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20) 9/26/0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등록금 혜택을 포기한 학생들
초대 교회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은 핍박은 요즘으로 치면 이슬람 국가나 공산국가에 가 있는 선교사들이 당하는 것과 같다. 한 사회나 한 나라 전체가 어떤 신이나 특정한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고 심하면 목숨도 잃게 된다.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믿지 않고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이면서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은 크리스찬들은 그 사회의 구성원의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믿음 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 같은 나라에서 예수 믿는다고 감옥 가는 일이 없고 사회 생활 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핍박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유타주 Salt Lake City에서 유학생 목회를 했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30-40분 되는 거리에 Provo라는 두 번째로 큰 도시가 있는 데 그곳에 몰몬교가 세운 Brigham Young 이라는 좋은 대학이 있다. 주일이면 그 먼 곳에서 4-5명의 대학생이 저희 교회를 출석했다.
그래서 목사로선 제일 바쁜 매주 토요일마다 그곳으로 가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저녁 먹으며 교제까지 하고 오곤 했다. 몰몬교 천지인 그곳에 교민과 한인 학생이 제법 사는데도 한인교회가 하나도 없어 지교회를 세울 소망을 갖고 그렇게 했다. 또 먼 거리를 마다 않고 교회에 나온 그들이 감사하기도 해 더욱 신경을 써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기특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대학은 몰몬교 신자에게는 등록금의 1/3만 내면 되는 혜택을 주었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 가운데는 형식적으로 몰몬 교회에 출석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도 이들은 다른 사람의 3배나 되는 등록금을 내고도 떳떳하게 이마에 크리스찬이라고 써 붙이고 다녔다. 바로 이것이 핍박이다.
대학 당국과 몰몬 교단에서 크리스찬을 핍박하거나 차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 종교를 믿는 자도 입학을 허락했으니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인정했다. 또 미국의 주립대학이 자기 주의 주민들에게 등록금을 싸게 해 주듯이 몰몬 교단에서 운영자금을 충당하는 사립 대학이기 때문에 자기들 교인에게 등록금 혜택을 주는 것은 합법이다. 그럼에도 신자에게는 그 일이 차별이나 혜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핍박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단 종교인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핍박의 본질
핍박이라고 하면 꼭 물리적인 강제력이 동원되어 고통이 가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핍박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을 포기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만드는 모든 외부적인 자극, 영향, 간섭, 개입 등이다. 신앙을 계속 지니므로 해서 생기는 불이익과 손해를 감수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을 하는 것은 그 간섭하는 힘이 더 세게 동원된 것뿐이다. 불신자 가정에서 식구 중 한 명이 교회 가는 것을 두들겨 패지 않고 말로만 회유하고 으름장을 놓아도 여전히 핍박이다. 폭력을 가해 고통을 주자는 것이 핍박의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해서든 신앙을 바꾸거나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꾸 신자를 뒤에서 중상 모략하고 사기 쳐서 손해를 입히면 한 밤중에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당장 뛰어가 요절을 내고 싶다. 그 때에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른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게 되면 핍박을 받은 것이다.
유타의 그 학생들이 아무리 크리스찬이지만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되 몰몬 교회에는 형식적으로 출석하고픈 유혹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몰몬 교회를 가더라도 속으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몰몬경 대신 성경을 보고 있으면 이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를 하나님은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몇 번씩 갈등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손해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핍박이 초대 교회 때나 중세의 종교 개혁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올바른 신자의 모습으로 서 있으면 어느 시대에나 핍박은 있게 마련이다.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이다. 세상은 죄와 사탄과 사망의 길로 향해 달려 가지만 하나님은 신자에게 거룩과 의와 생명의 길로 가라고 요구하신다. 서로의 가는 방향이 완전히 정 반대이기 때문에 반드시 충돌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떤 믿음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가?
그렇다면 세상이 신자에게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고 하지 무슨 ABC 같은 질문을 하는가 싶은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신자가 창조주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는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4:18로 가보자.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어 전도에 불이 붙자 제사장과 관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 핍박을 하는 장면이다. 그들이 사도들에게 어떤 믿음을 포기하라고 했는가?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핍박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을 아주 열심히 믿는 자들이었다. 사도들더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괜찮은데 예수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 믿는 믿음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다르며 신자들은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 받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도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선생이요 상전인 당신께서 핍박을 받는다면 제자와 종인 너희들은 얼마나 더 핍박을 많이 받겠느냐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예수님보다 더 많은 핍박을 받게 된다.
여러분은 이런 부분에 실감을 하고 있는가? 감옥에 가거나 채찍질을 안 당해도 사사건건 세상과 충돌되는 것을 실제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솔직히 자신이 없고 속에 찔림이 있다면 질문을 조금 다른 각도로 해 보겠다. 하나님만 믿는 신앙과 예수를 믿는 신앙을 정확히 구분은 할 수 있는가? 혹시 아직도 하나님만 믿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믿으나 예수를 믿으나 같은 신앙이지 무슨 말인가 싶은가? 이 부분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에겐 이 보다 더 근본적이고도 심각한 문제가 따로 없다.
하나님만 믿는 신앙과 예수를 믿는 신앙을 수도 없이 많은 관점에서 구별해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의 주제인 핍박이란 차원에서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왜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한 핍박을 받으셨는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하셨기에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던가?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권세 있는 말씀으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참 인간답게 살 수 있을지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다. 세상의 어떤 집단도 흉내 못 낼 참 사랑과 온전한 신뢰에 바탕을 둔 영적 공동체를 제자들과 이루어 하나님 왕국의 모범을 이 땅에 실현시키셨다. 심지어 자기를 배반할 줄 알고도 제자로 받아 주었고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었고 마지막에는 어서 가서 고발하라고 까지 하셨다. 자기를 잡으러 온 제사장의 하속들을 막아서는 제자들을 오히려 야단치셨다.
그 분이 하신 일을 아무리 구석구석 눈을 닦고 보아도 십자가에 죽을만한 대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십자가는커녕 핍박을 받거나 조롱과 멸시 받을 이유조차 단 한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분은 핑계를 대거나 변명과 항변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십자가에 달리셨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인간들
사회 정의적 차원에서 볼 때 천하의 악당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와 유대 분봉왕 헤롯도 예수님에게 죽을 죄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의로운 유대인들은 기어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첫째는 다 잘 아시는 대로 로마제국을 칼로 무찔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수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며 단순히 랍비라면 그런 요구를 할 수 없고 또 그런 이유 때문에 죽일 수도 없다. 어떻게 유대 민족 전체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한 인간이 책임져 줄 수 있는가? 현재의 미국보다 더 강력했던 로마 제국을 무식한 어부나 세리 열 몇 명을 제자로 데리고 있는 한 청년이 어떻게 무찌를 수 있다고 감히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그것을 요구했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자 배척했다.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 사람들 스스로 그 분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자 구세주 임을 결과적이지만 명백하게 증거한 셈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으면 실제 하나님이 맞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조종하고 결정하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큰 소리만 쳤지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 앞에 겸손히 항복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종교의 자유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선택할 자유는 인간에게 절대로 없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만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인간을 등 따뜻하고 배 부르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철썩 같이 믿고 오직 그것에만 매달린다. 인간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만이 전부요 그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한 신앙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정작 하나님 당신은 인간의 그런 요구를 분명하게 거절하셨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제자가 되길 청했다. 그 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19,20)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세상의 형통과 축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나를 따르면 세상의 멸시와 박해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도 따르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요6:15) 가셨다. 예수님이 그런 요구를 거절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차원이 아닌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두 번째 이유가 등장하게 된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고 선포하시면서 인간 모두를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죽였다.
그런데 이 이유도 가만히 살펴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예수님이 인간더러 살인, 도적질, 간음 같이 십계명을 위반하고 감옥에 갈만한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라고 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왔을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러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전부 물러갔다. 모두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죄를 어떻게 사해주신다고 했는가? 선행하라, 율법을 지켜라, 제사를 지내라, 고행과 수양을 쌓아라, 피해 본 자에게 손해 배상을 하라, 감옥에 가거나 매를 맞아 죄 값을 치르라 이 중에 어느 하나도 요구하시지 않았다. 단지 죄임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되돌아 오기만 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죽어도 싫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죄인임을 인정하기 싫어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방법이 너무 쉽고 싱거워서 싫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폼 나게 내 죄를 내가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내 잘난 것을 증명할 수 있는데 엎드리기만 하라고 하니까 예수가 미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만 믿는 신앙이 바로 이것이다. 현장에 간음한 여인을 바로 이 자리에 데리고 와도 우리 가운데 저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돌 던질 자 없다. 그럼에도 끝까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는 선행과 구제와 십일조에 열심이었고 저 죄 많은 세리와는 다르니 당연히 천국 갈 수 있고 가야 한다는 믿음이다. 착한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맞지 예수가 무슨 필요 있는가? 자기는 착할 수 있고 착하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을 방금 체험하고도 그렇게 고집한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올라가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겠다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어떠하셨는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이 땅에 내려 오셨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모두 죄 중에 있을 때 심지어 하나님을 찾을 꿈도 꾸지 않고 있으면서 그 분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셔서 구원을 베푸셨다. 그 은혜 앞에 완전히 무릎 꿇고 항복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래서 자기 일생을 그 분께 전부 내어 맡기고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바꾼 자가 신자다.
신자를 핍박하는 진짜 이유
세상은 다른 종교는 다 좋은 데 심지어 우상을 쫓고 귀신을 믿어도 아무 말하지 않아도 예수만 믿는다면 기를 쓰고 반대한다. 그 핍박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핍박한 이유와 똑 같다. 신자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제대로 흉내낼 자 아무도 없다.
신자 또한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과 똑 같았다. 너무나 어리석은 억지, 고집, 완악, 배교 속에 있다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간섭으로 참 하나님을 만나고 보고 만지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세계를 준비하며 주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사탄에게 미혹되어 예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집했던 그 우매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매일 성령의 충만을 구하면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셔서 평강과 자유와 안위가 넘치는 삶을 살게 해 주신다. 알기 쉽게 말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에 풍부한 자기들이 신나고 화끈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해도 씁슬하고 허무한 반면에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신자가 도리어 더 신나고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을 시샘 하여 핍박하는 것이다.
현재 세상이 돌아가는 풍조를 한 번 살펴 보라. 오직 성공과 형통과 실적과 쾌락과 안락만을 추구하는 가치체계로 완전히 바뀐 지 이미 오래다. 명시적인 죄가 별달리 없다. 간음은 둘째 치고 동성애도 백주 대낮에 떳떳하게 들어 내놓고 죄가 아니라고 큰 소리 친다.
지금 세대는 특별히 죄악이 많아졌거나 도덕이 타락한 정도가 아니다. 아예 도덕 자체가 실종되어버렸다. 아마도 동성애를 죄라고 정죄하는 자는 기독교인들 뿐이며 그래서 세상에서 이미 왕따 당하고 있다. 세상 전부가 반 성경적, 적(敵) 그리스도적인 종교적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어 그것과 반하는 기독교 신자는 사회 구성원의 역할조차 못하는 때가 지금 오고 있다. 초대 교회에서 겪은 것과 동일한 핍박이다.
신자는 그 모든 죄악에 대해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왕따 당해야 한다. 고리타분하다는 욕을 마땅히 들어야 하고 어느 누구도 상대 안 해줘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대신에 저들을 향해 그렇게 사는 것이 틀렸다, 그것은 죄악이며 사탄의 놀음에 놀아나고 있음을 깨달아라고 선포해야 한다. 비록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우리보다 수천 수만 수백만 배 많아도 된다. 그들이 수십억 명이고 우리는 단지 수십 명이라도 기죽을 이유가 없다. 아니 단 한명만 남아도 된다. 예수님은 혼자서 전세상을 감당하셨다. 주님 가셨던 바로 그 길을 똑 같이 걸어 가는 영광보다 더한 영광이 따로 어디 있겠는가?
참 신자인 표시
요즈음 테레비 광고를 보면 그 물건들 하나라도 없으면 마치 현대 사회에서 영원히 탈락하여 바보 병신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그럴 때 한 푼이라도 허튼 일에 절대 쓰지 않고 저축하여 나도 꼭 저것을 사서 남들 보란 듯이 폼 잡고 살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느냐, 아니면 그 현란한 광고를 애써 외면하고 눈을 돌려 불법 체류자인 까닭에 일 자리가 마땅찮아 렌트비도 제 때 못 내는 바로 옆 아파트의 이웃을 바라 보고 남들처럼 풍요롭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히 살 수 있는 직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인지 감사하느냐는 기로에 서게 된다. 그래서 여전히 한두 푼의 돈에 벌벌 떨지만 추석인데도 제대로 먹지 못할 그 집 아이들에게 케이크 한 상자라도 사주기 위해 그 푼 돈을 터느냐 마느냐 고민하는 것이 핍박 받는 것이다.
또 신자라면 자기 자녀를 세상에선 좀 뒤떨어지더라도 예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을 소망하며 거룩하고 신령한 삶을 사는 자로 양육하느냐, 아니면 예수는 적당히 믿는 둥 마는 둥 하되 일류 대학 나와 상류층으로 편하게 살게 하는 것이 좋은가 결정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아니 나면서부터 매일 그런 갈등을 겪지 않는 날이 없다. 바로 그것이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겪는 핍박이다.
만약 그것이 핍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자녀들을 예수는 적당히 믿고 세상에서 출세할 자로 키운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부모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믿음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믿음의 가계를 이어가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신의 당대에서 끊기게 한 죄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어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믿음의 본은 보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아니 신자로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낸 최소한의 소명인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지 못해 당신의 왕국이 더 뻗어나가게 하지 못한 책임을 따지실 것이다.
신자가 참 신자인 표시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세상에서 팝박을 받는 것뿐이다. 특별히 세상에서 쾌락과 죄악을 즐기는 자리에 “그 친구가 오면 재수가 없어”라고 하면서 초청에서 제외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나기만 하면 전도하느라 고리타분한 냄새 난다고 제외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친구만 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주눅이 들고 마음 속 깊이 찔리는 것이 생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 배척 당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신나게 놀 때는 피하고 싶은 대신에 세상에서 힘들 때는 의논하고 싶고 까닭 모르게 공허할 때는 함께 있고 싶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신자가 세상에서 충돌이 없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 이유는 아직 하나님만 믿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 믿는 신자인지 몰라 가만 놔두고 안 건드리기 때문이다. 아니면 예수님은 알기는 제대로 알고 믿는데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에 편한 길만 골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인은 되었을지 몰라도 아직 예수님의 제자나 신자는 되지 못한 것이다.
신자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그 속에선 절대 평강을 찾을 수 없음을 확신하는 자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이 언제 어디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에든지 있음을 당연히 여기며 당당하게 맞서는 자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가장 기뻐해야 한다. 자신이 주님 가신 길을 가고 있다면 그곳에 주님의 은혜와 권능 또한 함께 함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 그 길이 아니라면 주님이 같이 하지 않기에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음이 희석되어가고 하나님의 교회가 비대해져 가는 이세대에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왕따당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