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25) 10/31/04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소자가 누구인가?
성경 퀴즈를 하나 내겠다. 방금 읽은 본문에서 그것도 오픈 북 테스트로 하겠다. 42절에 나오는 소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관식이라 당황 된다면 객관식으로 물어보겠다. 예수님의 제자인가 불신자인가?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너무 건성으로 대충 훑어보고 치운다. 모든 말씀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윤리적 계명일 것이라는 바탕에서 해석해버린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경륜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관해 신자에게 직접 말씀해 놓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윤리적 계명을 언급한 것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것도 반드시 복음의 바탕 위에서 말씀 하셨다.
42절도 신자에게 주는 윤리적 계명이라는 인식으로 보면 신자가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나 권세가 비천한 자를 사랑으로 섬기면 하나님이 상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연 그런가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42절 후반부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너희'와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당연히 다른 사람이다. ‘너희’는 예수님 곁에서 직접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예수님의 설명 가운데 인용된 사람이다. 따라서 너희는 인류 최초로 전도 여행을 떠나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이고 그 사람은 전도함을 받는 불신자다.
그런데 그 둘 중 누가 상을 받는가? 제자가 아니고 불신자다. 불신자가 왜 상을 받는가? 42절 전반부로 돌아가면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했기 때문이다. 그럼 소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다. 지금 신자가 불신자를 대접한 것이 아니고 불신자가 신자를 대접한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흔히 쉽게 생각하듯이 신자가 불신자를 사랑으로 섬겼거나 전도를 열심히 해서 상을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신자가 잠시 그런 오해를 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성경을 앞뒤 문맥과 연결해서 읽지 않고 한절만 떼서 읽는 습관 때문이다. 본문은 처음부터 너희를 영접하는 자로 시작되어 끝까지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가 받을 복에 관한 설명이다. 또 42절에 물을 대접하되 ‘제자의 이름으로’ 한다는 표현이 있다 보니 전도하러 간 자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섬겼다고 오해 한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의 뜻이 불신자가 신자에게 물을 대접하는 적은 일에 충성하여 선행을 했기에 상 받는다는 의미와도 전혀 관계 없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단순히 물 대접한 것에 있지 않고 제자의 이름으로 했다는 데 있다. 성경 기록에는 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선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의 의미는 대단하다. 예수님도 그래서 당신을 생명수에 비교할 정도로 물 한 그릇의 대접은 결코 적은 의미가 아니다.
그래도 반드시 제자의 이름으로 대접해야 상을 받는다고 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는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100% 완전히 드러내며 그 사람과 완전히 동일시 되는 의미를 갖는다. 쉽게 말해 제자의 이름으로 대접한다는 것은 상대를 제자로 100% 인정하고 대접했다는 것이다.
41절에 선지자의 이름과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도 같은 뜻이다.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사람들 앞에 밝혀 드러내 보이는 자다. 의인은 그 하나님의 뜻을 말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실천하는 자다. 제자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자다. 이 모두 결국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40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요 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말하신 것이다.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할 소자에 불과한 제자를 소자로 보지 않고 제자의 이름으로 물을 대접했다는 것이다. 제자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불신자가 지난 삶을 완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였기에 당연히 영생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간단하고 쉬운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이 말씀 바로 앞 39절까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너희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면 반드시 핍박이 따르지만 끝까지 견디어내라고 하셨다. 이제 마지막 결론으로 그렇게 참으면 그 보상이 당연히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보다 불신자가 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다 아는 지당한 말씀으로 들리는가? 그럼 예수님이 왜 그렇게 당연한 말씀에 ‘결단코’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셨겠는가? 강조란 항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쉽게 잊어 버리는 일에 적용되는 법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소자를 잘못 알고 있다시피 절대 평범한 말씀이 아니다.
본문은 역으로 말하면 너희가 핍박을 무서워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들은 ‘결단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이 받을 상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저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를 파송 하기 직전에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유리”(마9:36)한다고 한탄하셨던 바로 그 세상 사람들이다.
신자가 받는 최고의 보상은 불신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신자가 복음 안에 거하고 복음을 전하면 이 땅에서 누릴 것이라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핍박과 한 영혼이 예수님께로 돌아 오는 것 둘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이 땅에선 끝까지 견디어내라고 하신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선 너희가 세상 앞에 나의 제자가 되어 서라고 하셨다. 의인이요 선지자임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인정하게 하라는 것이다. 신자를 보는 자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도록 해야 한다.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使臣)”(고후5:20)이라고 했다. 사신이란 대사(大使, ambassador)를 말한다. 한 나라의 외교관이 공적인 문서에 싸인하는 것 외에도 말과 행동 그 모든 것이 자기 나라와 국민의 뜻을 대표한다. 이전에는 사신을 죽이면 바로 전쟁이었다. 자기 나라의 왕을 죽인 것과 같이 취급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사를 추방하는 것은 두 나라 간의 국교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신자란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대사로 서야 한다. 모든 말,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도도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면 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한다든지 우리 교회 나오면 너무 재미있다든지 하는 충고와 권면이 아니다.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에 힘 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골3:17)해야 한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골3:23)한다. 사람들이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마5:16) 해야 한다.
혹시 선하게 살지 못해 주님의 대사가 되는 것에 도무지 자신이 안 서는가? 그래서 그것을 핑계 삼아 전도하지 않으려 하거나 뒤로 미루고 있는가?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죄나 결점이 100% 없을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모든 것을 양보하고 수고하여 생명까지 희생하며 전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연히 좋은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진정으로 주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열심으로 전도하면 그렇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전도에 분명히 하나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다. 신자가 여전히 세상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지며 불신자로부터 뒷구멍에서 호박씨 깐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신자라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신자라는 것이다.
어떤 사회사업가(Social Worker)가 빈민가에 있는 한 청년이 완전히 몸이 뒤틀린 채 지내는 것을 보았다. 몇 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병원비가 없어 상처만 겨우 아물게 한 후 사지가 불완전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관할 케이스가 아니지만 모든 절차와 비용을 알선하여 자기가 아는 정형외과 의사에 부탁해 수술하고 완치케 했다. 몇 달 후 기브스를 풀 때에 두 사람은 감사와 사랑의 포옹을 나누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인생에 다른 큰 일을 못 이룬다 해도 최소한 이 청년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만족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주위 사람들이 그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다들 그 도움에 감격해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선생이나 사회사업가나 의사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사실은 그 반대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 사회사업가는 “나는 분명히 그를 다시 걸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향해 걸어가야 할지를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전도란 단지 남의 어려움을 도와 섬기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말로 전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꼭 가야만 할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것도 신자가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면서 그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자가 서쪽으로 가면서 동쪽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착하게 살아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라는 것이다. 워싱턴의 주미 한국 대사관의 건물, 사택, 심지어 대사의 자동차도 미국 안의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다. 미국 법이 아니라 한국 법의 적용을 받는다. 미국 속의 한국인 셈이다.
신자도 비록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법과 원리에 적용 받지 않는 치외법권자다. 우리의 시민권은 영원한 천국에 있다. 하나님 왕국의 법에 적용 받으며 살아야 한다. 세상과 사람 앞에 자기 일생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붙잡혀 있고 그 분만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전도다.
천국 시민의 삶의 모습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다 설명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26절)고 하셨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진리와 실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을 움직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것이 절대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제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건강하고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신만만해도 자기가 진정으로 계획하고 이루고 싶은 것 자기 능력으로 제대로 이뤄낼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신자는 살아 계신 주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자기 일생을 맡기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또 세상은 신자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일 수 없다”(28절)고 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거들먹거리며 우리보다 앞서 나가는 것 같아도 기껏해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서 뿐이라는 것이다. 또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몸과 영혼을 함께 죽이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 뿐이다.
신자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는 한 그런 것들이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알고 열심히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이 짧고 한 번뿐인 고귀한 인생에서 절대적 가치와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신자는 대신에 진정으로 중요한 인생의 가장 큰 목표를 하늘의 보화에 두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의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이미 이땅에서부터 얻었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30절)고 한다. 불신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언제 나서 언제 죽는다는 것만 정해 놓으셨다.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어서나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은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신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각 자의 인생에 영광스러운 계획과 뜻을 태초부터 마련해 놓으셨다.
비록 신자의 눈에는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들어 이해가 안되고 자기도 모르게 의심과 짜증과 불평마저 새어 나올 수 있다. 그래도 신자는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 하심으로 그 계획을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고야 만다는 확신을 붙들 수 있다. 그 영광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고달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한 시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자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며”(32절) 사는 자다. 어떤 핍박과 시련 가운데도 당당하고 자신 있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불신자들 앞에 은혜 받았다고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이 매일을 그저 온유하고 담담하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 가운데 사는 것이다. 항상 주님과 교제하며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따로 없다.
이 땅의 헛된 것들을 더 좋은 것으로 더 많이 더 빨리 차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죄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니까 그 분으로부터 공급 받는 온전한 능력과 참 생명으로 인해 신자는 자연히 영육간에 거룩하고 의롭게 변한다. 신자는 불신자 앞에 언제나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로 서 있으면 된다. 신자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모시고 있는 주인의 거룩이 누가 봐도 우러나오도록 살면 되는 것이다.
신자가 신자 된 가장 큰 표시
신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가장 큰 표시는 무엇인가? 너무 거창하고 고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만약 예수를 믿지 아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서 있으면 된다.
하나님이 없이 혼자서는 아무리 선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해 보려 했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전부가 자기 자존심과 체면을 세우는 일 뿐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아도 방황, 번뇌, 고민, 갈등, 불안, 염려가 끊이지 않았다. 항상 어딘가 한 구석이 부족하고 갈급하며 허무해 ‘이것이 아닌데’,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 아닌데’라는 의심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악과 고통과 슬픔과 허물과 상처를 십자가에 내 대신 다 감당하고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죄의 노예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까닭 모를 두려움과 수치가 가시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보아도 모멸감, 자괴감, 열등감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은 미처 깨닫지도 못하지만 사탄의 조종아래 영이 미혹되어 종 노릇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왕창 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배경에 흑암의 세력이 있는 줄은 모르고 단지 재수와 팔자 타령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자녀가 되면 세상에서 즐기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세상의 시험과 유혹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요롭고 신나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그 모든 것이 일시적인 것이요 추악한 사기요 치사한 기만이요 사망으로 바로 이끌어 가는 궤휼 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없었던 인생에선 어떤 의미와 가치도 발견 못했다. 자신이 도대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죽을 때까지도 모른 채 세상 유행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로 휩쓸려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선 최소한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예수 믿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 된 것에 틀림 없다.
누구에게나 육신으로는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에 예외가 없다.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이니까 더더욱 하나님 뜻 안에서 정말 참 인간답게 제대로 한 번 살아야 한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인생이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고매한 인격으로 세상과 사람 앞에선 칭찬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의 온전한 평가는 절대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했을 리도 없고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를 하나님은 알지도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도의 막중한 사명
예수님이 불신자가 받을 상에 관해 ‘결단코’라는 수식어로 강조한 것은 전도가 얼마나 막중한 일인가 제자들에게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좌우되는 일이다. 사람이 살고 죽는가는 오직 예수 믿는 신자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신으로 서 있는가에 달렸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기로 예정한 당신의 백성들을 신자를 통해서만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서 건져 내신다.
혹시라도 전도가 그렇게나 중요한 것인가, 괜히 목사가 교회 부흥을 독려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신자가 신자 된 가장 큰 표시가 무엇이었는가? 예수 안 믿었더라면 정말 큰 일 날뻔했었고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전도란 전도자가 말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끝이 아니다. 기독교를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끝난다고 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가 제자의 이름으로 전도자를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저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도 똑 같이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뻔했다는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전도가 죽었던 사람을 되살려내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 의인의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불신자가 신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면 그에게도 그리스도의 향내가 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신자 자신은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면서도 남들은 살든지 죽든지 내가 알게 뭐냐라고 할 수는 없다.
1850년 1월 영국 뉴잉글랜드의 콜체스터 시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글렌 집사는 도저히 이런 날씨에 어떻게 교회를 가나 한창 망설이다 그래도 집사이므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완전 무장을 하고 6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마저 눈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열명 남짓한 교인과 새로 온 한 소년이 있었다. 예배는 봐야 하니까 사람들이 집사인 이글렌더러 인도하라고 했다. 기도와 찬양을 인도한 후 설교도 맡아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목사님 설교하던 것을 기억해 내어 진땀 흘리며 한 10분간 횡설수설하다가 설교를 마치려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의 감동으로 새로 나온 그 소년을 똑 바로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보시오, 예수를 보시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해서 소리치게 되었다. 그 때 소년에게도 똑 같이 성령의 감화가 임해 자기 인생을 주님께 바치는 회심이 일어났다. 그 소년은 커서 영국 최고의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가 되었다.
신자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헛된 것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예수가 빠진 그 어떤 사랑과 섬김도 가장 중요하고 크게 도와 준 것이 아니다. 억만 금을 갖다 주어도 예수가 빠진 채 도와주면 안 도와 준 것이나 다름 없다. 어쩌면 그 도움이 오히려 예수를 만나는 데 방해마저 될 수 있다. 당장에 급하고 아쉬운 일이 해결 났으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가난한 심령이 되어 나아갈 이유가 없어지게 한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으로 섬겨야 하고 도움을 받는 자도 제자의 이름으로 그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신자의 모든 말과 행동뿐 아니라 얼굴 표정에서 마저 예수님의 광채가 비춰 나와야 한다. 평소 때 신자가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고선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함께 전하지 않는 선행은 세상사람의 몫이며 신자가 할 일이 아니다.
베드로의 맹세는 지켜졌다.
예수님은 돌아 가실 때에 책 한 권, 번듯한 건물, 조직체로서 교회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글렌 집사 같이 평범한 사람들로 겨우 백 명 남짓의 제자를 남기신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단기간에 폭발적인 부흥을 이뤄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들 모두가 예수가 아니었다면 자기 인생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 했기 때문이었다.
수제자로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한 베드로는 자기의 열성, 도덕성, 인격, 의리, 전 존재를 걸고 스승의 목숨을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주겠다고 큰 소리치며 맹세했다. 그러나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 부인하는 처참한 실패로 결말 났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인간은 너무나 버러지 같고 연약하며 무지하고 무능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면서 스승을 부인했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인격적, 영적으로 완전한 파산을 겪었던 그를 주님이 되살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자 권능을 입고 하루에 삼천 명을 회심 시켰다. 그 후 남은 평생을 오직 복음을 전하며 살았고 결국 자기가 원했던 그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메어 달리는 죽음으로 순교했다.
감히 자기 같은 죄인이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다는 소원대로 되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맹세는 지켜진 셈이었다. 자기 스승이 잡혀가기 전에 생명을 걸고 주님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는 평생 박해를 무릅쓰고 선교하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으로 지켜졌다. 또 그는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겠다는 섣부른 맹세를 다시 했었지만 이번에는 주님이 그 맹세를 기꺼이 들어 주셨다.
인간 베드로가 자기의 전 인격을 걸고선 지킬 수 없었던 맹세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으로 변화된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들어 사용함으로 지킬 수 있게 해 주셨다. 온갖 실패와 좌절을 포함해 베드로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온전한 계획과 뜻 속에 있었던 것이다. 신자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것이 그 분의 제자가 된 자가 누리는 보상이다.
인간의 눈은 보라고 있고 귀는 들어라고 있고 발은 걸어라고 있다. 불신자는 눈으로 화려하고 풍요롭고 사치스런 것만 골라서 보고, 귀로는 스캔들과 험담과 돈 버는 정보만 들으며, 발로는 술집과 도박장과 유흥장만 골라 다니며 권력과 명예와 재물을 찾아 뛰어 다닌다.
신자의 경우는 다르다. 어거스틴이 “사람은 손이 있어 도와주고 발이 있어 찾아가며 눈이 있어 필요를 보고 귀가 있어 고통을 듣는다. 그것이 사람의 생김새다”라고 말했다. 눈은 감추인 진리와 영원한 실체를 보라고 있으며, 귀는 하나님의 음성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라고 있고, 손은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있으며, 발은 하나님이 이끄는 곳으로 가라고 있다. 특별히 신자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기 위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며 고생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찾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 해보자. 예수를 알고 믿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는가? 또 주위에 아직도 이전의 나처럼 예수를 모르는 인생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 보이는가? 둘 다 분명히 ‘예스’라면 당신은 불신자들로부터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 받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증거요 이 땅에서 그 분의 제자로서 받을 유일한 보상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보상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영혼이 구원받음이 어찌 값진 재물 보화와 비교가치가 허용될런지요.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빠져나와 주님의 밝은 빛을 보게될 때 그 감격은
과연 어두운 터널이 없었다면 그 빛의 밝음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
추구하는 빛의 밝음과 거룩과 의로서 주시는 빛의 밝기의 차이를
과연 비교할 수나 있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 속에서 감사의 눈물이
넘쳐나게 하시는 글이 너무도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