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27) 11/14/04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러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侵擄)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참으로 순진한 신자의 생각
간혹 신자들 중에는 예수님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자가 더러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동참하고 산상수훈의 말씀도 육성으로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고 너무나 감격스러웠을 것이다라고 상상한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싶다는 그 심정은 이해가 가나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하다.
당시에 태어났다면 일반적인 유대인의 삶을 살았거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거나 두 가지 가능성 뿐이다. 혹시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으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또 평범한 유대인이었다 해도 틀림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중 속의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 해도 최고로 잘되어도 자기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비겁한 베드로 밖에 더 되었겠는가?
인간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만큼 절대로 세지도 의롭지도 않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너무나 어리석고 완악한 버러지 같은 존재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도 평가도 못하는 착각과 공상 속에 헤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끝까지 착각과 교만 속에 허무하게 살다 일생을 마칠 뿐이다.
예수님도 본문 11절에서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대신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자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극히 작은 자에 불과한 우리가 천국 가면 요한 보다 높은 상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틀림 없이 실패하고 천국도 못 갔을 텐데 지금 이 시대에 이 모양으로 있기에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천국에서도 말할 수 없이 큰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구약시대 최후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배교하여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한탄하셨다.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실제로 그 후 450년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일절 끊으셨다. 말라기 이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뜻은 언제나 그렇듯이 심판과 재앙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이었다. 그래서 같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하셨다. 또 예수님이 본문 10절에 인용한 대로 메시야가 오시기 직전에 그 길을 예비하는 메신저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는데 요한이 바로 그였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3:1)
그래서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선포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장래 어느 때에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는 했지만 가까웠다는 표현을 쓴 이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아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마3:10)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지금 바로 맺으라고 촉구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마3:12) 메시야의 구원과 심판이 벌써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다른 모든 구약의 선지자는 메시야을 예언만 했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소개를 했다. 미국 토크 쇼에 “Sidekick”이라는 직책을 맡는 자가 있다. 자니 카슨이 심야 토크 쇼로 최고 인기를 누릴 때에 맥마흔이 그에 해당되는데, 가장 주된 일이 쇼가 시작되기 전에 간단한 멘트를 한 후 길게 빼는 억양으로 “Here is Johnny!”하고 소개하는 것이다. 맥마흔은 그것 하나로 대단한 부와 명예를 누렸다. 자니 카슨하면 맥마흔이 생각나고 맥마흔을 보면 자니 카슨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요한은 예수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는 예수님과 동시대에 태어나 주님 면전에서 “Here is the Messiah!”라고 외친 것이다.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래서 주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낳은 자’란 욥기 14:1에 나오는 표현으로 죄악과 고통 중에 살 수 밖에 없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요한은 인간 중에 최고로 큰 자라는 뜻인데 그 표현에 걸맞게 그는 헤롯왕의 잘못을 꾸짖다 감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하나님의 일로 순교한 셈이다.
그런 요한에 비하면 우리는 어떠한가? 일주일에 겨우 주일 날 하루 교회에서나 하나님을 찾는다. 내 코가 석자라 신앙으로 내 문제조차 해결할까 말까다. 전도 같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기는커녕 신자답게 살지도 못한다. 심심찮게 세상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진다. 예수님이 당신의 12제자를 두고 요한보다 크다고 했다면 말이 되지만 도저히 우리가 어떻게 요한보다 천국에서 더 클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약 성도와 구약 성도
물론 그 이유는 요한이 비록 예수님의 친척으로 동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사역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이나 천국 복음 강화를 듣지 못했고 십자가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비록 당시 현장에는 없었지만 성경을 통해 주님의 출생, 성장, 사역, 말씀을 다 듣고 볼 수 있다. 십자가의 대속, 부활, 승천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배운다. 주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어떻게 실현했는지 나아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인류 역사의 진행과 종말에 관해 예언한 것까지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요한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지도 보지도 못한 구약의 마지막 성도였다. 우리는 메시야를 알고 소유했다. 매일 그 분과 동행하며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신약 성도이기에 더 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이 단순하게 시대적으로 구분해 신약 성도면 모두 요한보다 크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만약 그렇다면 노아, 에녹,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이사야 같은 믿음의 위인들도 우리보다 작다는 말인가? 엄격히 따지자면 요한도 그들과 동격 내지는 그 이상이지 절대 부족하지 않지 않는가?
그런데도 천국 갈 자신마저 오락가락한데 감히 요한보다 커다니 괜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지 우리를 격려하려고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요한 보다 더 큰 존재다. 천국에서만 큰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그럴 수 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꼭 하나만이라도 제발 지켜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무엇인지 아는가?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경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앞뒤 문맥으로 그 뜻을 따져보라는 것이다. 언젠가 이야기 한대로 작은 동그라미로 구분 된 한 문단 안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본문도 마찬가지로 11:2-19까지 연결해 읽으셔야 한다.
본문은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되”(7절)로 시작된다.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자 주님이 답변해 주셨던 내용을 보충 설명한 것이라는 뜻이다. 11절 한 절만을 묵상해선 아무리 해도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요한은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야인 줄 알아보지 못할 때에 선지자의 권능으로 그 사실을 선포했다. 그런데도 다시 주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절대 오해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본문이다.
즉 구약에서 메시야 뿐 아니라 그 앞에 오는 선구자에 대해서도 예언 되어 있는데 요한이 바로 그였고 그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었다. “요한은 천국 간다. 그러나 천국 가선 너희보다 오히려 작은 자가 된다. 너희가 나의 직접적인 제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가 크고 그가 작은 이유는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곳이고 침노하는 자가 빼앗기 때문(12절)”이라는 것이다.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럼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우선 인간이 침노해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착하게 살고 율법을 준행하며 구제와 하나님 일에 열심을 내어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침노 당한다는 수동태 표현을 사용했다. 천국은 항상 영원한 상태로 변함 없이 그대로 있는 데 반해 천국 가도록 예정되고 선택된 자가 침노하는 만큼 천국의 은혜와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요한은 천국을 적게 침노했기 때문에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고 우리는 천국을 많이 침노했기에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천국을 침노하려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에 개근해야 하고 구제와 선행과 전도에 열심을 내야 하고 선교에 적극 후원하거나 동참해야 한다. 심지어 헌금도 은행에서 방금 찾은 새 돈으로 하고 예배 때 맨 앞 줄에 앉아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 기독교 제국들이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미개국을 침략하고 수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옹호하고 변론하는데 까지 이 구절이 동원 되었다.
만약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 라면 요한의 경우는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450년간의 침묵을 깨고 선지자로 나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나사렛 목수 요셉의 장남에 불과한 한 이름 없는 청년을 그것도 요즘으로 치면 정규 신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자를 메시야라고 선포했다. 서로 인척 관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시쳇말로 고스톱 짜고 치나? 하고 뒤에서 수근거릴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했다. 당시의 최고 권력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세례를 받으려 나오자 독사의 자식들아 임박한 진노를 피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야단쳤다. 헤롯 왕에게까지 회개를 촉구하다 생명까지 잃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으로는 예수님의 표현대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만한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가 천국을 적게 침노했다고 평가하셨다.
죠앤 새틀러라는 선교사가 한 미개인 마을에서 사역할 때의 일이다. 무당 할아버지가 악령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바쳤다. 그런데 6살도 채 안된 남자 아이가 돼지 귀를 잘라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악령이 무당에게 돼지 귀를 돌려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무당이 아무리 요구해도 아이가 돌려 줄 생각을 안 했다. 어른 같으면 벌써 자기 마을 수호신의 저주가 무서워서라도 둘려 주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제물의 귀를 자를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악령의 저주를 받아 갑자기 열이 나며 의식을 잃고 아프기 시작했다. 그 부모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무당에게 잘못 보였으니 선교사에게 기도 받으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조앤에게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동료 선교사들과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낫게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했다. 그러나 날이 새도록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할 수 없이 아이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며칠 만에 그 아이는 죽어버렸다.
선교사인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뭔가 잘못하신 것 아닙니까? 왜 아무 죄 없는 이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이제 누가 하나님 믿으려 하겠습니까? 무당에게 패배한 하나님을 말입니다” 온갖 의문이 꼬리를 물고 사로잡자 그녀는 완전히 실망에 빠졌다.
그런데 일주일 후 놀랍게도 그 아이의 부모와 식구들과 많은 동네 주민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나왔다. 평신도 몇 명이 그 집을 찾아가 위로하고 기도해 준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또 무당의 저주를 받을까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데 용감하게 신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찾아가 도와준 것이다. 그 부모로선 악령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장난한 것에 화가나 죽여 버린 데 반해 예수 믿는 자들은 그런 악령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와 사랑으로 섬겨주는 것을 보고 어느 쪽이 참 신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신자들이 기도해 줄 때 성령이 역사하여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준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판단하자면 악령의 저주를 받아 이름 모를 병에 걸렸으면 철야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고 또 그러면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 천국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기적적으로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다. 죠앤 선교사는 밤새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실망에 빠졌다. 그녀로선 천국을 침노했는지 모르지만 천국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천국을 침노한 것이 아니었다.
천국을 침노하는 것의 참 의미
본문을 앞뒤 문맥을 잘 따져 해석해 보면 6절과 12절은 평행 구절로서 예수님이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의 잘못된 질문을 두고 실족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므로 바로 그것 때문에 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또 실족하지 않으면 복이 있다고 했는데 천국을 더 차지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실족하지 않는 것이 바로 천국을 침노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지난 주에 배운 것인데 기억하고 있는가? 단순히 도덕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요한이 가졌던 의심의 경로를 통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했다. 그러나 유대나라 전체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고 했다. 주위 여건과 환경을 바꿔주면 잘 믿겠다는 인간 모두의 생각을 대변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른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다.
죠앤 선교사도 “하나님 뭔가 잘못되었지 않습니까? 무당을 대적 하는 바로 이런 때에 신유의 기적으로 응답해 주셔야 이 부족들이 당장에 당신께 항복할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해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하나님이 자기의 예상, 기대, 뜻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의아해 했다. 둘 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혹시라도 오해할까 분명하게 해둘 것이 있다. 죠앤 선교사가 철야 하며 기도할 때에 자신의 개인적 욕심, 체면, 위신, 자존심, 죄악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간구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기도했다. 그 일을 통해 마을 전체를 복음화 시키길 간절히 소원했다. 요한도 유대 땅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소원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뜻도 그들의 소원과 일치했다. 단지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셨던 시기와 방법이 그들 요구대로 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만약 죠앤 선교사가 철야 기도했을 때에 아이가 바로 살아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 소원대로 당장에 전 주민이 하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가운데 그녀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해서 믿은 하나님은 그 미개인들에게는 단지 능력이 더 큰 또 하나의 신에 불과하다. 두려움의 대상이자 우상이다. 고난과 죄악 중에 있는 인간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만사를 자기 기분대로 좌지우지하는 심술 궂은 절대자로 인식되어질 것이다. 구원보다는 심판에 치우친 반쪽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은 한 어린 아이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당신께 완전히 항복하고 진정으로 신뢰하여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하며 전 인생을 바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초월로 간섭하든,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방법으로 인도하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는 듯이 보이던 간에 언제나 완전하신 분이다. 모든 상황과 여건을 다 아신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꿰뚫고 계신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최고로 완벽한 길로 당신의 자녀를 이끌고 계신다. 기적과 초월의 모습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선이자 한치의 굽어짐이 없는 공평이자 무한한 사랑이다.
요한은 유다 왕국을 구원하고 죠앤 선교사는 아이를 살려 마을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너무 확신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졌으므로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크게 부흥해야 하고, 성전도 근사하게 건축해야 하고, 매일 새벽 기도도 뜨겁게 드려야 하고, 금요일 마다 철야 기도하고, 교회마다 선교사를 수십 명씩 해외로 파송 해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그래서 신자가 강한 믿음과 뜨거운 열심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당연히 따라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법으로 발휘 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동원하면 천국을 침노한 것이 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한 요한을 두고 실족하지 말라고 하셨고 천국을 침노하지 못했기에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생각과 전혀 반대다. 교회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180도 거꾸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당신이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 속에 있는 인간적, 세상적, 물질적 헛된 기대, 예상, 계획, 고집 등을 잘라내어 버리는 것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것은 간단하다. 예수님에 대해 실족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가 소원하여 기도하고 있는 일과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신하는 모든 일들을 이뤄내는 때와 방법을 하나님께 완전히 일임하면 된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미리 결정하여 능력만 구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어떤 일이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겸손하게 물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 뜻을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고 옳고 실수가 없으며 영원토록 신실하다는 것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 분의 하시는 어떤 일에도 가식, 거짓, 사기, 모순, 왜곡, 강제 등이 전혀 없고 또 일시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오직 신자를 최고로 유익하게 하기 위해 거룩과 의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면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채워 주시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그 분의 사랑, 은혜, 자비, 권능, 긍휼, 위로 안에 속하기를 소망하며 자기 자신의 모든 삶을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내어 맡기는 것이 바로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다.
천국을 마음껏 소유하라.
죠앤 선교사도 천국을 침노할 수 있었다. 철야 기도했지만 아이를 낫게 해주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실수하셨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실망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일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이루실 신비하고 영원한 계획을 이미 마련해 놓고 계시기에 당신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어야 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부모를 찾아가 위로하고 기도해 주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여전히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아이의 부모가 회심하고 주위 이웃들도 눈물로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임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현장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로부터 불의 혀 같이 강림하신 성령으로 인해 기도 모임에 참여한 자들의 영혼이 주님의 사랑과 위로로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구태여 아무 말이 필요 없고 찬양과 기도와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바라만 보아도 영과 영으로 하나님이 임재해 있음을 느꼈을 것이고 이심전심으로 주님 홀로 영광과 경배와 찬양을 받아 합당하다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천국이 이 땅의 한 미개인 마을에 아들을 잃어 비통과 실망에 잠겨 있는 이름 없는 가정에 내려 온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난하고 애통한 심령으로 엎드린 자들로 인해 천국은 침노 당한 것이다.
세상적, 인간적, 개인적 이해 타산 없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그 분은 반드시 충만한 모습으로 임재해 주신다. 진정으로 그 분의 위로와 사랑을 소망하면 그 분의 영으로 우리의 영을 뜨겁게 채워주신다. 그렇다고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와 환난이 뚝딱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분에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정말 추하고 죄 많고 게으른 나 같은 자도 그 분이 자신의 생명을 주실 만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게 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품에 참여 시켜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신자는 그 일에 자신을 완전히 던져 넣어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크게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라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라는 것이 아니다. 철야 기도해야 하고, 성경 공부 모임에 개근해야 하며, 모든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 서야 한다. 흔히 말하는 뜻의 적극적인 침노를 해야 한다. 죠앤 선교사가 먼저 적극적으로 철야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의 부모가 회심하는 역사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찾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진정과 열심으로 온 힘을 다해 주님의 위로, 능력, 인도, 보호를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길 갈망해야 한다. 또 역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그 은혜를 실제 체험해 본 자만이 그분이 주시는 자유와 평강과 위로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갈수록 더욱 주님을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신자는 소원하는 것, 계획하는 것,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때와 방법만은 절대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기도한 후 소망 가운데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당장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는 반드시 당신만의 때와 방법으로 그 능력을 아낌 없이 당신께서 동원시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다 잃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족하고 세상을 다 가져도 예수님이 빠졌다면 모든 것에 부족하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난 자들이 누구였는가? 세리, 죄인, 소경, 문둥병자, 창녀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만이 아니었다. 세리는 아주 부자였다. 죄인도 부정으로 돈을 벌어 궁핍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예 정죄된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겠는가? 돈 벌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의 저주 받은 운명이 새롭게 되는 것이었다. 자기들 같은 존재도 하나님에게 용납되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죽기 전에 갖고 싶었다. 하나님 당신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야말로 천국을 침노한 것이며 또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로 천국을 침노케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의인과 부자를 만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고 병자를 치유하러 오신 것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고통이 심했던 욥이 어떻게 천국을 차지했는가? 기도와 예배와 선행과 구제와 전도였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천지의 주재이신 전능자 앞에 피조물인 주제에 감히 한 마디 변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후였다. 당신은 절대로 선하시며 옳으시며 완전하시다고 진심으로 항복한 후였다.
여러분의 믿음이 스스로 보아도 시원치 않아도 좋다. 하나님의 일에 별로 열심을 내지 않아도 좋다. 세상의 일로 고민해도 좋다. 간혹 시험과 유혹에 넘어져 죄를 지어도 괜찮다. 정말 세상과 하나님 양 쪽 앞에서 다 최고로 작은 자가 되어 있어도 된다. 그래도 천국에선 최고로 큰 자가 될 수 있다. 단 한가지만 확실하다면 말이다.
아무리 사방 팔방이 다 막혀 도저히 우리 생각에 탈출구가 안 보이고 그래서 주님마저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고 느껴질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은 숨겨져 있음에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나의 전 존재, 전 인격, 전 일생에 그 영광이 드러나길 소망하며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죽어 천국 가기 전이라도 이 땅에서부터 틀림 없이 하나님의 참으로 크고 신비한 은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될 것이다.
아멘! 아멘!!!!
들여다 볼 수록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자아. 살아 꿈틀거리다 못해 나를 뚫고 튀어 나올 듯 기승을 부리는 자아...
자기 고집과 기대로 똘똘 뭉쳐져서 도무지 풀어 헤칠 수 없는 자아 때문에 이 썩어 뭉개진 자아 때문에....
십자가 아래 목 놓아 울 수 밖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