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1-3)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
미친 사람이나 정신 병자의 일반적인 특징이 무엇인가? 침을 질질 흘리고 눈에 초점이 없고 엉뚱한 말을 하며 돌발적 행동을 하는 것인가? 단지 그런 외형적인 특징만으로는 미쳤다고 할 수 없다. 얼마든지 재미로 엉뚱한 말을 하며 돌발적 행동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심지어 멀쩡한 사람이 일부러 눈에 힘을 빼고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척하기도 한다.
성경에도 좋은 예가 있다.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적국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서 거짓 투항을 했다. 그것을 눈치챈 가드의 신하들이 다윗에게 속지 말라고 왕에게 권하자 위험을 감지한 다윗이 미친 척 했다. “그 행동이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 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올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삼상21:13,14)
말과 행동이 비정상적이라고 해서 다 미친 사람이 아니다. 모든 미친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행동은 이상하게 하면서 절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친 것을 정의하자면 말과 행동이 자기 생각과 따로 노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은 예수 믿는 신자다. 그 이유가 신자들이 모든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거나 모여서 박수 치고 찬양할 때에 뒤로 넘어가기도 하고 보통 사람이 알아 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다. 유독 기독교에 가끔 요란스럽게 믿는 자들이 있어 보통 사람 눈에 광신자 내지 맹신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멀쩡한 정신에서 나오는 행동이므로 정도가 좀 지나치다고 할 수는 있어도 미쳤다고 까지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 말씀은 기독교의 문외한들 조차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인 만큼 신자는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성경으로, 설교로, 책으로 너무나 자주 접하는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 또 잘 아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말로 남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면도 한다.
그런데 과연 신자가 자기가 믿는 대로 말한 대로 실천하는가?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고, 남의 눈의 티끌은 안경 안 끼고도 잘 보여도 내 눈의 들보는 현미경을 갖다 대도 안 보이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썩어 없어질지언정 내 곳간에만 쌓기 바쁘고,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바로 막으면서 상대편 뺨을 왕복으로 때려야 겨우 반분쯤 풀리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은 아닌가?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각각 따로 놀면 이중으로 미친 정도가 아니라 삼중으로 미친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반적인 정신병자보다 더 질이 안 좋게 미쳤다. 미친 사람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자기 스스로 자기의 정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비정상적 말과 행동이 무의식 중에 행해지는 경우가 거의 전부라 그 행동의 와중에나 지나고 나면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저질렀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신자는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말과 행동이 생각과 따로 놀고 있다. 이런 경우는 사실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사기꾼이다.
신자가 전도를 하다 보면 불신자로부터 가장 자주 듣는 이야기 중에 어떤 것이 있는가? “예수쟁이들은 말만 앞서고 행동은 딴 판이라 죽으면 입만 동동 뜰 거야. 교회 장로라고 해서 돈 빌려 줬더니 제일 먼저 돈 떼 먹고 이자도 안 주더라.” 무슨 말인가? 위선자, 사기꾼 나아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고의적으로 악의를 갖고 그런 것이 아니고 돈이 원수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신자가 아니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 한대로 최소한 지켜야 하는데 예수 믿는 신자라면 더더욱 선해야 한다.
3세기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초대 교부 중의 한 사람인 오리겐(Oregen)은 스스로 거세하여 고자가 되었다. 마태 복음 5장 27-30의 말씀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신자(信者, 믿는 자)란 믿는 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 믿기는 믿되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초대 교회의 일반 신도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모라비안 형제단 등 말과 행동이 믿음과 일치한 믿음의 선배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들에 비해 우리는 어떠한가? 불신자들의 공격 대로 사기꾼인가 위선자인가 미친 사람인가? 알면서도 행동을 따로 하니까 일부러 미친 척 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이 신자를 평가할 때 자주 듣는 말은 “예수 믿는 것들이 우리 보다 더 해”일 것이다. 도저히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우리 말과 행동이 고의로 예수를 안 믿으려는 것처럼 저들에게도 비춰졌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우리하고 똑 같네” 수준도 안 되니 언제 “예수 믿는 분들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시네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라(마10:32)는 것이 무조건 장소나 시간을 불문하고 박수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예수쟁이의 냄새를 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신자를 어떻게 보는가에도 달려 있지 않다. 저들이 우리더러 무슨 말을 하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귀를 막고 안 들으면 된다. 지금 껏 해온 대로 행동은 나중 문제고 잘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꿰 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로따로 놀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도 계속해서 미친 척할 배짱이 있는가?
부끄럽지 않은 사기꾼
그러나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예수 믿는 신자들은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되어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신자는 우리 심령의 밑 바닥까지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기꾼처럼 비춰져도 되고 어쩌면 그렇게 평가되는 것이 참 신자다. 오리겐이 스스로 고자가 된 것과 불신자들이 신자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것이 산상수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산상수훈에 대해 참으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오해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산상수훈을 단순하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요구하는 윤리적 계명으로만 이해한다. 모든 종교에는 신자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고유의 엄격한 도덕률이 있는데 산상수훈 또한 동일한 종류로 보는 것이다. 특별히 내용적으로 다를 것이 없고 다만 타종교의 그것에 비해 좀더 고급하고 심오한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점수로 따지자면 다른 종교의 윤리는 60-70점이라면 기독교는 최하 80-90점 정도는 된다고 친다. 그런 평가를 내린 근거의 한 예로는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들 수 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당시에 종말론적으로 자기들만이 남은 자라는 사상을 가진 쿰란 공동체에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적은 있지만 타 종교에서 구체적으로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아마 타 종교나 유대 율법사들은 원수를 대적 내지 저주하지 말고 심지어 용서해 주라고 까지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해주라고 한 것은 분명히 용서와 사랑의 차원에서 두 세칸 앞선 것이다.
소극적으로 자기 인격과 품성을 개발하여 선과 의를 행할 준비로 갈고 닦는 수준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남을 위해 희생해가며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처럼 살지 못하는 신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위선자라고 비난을 받게 되고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상수훈을 표면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산상수훈이 “정말로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라면 이런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도록 노력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예수쟁이, 사기꾼, 위선자, 예수 믿는 것들 같은 소리 안 듣도록 하라. 바리새인들 보다 더 완벽한 윤리적 삶을 살아라”는 기독교 특유의 윤리적 계명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베푸신 근본적인 뜻은 따로 있다. 2절에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입을 열어”라고 표현된 것은 원어상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작심하고 하셨다는 뜻이다.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에서 모든 인간이 들어야만 할 말을 지금부터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로 천국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7장 21절 이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해서 천국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즉 산상수훈은 예수 믿는 자는 이렇게 살아라고 권하거나 명령하는 윤리 지침의 차원을 넘어 처음부터 끝까지 본질적으로 천국에 관한 설명이다. 윤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하고 천국이 그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하고 확실히 해둘 것은 이 말씀 대로 살면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나 방법으로 주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래 그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했더니 어떠하더냐? 제대로 되더냐? 그렇게 살 수 있는 마음과 의지와 자신과 능력과 끈기가 뒷받침을 해 주더냐? 너희가 정말 오리겐처럼 스스로 고자가 되기를 자청해 음욕을 통제할 수 있는 도덕성과 지성과 믿음과 영성이 너희 속에 확실히 있더냐? 이 말씀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네 오른 쪽 눈을 파내어 버리고 싶고 네 오른 손을 찍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냐 안 생기더냐? 너희 마음 속에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이 동하지 않는 자 있더냐? 너희 중에 사촌이 논을 샀는데 배가 아프지 않는 자 있더냐? 너희 중에 형제를 바보라고 미워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자가 있느냐?.” 신자가 노력하고 훈련하면 쉽게 지켜져서 인격과 품성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수신서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더라는 것을 깨달아라고 주신 말씀이다.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 되어 있지 않지만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이 모든 인간에 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젊은 부자 청년처럼 내가 모든 계명을 지켰으니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큰 소리 칠 셈이더냐?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수준까지 갔느냐? 모든 소유가 없어지더라도 천국과 영생을 소원하느냐? 네가 네 스스로 감히 율법을 지킬 수 있고 네 의지와 교양과 도덕성으로 지킬 수 있는 산상 수훈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천국을 보지 못한다.”
신자더러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르고 지키라고 준 것은 분명히 맞지만 대신에 그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대로 완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라고 하신 말씀이다. 모든 인간이 뼈저리게 느끼는 대로 인간의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 내지 열심과 실제 우리 행동 간의 모순 내지 괴리를 신랄하게 지적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뻔히 못 지킬 줄을 알고 준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람
윤리 도덕적으로 따져서 사람은 두 가지 종류 밖에 없다. 교인으로 치면 산상수훈을 엄격하게 지켜내어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쳐 처럼 성자로 칭송 받는 사람과 교회 다니면서도 시험과 유혹에 빠져 예수쟁이 소리 듣는 위선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또 일반인으로 따져서 원수 나라 일본의 한 이름 없는 사람을 구하려고 지하철에 뛰어 들어 대신 목숨을 잃은 의로운 일본 유학생 청년인가 감방에 갇힌 살인범 사형수인가의 구분도 아니다.
첫째는 “나는 내 양심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고 살고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다.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지켰으니 감히 영생을 내어 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자다. 바리새인들처럼 십일조와 금식과 기도와 구제와 선행에는 둘 째 가라면 서러워 그렇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산상수훈을 고차원적인 윤리 계명이니 자기 같이 남들보다 더 의롭고 착하고 고상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위선자,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의인이다.
나머지는 이에 반해 양심대로 살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모든 노력이 실패한 자다. 도덕 교과서를 따르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해 보지 못한다. 새해가 돌아 오면 올해 꼭 고쳐야 할 것들의 리스트에 삼 사십 개씩 적어 보지만 3-4일도 지나지 않아 하나도 고치지 못하고 유야무야 해버리고 년 말이면 여전히 그 목록이 유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칠 것이 더 늘어나는 자들이다. 산상수훈대로 살려고 했지만 “도저히 힘듭니다. 나로선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라고 실토하며 철저하게 실패하고 또 실패해서 완전히 부숴진 자들이다. “저는 죄인입니다. 완전히 썩어 부패한 벌레만도 못한 자입니다. 저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나님 저를 저의 외모대로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처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은 우리가 진토인 줄 아시고 얼마나 연약한 체질인 줄 아시지 않습니까? 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저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시오.”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무릎 꿇는 죄인이다.
산상수훈으로 따져선 그것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와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항복하는 자로 나뉜다. 산상수훈을 단순한 윤리도덕률로 보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하나님의 용서 받기를 거부한 의인과 용서 받은 죄인이다.
“저의 외모대로 보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란다”는 신자의 고백은 무슨 뜻인가? 외모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도저히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모와 중심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한탄하는 자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자가 중심과 외모가 다르다면 그것은 사기꾼이다. 그러니 당연히 불신자들의 눈에 위선자로 비췰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말과 행동이 다르며 믿음과 외모가 달라 사기꾼 소리 듣고 있는 줄 압니다. 그 말 들어 너무나 쌉니다”라고 정말 겸비하게 인정하는 자라야 참 신자이지 그 반대는 오히려 신자가 아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역설이 존재하며 십자가 복음이 살아 있는 은혜와 능력이 된다.
스스로 고자가 된 까닭은?
스스로 고자가 된 오리겐이 사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엄격하게 지켜 보려고만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를 고급한 윤리적 차원으로 해석해서 그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고자가 되고자 따랐던 말씀은 따로 있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마19:12) 오리겐은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음욕을 끊고 도덕적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혼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면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8,9) 율법에 의하면 이혼 증서만 주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아내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무조건 증서만 주고 이혼하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예수님이 지적한 말씀이다.
율법 이전에는 아무 배상 없이 무조건 내어 쫓는 잘못을 저지르므로 이제는 이혼한 전처에 대해 반드시 이혼 증서를 주어 신분 보장을 해주라는 선하신 뜻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증서만 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 율법을 오용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셔서 음행하지 않는 한 절대 이혼할 수 없는 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렇게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무슨 뜻인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면 도저히 그것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장가 안 가고 혼자 사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다. 또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가는 자는 간음한 것과 같다는 말씀에 비추어 “자기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도 관계를 맺고 싶은데 이 때까지는 그렇게 하려면 간단하게 이혼 증서만 주고 새 장가 들면 되었는데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면 이제는 그런 재미는 도저히 맛 볼 수 없겠네요? 여자가 음행하면 바로 돌로 쳐죽이는 사형인데 그것을 알고 여자가 간 크게 간음할 리는 없고 그러면 마누라와 도저히 이혼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언제 또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습니까?” 라는 음흉한 뜻이 그 이면에 깔려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하면서 오리겐이 감명 받은 바로 그 말씀으로 이어가셨다. 예수님의 뜻은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뜻대로 온전히 지키자면 타고난 고자이던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라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고자가 된 것은 자기 지체를 자르면서까지 스스로 선하게 되려고 노력한 뜻이 아니다. “도저히 내 죄를 내가 다스릴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위선자 소리 안 들을 재간이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놈입니다. 저 자신의 선행으로는 천국 시민이 되거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 설 수 없습니다”라는 처절한 고백의 바탕 위에서 스스로 고자가 된 것이다.
산상수훈은 최고급 차원의 윤리 교과서가 아니다. 구약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제사법의 복잡한 절차는 없앴지만 도덕법의 규율은 훨씬 더 엄격해졌다.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형식적 종교의 멍에는 벗겼지만 내면적 변화의 짐은 훨씬 무거워졌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고 말씀하신 것과 문자적으로는 오히려 모순 된다. 형제를 속으로 바보라고 욕할 수 없고, 예쁜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라도 음욕을 품으면 안 된다. 결코 쉬운 멍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상수훈을 지키고 잘 지켜서 선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만 의로움을 입을 수 있다.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온전한 믿음으로 그 분을 영접하면 구속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인류에게 더 이상 고급한 윤리 교과서가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절대 도덕을 몰라 죄를 짓고 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 상태에서라도 하나님을 닮은 형상인 양심만 잘 가꾸어도 충분하다. 인간의 문제는 어느 누구라도 완전히 양심대로 살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지 양심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미친 자요 위선자요 사기꾼이다.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마찬가지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양심대로 살지 못하니까 자기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 신자란 자기가 미쳤다는 것을 아는 미친 사람이고 불신자는 미친 것을 모르는 미친 사람이다. 미친 것을 고칠 수 있는 첫 걸음은 자기가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길은 심령이 가난해지고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비로소 인간의 원래 정신 상태로 되돌아 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라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일치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인간은 죄악과 사망과 사단의 권세가 들 끓는 세상이라는 이 거대한 정신병원에서 비로소 퇴원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오직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