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33) 1/16/2005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표정 관리에 급급한 묵은 신자
본문에 대해 신자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세 가지 오해에 대해 알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마지막 세 번째로 신자가 수고와 짐을 벗고 난 결과에 관해 살펴 보기로 합시다. 지난 두 주간 배운 바 대로 수고와 짐은 현실의 환난과 문제가 아니었고 따라서 그 벗는 방법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도 당연히 환난이 끝나면서 갖게 되는 안도감과 평안함이나 문제가 해결되어 받는 보상과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 29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병이 낫거나 사업이 번창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결과를 가지고 역으로 추적하면 본문의 뜻은 간단히 말해 이렇게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마음에 쉼이 없다가 예수를 믿은 후에는 마음의 쉼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과연 그렇습니까? 이 부분에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었더니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관한 욕심이 없어졌고 검소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범사에 자족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정말 자신 있게 ‘예스’할 사람이 우리 가운데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예수를 믿은 후에 분명히 세상의 형통과 쾌락에 대한 집착은 어느 정도 줄었고 어떤 환난과 문제가 닥쳐도 믿음으로 이기며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반면에 남들이 잘 나가고 형통하는 것을 보면 수시로 시기와 질투가 솟아나고 돈이 궁핍하거나 병이 나면 짜증스럽고 염려가 앞서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을 부르면 평강이 회복됩니까?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돕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면 기쁨을 맛 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또 신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 해서 마음의 쉼을 얻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자기 집에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수도원으로 바꾸어 24시간 성경 보며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장 먹고 살고 아이들 키우느라 보면 매일 자질구레한 일들로 속을 썩게 마련입니다.
또 다시 이전 보다 더 뜨겁게 기도해 보지만 상황이 호전되기 전까지는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내 믿음이 잘못인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결과를 현실 문제 해결에 둔다면 당연히 그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에 쉼이 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환난과 문제가 닥칠 때마다 불안과 염려는 쉴 새 없고 그저 눈 앞에 닥친 문제만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 하느라 평생을 다 보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헌신한 자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부터 현실의 형통이 부럽지 않고 이제는 남은 평생을 십자가 골고다 언덕을 주님과 함께 가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에 쉼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도 많은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에 참석했다면 이제는 어지간한 일에 초연해지고 환난과 문제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이겨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그렇지 못합니다.
본문에서의 수고와 짐은 현실의 환난과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부과해 놓은 복잡하고도 잘못된 율법체계를 말한니다. 내용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께 바친 열심과 치성에 비례해서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 관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잘못된 형식들을 폐기했고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당신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 마음에 쉼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복음 안에 들어온 당신의 자녀가 어떤 모습과 형편에 처해 있든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복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친 만큼만 복을 주고 꼭 선행을 해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 동안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강박 관념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또 다른 신앙 상의 역설적인 스트레스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어떤 잘못을 범해도 나를 사랑하고 복 주시기 원하신다면 왜 또 이런 환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만약 신자의 치성이 부족한 것도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의 결핍도 그 원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런 문제가 왜 생겨야만 하는가?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자라서 그런가? 우리 형편과 믿음과 헌신과는 아무 상관 없이 하나님이 무조건 독단적으로 처리 하시는 것일까?
분명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평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헌신했는데도 온갖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신자로선 기도하고 말씀 볼 열의마저 떨어집니다. 교회를 한 십년 정도 다니면 무슨 일이 생겨도 그저 하나님의 뜻이겠거니 체념해버립니다. 하나님이 자칫 숙명론적인 하나님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신앙 생활과 현실의 문제 등 모든 일에 그저 덤덤해지고 물에 물 탄 듯 아무 생기가 없게 됩니다. 신앙이 그저 마지 못해 하는 의무적 습관적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속으로는 마음의 쉼이 전혀 없는데도 교회에 맡은 직분이 있어 겉으로는 아주 평강한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합니다. 그럼 이런 상태로 평생 신앙 생활하고 마쳐 버릴 것인가? 과연 이렇게 까지 된 원인이 무엇이며 그 대책은 또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
생각보다 마음을 바꿔라
그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에 쉼’이 ‘생각의 쉼’과는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사건 하나하나에 순간적이고도 개별적으로 반응하여 판단하고 결정하는 지정의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든지 회사에 긴급한 문제가 생겼다든지 할 때에 그 원인을 분석하고 현재 진행되어가는 상황을 체크하고 앞으로 전개될 결과를 예측하여 그 대비책을 궁리해 가는 과정이 생각입니다.
반면에 마음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생각을 사로 잡고 있는 더 깊은 내면적 흐름을 말합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불안하거나 담담하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오기가 발동하거나 자꾸 절망에 빠지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 전체를 사로잡는 배후의 분위기가 마음입니다. 어떤 생각을 주도하여 항상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생각과 구별되어서 사람 속에는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생각의 배경에서 생각을 주장하는 힘이 마음입니다. 본문에서 ‘마음’의 원어적인 뜻도 바로 인간 생명의 실제적인 요체 즉 인간의 자아 전체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사고활동을 의미하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한 신발 회사에서 아프리카에 판매원을 두 명 파견했습니다. 일차 시장조사를 마친 보고서를 본사에 보내 왔는데 완전히 상반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이곳에는 아무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 신발 판매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음”이었고, 다른 사람은 “이곳에는 아무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 신발을 신는 편안함을 알게만 해주면 판매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음”이었습니다.
동일한 현상을 두고 두 사람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컵에 물이 반쯤 차 있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은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라고 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비관적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신발 판매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낙관적인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두고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신자에게 환난과 문제가 발생하면 염려하고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목사 가운데 암 걸린 자가 많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너희 중에 있을 때에 심히 두렵고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발에 착고를 차고도 한 밤중에 찬양을 한 적도 있지만 다메섹에선 비겁하게 광주리를 타고 야반도주한 적도 있었습니다. 몸에 병이 있어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치유는 일어나지 않고 평생을 몸에 사단의 가시를 안고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 신자도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입니다. 인간 외부의 어떤 개별적 사건에 대해 인간 내면의 지정의가 일차적으로 반응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가 아프고 집 안에 돈 들 일이 생겼는데도 짜증이 안 나고 염려가 안 된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안 지겠다는 뜻밖에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미쳤거나 바보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내가 그래도 명색이 교회 장로인데 이런 염려를 해선 안 되지. 믿음으로 당당하게 이겨야지” 다짐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봅니다. 분명히 조금은 나아집니다. 그러나 그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자꾸만 자기 생각만 가라 앉히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의지력을 동원해 감정을 통제하고 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 것입니다. 생각만 바꾸려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마음 자체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바꾸는가?
그럼 그 마음을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가치관을 능동적, 적극적, 낙관적, 긍정적으로 바꾸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처세술입니다. 또 그런 것은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천성이자 성격의 일종입니다. 수동적, 소극적, 비관적, 부정적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 만나야 사이 좋게 잘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는 수 말고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정말 신자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평생을 두고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물에 물 탄 듯한 신앙 생활을 본질적으로 생동감 넘치고 승리할 수 있게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신자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뜻이 신자가 가는 곳 어디든지 그 분이 함께 가 주신다는 뜻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신자를 떠나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약4:3) 있습니다. 신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예수님은 함께 가던 길을 멈춰서서 다시 제대로 된 길로 돌아 오도록 가만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자가 간다고 어떤 길이든 무조건 따라와 주지 않습니다.
부모도 자식이 나쁜 친구랑 잘못된 길로 빠져들면 용돈을 안 주거나 사업 자금을 대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부모이지 남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말리지 않습니까?
신자가 어떤 일만 생기면 불안하고 꼭 어떤 일이 생겨야 기도하고 말씀 보는 이유는 “왜 내가 가는 길에 예수님이 따라와 주지 않지?”라는 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있는 길을 신자가 따라가지 않는 한 주님이 신자 곁에 임재(臨在)는 하고 계시지만 그분이 신자와 함께 동행(同行)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바꾸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신자가 진심으로 자원해서 기쁨과 열심을 가지고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실제로 그 길을 가고 있으며 가면서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풍성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분과 함께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고 싶은 소망과 갈급함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믿기 전과는 세상 살아가는 모든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완전히 180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제대로 믿었다면 바뀌어집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달라집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아직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자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세상의 시험과 유혹이 있어 그 생각에 불안하여 쉼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쉼 까지는 절대 빼앗기지 않습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 분의 임재와 동행, 또 인생에 대한 그 분이 갖고 있는 생각과 계획에 관해 전혀 감각과 인식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만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일차적인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고 그런 생각들이 모여 마음으로 굳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한 마디로 순간순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이 자기 마음 즉 내면의 자아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항상 제한적이고도 가변적이며 순간적인 외부의 물질적 현상에만 좌우 되니까 불안과 염려가 끊일 새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신자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신자의 내면이 성령의 전이 되고 마음 자체가 바뀝니다. 갑자기 신령해지고 거룩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생각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면의 의사 소통과 결정 구조가 달라진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를 대신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할 수 있고, 미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지시할 수 있고, 하늘의 신령한 지혜로 채워주실 수 있고, 때로는 강권하여 우리에게 어떤 결정을 내리게 할 수도 있게 됩니다.
신자가 자꾸 자기 생각만으로 어떤 문제를 판단하면 성령이 일할 수 있는 소지를 신자 스스로 막는 셈입니다. 신자가 불안과 염려로 들끓는 자기 생각만 절제하려 들면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 문제만 생기면 불안해 하는가 아직도 신앙이 이 수준 밖에 되지 않았나?”라는 한탄과 실망 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신자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생각을 다스리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무조건 그 문제를 하나님께 당장 해결해달라고 간구하기 이전에 자기 마음에 비추어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신자로서 바른 마음으로 서 있는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이 가시고 있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쉼을 얻는 세가지 길
그래서 신자가 마음에 쉼을 얻는 길은 세 가지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자가 마음에 쉼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신자가 그 마음이 바뀌어진 세 가지 모습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참 신자는 반드시 이 세가지 중의 한 모습이어야합니다. 그리고 이런 세 가지 바뀐 모습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현실의 환난, 문제, 죄악, 시험, 유혹을 얼마든지 당당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1.소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
첫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이 분명히 있고 그 소명을 이뤄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복음을 전도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과 왕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라는 소명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일생에 관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을 알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어야합니다. 말하자면 직업의 종류까지 정해져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천직임을 확신하며 그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져 갑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분명히 정해진 일정표대로 나아가고 있어서 그 앞에 닥치는 어떤 장애와 훼방도 주님과 함께 부수며 나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온갖 위험과 죽을 고비를 맞아도 한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메여진 멍에를 벗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오직 앞에 닥친 목표를 향해 전진합니다. 이룬 일보다 앞으로 이룰 일이 훨씬 더 많아 시간이 아쉽습니다. 현실의 걱정 염려거리가 생겨 그 생각이 잠시 흔들리더라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인생의 방향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미풍은 될 수는 있어도 태풍은 결코 될 수 없기에 마음에 쉼은 뺏기지 않습니다.
환난과 문제가 닥쳐도 하나님에게 당장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는 기도마저 급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는 분명하게 정해진 길을 가고 있기에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자기 소명과 연관해서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이 자기 일신상에 피해를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소명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될지 도움이 될지 만 문제 될 뿐입니다. 어떤 장애도 주님이 시키신 그 일을 궁극적으로 실패케 할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 장애를 통해서도 자기 소명을 이뤄달라고 기도합니다.
반드시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 의사면 의사로, 사업가면 사업가로, 학자면 학자로, 작은 구멍가게 주인이면 주인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님이 자기에게 그 일을 통해서 이뤄내실 방향과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력서를 적어도 직업란에 단순히 무직으로 적지 않고 가정주부라고 당당하게 쓸 수 있습니다. 주부라는 직분 자체가 천직(天職)이자 소명(召命)임으로 주부로서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며 그 가정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참으로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바꿔나갑니다. 설거지를 하나 해도 주께 하듯 하기에 이미 주님이 가고 있는 길을 신자가 따라 가고 있는 셈입니다.
세속의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그 속에서 이미 빛과 소금으로 바뀐 자로 서 있기에 주위에 거룩하고 신령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미 바꿔진 마음으로 인해 신자 자신부터 변화되어 그가 소속한 어떤 집단에서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뀌어져 나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며 가꾸며 열매를 수확하는 일에만 전념하므로 다른 걱정 염려가 그를 흔들 수 없습니다. 간혹 옆 집에서 벤즈 자동차를 사면 순간적으로 생각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쉼은 뺏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옆 집 사람을 볼 때마다 좋은 차 좋은 옷을 사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다는 마음뿐이기 때문입니다.
2. 인생의 큰 줄기를 붙든 자
둘째는 현실에서 구체적인 일이나 업종까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계획에 관한 일정표는 받지 못했으므로 하나님 왕국의 열매를 수확하는 수준까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큰 줄기와 맥락에서 주님이 분명히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은 있습니다. 또 그 방향으로 가길 신자 자신이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하나님이 미국으로 이민 오게 하셔서 한국에선 해볼 엄두도 내지 않았던 허드레 일을 하게 한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정해진 목표와 방향으로 이끌고 계신 계획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한국에서 이것저것 다 해봐도 실패해 힘들어 하니까 하나님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미국으로 끌고 와 먹고 살게만 해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실패마저도 하나님이 미국으로 오게 해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간섭이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 동안의 모든 실패와 현재 하고 있는 힘든 일이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로 가고 있는 준비와 훈련 과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자원하여 감사함으로 그 연단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환난과 문제가 발생해도 당장에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기에 앞서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간섭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당신을 향한 계획의 일정과 세부 사항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전의 어려움이 지금 이 자리로 이끈 계획이었듯이 지금의 어려움도 장래의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중간 과정임을 믿기에 그 목표 지점이 무엇인지부터 기도로 찾게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아직 완전하게는 메지 않았습니다. 멍에를 멜 수 있는 기초 체력을 단련 중입니다. 혹시 메었더라도 한두 발자국 걸음마를 떼는 연습 중이며 자기가 주님과 함께 갈아야 할 밭이 어딘지도 모를지라도, 쉽게 말해 구체적인 직업의 종류까지는 안 정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장래의 일에 대한 준비 과정이며 최소한 이와 연관 되는 일을 시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성실하게 감사함으로 수행하며 열심히 장래를 준비하는 자입니다.
3. 옛 사람으로 돌아가기 싫은 자
마지막 세 번째는 구체적 소명도 받지 못했고 큰 줄기의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하나님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자기가 가는 방향을 아직 몰라 간혹 실수하고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이 바로 잡아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멜 준비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분이 내민 손을 자신이 붙들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리고 그 손을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기가 걸어 갔던 길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지 알기에 이젠 절대로 그 길로 되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인생관과 가치관과 목적관이 이전에는 자기 중심이요 세상의 보이는 것들로 그 기준을 삼았지만 이제 오직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 형성됩니다.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예수님 만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업종의 일을 하게 하실지 모르지만 주여 나의 전부를 당신께 바치오니 주께서 자신의 일생을 인도해 달라는 헌신은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난과 문제가 발생하면 물론 그것들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만 동시에 이일 가운데 있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일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간절히 기도해도 그 뜻을 모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그 어려움만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통해서도 반드시 그분만의 신비하고 풍성한 뜻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면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셨고 그 모든 어려움들이 결국은 신자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믿음을 견고케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그런 체험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하나님이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구나를 깨닫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이 어떤 출발 점에 세우시고 특정한 일을 마련해 놓고 내가 방향을 완전히 잡아 출발 준비를 해 주기만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쉼을 얻으려면
결론적으로 말해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은 마음이 이미 바꿔진 상태입니다. 서두에서 알아 본 대로 신자는 하나님이 심어준 마음이 세상에서 겪는 인간적 생각을 지배하게 된 자입니다. 이미 바꿔진 마음이 없이 단지 마음에 쉼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심리학적 Mind Control 요법이거나 자기 최면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는 길로 예수님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가시는 길에 진심으로 자원해서 동참하는 자입니다. 신자의 일을 그분이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을 신자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세상 어느 것도 방해 할 수 없다는 확신으로 이미 마음이 완전히 채워진 자가 신자입니다. 그러니 비록 세상의 것들로 생각에 잠간의 흔들림은 생길 수 있으나 마음에 쉼을 오랫동안 뺏길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 분께 배우고 있기 때문에 이미 마음이 쉼을 완전히 얻은 상태라 마음의 측면에선 더 이상 빼앗기고 흔들릴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적으로는 여전히 소심하고 겁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분을 믿고 경배하는 일에는 신자의 천성과 기질마저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 가는 데에선 모든 신자가 낙관적, 긍정적, 적극적, 능동적이 됩니다. 어떤 환난과 문제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 앞에 더 이상 방해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반드시 그 마음의 상태 즉 주님과 길을 동행하는 모습이 반드시 위에 말한 세 가지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함께 가겠다고 헌신하여 옛날에 가던 길과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여 출발점에 서 있거나, 큰 줄기의 인생의 방향을 정해 나아 가면서 하나님 왕국의 씨를 뿌리고 키우는 훈련과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거나, 구체적으로 자기 일을 통해서 실제로 복음의 열매가 맺히고 수확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셋 다 공통점은 환난이나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일차적인 중심 목표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단지 그 어려움을 제거해달라고 하기 이전에 그 뜻을 묻거나, 자기 일에 도움을 받는 준비와 연단이 되도록 해달라거나, 심지어 하나님 일의 열매로 전환해 달라는 기도부터 합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신앙 성숙의 부수적인 결과로 나타날 뿐입니다.
신앙을 가지는 목적을 문제 해결에만 두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절대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문제가 해결되어도 지금껏 경험했듯이 또 다른 문제가 곧 닥칩니다. 그러나 신앙의 목적을 주님 가시는 길을 따라가며 그 분이 시키는 일만 하겠다고 하면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음의 쉼도 흔들 수 없습니다. 현실의 환난과 문제는 당신의 일을 더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직접 마련한 무대장치요 소도구일 따름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 자는 이미 마음의 쉼을 완전히 얻었습니다. 단지 주님과 함께 걸어간 길의 거리만 다를 뿐입니다. 당신은 지금 과연 이 셋 중 어떤 지점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방향마저 주님의 길쪽으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까?
맘을 붙잡아 주시는 신기한 힘 앞에서 다시 잘못된 생각들을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도록 붙드심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생각과 마음을 이렇게 묘사해 놓으시니 그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맞다, 그렇구나 하며 이해가 되어집니다.
그래도 내 생각이 마구 마구 튀어 다닌 시간들은 부끄럽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