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빠삐용이 탈출한 진짜 이유(엡5:16,17)

조회 수 1725 추천 수 86 2005.01.03 20:22:46
12/31/2004

신자가 짓는 가장 큰 죄

인간이 짓는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인가? 살인인가?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죄다. 이 말에 불신자들은 당장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장 큰 죄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큰 죄가 아닌가”라고 반발할 것이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자. 살인범이 아무리 피해자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충분할 만큼 보상하고 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자기 생명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되어도 그 마음 속에 평강은 절대 없다. 여전히 죄책감으로 후회하고 뭔가 천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된다. 나아가 만약 그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그 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체험했다면 살인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몰라 살인 같은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더 큰 죄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짓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이제는 살인인가? 여전히 아니다. 그 이유도 간단하다. 예수님이 형제를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살인 죄와 버금간다고 한 말씀(마 5:21,22)에 비추어 보면 된다. 우리는 믿고 난 후에도 수도 없이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마음으로, 말로, 눈 빛으로 살인한다. 저부터라도 예수를 믿지 않고 죽는다면 거짓말한 것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살인 죄만으로도 미싱에 박힐 것이 뻔하다.  

오래 전에 나온 빠삐용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그 주인공 빠삐용은 자기는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잡혀왔다고 믿었기에 실패를 무릅쓰고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한다. 늙어서 이빨이 다 빠져도 생명을 걸고 절해고도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기어이 탈출에 성공한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잘 표현한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숨겨진 더 중요한 주제는 따로 있었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 여러 번 잡혀 독방에 갇히고 나중에는 완전히 탈진하여 사경일보 직전까지 갔다. 꿈 속에서 하늘의 법정에 서게 되는데 재판장이 “네가 네 죄를 알렸다!”라는 추상 같은 추궁을 받고도 “저는 억울합니다. 죄가 없습니다”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재판관의 단 한 마디 말에 찍 소리도 못하고 “맞습니다. 저는 죄인임에 틀림 없습니다”라고 시인한다. 그 말은 “너는 네 인생을 낭비했지 않느냐?”였다.

그 꿈에서 깨어난 후부터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 바퀴벌레도 잡아 먹고 팔 굽혀 펴기 하면서 체력을 보강하기 시작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탈출에 성공한다. 자유를 갈망하기 이전에 세상에서도 인생을 낭비 했었는데 감옥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또  낭비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나가서 뭔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자가 된 후에 짓는 가장 큰 죄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연말에 가장 아쉽고 후회하는 일이 무엇인가? 마음 속으로 형제를 바보라 했거나,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거나,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에 게을리 했기 때문인가? 우리 모두 그런 일들이 가장 아쉬울 만큼 거룩하지 못하다. “올해도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또 금방 지나갔구나. 내년에는 좀더 충실하게 잘 살아야지”다. 가장 크게 후회하고 반성한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죄라는 의미이지 않는가?

오늘 송구 영신 예배로 모이는 뜻은 무엇인가? 해가 바뀌므로 뭔가 엄숙하고 경건하게 지내야 할 것 같은가? 올 한해 큰 탈 없이 지낸 것에 감사하고 내년에는 좀더 많은 축복을 받고자 간구하러 나온 것인가? 다 좋은데 올해에 지은 구체적인 잘못을 회개하고 내년에는 절대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헌신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고 단순히 감상적 기분에 젖거나, 도덕적 죄책감으로 반성하거나, 종교적 의무감으로 회개의 기도를 해 봐야 자칫 그것조차 시간 낭비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혹시 “나는 시간 낭비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모자라 쩔쩔 맸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 TV보고 쉴 시간도 없이 샤워하고 밥 먹고 밀린 일 조금 처리하고 다음날 출근 때문에 누워 자기 바빴다. 겨우 일요일 하루 쉬는데 교회 와서 예배보고 봉사하다 보면 일주일이  휘딱 지나가는데”라고 반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내가 겨우 이런 일을 하고 평생을 보내야 하는가? 내 꼴이 이게 뭔가?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조금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은 어디 가서 주무시는가?”라고 의심하고 불평했다면 아무리 한치의 짬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 전부를 낭비한 것이다. 또 믿음이 좋아 그런 불평과 의심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모자라 쩔쩔맸다면 여전히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해 더 중요하고 꼭 하고 싶은 일 대신에 덜 중요하고 자기가 진정 소원하지 않는 하찮은 일에 시간을 다 빼았겼기에 시간이 모자랐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불신자도 반성하고 소원을 빈다.    

그런데 연말에 이룬 것 없이 아쉽다고 반성하는 것은 불신자나 신자 구분 없이 공통적이다. 또 불신자도 연말에는 엄숙하게 반성하고 정초에는 동해 해맞이라도 가서 천지신명에게 새해 소원을 경건하게 빈다. 만약 신자도 연말에 몇 가지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새해에는 더 큰 은혜를 달라고 비는 정도라면 단지 기독교적인 용어만 사용했다 뿐이지 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연말연시를 보내며 회개하고 기원하는 내용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믿기 전과 비교해 그 내용과 의미가 확실하게 달라야 한다.

불신자가 짓는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다르게 해석하면  인생 자체를 낭비한다는 말과 같다. 그들은 인간이란 존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인식이 없다. 당연히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않는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려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베푸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는 진리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오히려 그 진리를 배척한다. 자기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인줄 착각한다. 그것은 절대 전부도 아니며 진정한 실체가 될 수 없으며 영원한 세계 즉 진정한 실체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자연히 그들의 열린 목구멍은 무덤이다.(롬3:13a) 아무리 세상의 좋은 것들로 채워도 충족이 되지 않는다. 그 혀로는 속임수를 베푼다.(롬3:13b) 세상에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빨리 차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입만 열면 사기와 거짓이 당연히 따라 나온다. 그러나 그들의 그 모든 노력과 수고는 아무리 해도 헛되고 헛되다. 그들의 인생은 단지 ‘향방 없는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는 싸움’(고전9:26)으로 마감할 뿐이다.    

신자는 다르다.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이제는 자기 인생이 절대 낭비 되어선 안 되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고 정말 버러지만도 못한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능했던 자기 같은 자를 위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셔서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분의 크고도 영원한 계획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셔서 언젠가는 반드시 천국 보좌 앞에 참으로 영광스런 모습으로 세우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죄는 짧고도 한 번 뿐인 인생을 바로 하나님이 이 세대에 이 모습으로 이 처지 가운데 두게 하신 그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에 걸맞게 살지 못한 것이다. 신자의 인생 자체는 하나님이 붙들고 계셔서 절대 낭비될 수 없지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한 것은 신자의 전적 책임이다. 신자가 연말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할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이다.      

노아의 낭비된(?) 인생

노아는 세 아들을 본 때가 오백 세 이후였고(창5:32), 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에 대비해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받았고(창6:10-14), 홍수가 난 때는 육백 세 되던 해(창7:11) 였다. 말하자면 그는 방주를 짓는데 자기 인생의 근 백년을 소비했다.

당시의 세상 사람들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이 사람을 지은 것을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할 정도로 죄악이 관영했다. 죄가 차고 넘쳐 더 이상 채울 곳이 없을 정도로 세상 만사가 완전히 100% 죄였다.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창6:5-7)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고 도덕적 회개조차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틀림 없이 노아는 방주를 짓고 있는 중에도 계속해서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오히려 노아더러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했을 것이다. “왜 한 번 뿐인 인생을 아무 쓸 데 없는 일에다 모든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허비하느냐?”라고 얼마나 놀렸겠는가?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노아가 인생을 낭비한 것이 아니요 시간도 허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시간뿐 아니라 인생 자체도 낭비했으며 그나마 단순히 낭비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홍수로 익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 때도 틀림 없이 배가 있었고 바다에서 고기도 잡았을 것이다. 추측컨대 홍수만 있었다면 배를 타고 피난할 수도 있었지 않겠는가? 비록 노아의 방주처럼 크지 않고 평소 때에 배 속에서 사십일을 견딜 양식과 물을 비축 못했다 할지라도 아껴서 먹으면 어쩌면 40일 정도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땅에 물이 불어 가는 정도를 보고 큰 일 났다 싶어 양식과 물을 긴급하게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 때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그랬을까?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1)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때에 지구는 물에  덮여 있었다. 창조 사흘 째 되는 날에 물로부터 땅이 거대한 지각 현상으로 융기 되어 나왔다. 그때 천하를 뒤덮고 있던 물이 바다와 지각과 지각이 부딪혀 생긴 틈새로 새어 들어간 ‘큰 깊음의 샘들’ 즉 지하수 둘로 나뉘게 되었다.

노아의 홍수가 시작할 때에 가장 먼저 혹은 최소한 동시에 일어난 현상은 이번에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쭈나미(Tsunami)였다. 지각과 지각끼리 충돌하면서 해저에서 ‘큰 깊음의 샘들’ 사이에 다시 틈새가 벌어지고 지하에 보존되어 있던 엄청난 물이 터져 나왔다. 또 해저 지진의 여파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났다. 이번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집채 아니 전 땅을 뒤엎을만한 파도가 눈 깜짝할 새에 불시에 들이닥친 것이다. 산 위로 피하거나 당시의 원시적인 목선으로 떠 다닐 여유는 도저히 없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팔 다리가 잘려 나가고 내장이 터지면서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몰살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인생이 단순히 이 땅에서 제 멋대로 살다가 자연 수명이 다하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불 못의 심판에 떨어지며 그것도 도저히 피할 여유가 없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들은 그야말로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있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인생을 백년이나 낭비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의인이라 하나님과 동행했었기에 그런 참혹한 심판에서 구원 받았다. 집채 만한 파도가 불시에 덮쳤지만 그 백년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지은 집채만한 배 때문에 구원 받았다. 집채만한 파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큰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방주를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 아벨, 에녹 다음으로 당당하게 믿음의 위인의 반열에 자리 잡게 되었다.

노아와 같은 고백이 있는가?

신자가 올 한해를 회상하면서 가장 먼저 따져 볼 것은 “과연 노아와 같은 삶을 살았는가?”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숙맥처럼 사느냐? 적당히 눈감고 타협하며 세상 재미와 쾌락도 즐겨가며 살지?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인데 그렇게 산다고 특별히 달라질 것이 무엇 있는가?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걱정 반 조롱 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예수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었는가? 나아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에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더 불쌍히 여긴 적이 있는가?

그들 말처럼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이기에 더더구나 정말 낭비할 수 없다는 각오로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다. 단지 지옥의 심판이 두려워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조가 그릇되고 있고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주를 따랐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오는 것이 절대적 진리이자 축복이기에 실제로 더 능력이 풍성하게 나타났고 진짜 신나고 재미있게 살았는가? 이 부분에 후회가 없었어야 한다. 혹시라도 마음은 세상에서 훨훨 날아다니면서 몸만 교회에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또 집채 만한 파도가 우리를 삼키려 했을 때에 집채보다 더 큰 하나님의 방주 안에 있었던 체험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눈도 깜짝 안하고 당당하게 맞서서 환난을 이겨내어 구원 받고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린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혹 환난이 전혀 없이 평탄하게 한 해를 보낸 자라도 최소한 자기의 인생과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강하고 의로운 오른 손에 붙들려 있고 당신의 영광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는가? 그래서 기쁨으로 자기 삶을 오직 주님의 인도대로 내어 맡기기를 진정으로 소원하며 살았는가? 실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간증 거리가 없었다면 내년에는 정말로 그렇게 달라지기를 기원해야 한다.

그러나 제발 부탁 드리는데 내년에는 믿음 생활 더 철저하게 해야지 식으로 쉽게 결단하지 마라. 성경을 하루 몇 장씩 보고 기도는 몇 분 이상 해야지라는 결심을 하지 말라. 목사로서 장담하건대 며칠 못 가 유야무야 된다. 구태여 장담 안 해도 여러분의 지난 경험으로 이미 올해도 얼마 못 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마저 하고 있지 않는가? 심지어 하나님마저 우리가 그렇게 못할 것이라고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기도하지 말고 성경 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틈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하면 된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데 별다른 비결이나 결심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그냥 무조건 해야 한다. 대신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내 삶의 모든 부분이 그 분의 손 안에 100% 붙잡혀 있다는 확신을 언제든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내가 세운 계획과 뜻을 내 능력과 자원을 동원해 이루려 하면 할수록 실망과 낭패만 따른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 자체가 철저하게 갈급하고도 가난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상 앞에 구호로 써 붙여 놓지 않아도 절로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된다.

노아가 백년이나 세상의 조롱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단순하게 믿음이 좋아서라고 말하지 말라. 신자가 믿음을 갖는 것은 그야말로 ABC 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소명을 붙들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한가지 계획을 확정 지었다. 그래서 그 계획이 이뤄지는 동안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고 희생했다. 자기 생명까지도 걸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6) 신자마저 시간을 낭비하여 자칫 인생 자체를 낭비하는 불신자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고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뜻과 계획 안에서 인생을 꾸려 나가는 자는 시간 낭비하는 것이 가장 아쉽고 또 그럴 여유도 없다. 천국에서 받을 하나님의 상급에 욕심나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 자체가 너무 거룩하고 가치 있으며 또 그 일을 실제 실천할 때에 얼마나 신나고 재미 있는지 스스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당장에 올해는 선교나 전도나 교회 봉사에 열심을 더 내어야지라고 구태여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고 싶고 계획했던 일이라면 그대로 계속해서 하면 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 말하자면 나이 40-50이 넘은 음치가 가수가 되겠다든지, 슈퍼 로토에 당첨 되어 요트 타고 세계 일주 여행을 하겠다는 식의 꿈만 안 꾸면 된다는 것이다.

단 무슨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든 그 일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업이자 천직이라는 확신과 그에 대한 감사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추진함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이뤄나가는 방법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길로만 가야 한다. 또 그 일로 일궈낸 열매를 따고 나눌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간에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답게 하고 그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증거 되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소원하고 하든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계획이자 뜻이자 소명이다.

송구영신 예배의 진정한 의미

신자가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그저 큰 탈이 없었음에 감사하고 내년을 새롭게 맞이하면서 올해보다 조금만 나아지도록 빈다면 너무나 잘못하는 것이다. 특별히 “제가 뭐 크게 바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오래 된 이런 저런 문제들 좀 해결해주고 큰 사고 큰 병만 안 일어나게 해주시면 됩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 죄 안 짓고 열심히 잘 믿고 살겠습니다” 식의 마음을 갖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마치 큰 욕심 안 부리는 것이 선하고 겸손한 것인 양 하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의 소원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신자에겐 위선이다. 인생살이를 이마에 땀 흘리지 않고 또 아무런 환난도 겪지 않고 그저 날 것으로 먹겠다는 가장 큰 욕심이자 헛된 공상이다. 이미 죄악으로 부패된 이 세상은 구조적으로 어려움 없이는 지낼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그런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의 인생을 낭비하도록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설사 신자가 자신의 게으름으로, 세상과 죄악의 시험과 유혹으로, 악령의 세력의 방해로 시간을 낭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다. 그 분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자가 기대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도 할 수 없는 특유의 신비하고도 영원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절대로 신자가 후퇴하거나 정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신자가 그저 평범하게 살겠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는 관심이 없고 또 그런 길로 갈 용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한 죄가 어디 있겠는가?

노아가 세상 사람의 어떤 훼방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게 백년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다른 사람은 다 멸망하는데 자기 혼자 구원 받은 것이 그 전부인가?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전부라면 구태여 백년 간이나 방주를 그렇게 어렵사리 짓도록 하지 않으셨다.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그만 구원하면 된다. 하나님은 그를 전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세웠다. 말하자면 제 2의 아담이 되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그렇다고 신자가 스스로 거창한 계획을 세우든지 하나님께 엄청난 비전을 보여 주시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겠다는 식으로 나서지는 말라. 단지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따져 보라. 그 계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과연 얼마나 그것을 이루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었는가 점검해 보라. 또 진척이 되었던 안 되었던 간에 그 모든 과정 중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간섭과 은혜가 있었는지 회상해 보라.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와중에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자랐으며 인격은 얼마나 다듬어졌는지 살펴 보라. 다른 누구와도 상의할 필요 없다. 오직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일대일로 벌거벗은 채 나아가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지 말고 심지어 아내와 남편도 개입시키지 말고 그 분과 모든 것을 완전히 털어 놓고 은밀하게 나누어라.  

혹시 내가 계획 한 것은 아예 진척이 없는 대신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엉뚱한 일만 일어나 고생만 진창 했다는 기분이 드는가? 그렇다면 정말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라면 바로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구체적인 의미는 모르지만 우리 인생을 낭비시키지 않고 훨씬 더 좋은 계획으로 이끄시는 분께서 얼토당토 않는 일을 허락하셨겠는가?

물론 신자 자신의 죄악과 욕심과 또 세상과 사탄의 방해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당신께서 그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비록 어려움이 겹치더라도 더욱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을 귀하게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자가 의심하고 불평하면 그 인생의 영원한 운명은 허비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계획과는 멀어지고 이땅에서 신자에게 허락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무슨 계획을 세우며 어떤 소망을 갖고 내년을 맞이하려고 하는가? 무슨 일이든 여러분이 진정으로 소원하는 것이라면 다 좋다. 또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올해 못다 이룬 계획이 있다면 내년에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진정으로 자기의 소원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고 또 그 모든 계획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꼭 기독교적 색채가 나타나지 않고 세상에서 누구나 하는 일반적 일이라도 아무 문제 안 된다. 대신에 지난 해와는 전혀 다른 헌신으로 구체적으로 더 간절하게 기도하라. 뜨겁게 오래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하나님이 절대 낭비시키지 않는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으니까 자연히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년에 성공적인 삶을 산 신자의 모습이 제자 훈련 코스를 마친 자이겠는가 아니면 새 차와 새 집을 산 자이겠는가? 만약 그 차와 집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계획이고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으로 산 것이라면 후자가 훨씬 더 성공한 삶이 된다. 제자 훈련 코스를 마친 것 만으로는 성공이 아니다. 세상에 나가서 또 다른 제자를 불러 와야 성공이다. 반면에 새차와 새집을 산 것은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다른 어떤 계획보다 내년에는 절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죄만큼은 안 짓겠다는 결단을 하라. 그래서 내년 송구영신 예배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감사의 열매만큼은 들고 나오도록 하라. 비록 모든 계획과 소원들이 완성되지 않았고 아직 별 진척이 없더라도 말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또 옆 눈길 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그 만큼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성공한 신자의 삶이 어디 있겠는가?  

사라의 웃음

2011.10.06 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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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일으켜 놓으신 모든 환경, 상황들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임을 더욱 더 깨닫고 감사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삶이
시간을 아끼며 낭비하지 않는 순간 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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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신판(新版) 가롯 유다전(傳)(행1:15-19) [3] 운영자 2005-10-24 2605
103 하늘에서 카운트 다운 하시는 삼위 하나님(행1:12-14) [4] 운영자 2005-05-06 1984
102 갈릴리 촌놈들아!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볼 것인가?(행1:9-11) [2] 운영자 2005-04-04 1842
101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행1:8) [6] 운영자 2005-03-23 4009
100 인류 역사상 오직 두번 뿐인 사건(롬12:1,2) [2] 운영자 2005-03-14 2318
99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 –신자(마5:1-3) [1] 운영자 2005-03-03 2918
98 모로 가면 서울 못 간다 (마12:28-30) [3] 운영자 2005-02-22 1994
97 왜 귀신은 믿으면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가?(마12:22-27) [1] 운영자 2005-02-15 2357
96 고난을 이겨내는 유일한 비결 (마12;14-21) [2] 운영자 2005-02-08 1948
95 탁구공을 되 넘긴 예수님 (마12;9-13) [1] 운영자 2005-02-01 1950
94 주일날 짜장면 사 먹어도 되나요? (마12:1-8) [1] 운영자 2005-01-25 6521
93 마음의 쉼을 얻는 세 가지 길 (마11:28-30) [2] 운영자 2005-01-18 2684
92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이 없으셨던 진짜 이유(마11:28-30) [1] 운영자 2005-01-11 1984
91 벤허가 골고다 언덕으로 간 까닭은? (마11:28-30) [3] 운영자 2005-01-04 2934
» 빠삐용이 탈출한 진짜 이유(엡5:16,17) [1] 운영자 2005-01-03 1725
89 기 안 죽이고 아이를 키우려면? (엡6:4) [1] 운영자 2004-12-28 1789
88 기생집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인생들(요15:1-5) [2] 운영자 2004-12-21 1842
87 한국인의 세가지 종교적 유전인자 (마11:25-27) [1] 운영자 2004-12-1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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