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35) 1/30/2005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어리석은 바리새인들
본문 같이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 기사를 읽을 때에 언뜻 와 닿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너무 율법적, 형식적이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해 보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왜 문제 삼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그렇다 쳐도 예수님이 대응한 것도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이지 특별히 심오한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귀한 것은 어린아이도 알 만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면 기존의 제도와 관습에 조금 어긋나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그칩니다.
성경은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모든 세대의 신자들의 영혼에 대고 개별적으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혼에 대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뾰봉’하고 갑자기 눈 앞이 훤히 밝아지는 신령한 깨우침을 얻게 하거나 하나님과 신자가 방언으로 대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 적힌 모든 내용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영역 즉 영원한 세계에 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존재가 실제로 어떤 것이며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밝혀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정의를 업그레이드(Up-grade)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 자체를 바꾸는 책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표면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논쟁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엄청난 영적인 전투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단은 바리새인들을 조종하고 동원해서 예수님을 대적케 했습니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고 실패케 하려는 음모를 진행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무당처럼 직접적으로 귀신이 들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아가 그들의 상식이나 지성이 모자랐거나 흔히 생각하듯이 위선적, 형식적, 독선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신자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된 사단의 희생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몰라 자신의 구세주로 소유하고 있지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영적인 소경이며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지 그래서 끝까지 완악하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있다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로 떨어진 것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불신자들의 대표이며 예수를 믿기 전의 바로 우리 모습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바리새인
사단과 예수님과의 영적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 봅시다. 10절에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의도적으로 고소할 거리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인 ‘미쉬나’에 따르면 사람이 목숨이 위태할 때는 안식일에 치료해 주어도 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졸도했다든지 팔다리가 잘려 피가 쏟는데도 안식일이니까 죽도록 내버려 두는 그런 몰상식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문제 삼고 있는 병이 무엇입니까? 손이 마른 것입니다. 피가 잘 안 통해 마비가 와서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입니다. 당장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에 구태여 안 고쳐도 되는 병입니다. 지금도 주일에는 종합병원 응급실이 아닌 병원은 다 문을 닫고 의사들도 교회에 와 예배 보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만 일방적으로 야단 맞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쳐 주기 전에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먼저 병자를 고쳐 주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바리새인들이 따져 봐야 이미 좋은 일이 벌어진 후입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안식일 규정 위반한 것이 그 이적에 파 묻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집니다. 또 일반 대중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미쉬나’ 규정을 구체적으로 다 외우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미리부터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해 가만히 있는 손 마른 자를 골라 내어 율법에 관한 논쟁을 하자고 일종의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그들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주 교묘한 이중적인 덫이 그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쳐주면 “자! 보아라. 생명이 위태롭지도 않은데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 안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위반했지 않은가?”하고 추궁할 속셈이었습니다.
만약 고쳐주지 않으면 예수님이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7절)고 가르쳐 놓고 실제로는 불쌍한 자를 외면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로 공격할 참이었습니다. 이런 정도의 병도 고칠 능력이 없는 자가 자기들 보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지적해놓고 어떻게 그 짐을 쉽고 가볍게 해 줄 수 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는가라고 비난할 작정이었습니다. 나아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쉬도록 하는 것이 어찌 수고와 짐이 되느냐고 자기들 가르침을 변호할 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쳐도 걸리고 고쳐 주지 않아도 걸리게끔 덫을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잘못을 정죄하는 인간들
인간은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하며 추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에레미야 선지자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한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썩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지금으로 치면 목사, 국회의원, 판사, 대학교수 다 합친 정도에 해당합니다. 아는 것이 가장 많고 인격은 고상하며 실제 삶에서 선행과 구제에 아주 열심이라 일반인들은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정도이며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도 일단 자기 자존심, 체면, 위신이 조금이라도 손상되고 이해 관계에 방해 받으면 가차 없이 남을 걸고 넘어집니다.
너무나 치사한 것이 절대 폭력, 사기, 부정한 방법은 동원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와 같은 종교적, 사회적으로 아주 명분이 서는 일로 따집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해버리고 그 상대가 두 번 다시는 자기들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완전히 생매장 시켜 버립니다. 옳고 정당한 일과 절차는 자기들 만큼 잘 아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항상 이길 수 밖에 없습니다. 변호사한테 걸려 이겨낼 자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하나님 일이라고 하는 데 아무도 감히 반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진 피해자라고 꼭 선하다는 법도 없습니다. 좀 억울하게 당한 면도 있겠지만 어쨌든 규정을 위반한 어떤 잘못을 범해서 진 것입니다. 또 그들도 끝까지 독을 품고 저주하며 칼을 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상대가 혹시라도 가진 권세나 재물이 줄어 별 볼일 없게 되면 절대 찬스를 놓치지 않고 복수하는 모습은 더 악랄합니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에게 피해가 되지 않고 체면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 얼마든지 천사로 가장하거나 실제 천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기 이익이 깎이면 순간적으로 최고의 악마로 돌변하는 신출귀몰한 존재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뜻이 바로 이렇게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가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까발려 적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인간은 선하므로 도덕적 인격적으로 수양하면 스스로도 신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지어낸 신이자 그 경전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다릅니다. 인간이 썩어 냄새가 진동하며 죄악을 향해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신나게 달려 간다고 적어 놓은 유일한 경전입니다. 인간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책이라 그렇습니다. 지금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감히 시험하려 들지 않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인간이 정죄하려고 덤빌 만큼 인간은 썩어 있습니다.
탁구공을 되넘긴 예수님
바리새인들이 파 놓은 함정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양과 사람의 가치를 비교했습니다만 단순히 상식에 근거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엄격하게 율법대로 사는 쿰란 공동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양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빤지를 넣어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안식일에 노동해선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은 더 세밀했습니다. 양이 안식일을 굶지 않고 견딜 만큼의 식량을 넣어 주었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건져 내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물 웅덩이나 늪에 빠져 양이 죽게 되었으면 안식일이라도 직접 건져 내어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면 고쳐주든 안 고쳐주든 그들의 흉계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음흉한 심중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율법 규정을 역으로 인용하여 너희들도 양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느냐 그럼 양과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귀한가 생각해 보라고 따진 것입니다. 예수님쪽으로 넘어온 탁구 공을 그대로 저들의 코트로 되돌려 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당신의 말대로 제대로 자비를 베푸는지 시험해보자고 덤비는 자들에게 과연 어떤 자비가 참 자비인가 따져보자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대로 안식일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리기 위한 것이지 않는가 과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인가” 판단해 보라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외경에 따르면 이 때의 손 마른 사람은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손으로 벌어 먹고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그룹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유대인들은 손으로 벌어 먹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손으로 밥 벌이 하는 기술을 의무적으로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굶지 않고 부자로 사는 까닭입니다.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석공의 손이 말라 일을 못해 굶는다면 그것을 고쳐주는 것만큼 급하고 선한 일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습니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0절)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 틀린 일이지 않는가 입니다. 영어로 따지면 Right or Wrong 더 정확하게는 Correct or Incorrect 인가 물었습니다. 사단도 시작할 때는 자기 얼굴은 감추고 항상 옳고 맞는 일로 시험하고 유혹하지 더럽고 추한 일로 본색을 바로 드러내는 법은 없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그 목적과 의도를 준수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뜻은 선을 행하는 데 있지 선은 행치 않고 규정만 지킨다고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친 그대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어로 쳐서 “Good or Bad”의 차원으로 바꿔 그들의 흉계가 힘을 못쓰게 하시면서 오히려 그들더러 과연 너희가 제대로 참된 선을 행하고 있는가 되물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양은 살릴지언정 손 마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해진 규정만 안 어기면 인간으로서 할 바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으니 나는 의롭다라고 자신하는 불신자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생각이 있는가 또 그렇게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를 따졌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도 양을 살리는 이유는 자기 재산에 당장 손해가 가지만 남이야 손이 말라 가게 문을 닫든 말든 자기들 먹고 사는 것에 아무 지장이 없으니 상관 안 하겠다는 심보가 아니냐고 물은 것입니다.
에레미야 선지자가 만물 중에 인간의 마음이 가장 부패했다고 한 것이 사람이 탐욕과 음란에 젖어 항상 죄악을 궁리하고 결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물이 썩는다는 것은 그 본질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에 활력이 넘쳐서 본연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썩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각각 그 창조된 목적대로 고유의 직분을 어긴 적이 없는데 오직 인간만은 그 목적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최후의 카운터 펀치
예수님과 사단의 싸움이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예수님 최후의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는 남아 있었습니다. 13절에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고”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손 끝도 움직이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만 치유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노동을 했느냐 아니면 쉬었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수술도 하지 않았고 약도 바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안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만으로 그것도 단 몇 마디에 고쳤습니다.
사단은 너무 영악합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장 똑똑했던 바리새인들조차 꼼짝 못하고 조종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단이 처 놓은 삼중 사중의 그물 망에 털끝 하나 스치지 않고 빠져 나가심으로 스스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손 마른 병을 고치는 것으로 당신 되심을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셨고 죽은 자도 살리며 자신도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자기가 지은 피조 인간의 혈관이 조금 막힌 것을 뚫어 주는 것 정도는 전혀 대단할 것 하나 없습니다. 자동차를 설계하고 제조한 포드가 타이어에 바람이 조금 빠진 것을 고친 정도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의 최고 중심까지 관통해서 보셨고 또 그 배경에 있는 사단의 흉계마저 완전히 분쇄하셨습니다.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힘으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당신만이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분 앞에는 인간의 어떤 고매한 인격도, 심오한 사상과 철학도, 경건한 종교 등 모든 것들이 단지 휴지조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의 의는 누더기에 불과하며 그 존재도 버러지와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잘못을 지적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그분도 한 명석한 비평가로 인간의 죄를 정죄한 검사의 역할만 한 것이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인간의 모든 죄와 고난과 분노와 슬픔과 시련과 상처까지 다 감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바꿔서 더 이상 썩지 않는 마음으로 심어 주셨습니다. 인간을 참 인간답게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분이 감당한 죄 중에는 심지어 사단에 속아 넘어가서 안식일에 율법대로 지키는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옳고 선하다고 자랑한 바리새인들의 죄마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는 그들이 너무나 어리석고 더 안타까웠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바리새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이 바로 사단의 흉계에 넘어간 것임을 모르고 한 것이니 오히려 그 죄마저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중보해 주는 변호사의 역할까지 하셨습니다.
나아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생전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으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시고”(롬5:4)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십니다”(롬5:8) 예수를 믿음으로 구주로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로 선고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판사의 역할까지 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정죄 받고 그 죄인은 변호되어 용서 받으며 죄의 대가로 형벌을 감당하는 판결까지 오직 십자가의 공로였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만 달렸는데 예수님이 그 죄를 위해 검사, 변호사, 판사의 모든 역할을 감당하셨기에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메시지
성경이 신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잘 믿으라, 절대자에게 소원을 빌어라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기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 바로 곁에 임재해 계셔서 성령을 통해 직접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신령하고 영원한 영적인 존재로 지어졌고 그러기에 각자를 위한 당신의 영원한 계획과 뜻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이 땅에는 어둠의 영적존재 사단이 분명히 설치고 다니면서 모든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고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자리에 설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사단의 영에 사로 잡혀 죄악의 종 노릇하고 있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단의 종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통해 신자에게 항상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이것 하나 뿐입니다. “너희의 영혼이 예수의 영으로 채워져 있는가? 너희의 전 존재가 예수를 알기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는가? 그래서 평생을 걸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기로 헌신했고 그렇게 따르고 있는가?”
그런데 신자가 예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기도 뜨겁게 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교회 봉사를 성실히 하는 것입니까?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직도 나는 나쁜 짓 안 했으니 옳은 교인이다라고 자부하고 있는 지부터 따져 보아야 합니다. 신자가 주일에 짜장면 사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목사에게 물어 보는 뜻이 무엇입니까? 규정에 위반만 안 하면 선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면 안 된다고 따지는 것에서 단 한 칸도 나아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나쁜 짓 안 하는 존재로 짓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당신 대신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자신을 닮아 신령하고 거룩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원죄로 그 영혼이 부패한 상태에선 사단의 종 노릇 하기에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나쁜 짓만 안 하면 전부인 줄 압니다. 불신자들은 남에게 나쁜 짓 하나 한 적 없고 기독교적으로도 십계명을 위반하지 않았으니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신자란 죄를 행치 않았으니 선이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치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알게 된 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주위를 섬겨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부름 받은 자입니다. 그 일에 헌신하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뜻과 계획을 알면 알수록 신자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신자가 속해 있는 모든 집단에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을 실현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일에 자신의 전존재, 전삶, 전인생을 완전히 걸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참신자라면 아침마다 기도할 때에 오늘도 큰 어려움 없도록 지켜 보호해 주시고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을 해결해 주시고 이런 저런 소원하는 일들 이뤄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먼저 나와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에게 시키는 모든 일을 통해서 주님이 계획하신 복음의 열매가 당신의 때와 방법대로 맺히고 그래서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자기 생명마저 걸 정도로 진정으로 소원해야 하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매사에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근거가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자신이 평안하고 즐기고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를 따르면 절대 사단이 훼방하거나 걸고 넘어지지 못합니다. 반면에 예수를 멀리하는 순간 그 음흉한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신령한 신자도 없습니다. 오직 그 속에 예수님의 영이 충만할 때만 신자가 이 땅에서 썩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일 논쟁이 어떻게 결론지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지적에 바리새인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논의하거늘.”(14절) 지금으로 치면 목사들이 조금 창피 당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려 든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 하나 없이 선한 일을 베푼 자를 말입니다. 손 마른 병자가 나은 것에 관해선 한 마디 감사나 축하조차 아예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저들에게 비취지 않았고 그 배후에는 사단이 죄악의 사슬로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를 알기 전의 우리 자신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예수의 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중국 영화에 나오는 대낮에는 시체이지만 밤만 되면 설치는 강시(疆屍)와 같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영이 그 속에 없으니 죄악과 쾌락과 일신의 형통을 위한 일만 생기면 갑자기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젓 먹던 힘까지 동원해 깡충깡충 뛰어 다닙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수를 믿는 신자입니다. 눈 앞의 환난과 고통을 빨리 없애주지 않으면 솔직히 우리 마음 속에서 얼마나 자주 예수를 죽였다 살렸다 하는 모의를 합니까? 우리가 봐도 한심하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그런 죄 된 생각을 없애야 합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님께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의 영으로 충만해지지 않고는 신자 또한 순간순간 사단이 파 놓은 덫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신자란 위대한 사도 바울마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라고 한탄 했던 그 고백을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드릴 수 밖에 없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은 단 한명도 예외 없이 예수님의 영과 사단의 영 둘 중 하나에 사로 잡혀 있으며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예수님이 하신 일과 사단이 한 일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옳고 그른가(right or wrong)가 아니라 선한가 나쁜가(good or bad)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선에 대해 외면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당신의 말대로 제대로 자비를 베푸는지 시험해보자고 덤비는 자들에게 과연 어떤 자비가 참 자비인가 따져보자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대로 안식일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리기 위한 것이지 않는가 과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인가” 판단해 보라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그 목적과 의도를 준수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뜻은 선을 행하는 데 있지 선은 행치 않고 규정만 지킨다고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친 그대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어로 쳐서 “Good or Bad”의 차원으로 바꿔 그들의 흉계가 힘을 못쓰게 하시면서 오히려 그들더러 과연 너희가 제대로 참된 선을 행하고 있는가 되물은 것입니다'
이번 강해는 개인적 느낌으로 지금 코로나시대의 일부 한국교회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나 이웃들을 위해 교회의 곳간을 풀어 구제하기 보다는 대면예배를 못하게 한다며 이에 교회신자들을 앞세워 질병통제를 훼방하고 결과적으로 집단발병을 일으키고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는 커녕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음에 안타까움을 넘어서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이 안식일 논쟁이 어떻게 결론지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지적에 바리새인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논의하거늘.”(14절) 지금으로 치면 목사들이 조금 창피 당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려 든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 하나 없이 선한 일을 베푼 자를 말입니다. 손 마른 병자가 나은 것에 관해선 한 마디 감사나 축하조차 아예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저들에게 비취지 않았고 그 배후에는 사단이 죄악의 사슬로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를 알기 전의 우리 자신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는 이를 허락하신 주님앞에 안식일 논쟁과는 다르게 회개하여 주님의 뜻대로 바로 서는 저희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