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138) 2/20/2005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勒奪) 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변화시켜야 할 이 땅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귀신을 쫓아내면서 귀신의 왕의 힘을 입지 않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를 전개해 스스로 귀신에게 조종당하고 있음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본문에서 성령의 권능에 힘 입어 귀신을 쫓는다고 함으로써 당신이 베푸는 모든 이적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전도 여행을 다녀온 70명의 제자들이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보고했을 때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본문 말씀도 단순하게 사단과 하나님 둘 중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는가 해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귀신이 쫓겨 가고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대신에 이런 일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음을 알아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죽어 봐야 천국을 갈지 지옥을 갈지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땅은 번뇌와 고통뿐이므로 벗어나야 할 대상이며 그래서 세상에 대한 모든 인연과 집착을 끊으라고 한다.
기독교는 다르다. 비록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 그 집을 늑탈했다. 원어적으로 늑탈이라는 뜻은 그 집의 가구 같은 소유물을 하나씩 밖으로 끌어 낸다는 뜻이다. 예수님 오시기까지 사단의 종이 되었던 인간을 십자가에 흘리신 당신의 보혈로 구출해 내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라면 천국 같은 삶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이 땅은 벗어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천국으로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다.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신자가 스스로 심각하게 물어 볼 질문은 과연 현재의 삶과 인생이 천국으로 바뀌어져 있는가다. 혹시 직장과 가게에서 가뜩이나 짧은 영어 때문에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고 또 집에 오면 아이들 앞으로 돈 들어갈 일만 생겨 염려와 짜증이 끊이지 않고 있는가? 마누라는 바가지만 긁어대고 그래서 도대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라 제발 단 며칠이라도 짬을 내어 어디 조용한데 가서 푹 쉬는 것 외에 다른 소원이 없는가? 그래서 도저히 천국의 문턱에도 못 가본 것 같은가? 대다수의 신자가 불신자 시절에 갖고 있던 천국에 대한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크루즈 타고 카리브해의 외딴 섬에 가서 시원한 야자나무 그늘 아래에 드러누워 맹고 주스 마시며 아무 하는 일 없어도 먹고 사는 것에 걱정 없는 것이 천국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남태평양에 핏케언이라고 화가 고갱이 유토피아로 꿈꾸던 그런 작고 아름다운 섬이 있다. 주민이 다해야 몇 백 명도 안 되는데도 220년이 넘도록 강간, 근친상간, 살인이 성행하는 죄악의 천국이다. 마론 부란도가 주연한 영화로도 소개된 적이 있는데 1789년 영국 군함 바운티호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킨 12명의 주모자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재판에 회부될 것이 두려워 작은 섬에 들어가 천국처럼 살기로 하고 정착한 곳이었다. 정말 먹고 마시는 것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오직 하는 일이라고는 섹스에 탐닉하는 것뿐이었고 몇 안 되는 사람 사이에 질투가 번져 살인하는 일만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 걱정 없으면 심심해지고 그 다음에는 미치게 마련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인생 말년을 로마 감옥에서 보냈다. 당시는 죄수 한명에 간수 한 명이 붙어 함께 족쇄를 차고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간수가 보는 앞에서 해야 했다. 행동의 자유는 전무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가 주제인 빌립보서를 저술했다. 또 네로의 이차 박해 때는 처형을 기다리며 로마의 그 악명 높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서너 평 남짓한 방에 20명이 넘는 사형수가 함께 기거하며 그 방에서 식사하고 대소변을 처리했다. 하수구와 바로 연결되어 있어 쥐가 들락거리고 온갖 전염병으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지옥이었다. 그런데 그런 방에서 그것도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이라고 확신하며 디모데 후서를 기록했다.
핏케언 섬의 외부 환경은 천국이었지만 그 주민의 삶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처한 환경은 지옥이었지만 이땅에서부터 이미 천국을 누렸다. 천국이란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곳만이 아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형통하는 것이 없어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 차 “예수 안 믿는 저 쌍놈들이 지금은 아무리 떵떵거리고 살아본들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지지만 나는 천국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어”라고 위로하며 마치 세상을 초월한 양 살다가 마지막으로 도피하듯 가는 곳이 천국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어도 한창 잘못 믿었다.
예수는 인간이 믿기로 결심하고 교리를 배우고 노력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간섭해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믿어진다. 본문 말씀대로 예수님이 사단을 묶은 후 그 집에 종 노릇 하던 죄인을 꺼내 주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며 그래서 그 구원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영원토록 보장되며 차후에 취소되는 법이 없다. 말하자면 죽은 후에는 따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그 상태가 이어지는 것 뿐이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천국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는 절차가 따로 필요 없다. 역으로 말하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한 자는 죽어도 천국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행의 의미조차 모르는 신자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린다는 것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임금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면 된다. 신자 가운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싶은가? 그럼 왜 우리 대부분이 천국처럼 살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신자들이 그저 생각만으로 하나님은 왕이고 나는 그 백성이라고 간주하고 있는데다 그 생각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왕이라고 해서 신자에게 무조건 일방적으로 어려운 일만 갖다 맡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와 동행(同行)하길 원하시는데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실제로 동행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동행이라는 뜻조차 모르고 있다. A.W. 토저 목사가 쓴 ‘세상과 충돌하라’는 책에 동행한다는 의미를 잘 정의해 놓았다. 그 정의에 기준하여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로 하자.
동행의 뜻이 무엇인가?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뜻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한 길을 가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함께 가기로 진심으로 합의해야 한다. 쉬운 예로 부부가 결혼 서약을 어떻게 하는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에도 함께 하며 죽음이 둘을 갈라 놓기 전에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초점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또 그 서약은 쌍방 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진다. 상대가 힘이 빠져 있으면 내가 그 힘든 쪽에 같이 가 있어 주어야 하고 내가 힘이 들면 상대도 내 힘든 곁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신자도 연약하며 불완전하므로 때때로 “이렇게 내가 힘들 때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어디서 주무시고 계시나?”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함께 계신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실 리는 절대 없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신자쪽에서 힘이 드니까 하나님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무엇보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기꺼이 하나님과 함께 가겠다고 합의해야 한다. 아니 합의만으로는 약하다. 진정으로 온 힘을 다해 소원하고 갈망해야 한다. 인간끼리 동행은 일방적으로 혹은 쌍방의 과실로 서로 손해 볼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동행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신자를 향한 뜻과 계획에 절대 잘못이 없다고 믿는다면 왜 우리의 전부를 그 분께 완전히 내어드리지 못하는가? 또 그 내어드리는 것 중에는 우리가 중병에 걸린 것이나 사업이 부도난 것이나 심지어 생명마저 포함되어야 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신자가 사실은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진심으로 동의한 것이 아니다. 신자가 가고 있는 길로 하나님이 따라 올 때만 나도 하나님과 함께 가겠소라고 조건부 동행의 계약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신자쪽의 일방적 생각만으로 말이다.
두 사람이 동행하기로 합의 했다면 그 다음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같아야 한다. 나는 너랑 같이 여행을 하고 싶은데 너는 산으로 가고 나는 바다로 간다면 친구 사이는 변동이 없지만 동행이 아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함께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를 하나님과 함께 정해야 한다. 죽은 후에 천국은 누구나 간다. 이 땅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 나아가 구체적인 소명을 확립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디로 이끌고 가실 것인지, 어떤 사람으로 바뀌길 원하시는 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소유하고 또 그 해답에 따라 살고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날 교회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일생을 그 분의 뜻에 따라 꾸려가겠다고 헌신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기도해도 된다고 해서 목적지도 정해 놓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뤄달라고 빌어선 안 된다. 신자가 현재 목표로 하고 있는 일이나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이 도달하는 최종 도착지까지 하나님이 틀림 없이 함께 가주실 것이며 그 이뤄낸 결과를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모로 가면 서울 못 간다
하나님과 함께 가기로 소원하고 목적지도 정해졌다면 다음 단계로 거기까지 가는 방향과 방법을 택해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식은 사단에게 속아 넘어간 다른 종교에서 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오직 골고다 언덕으로 이끌며 십자가의 진리로만 다스린다. 다른 방향과 방법은 절대 없다.
부산서 서울로 가면서 배를 타고 남해와 서해를 거쳐 인천으로 해서 간다면 방향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는 것이며 방법은 배다. 발 닿는 대로 팔도를 유람하며 가겠다면 방향은 갈 지(之)자요 방법은 도보다. 그럼 하나님은 신자를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 어떤 방향으로 이끄시는가? 신자를 사랑하니까 신자에게 가장 편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신나는 방향인가? 아니다. 신자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이다. 나아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방향이다. 현실적으로 편할지 고될지, 빠를지 느릴지, 신날지 슬플지 모른다. 그 어떤 모습이 되었던 영원토록 변동될 수 없는 방향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신자에게 반드시 선이 되는 쪽으로 이끈다.
또 하나님의 방법에는 거짓, 사기, 부정, 죄악이 단 한치도 개입되지 않는다. 오직 선하고 거룩하며 정직하고 의롭고 순수한 길로만 간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쓰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나마 신자의 정성과 열심이 포함되었다면 당장 벌을 주지는 않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신자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사람과 똑 같은 목적지를 향해 세상의 방법으로 살기 원하면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축복을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망상에 불과하다. 이 때도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 자체를 취소하지는 않겠지만 신자의 이 땅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고 단지 내재만 할 뿐이다. 그것도 완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재하므로 신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그 삶이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갈 의사, 목적지, 방향, 방법에 합의했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어쩌면 신자들이 가장 잘 넘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함께 가는 속도를 정해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고 현재 기도하는 제목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임을 확신하는데도 왜 빨리 응답이 안 되나 하고 조급하게 굴면 동행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는 예수님마저 성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했지 않는가? 신자는 부산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한 시간 만에 가고 하나님은 고속버스로 6시간에 가면 비록 목적지는 같아도 동행이 아니다. 벌써 가는 방법이 다르지만 신자가 가는 속도에 먼저 신경을 쓰다 보면 자연히 세상적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다른 모든 조건이 만족되었는데도 기도가 빨리 응답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 도대체 언제 그 기도가 응답이 되는가? 40일 작정기도가 끝이 나면 응답되는가? 금식하면서 정말 간절히 울부짖으며 기도하면 되는가?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석하면 되는가? 그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전도서 기자는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3:1)라고 했다. 하나님의 목적이 충만하고도 완벽하게 이뤄지면 자동적으로 응답이 된다. 반대로 그 목적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응답이 안 된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은 범사에 영원하며 신실하고 완전한 하나님만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신자를 향해 갖고 있는 당신의 생각을 절대 중간에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토기장이신 그 분이 토기인 우리를 당신이 디자인한 대로 반드시 완성시키고야 말지만 흙을 빚어 무늬를 새기고 색칠하고 유약을 발라 불에 굽어내는 모든 절차는 하나 빠짐 없이 다 거치게 한다.
왜 빨리 기도가 응답이 안 되나 조급해 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드러날지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간구 속에 신자의 욕심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니면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못 믿거나 잊고서 자꾸 자기 스케쥴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려 노력하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다.
신자가 비행기 타고 한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해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고속버스 타고 오는 하나님이 왜 빨리 안 오나 안절부절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바보짓이다. 5시간 후에는 반드시 나타난다. 그 동안에 호텔 사우나에 가서 느긋하게 쉬고 있으면 되는데도 그러지를 못하니까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까지 함께 갈 용의가 있는가?
이제 우리 모두 솔직히 다시 자문해보자. 현재 나의 삶이 천국 같다고 확신하는가? 만약 아니라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 진정으로 함께 갈 용의가 있는가? 바울이나 다윗이 겪었던 것처럼 평생 동안 힘든 일의 연속이라 해도, 세상에서 이름과 빛도 없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더라도, 단 한시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가 가는 곳으로 하나님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목적지를 정했는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고 사단에 묶여 있는 단 한명의 영혼이라도 예수 앞에 나와 무릎 꿇고 그리스도라 시인케 하는 일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 있는가? 그래서 그 일을 위해 내가 처한 환경과 직업과 모든 가진 것을 동원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런데 그 일을 어떤 방향과 방법으로 할 것인가? 어떤 악도 모양이라도 버리며 하나님의 길과 방법이 아니면 절대로 취하지 않을 준비가 되었는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의 동상에 절하지 않아 당장 죽을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고 또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대로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극렬한 풀무불에 뛰어든 것처럼 할 자신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내가 정해 놓은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이뤄질 것을 설렘과 기쁨으로 기대하고 있는가? 조지 뮬러가 불신자 친구의 구원을 위해 평생을 두고 기도했고 그래도 믿지 않았던 친구를 죽은 후에도 구원해 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하며 죽었더니 정말 그대로 된 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평생을 걸고라도 기다릴 태세가 되어 있는가?
너무 어렵고 거창한 것 같은가? 그럼 가장 간단하면서 실제적인 예로 바꾸어 점검해보기로 하자. 신자의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각자의 가정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정조차 천국으로 바꾸지 못하면 어떤 다른 사회 집단에 나가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허구한 날 부부 싸움만 한다고 소문났다면 아무리 교회의 장로요 집사라도 그 부부의 전도가 씨가 먹힐 리 없지 않겠는가?
가장 먼저 부부가 정말 끝까지 함께 갈 용의가 있는가? 어떤 힘든 장애가 가로 막더라도 심지어 배우자가 나를 속이고 부정을 저질러도 천국까지 함께 갈 용의가 있어야 한다. 신자 부부는 세상 부부와는 정 반대로 살아야 한다. 세상 부부는 현실에 형통해야 마음이 하나가 되지만 신자 부부는 마음이 먼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고 해서 종교적 의무감이나 윤리적 책임감으로 하나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천국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라는 인식이 확고하기 때문에 그 영이 먼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또 부부가 가정을 꾸려 나가는 목적지는 어디로 정했는가? 벤즈 승용차에 백만 불 짜리 저택(House)인가 아니면 예수님 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Home)인가? 그곳으로 가는 방향과 방법은 또 어떻게 잡고 있는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을 자존심과 고집이 주장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에 내어 맡기는가? 자녀들도 내가 실패 했던 것들의 한풀이를 이루기 위해 의사 변호사 시켜 떵떵거리며 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예수를 잘 믿는 참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달라고 하나님께 맡길 것인가?
마지막으로 목적지로 가는 속도를 어떻게 맞추었는가? 상대가 변화되지 않는데 나만 먼저 숙일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면서 버티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먼저 양보하고 용서를 구하되 상대가 바뀔 때까지 끝까지 기다려 줄 용의가 있는가? 청소년기의 자녀들이 나쁜 친구들과 방황하고 있다면 당장에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뜯어 고치겠다고 덤비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님이 그 영혼에 간섭하여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것 한 번만 봐주시면…
어쩌면 가정을 천국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기준조차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정말 간단한 한가지 기준만으로 우리가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닌가 점검해보자. 기도할 때에 솔직히 잠재의식 속에 어떤 마음을 갖고 하는가? 혹시 “하나님! 이번 한 건만 좀 봐주시면 제가 다음부터는 알아서 기겠습니다”가 아닌가? 이번 이일만 봐주시면 다음부터 잘 알아 하겠다는 것은 지금까지 제대로 잘 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 본적이 없다면 그 나라 백성이 아니다. 당장 그렇게라도 기도해야 하는 바로 그 문제에 목이 매달려 있는데 그 삶이 천국일리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과연 그런 기도를 응답하시겠는가?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속임수이자 거짓말이다. 신자가 급하지도 않은데 급한 것처럼 거짓으로 간구했다는 뜻이 아니라 응답이 된다고 해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서약대로 알아서 길 리가 없으니 하나님께 사기 치고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그런 속임수에 절대 넘어갈 리가 없다.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올 때 다른 것이 인간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지 못해 한두 번 정도는 거짓인줄 알고도 일부러 속아주는 경우가 있다. 그 한두 번조차 안 들어 주면 하나님을 완전히 외면하고 교회마저 안 나올까 그런 것이다. 신자가 평생에 그 한두 번의 은혜만 바라 보고 신앙 생활 한다면 천국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신자에게 무슨 일이든 절대 강요하지 않으신다. 신자 쪽에서 동행할 준비를 기쁜 마음으로 먼저 갖추기를 기다려 주신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가 완전히 갖추어지면 비로소 하나님은 움직이기 시작하며 신자가 기대하고 예상 했던 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목적지까지 가도록 하나님이 앞장 서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당신이 뒤쳐지는 법은 없다.
이 네 가지 준비를 한 마디로 하면 신자의 삶과 존재와 인생을 완전히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그 전부가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주님의 방법과 때에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할 때에 “이번 한번만…”이라는 마음이 없어지면 된다. 대신에 기도할 때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오니…주여 뜻 대로 하소서 그래서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라고만 하면 신자의 삶과 인생을 반드시 그 분이 천국으로 바꿔주신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바로 이 네 가지 준비에 대한 생각이 자꾸 흐트려지고 다른 것들에 방해 받으면 본래의 준비 태세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다. 또 기도란 그 네 가지 준비 상태를 스스로 점검해 보는 일이다.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성령님께 자기를 준비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이제 출발하겠으니 주님더러 나를 이끌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 지옥 같은 지하 감옥에서 천국의 기쁨을 갖고 기록한 디모데 후서의 구절로 오늘의 결론을 삼기로 하자. “미쁘다 이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一 向)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리라.”(딤후2:11-13)
주님은 일향 미쁘시다고 했다. 주께서 신자를 이끌고 가는 목적지, 방향, 방법, 때 모든 것이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 뿐이라는 뜻이다. 신자가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을 그 미쁘신 주님을 믿고 드릴 때에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 준다고 한다. 그 때 신자는 이 땅에 임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순간의 제사..진정과 신령한 마음의 제사..
바로 이순간 마음을 바로 해야할 것입니다
너무 놀랍습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