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2004
영국이 나치에 점령당하지 않은 이유
나치 독일이 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을 점령하지 못한 이유는 도버 해협이 가로막고 있는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당시는 아직 미사일이 발명되기 전이라 영국에 상륙하려면 폭격기가 먼저 방어태세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러나 영국의 날쌘 소형 전투기들이 덩치가 커 움직임이 둔할 수 밖에 없는 독일 폭격기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승전 후 행해진 한 기념식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영국 공군의 공로를 치하하며 이런 연설을 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숫자의 사람에게 이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없었다.” 소수의 전사한 공군 조종사들 때문에 영국 전국민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칠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영국 공군의 활약은 분명 그의 치하대로였지만 인류 역사상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나게 더 큰 희생의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2000년 전 유대 땅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이다. 단 한 사람의 흘린 피로 인해 인종과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고 과거 현재 미래 전 세대의 모든 인간이 가장 큰 빚을 졌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성탄절 기념 예배로 모였다. 어떻게 예수님을 기념해야 하는가? 캐롤 송을 부르고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가 선물을 증정하는 성극을 하고 만찬을 나누며 선물을 교환해야 하는가? 물론 그 모든 것이 다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자 각자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대가로 그 분께 지게 된 빚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을 너무 교리적, 관념적으로 막연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와 조건과 처지에 있던지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을 준다고 하니까 영생이라는 선물만 덥석 받아 쥐고 있는 꼴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사실을 잘 믿는다고 신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구세주가 아니라 나 개인의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질문 해보자. 크리스마스에 부르는 대표적인 찬송으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들 수 있다. 신자가 누리는 기쁨의 근거는 구주가 오셨기 때문이다. 그럼 구주 오신 것과 다음 달 수입이 당장 2-3배로 느는 것 중에 솔직히 어느 쪽 기쁨이 더 큰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예수님 오신 것이라고 대답 못한다면 그 찬양을 부를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아무리 신나게 불러본들 노래를 부른 것이지 찬양한 것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도 성탄으로 기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적 명절로 즐긴 것 뿐이다.
예수님이 자기의 삶과 존재와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또 매일매일의 현실에서 실제로 어떤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는지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물론 신자가 되었어도 체질이 연약하고 아직 완성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그리로 가는 여정의 도중에 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고 삶에 힘이 빠질 때도 많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님 오심과 나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정리는 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애로
모든 인간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인생살이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애로 사항이 하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 아니다. 살아 가는 중에 체험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자기 주관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사춘기 이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느끼는 것이다. 많이 배우거나 적게 배운 것, 많이 가지거나 적게 가진 것, 몸이 건강하거나 병약한 것들과 아무 상관 없이 누구나 동일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해 “지금 이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내가 바른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든다. 최소한 무엇인가 부족하고 완전하게 다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안다. 꼭 나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반드시 걸어가야만 하는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있거나 바른 길을 가고 있더라도 만족할 정도로 많이 진척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초조함, 불안함, 허망함, 실패감, 갈급함이 번갈아 들고 짜증과 분노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파고 든다. 그 뒤틀린 감정 상태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과 사회 활동마저 위협할 때도 있다. '나'라는 존재의 인격과 품위에 훼손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제가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자유스런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도덕적 죄악으로 방탕에 빠진 것과도 무관하다. 단순하게 세상에서 좋은 차 좋은 집을 목표로 미친 듯이 살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도 아니다. 인간 관계에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음으로써 생기는 깨어진 감정의 상태도 아니다. 성경을 적게 보고 기도를 게을리 해서 생기는 죄책감과도 거리가 멀다. 반면에 세상적으로 형통하고 훌륭한 인격자로 칭송 받고 실제 선행과 구제에 열심이며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쌓은 자라도 마찬가지다. 우리 같은 소시민의 경우 남편으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학생으로 사회 생활과 인간 관계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OOO 야! 너는 결코 이런 수준의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이 정도로 만족하며 인생을 끝내고 말 것인가?”라는 자신을 향한 내면의 아우성을 끊임 없이 듣게 된다는 것이다. 오해해선 안 된다. 욕심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탐욕에 사로 잡혀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나아가 자기 분수도 모르는 착각이나 교만에서 파생되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좀 더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부족감과 뒤에 쳐진 것 같은 아쉬움을 어떻게 보충하려 드는가? 우선 자기가 가장 자신 있고 잘 아는 것으로 커버하려 든다. 공부를 잘하는 자는 어떻게 하든 지식을 많이 쌓는 것으로, 운동을 잘하는 자는 그저 몸을 우람하게 가꾸면서 충족감을 구한다. 어떤 이는 고매한 철학과 심오한 사상을 파고 들며 길을 찾으려 한다. 아예 독선과 편견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 막무가내 인생을 사는 이도 있다. 육체적 쾌락을 좇아 마약, 도박, 섹스에 탐닉하는 자가 있는 반면에 믿음에 의지하여 종교에서 요구하는 계명을 죽기살기로 실천하는 자도 있다. 계속되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일부러 그 부분을 외면한 채 허무와 염세와 비관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에는 이것도 저것도 잘 모르겠고 알 수도 없다고 포기하며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인간들의 그 모든 노력을 뭉뚱그려 표현하면 우스개 소리로 하는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을 넘다 생긴 일과 같다. 알프스를 넘으려고 천신만고 끝에 한 봉우리의 정상에 이르러보니 더 첩첩산중으로 막혔다. 그래서 “이게 아닌가 봐?”하고 내려갔다가 또 다른 봉우리를 올라 왔더니 여전히 목적지가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그래서 “아까 그곳이 맞는가 봐?”하며 왔다 갔다 하다가 인생을 허비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런 낭패와 부족을 겪고 있지 않는 양 가면을 쓰고 산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풍요롭고 화려하게 치장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며 절대 남들에게 뒤 쳐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억지로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그 속으로는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날 수는 없다는 절망감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적이 없다.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
“지금 이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은 결국 좀 더 멋진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다. 인간으로 품위를 더 완벽하게 갖추고 싶다는 뜻이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되어야 할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다. 그 말은 결국 인간은 원래 더 높고 고급한 차원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선과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망이 인간의 본성 속에 심겨져 있다.
그 이유는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창1:26,27) 만약 인간이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면 절대로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는 소원이 생길 수 없다. 자기가 통제는커녕 인식도 못하는 외부적 요인과 여건에 의해 그것도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상황에 좌우되는 인간이라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가기를 원할 리 없다. 더구나 거룩하고 선한 방향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꾼다.
혹시라도 정말 우연의 일치로 누군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그런 갈망에 빠진다는 것은 절대 우연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없다.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아래 창조되어진 존재다. 그것도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기대하고 예상하고 계획하는 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선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오죽하면 인간을 만드신 후 하나님 당신께서 심히 기뻐하셨겠는가?(창1:31)
하나님은 이 땅을 당신 대신 거룩하게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그 속에 당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창2:7) 그러나 첫째 인간 아담은 너무나 교만하게도 그 분 없이도 이 땅에서 제 마음대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어 버렸다. 그 결과는 공포와 수치만이 남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그의 후손에게 단 한번도 온전한 평강이 없는 인생을 살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이 “이게 아닌데?”라고 후회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다. 죄를 많이 지었거나, 돈이 모자라거나,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았거나, 몸에 중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서가 아니다. 에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그대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대 백성들에게 그 한탄을 했던 것 같이 그런 상태가 불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신자도 그 마음에 때때로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잘 살아 보려 하면 할수록 반드시 똑 같은 낭패를 겪게 된다.
체스트톤이라는 신학자가 “인간은 기생집 문을 두드릴 때도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술 먹고 방탕에 빠져 있든 죽기 살기로 돈을 벌든 결국 그 모든 것은 자기 증명과 과시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을 한꺼풀 벗기고 들어가 보면 여전히 그 인생이 궁핍하고 갈급하다는 증거다. 하나님을 외면한 채 세상에서 아무리 이것저것 다해 봐도 애당초 채우는 것이 불가능한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려는 헛수고일 뿐이다.
스스로는 지성인이요 깨인 자라 자처하며 자유분방하게 사는 자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자기가 인식하든 못 하든 그 속에 절대적 선이 채워지지 않고는 인간으로서 근본적인 상실감이 없어지지 않는다. 기생집을 갖다 온 그 다음 날이 가장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증거다. 또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생집을 찾아 가는 것은 더 확실한 또 다른 증거다. ‘기생집’이란 상실감을 메워 보려는 최후 발악적인 시도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한 번의 시도에 무엇인가 효력이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여러 번 찾아가야 한다면 이 세상에선 도저히 그 웅덩이를 채울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우리 각 자 안에는 하나님 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빈 공간이라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 모양을 한 빈 공간’이라고 표현했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빈 공간이 있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공복감(空腹感)을 느끼게 되어 있다.
불신자들 가운데 나는 하나님을 찾아 본 적도 없고 찾아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항변조차 이 빈공간의 부재(不在)를 증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욱 그 실재(實在)를 확실하게 해 준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알 수 있는데(고전2:11) 불신자의 영 속에 하나님의 영이라고는 없으니 자신의 의식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그 대신 미혹하는 사탄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취는 것을 가로 막고 있어(고후4:4) 자신의 지정의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배 속에 음식이 다 소화되고 비워지면 자동적으로 공복감이 느껴지듯이그들은 세상과 짝하고 신나게 지낼 때는 모르고 지나지만 혼자 떨어져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갈급하고 허무한 심령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공복감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채워야 하니까 또 다시 세상으로 나가 더 자극이 센 쾌락을 찾게 된다. 기생집 문을 계속 두드리는 자 치고 ‘내가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지’라고 끊임 없이 후회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우리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한 죄들을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십계명의 첫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부터 시작해 도적질, 간음하지 말라로 이어져야 했다. 그 대신 첫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이다.
'다른 신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 외에 신들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다. 너 속에 나만이 채울 수 있는 나를 닮은 빈 공간이 있는데 절대로 그 속에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우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 돈, 지식, 권력, 명예, 자존심, 체면, 위신 등등 하나님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도 채우면 채울수록 네 삶이 더 고달파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제사와 제물을 받는 것을 좋아 하며 또 그렇게 해야 당신의 영광이 더 올라가기 때문에 첫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품 안에서 살 때에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기에 우리더러 제발 당신의 인도와 보호로부터 벗어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다. 한국의 110 볼트 전기기구를 미국의 220볼트에 꽂으면 어떻게 되는가? 작동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꽂는 순간 고장이 나버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순간 그 인생은 반드시 고장 나게 되어 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에 예수 믿어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 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이 현재 내 삶의 실제 주인이 되어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살아 역사하시는 그 분과 일 대 일의 인격적인 만남이 분명히 있고 또 그 분에게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아는 역사를 소유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자신을 대신해 죽으신 그 분의 죽음을 자기 몸에 실제로 지녀야 한다.(고후4:10)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로 자신과 모든 면에서 똑 같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 속에 있는 하나님 모양의 빈 공간을 채워주셨기에 그 분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평생을 두고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사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 분의 임재를 확실히 느끼고 그 분이 인도하고 보호하는 그대로 따를 수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1-15) 이 말씀이 신자의 인생에 영원한 진리로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해야 하며 특별히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삶의 절대적인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불신자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부인하다 인생의 상실감이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채 향방 없는 달음질로 끝난다. 신자의 인생은 전혀 다르다. 날 때부터 비어져 있던 그 공간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졌다. 간혹 아직도 신자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세상의 유혹으로 인해 그 영이 눌려져 있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비워져 있지는 않다.
그래서 불신자와는 다른 형태의 상실감과 부족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소망하고 영원한 생명과 빛과 의를 자기 속에 더 많이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진정으로 자기 평생을 그 분의 뜻 안에만 두고 그 분을 경배하며 그 분만을 영예롭게 하기를 소원한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참 인간답게 회복된 품위가 있다면 그것을 유지하고 더 키우면서 사는 것이 삶의 목표요 가치가 된다.
바울과 같이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빌3:12) 인생으로 바뀐다. 완성은 안 되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은 분명히 정해졌기에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상실감과 부족감은 사라졌다. 반면에 이전과 달리 거룩의 완성을 향한 부족감이 생겼다. 당연히 바울처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 가는”(빌3:13,14)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
또 그 바른 길을 가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어떤 환난도 그 길을 방해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신자 속에 생긴 부족감은 하나님이 불러 일으킨 하나님 당신을 향한 소망이다. 그래서 당신께서 채우신 당신의 열심을 가지고 당신이 시킨 일을 하게 되므로 당신이 그 모든 과정과 결과를 계획하고 보장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빌1:6) 믿고 그렇게 살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기 예수 오심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가지 질문 해보자.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을 역으로 해석하면 구주가 오시지 않은 것이 신자의 인생에 슬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에 또 예수를 믿었어도 잠깐씩 외면하고 의심과 불평에 쌓일 때에 느끼는 부족감, 상실감, 아픔이 사업이 부도나거나 중병에 걸려 고통을 받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슬픔이 되는가?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자 중보자이시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성부 하나님에게 중보하고 계신다. 바로 이 자리에도 성령의 모습으로 임재해 계시고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만약 그 소원이 여러분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 당신이 여러분의 속에 심어 주신 것인데 더 이상 뭔가 부족하고 잃어버린 것 같이 느낄 이유가 없지 않는가?
물론 예수가 없는 인생 중에도 세상에서 인간 스스로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자기 자랑이요 자기 과시다. 그 속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과 선과 진리는 없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은 절대 없다. 그들은 기생집을 찾아가든 고아원을 찾아 가든 아직도 하나님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신자의 인생에도 가끔은 부족감이 생겨 “지금 이게 아닌데?”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그런 당신의 백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느끼시는 부족감은 우리가 느끼는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크다는 것이다. “내 자녀를 절대 저런 상태로 인생을 마치게 할 수 없어”라는 안타까움이 없었다면 당신의 아들이 그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돌아가실 리 없지 않는가?
모든 문제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