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31) 1/2/2005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거짓말만 하는 교회
본문은 기독교 전도에서 가장 효과적인 문구로 자주 등장한다. 교회 건물에 특별히 부흥회나 전도집회 때에 프랭카드로 크게 써 붙여 놓는다. 단순히 이 구절만 써놓는 것이 아니라 꼭 따라 붙는 설명이 있다. “병이 들어 고생하십니까? 사업이 부도 났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심지어) 자녀가 대학 입시에 실패했습니까?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마치 예수를 믿으면 인생살이에 고통은 다 사라지고 하는 일마다 형통할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아주 큰 잘못이다.
물론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며 초자연적 이적이 일어나는 일이 다른 어떤 종교에 비해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많다. 예수님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셨지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인간이 수영이나 자전거 타는 것처럼 몸에 배여 항상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능력(Ability)이지만, 표적(Sign)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Miracle)을 말한다.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표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마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양 소개하는 것은 거짓말 한 것이다. 교회가 거짓말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셈이 된다.
혹시라도 신자가 기도하면 그런 일이 분명히 일어나고 또 그렇게라도 해서 전도하면 좋은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중고 전자 제품 가게에 가서 아주 화질이 좋다는 점원의 말만 듣고 중고 TV를 한 대 샀다. 집에 갖고 와서 틀어보니 화면은 잘 나오는데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고 잡음만 났다. 다시 찾아가 항의했더니 “소리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지 않느냐? 나는 거짓말 한 적 없다”고 되려 큰 소리쳤다.
교회도 이 점원을 닮아 “기도하면 병이 낫고 사업이 번창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않느냐? 불신자가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안 물어 봤지 않느냐?”라고 해명할 수는 없다. 일부러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런 표어로 전도하는 것은 심하게 말해 일단 교인들 머리 숫자부터 채우자는 욕심이요 속임수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에 흘리신 그 분의 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로만 소개되어야 한다. 다른 어떤 설명도 이 진리를 보완하고 더욱 증명되는 용도로만 동원되어야 한다.
수고와 짐의 참 뜻은?
믿음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으로 전도를 받다 보니 많은 신자들이 본문에 관해 최소한 크게 세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오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30절에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쉬운 멍에와 가벼운짐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으면 암이나 백혈병 같은 불치병에는 안 걸리고 감기 몸살만 앓는다든지, 사업이 부도가 나도 백억대가 아니라 아파트 한 채로 감당할 만한 십억대에 그친다는 뜻은 아니다. 벌써 이렇게만 따져도 수고와 짐이 현실적인 고통과 환난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수고와 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힌트도 바로 같은 말씀 속에 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 ‘나의’ 짐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종류의 멍에와 짐은 어렵고 무겁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것과 비교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3:4에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 일반 백성들에게 부과시킨 종교적 계명들이 바로 무거운 짐이자 어려운 멍에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4절 이하에 두 가지를 드셨다. 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은 안 지켜도 되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는 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마23:16) 성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말로만 맹세하고 보증물을 걸지 않았으므로 공수표로 끝내도 되지만 성전의 금 즉 예물을 바치겠다고 보증했으니 반드시 지키라는 것이다. 또 율법에서 십일조를 규정한 뜻 중의 하나는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위에 굶어 죽어가는 이웃은 구제 하지 않아도 되지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꼭 하라고 시켰다.(마23:23) 주식과 부식이 아닌 양념까지도 반드시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수고’는 많은 일들을 계속해서 자기 스스로 처리하다 지쳐서 피곤한 상태를 말한다. 또 ‘짐’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과시킨 의무 사항들을 꼭 지키려는 부담이다. 둘 다 그 원인이 자기 내부에 있던지 외부에 있던지 간에 고무줄이 팽팽히 당겨진 것처럼 항상 긴장감과 스트레스에 쌓인 정신적 영적 상태를 말한다. 본문은 흔히 생각하듯이 병에 걸리고 사업이 부도나는 것같은 현실적 문제를 예수님께 기도해 하나씩 해결 받는 그런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의 뜻은 유대인더러 그 때까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 배운 것들이 잘못되었으니 자신에게 와서 ‘배우라’(마11:29)는 것이다. 그들이 정한 율법의 세밀한 규정들을 일일이 지키려다 생기는 온갖 현실적 부담과 또 꼭 그렇게 해야만 복을 받고 어기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유대교 신앙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쉐마를 만지는 벤허
지금껏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만든 영화 중에는 오래 전에 나온 빌리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가 가장 잘 만들어진 것 같다. 작년에 개봉된 화제작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과도 비교가 안 된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으로 가르치거나 기적을 베푸는 모습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뒷모습만 간단하게 몇 번 나오고 치운다. 대신에 주인공 벤허의 신앙이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그려내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직설적인 대화나 설명 대신에 어떤 행동이나 상징으로 더 깊은 진리와 은혜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성경에 정통하여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도 못 채고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중에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자기 집을 들락날락 하면서 대문 오른 쪽 기둥을 만지는 태도와 모습이 세 단계로 바뀐다.
신명기 6:4,5로 가보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님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기독교 진리를 한 마디로 대변하는 말씀이 요한복음 3:16이라면 이 구절은 유대교를 한마디로 나타내는 말씀이다. 성경 원문에는 ‘들으라’고 시작되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인 ‘쉐마’로 통칭된다.
유대인들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신6:6-9)고 명령하신 그대로 실제 수행했다. 벤허도 ‘쉐마’를 아주 작은 종이 두루마리에 적어서 마치 초인종처럼 대문 기둥에 홈을 파고 넣어 두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계명을 순종하고 있다는 표시로 외출 할 때나 외출에서 돌아 올 때마다 그것을 만졌다.
처음 사업이 번창하고 아무 문제 없이 형통할 때는 그 만지는 모습에 유별난 것이 없었다. 어찌 보면 습관적 의무적으로 만졌다. 그는 아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신28:1,6)는 약속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틀림 없이 그와 동행하고 있었고 세상에서도 그는 인격자로 존경 받고 구제와 선행에도 열심인 자로 칭송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신임 예루살렘 로마 총독이 부임하는 퍼레이드를 여동생과 함께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전혀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우연히 낡은 기와 한 장이 떨어지고 마침 총독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총독은 말에서 떨어져 다치게 된다. 그 벌로 벤허는 반역죄로 몰려 노예선으로 끌려 가고 엄마와 동생과도 소식이 두절된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해진다. 자기가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억울하게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바로 잡아 주실 것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 끌려 가면 3년 안에 다 죽는다는 지옥 같은 노예선으로 자기에게 앙심을 품고 보낸 죽마고우 로마인 친구이자 예루살렘 경비대장인 자기 가족의 원수에게도 반드시 복수해 주리라 믿는다.
계속해서 기이한 사건들이 연속되고 노예선에서 구원 받고 그 친구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로마 귀족의 양아들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다. 노예선으로 끌려 갈 때에 벤허는 자기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그 지옥에서 반드시 살려낼 뿐 아니라 원수까지 갚게 해 줄 것이라고 그 친구에게 선포하고 떠났다. 이전에는 도덕적으로는 사람들 앞에, 율법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그가 완전히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 돌아 온 것이다.
곁에서 그런 그를 보다 못한 크리스찬 약혼녀가 원수 갚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차라리 잊고 용서하라고 권했다. 또 갈릴리에서 한 선지자가 나타났으니 그를 만나면 인생의 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내키지 않는 벤허를 그 선지자의 집회 장소로 데리고 갔다. 요즘 식으로 하면 전도 집회요 성경적으로 하면 바로 산상 수훈의 현장이었다. 그래도 벤허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생각도 않고 바로 떠나 버린다.
아마 예수님이 요즘 교회가 하는 식으로 “병든 자 있습니까? 사업이 부도 난 자 있습니까? 다 내게 나오시오. 내가 모든 것을 고쳐 주겠소”라고 말씀하셨다면 끝까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잘 아는 대로 “원수를 사랑하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였다. 원수 갚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벤허에게 그 말씀이 귀에 들어 올 리는 없었다.
드디어 그는 마차 경주에서 우승하여 유대인의 영웅이 되고 친구는 경주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친 부상 때문에 죽게 된다. 벤허가 이전에 친구에게 장담했던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보응해 주셨다. 그러나 친구가 죽기 직전에 그에게 “이것으로 우리의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네는 절대 나와 로마를 이길 수 없어. 너는 졌어. 성밖 문둥이 굴로 가보라. 네 엄마와 여동생이 어떤 꼴로 하고 있는가 보라”는 말을 남긴다.
그에겐 청천 벽력이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에게 피해 준 것도 없었다. 율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엄마와 동생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만이 걸리는 문둥병에 걸려 저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복수에 성공할 때까지만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동행하는 하나님,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믿는 자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술 궂고 신경질 내며 신자가 처한 상황과 갖고 있는 믿음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기분대로 하는 하나님으로 둔갑해 버렸다.
나아가 더 견딜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은 원수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자기 누명이 벗겨졌으면 속이 시원하고 통쾌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뒷맛이 씁쓸하고 마음에 평강도 사라지고 번뇌만 쌓여져 갔다. 과연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엄마와 동생이 문둥이 굴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그는 쉐마를 만지지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벤허가 골고다 언덕으로 간 까닭은?
그의 약혼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날 벤허의 엄마와 여동생을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고 문둥이 굴에서 데리고 나온다. 벤허도 골고다 언덕을 따라 그 처형 행렬을 따라 갔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시고 그 직후 천둥 번개가 쳤는데 그것을 바라본 엄마와 여동생의 문둥병은 깨끗이 낫는 기적을 체험한다. 그 이후 벤허는 쉐마를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뺨을 쓰다듬듯이 정말 진심을 다해 정성 어린 손길로 어루만진다.
그가 그런 것이 엄마와 여동생의 문둥병이 낫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과 갈등을 마침내 해결 받았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도 벤허는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믿은 자도 없을 만큼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인도와 보호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그러나 아직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느냐에 비례해서 복을 주시고 믿는 자가 불행한 일을 당해 간절히 기도하면 해결해 주시는 능력과 공의의 하나님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로마의 원수를 물리쳤고, 세상의 잘못도 바로 잡았고, 선하고 의로운 자로서 복도 받았다.
그러나 약혼녀의 충고대로 그에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인생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무리 옳고 정당한 것이라도 세상을 바꾸고 인간에게 평온을 줄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 영혼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죄악으로 부패된 본성은 도덕, 윤리, 철학, 법률, 종교, 율법 그 어느 것으로도 고칠 수 없었다. 나아가 하나님이 만사를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해서 상벌을 그에 따라 나눠주는 방식으로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을 온전한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뿐임을 그는 깨달았다. 십자가에 말 없이 죽으신 그 분이 온갖 상처, 분노, 시기, 질투, 저주, 슬픔, 고통, 눌림, 공허, 염려, 불안에 묶여 있는 인간의 영혼을 깨끗케 할 수 있음을 눈으로 직접 보았고 또 그의 마음에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범사를 형통케 해서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성품과 인격과 영혼을 거룩하게 바꾸어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인간을 참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벤허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문둥병을 낫게 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골고다 언덕을 온갖 고초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 않으시고 피 흘리며 가시던 그 분을 이전에도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예선으로 끌려 갈 때에 어떤 마을의 우물가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 준 이름 모를 사람이 있었는데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가는 분이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벤허로선 그 지옥 같은 노예선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자기가 가진 굳건한 신앙의 힘이며 또 그런 믿음을 하나님이 예쁘게 보시고 구원해 주신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노예선에 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한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목수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났고 또 바로 그 분이 주신 생수 한 대접 때문에 힘과 믿음을 잃지 않았던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벤허가 사랑한 만큼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마다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마다 먼저 은혜를 베풀고 계셨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사업이 형통했을 때 뿐만 아니라, 우연히 옥상에서 기와가 떨어 질 때도, 친구가 아무 죄없는 자기를 억울하게 노예선으로 보낼 때도, 지옥 같은 노예선의 선창에서 팔이 부러져라 노를 저을 때도, 마차 경주에 우승했을 때도, 나아가 엄마와 여동생이 지하 감옥에서 살이 썩어져 가고 있을 때에도 그 어디에나 함께 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쳤던 것같은 모든 사건 속에, 도저히 이해도 안 되고 오히려 불만과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온갖 역경과 환난 속에도 그 분이 안 계셨던 장소와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이 결국에는 자기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나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게 만드는 자리로 이끌기 위한 당신의 계획이요 간섭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그런 고난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자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 하는 어려운 수고와 율법을 잘 지켜 복을 받겠다는 무거운 짐 아래에 자기 인생이 묶여져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만나고 그 영혼에 평강을 얻고 난 후에서야 ‘쉐마’를 정말 연인의 뺨을 어루만지듯 쓰다듬게 되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형식적 율법적이었던 쉐마가 이제야 진정으로 참 쉐마가 된 것이다. 율법을 이루시는 공의의 하나님이 이제는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단 번에 함께 만족시키는 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 또 그 길 외에는 어떤 인간에게도 영원한 소망과 평강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자.
새해가 시작되는 첫 주에 잘 믿으면 올해가 장미 빛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신자가 걸어 가는 길은 레드 카펫이 깔린 길이 아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다. 올해도 틀림 없이 우연에 우연이 겹친 듯하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힘들고 억울한 일들을 겪을 것이다. 벤허가 겪었던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과 인생에 대한 갈등과 고뇌를 똑 같이 겪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붙들어야 하는 가장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절대 기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동 판매기가 동전을 넣으면 과자가 떨어지듯이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본다고 해서 당장에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에서 구원 받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이 절대 가시밭길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축복과 사랑은 신자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의 곳곳에 알게 모르게 숨겨져 있다.
신자를 일부러 곤혹하게 만들어 조종하고 부담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당신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진정으로 신뢰하고 참 된 사랑을 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전 인생을 걸고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신다.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에서 구원 받는 은혜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도 하나님 당신을 향한 사랑을 놓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또 그런 일들을 통해서도 자기에게 이루실 당신의 역사와 간섭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그래서 신자란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 또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범사에 감사할 것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당연히 항상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선으로 자기 영혼이 채워지지 않고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나아가 신자는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과 진리 위에 완전히 내어 맡기지 않고는 참 능력을 맛보지 못한다.
올해에 여러분의 신앙 목표를 거창하게 수치적으로 정할 필요 없다. 세상에 내 세울 큰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깊이 알아 나가야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시리라.”(호6:1-4)
비록 찢어지고 치였지만 그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로 돌아 오게 하기 위한 간섭이라고 하신다. 특별히 삼일 만에 일으키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 길만이 여호와를 힘써 아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 분의 신자를 향한 신실하신 뜻은 새벽이면 반드시 해가 떠 빛이 비추이듯이 영원토록 변개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의 삶에 숨겨져 있다고 해서 마치 보물 찾기 하듯이 해선 안 된다. 뭔가 특별하고 예상치도 못한 더 큰 축복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유대 종교의 찌꺼기를 털어 내고 기독교의 진리 안으로 완전히 들어 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 준다고 생각하는 긴장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고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든지 그 곳에 이미 태초부터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이땅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또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 분에 대한 지식을 늘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너무나 다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이 체험해 나가는 것이다.
올해 여러분의 삶이 궁핍해질지 부요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분의 기도와 믿음에도 달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영원토록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올해 일어날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당신만의 방법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야 만다. 그런데 그 영광은 하나님을 알아가지 않고는 절대 보지도 누리지도 못한다. 올 한해 만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 하기 이전에 제발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도록 하자. 그래서 우리도 벤허처럼 쉐마를 집 대문에 써 붙여 놓고 정말 연인의 뺨을 쓰다듬듯이 어루만질 수 있는 365일이 되자.
기가막힌 해설과 함께.....^^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야 만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