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28) 11/28/04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순신 장군은 죽어 천국 갔는가?
신자가 전도를 하다 보면 불신자로부터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의 하나로 “이순신 장군은 죽어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를 들 수 있다. 그 답은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지옥 갔을 확률이 거의 100%다”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믿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장 “이순신 장군이 살았을 때에 예수님은 한국에 소개도 되기 전이었는데 장군으로선 알래야 알 수도 없었지 않느냐? 장군의 잘못도 아닌데 단지 예수 안 믿었다고 그렇게 훌륭한 분을 지옥에 보내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도 없다”고 반발한다.
기독교적으로 이런 대답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순전히 가정해서 한 번 따져 보자. 만약 “그 분은 나라를 구하는 큰 업적을 세웠고 원균의 모함을 받아 귀향을 가면서도 예수님처럼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으니 천국 갔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치면 그들이 뭐라고 할 것 같은가? “예수 안 믿어도 천국 갈 수 있네. 나도 큰 죄를 지은 적도 별로 없는데 나더러 교회 나오라 예수 믿으라 하지 말게”라고 말을 돌릴 것이 틀림 없다. 결국 불신자 시절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고 하나님을 믿어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래도 안 믿고 저래도 안 믿기는 마찬가지다.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겠다는 심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미 이천년 전에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비유란 객관적인 진리나 사실을 청중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어떤 현상에 비추어 알기 쉽게 풀이하는 문학적 수사법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초점은 18, 19절인데 그것을 16,17절에서 아이들이 장터에서 하는 놀이에 비추어 설명했다.
아이들은 소꿉 장난할 때에 아빠, 엄마, 아이들의 역할을 분담하고 또 인형으로 결혼식 장면을 흉내내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아이들도 비슷한 놀이를 했던 것 같다. 피리 불고 춤을 춘다는 것은 결혼식을 의미한다. 먼저 몇 아이가 피리 부는 시늉을 할 테니 너희는 춤을 추라고 했는데도 꼼짝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식 놀이가 재미 없나 보다 하고 우리가 ‘애고 애고’ 곡을 할 테니 너희는 가슴을 쳐서 장례식 놀이를 하자 했는데도 시큰둥하게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이 꼭 이런 아이들과 같다는 것이다.
먼저 요한은 세상의 재물, 권력, 명예 그 전부를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죄를 회개하라 곧 오실 메시야의 심판과 구원에 대비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 꿀만 먹고 사는 기이한 행태를 보고는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수근거렸다. 말하자면 장례식 놀이를 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던 셈이다. 오늘날에도 신자가 불신자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시지요”라고 전도하면, “예수쟁이들은 밥도 안 먹나? 다른 일은 안 하고 전도만 하고 다니게. 다른 종교를 믿는다 해도 거머리 같이 들러 붙으니 꼭 광신도들 같아”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죄인과 세리들을 친구로 삼아 먹고 마시며 교제를 하니까 먹기를 탐하는 자 즉 식도락가에다 포도주를 즐기는 자 즉 원어적 의미로 술꾼이라고 비난했다. 명색이 제자들을 둔 종교적 지도자라면 엄숙하고 경건하게 말씀으로 가르쳐야지 사람 같지 않은 자들과 시시덕거리며 놀러 다닌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예수 믿는 신자들은 모였다 하면 박수 치고 눈물 콧물 흘려가며 울부짖고 기도하는 꼴이 너무 경망스럽다고 비아냥거린다. “저렇게 방정맞게 굴면 하나님도 귀를 막고 눈을 감을 거야. 차라리 안 믿고 집에서 조용히 반성하며 착하게 사는 것이 백번 낫겠다”고 한다.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초대해도 아무도 춤을 추지 않는 꼴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대’라고 하면서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지만 오늘 날도 똑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납득이 가도록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도 소 귀에 경읽기다. 조금이라도 마음 문을 열어보려고 현실적으로 어렵고 궂은 일을 도와주고 해결해 주어도 반응이 없다. 심지어 돈을 빌려 주면서까지 전도해도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한이 있어도 교회는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기들 머리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롬2:5) 있는 줄은 모른다.
신은 틀림 없이 악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저들이 신자인 우리보다 무식하거나, 머리가 둔하거나, 도덕적으로 더 부패했거나, 영적으로 덜 신령해서가 아니다. 우리 또한 예수 밖에 있었을 때는 똑 같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 외면, 거부, 배반했고 저주까지 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연인이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완악한 이유는 인간이라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딜레마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딜레마란 인간이 어떤 때는 아주 고상하고 거룩하며 선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짐승보다 더 야만적, 본능적, 탐욕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남을 희생적으로 섬기며 의로운 일에 과감하게 앞장 서기도 하지만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하고 비겁하고 치사하며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다.
일본 유학 중에 지하철에 떨어진 일본 아이를 뛰어들어 구해내고 대신 죽은 한국 학생이 있는가 하면, 20명이 넘는 사람을 토막 살인하여 그 인육을 먹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청년도 있다. 정말 인간은 야누스처럼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밖에서 일어나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서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번갈아 일어나는 바로 나의 일이기 때문에 더 괴롭다.
가난하고 힘든 이웃을 도와 주어 마음이 뿌듯해졌다 싶었는데 그 기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마다 살을 맞대고 사는 아내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잔 소리 한두 마디 한 것으로도 당장 칼을 들고 찔러 죽이고 싶도록 미워진다. 이웃을 도와 주었던 그 일도 지나고 보면 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증명을 하기 위한 교만이었고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 한 일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그 사람이 불쌍하고 사랑해서 한 일이 아닌 것이 그 사람의 상황은 계속 나빠지고 나의 형편이 점점 여유가 있어지는데도 단 한 번 도와준 것으로 그쳐 버린다. 대신에 마음 속으로는 지지리도 못난 사람 같으니 그 정도 도와 주었으면 좀 정신차려야지라는 비방부터 먼저 튀어 나오고 길에서 다시 마주칠까 두렵다.
최소한의 정상적인 이성이 있는 사람이 인간과 인생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한 번이라도 고민하고 갈등 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이 비록 비유의 소재로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들었지만 그 의미는 참으로 심장하다. 결혼식은 인간사 중에서 가장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장례식은 완전히 반대다. 인간사 중에서 가장 슬프고 힘들며 불행한 일이다. 각각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슬픔을 상징한다. 그런데도 그 둘에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는 뜻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인간의 진정한 행 불행을 좌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으로도 인간을 본질적으로 기쁘게 할 수 없으며 그 반대로 세상에서 겪는 최대의 슬픔보다 더 근본적인 절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도대체 천사와 악마 중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무슨 일을 해도 자기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고 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란서의 낭만파 시인 보들레르는 이렇게까지 읊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그는 틀림 없이 악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히 천사로 만들든지 아니면 완전한 악마로 만들었어야지 왜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느냐는 불평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밀어 넣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꼴을 따로 앉아 즐기고 있으니 틀림 없이 악마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의미에선 맞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사에 결혼식이 있었는가 하면 곧 이어 장례식을 겪게 만드는 하나님이다. 고통이 끝이 없고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완전한 충족이 이뤄지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할 방향과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렇게 인간을 고난 가운데서 헤맬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신 그런 하나님이라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는 불만이 절로 나온다.
불신자를 복음의 진리를 상세하게 풀어 가며 전도해 보면 논리적으로 수긍할 듯 하다가도 마지막 결론으로 그들이 내 뱉는 한 마디가 무엇인가? “예수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차라리 내 주먹을 믿고 말지.”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제대로 잘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전도 내내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고 있은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지옥에 보내는 불공평한 하나님이라면 안 믿겠다”고 반발하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이다.
가만히 키스만 하시는 예수님
러시아의 문호 토스트에프스키가 지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형제 중에 이반은 완전한 무신론자이고 알료사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하루는 이반이 알료사의 기독교 신앙을 조롱할 목적으로 예수님이 종교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는 내용으로 장편의 시를 지어 들려 주었다.
재판관이 예수에게 인간이 반역할 줄을 알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해 타락하자 낙원에서 쫓아내 세상에서 죄악과 고통 중에 있도록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재판장의 논고를 다 듣고 난 예수님은 가만히 일어나 재판장에게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스하는 것으로 그 시는 끝났다.
이반이 그런 시를 지은 뜻은 말하자면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악마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게 만들었고 하나님 독단으로 인간을 이 땅에서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일을 번갈아 겪게 한다는 것이다. 그 시를 다 듣고 난 알료사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그도 가만히 일어나 이반에게 다가가 아무 말 않고 키스만 했다.
예수님이 도수장에 끌려 가는 양처럼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복음의 핵심이자 전부다. 신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것,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사랑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대신해 죽이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요일4:8,9)
그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인치시고 그 분만이 갖는 권능과 은총으로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당신이 계획 해 놓으신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가 신자다. 그 분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은 자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당신의 사랑 안에 완전히 녹아져 내리도록 만드셨고 또 그 자녀로 하여금 그런 사랑 안에만 거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가운데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악마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신자가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 배워서 믿기로 결단한 것이 아니다. 지금 제가 설교 하는 것도 여러분더러 믿기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 스스로 체험했고 절실히 느낀 것이다. 하나님이 갑자기 죽을 병에서 고쳐 주고 대박 같은 형통을 주어 그 사랑을 확인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매일 겪는 일상사 중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가?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무엇인가? 돈이 없어 끼니를 잊지 못하는 것, 중병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출세하지 못해 권력도 명예도 손에 쥐어 보지 못하는 것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외로운 것이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 주거나 찾아 주지 않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다. 감옥에서도 가장 심한 벌은 독방에 가두는 것이다. 말기 암 환자가 모르핀 없이는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병상에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것은 더 견디기 힘들다.
외로운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면 그 반대도 성립한다. 외롭지 않는 것, 함께 있는 것, 그래서 서로 진정으로 신뢰하고 참된 사랑으로 섬기는 것, 인격과 인격이 서로 숨길 것 하나 없이 성령 안에서 완전히 하나된 관계를 이루는 것만이 인간의 최고 행복이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다.
언뜻 보면 인간은 분명히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이 공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남과 상처를 주고 받으며 불화가 생긴 후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야단친 적 없어도 스스로 괴로워 하게 되며, 그 반대로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으로 섬기고 나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속에서부터 넘친다. 교육과 문화와 관습과 제도와 무관하며 내 의지나 생각과도 전혀 상관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미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처음부터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인간을 지은 분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렇게 지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불신자들이 복음을 외면하는 이유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은 외면하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자보다 더 악하고 욕심이 많아서인가? 그렇지 않다. 남들 앞에 그저 내가 내라는 것을 번듯하게 증명해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그 속을 가만히 파고들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진정한 인정과 칭찬과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이 자기 전 존재와 인생을 걸고 사랑하고 섬길만한 대상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 이민 오면 한국에선 전혀 불신자였던 사람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요일 하루라도 한국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일주일 내내 일터에서 짧은 영어로 미국사람과 만나 말도 안 통하고 감정과 문화와 사고방식이 달라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좀더 진실되고 서로 속 마음까지 털어 놓고 격의 없이 사귈 수 있는 그런 관계가 그립다는 뜻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남의 인정과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안에 악마로 떨어지는 법은 절대 없다. 반대로 남의 인정과 칭찬과 사랑을 받지 않고서 천사로 올라가는 법도 없다. 간단하게 부부 관계만 예를 들어도 남편이 아내를 인정해 주고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면 싸울 일이 없다. 남녀간의 육신적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서로 완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존중하면 둘 다 천사가 된다.
인간이 때로는 짐승보다 더 야만적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이 공존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 동물은 본능에만 자동으로 따르게 되어 있어 먹고 마실 것을 절대 뛰어 넘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다르다.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초월한 영역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으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아무 상관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크리스찬으로서 개인적인 신앙 수준이 어떠한지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처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2000년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한 이 연설만은 진리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다. 내가 봤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평강을 믿는다. 내가 느껴봤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 내가 필요로 해 봤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가?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 최고의 학벌을 거쳐 스스로 노력하여 큰 부자가 된 자다. 세상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성공한 자였다. 알다시피 아내도 최고로 얻었고 단 하나 남에게 꿀릴 것 없었던 자였는데 그런 성공을 하고도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자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단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그도 인간으로서 누구나 겪는 딜레마를 처절하게 통과해 봤다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가 번갈아 나타나는 인간의 양면성을 다 경험하면서 과연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세상에선 무엇을 해도 참 평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서하시고 아무 말 없이 그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강을 맛보았고 자신의 자신 된 정체성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지닌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신자가 된 후에도 그런 본성은 분명히 남아 있다. 또 이 땅은 죄악으로 부패되어 있고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미혹하고 있으며 죄의 삯인 사망의 올무 아래 묶여 있다. 나아가 모든 인간이 불완전하고 갈급하며 연약하고 무능하다. 그런 사이에선 진정한 사랑과 완전한 신뢰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정말 참 인간답게 살려고 발버둥치고 자기 전 생명을 걸고 갈등 하다 보면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그곳이 어디인가? 완전한 절망에 이르러 자포자기 하는 인생인가? 아니다. 정 반대다. 완전한 절망에서 오히려 인간을 완전한 소망으로 끌어 올리는 곳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앞이다. 사람과 세상에선 절대 충족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곳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는 네가 정말 메시야이거든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야유했다. 그 야유는 사실은 왜 메시야이면서도 우리를 몽땅 이런 딜레마에 빠트려 놓고 모른 척 하는가라는 불평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인간 속에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다 가지게 하고 이런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십니까?”라고 따진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도 않으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23:34)고 하시면서 저들의 용서를 성부 하나님께 빌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소설 속에서 알료사가 자기 신앙을 조롱하는 이반에게 가서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키스한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려 오셨다. 모든 인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 앞에 다다른 자에게 단지 키스만 하신다.
그분의 침묵 속에는 바로 이런 말씀이 담겨 있다. “나는 인간을 천사와 악마를 다 가진 야누스로 만들지 않았다. 너희를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아니 이 우주 가운데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너희다. 가장 고귀하며 완전한 존재로 만들었다. 또 너희를 결혼식과 장례식을 번갈아 치르는 딜레마에 밀어 넣어 놓고 모른 척 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지은 아버지요 하나님이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천하 만물보다 더 사랑한다. 내가 모든 피를 흘리고 모든 살이 찢기며 십자가에 죽어 보이지 않았느냐? 이것 이상 어떻게 더 내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느냐? 너희에게 내 진심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외에 더 이상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인간끼리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의심과 회의와 논리적 합리성의 결핍도 오직 십자가만이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파하며 누구나 겪는 인간 본연의 딜레마를 풀어준다.
그럼에도 불신자는 아직도 먹고 마시는 것이 해결되어 여유가 생겨야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이 그런 여유를 마련해 주지 않으니 믿을 필요가 없다고 거부하고 배반한다. 아직도 사람과 세상 속에서 자기의 충족을 구하려 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딜레마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이미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음을 모르고 스스로 사랑을 쟁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자의 평생이 괴롭고 힘들 수 밖에 없다.
신자도 예수 이전에는 저들과 똑 같은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은 오직 서로 먼저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해야 비로소 영육간에 평강과 위로가 넘쳐 충족하게 되지 영육간에 충족해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헛된 곳에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참 사랑을 찾고 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잘나고 똑똑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사람으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와 비난을 뒤집어 쓰고 있었을 뿐이다. 참 사랑의 결핍 때문에 목마르고 인생의 갈 바를 몰라 헤매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고백처럼 세상에선 도저히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참된 용서를 간절히 필요로 했었을 바로 그 때에 그 분이 사랑으로 먼저 찾아와 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신자가 된 후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인정과 칭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때때로 솟구치고 야누스의 얼굴로 되돌아 갈 수도 있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가 다시 세상에서 어떤 큰 고통과 환난을 겪어도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가만히 두고 보신다. 아무 말 없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입 맞추시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다시 골고다 언덕으로 되돌아 갈 것이며 그 길 만이 인간이 누리는 참 행복임을 그 분은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현재 몸으로 겪고 있고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 즉 결혼식만 계속되지 않고 장례식이 자꾸 겹쳐져 세상과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 회의가 드는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 보라. 인간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인생의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다. 나아가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 보라. 하나님의 사랑 앞에는 인생의 어떤 갈등과 회의도 정말 아무짝에도 소용 없음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