무 심해 교회 못 가게 되더라도 괜찮다. 그럴 때는 대신에 집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남들 보는 앞에서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이 의지하는 힘과는 전혀 다른 능력에 의지하여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기도한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이뤄지고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이 저들에게도 끼쳐져야 한다.
세상의 어떤 책보다 성경이 더 재미있고 귀중한 내용임을 알게 해야 한다. 책장에 꽂힌 채로 먼지가 쌓이는 모습을 저들에게 보이고는 아무리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항변해봐야 의미가 없다. 세상의 어떤 노래보다 찬양이 더 좋고 신나는 노래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집 안에서 항상 기독교적 신앙 형태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일생의 목표가 세상에서 큰 업적을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주위 사람들에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도록 하는 일에 두라는 것이다. 신자를 볼 때에 언제 어디서나 저들의 영혼에 찔림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저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을 해결 받고 누려야 할 가장 큰 기쁨을 얻겠다는 소망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
예수 믿는 신자의 삶은 절대로 이 땅의 무덤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같이 위인전에 올라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는 차원과도 다르다. 신자가 아무리 이 땅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희미한 존재로 끝이 날지라도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고 하늘의 생명책에 성자(Saint) 누구누구로 이름이 이미 올라 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영원토록 그 분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어린 양이신 예수님과 이 땅을 다스리는 일에 참여 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런 특권을 이미 확보한 신자가 기껏 세상에서만 겪을 반대와 핍박이 무엇 때문에 두려운가? 왜 사람의 눈치를 보며 환경을 자꾸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주님은 분명히 선언하셨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자기들이 믿는 것만 맞다 여긴다. 너무 독선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제일
싫었던 것이 참 수다스럽다라는 것이였습니다. ㅋㅋ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문제였음을 배웁니다.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보게 하심 또한 주님을 닮아가라심이며 그 분의 영으로
채워져 참 안식을 맛 보라심임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