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9-11)
예수님 승천의 의미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모습과 그를 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록한 내용이다. 성경은 주님이 승천하는 모습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자세히 묵상하며 읽으면 그 속에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주님의 지상 사역과 천상 사역간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9절에 의하면 보는 데서 올리워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땅에서의 주님의 육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임재는 끝이 나고 이후로는 천국 보좌에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임재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빌2:6-7에서는 주님이 이 땅으로 오신 것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제 주님은 이 기사의 내용을 역순(逆順)으로 하여 사람의 모양에서 하나님의 본체로 원상 회복한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지상에서의 대속사역을 마치고 다시 자신을 천상의 영광으로 채우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대로 지상사역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상에 머물러 계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제자들이나 오늘날의 신자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난 주님의 지상 사역에 대해 뭔가 미진하고 부족한 느낌을 갖고 있다면, 즉 좀 더 오랫동안 남아 계셔서 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고 가시지라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십자가의 비밀을 다 알지 못한 셈이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직 인류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 따라서 그 일을 완성하셨기에 주님은 가시적 세계의 시공간에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고 이땅의 영역을 넘어선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보좌 우편으로 가셔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 구원의 영광스런 완성을 위해 지금도 한 시도 쉬지 않고 사역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신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끝맺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이 천상에서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그 다스림에 기꺼이 순종하며 쓰임 받겠다는 고백이지 않는가?
주님은 승천하신 이후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 대신에 이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계속해서 확장시키고 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이 주로 이스라엘 경내에서 활동함으로 해서 지역적으로 제한이 되었던 복음선포를 하늘 보좌에 좌정하셔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해 전인류를 대상으로 전파하겠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또 그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또 다른 제자들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해서 천국의 비밀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것이다.
이제 그 일은 오직 성령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이루실 것이다. 주님 개인의 육신적 사역만으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언제 어디에나 임재하시는 성령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계셨을 때보다 오히려 양적으로는 더 광범위하고 전우주적이며 포괄적인 구원을, 질적으로는 그 구원의 대상인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들과 더 체험적이고도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자들을 꾸짖는 천사
그런데 본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두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천사들이 제자들을 그냥 일깨워주고 권면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을 야단치고 꾸중하고 있다. 10절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라고 한다. 우리말로 ‘자세히’라고 표현한 것은 100%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원어의 의미를 살린 번역이다. 그러나 원어의 용법으로는 계속과 진행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 “정신없이 넋을 잃고 죽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다.
따라서 11절의 천사의 권면도 성경 표현상으로는 특별히 나쁜 어감을 발견할 수 없지만 사실은 따끔하게 야단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요즘의 일반적인 어투로 실감나게 바꿔보면 “야! 이 촌놈들아 뭘 그리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느냐? 또 오실 건데 이제 그만 미련 버리고 정신 좀 차려라”이다. 방금 스승을 떠나 보내 상심에 젖은 불쌍한 제자들을 위로는커녕 이런 식으로 꾸중한 것은 좀 심하지 않는가?
천사들이 그런 꾸중을 한 까닭은 한마디로 제자들이 여전히 주님에 대한 인간적 세상적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자기 스승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고 실망했었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정말 예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며 이제는 정말 이스라엘이 회복될 줄 믿었다. 예수님은 죽은 자만 살린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죽음을 초월하고 생명을 주관하는 능력을 소유한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제자들로선 얼마나 신이 났을까 안 봐도 뻔하지 않는가?
그들이 6절에서 주님께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던 것이 바로 그런 기대의 반영이었다. 이제야말로 그 큰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유대 땅에 지상천국을 건설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온갖 기대에 들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주님이 비록 구름 속에 올라 갔지만 부활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곧 내려 오실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제자들의 그런 기대가 헛된 공상만은 아닌 것이 이미 그들은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번 했기 때문이다. 변화산상에서 천상의 영광된 모습으로 변모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구름 속으로 들리워 올라가신 얼마 후 다시 제자들 곁으로 내려 온 것을 목격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희의 말을 들으라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눅9:35,36)” 마찬가지로 지금도 혹시 곧 구름을 걷고 나타나실 수 있겠거니 하고 쳐다본 것이다.
변화산에서도 그랬지만 그들이 눈이 빠져라 아무리 자세히 쳐다보아도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 문제다. 만약 그들이 정말 감격스럽고 기쁨에 겨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면 두 천사가 저들을 칭찬했어야 마땅하다. 최소한 주님이 천상으로 가실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만 했어도 근심과 조바심으로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천사는 당시에 천하고 경멸하는 호칭으로 통용되는 “갈릴리 사람들아”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들은 정신이 다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빨리 정신차리라고 야단맞을 수 밖에 없었다.
변화산 사건에서도 제자들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마17:4)라고 했다. 그들은 그것이 영적이든 현실적이든 어떤 황홀경에 빠져 이땅에서 주님과 계속해서 함께 있기만 바랬다. 주님은 변화산에서나, 골고다 언덕에서나, 지금 승천의 현장에서나 제자들의 현실적 기대를 한번도 충족시켜 준 적이 없다.
승천 현장에 동참한 영광
천사들이 제자들을 꾸중한 또 다른 이유는 저들이 주님의 재림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리라 확신했다면 목을 빼고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을 이유는 없다. 천사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했다. 다시 오시는 모습과 그 방법까지도 정확하게 일러줌으로써 주님의 재림의 확실성을 다시 깨우쳐 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마치 제자들이 이처럼 넋을 잃고 쳐다볼 것을 미리 아신 것처럼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요6:62)라고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기 전에 이미 물어 본 적이 있다. 진정으로 기뻐할 것인가 의심하며 미련을 가질 것인가 둘 중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떠 보았다. 이 물음을 물으신 것은 제자들과 한창 육신의 떡과 영생의 떡에 관해 강론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 때도 제자들은 만나를 항상 먹게 해달라고 요구했듯이 바로 지금 주님이 승천하시는 순간까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재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배경의 뜻은 무엇이겠는가? 주님이 더 크신 영광 중에 반드시 다시 오실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신없이 쳐다 보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주님이 가신 것이 아쉽고 슬프면 슬플수록 이제 곧 오시니까 다시 만날 때를 대비해서 오히려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주님이 시키신 대로 당장 실천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재촉한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줄 알고 있기나 하느냐?”라고 깨우친 것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이다. 갈릴리는 요한복음에도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7:52)라고 표현이 나올 만큼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다. 그 멸시 받던 곳에서 고기나 잡던 무식하고도 비천한 신분이었던 그들이 예수님의 3년간의 지상 사역기간 동안 육신적으로 동고동락하는 축복과 영광을 누렸다.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1,2)”
그런데 이들 말고도 사실은 주님의 지상사역을 옆에서 보고 동행했던 자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요한복음6:66에 의하면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갔다”고 한다. 예수님이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만 구원 받을 것이라고 하자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특별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63)고 말씀하시자 오직 육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들로선 더 이상 주님을 따라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자들이 주님의 제자입네하고 따라 다녔지만 지금 주께서 승천하는 자리에는 적게는 유다를 제외한 11명 혹은 많게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 여명뿐이었다. 성육신하여 비천한 모습인 종의 형체로 계신 것은 수많은 이들이 보았지만, 하나님의 본체로 회복되어서 영광 가운데 승천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특권을 누린 자는 극소수였다.
그래서 천사들은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너희들이 왜 초대되었는지 아느냐? 부활 승천의 목격자로 증인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지금은 계속 하늘을 쳐다보며 미련을 못 버리고 묵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너희들에게 주신 그 계명을 당장에 실천으로 옮길 때다. 이런 영광을 너희들 기억 속에만 간직해선 안 된다. 주위에 증거하고 나눠줄 때만이 그 영광이 참된 영광이 된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가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구태여 너희들을 증인으로 부른 이유를 생각해보라”라고 추궁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수난 받는 종으로 이땅에 오실 때는 정말 비천한 모습으로 조용히 오셨다. 그러나 가실 때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만천하에 공표할 필요가 있었다. 부활하시고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 자리에 제자들이 초대 받았으므로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자기들이 본 그 영광스런 주님 승천의 모습을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나사렛의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 가신 그 갈릴리의 예수가 정말 메시야였다고, 정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아니 하나님 바로 그 분이었다고,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 가셨다고 말이다.
위로 향한 고개를 옆으로 돌려라.
천사들의 이 꾸중 섞인 메시지를 들은 제자들은 새삼 정신을 차렸다.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 모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자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잘 아는 대로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이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했고 갈릴리 출신의 무식한 촌놈들은 완전히 십자가 군병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남은 여생을 완전히 다 바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다. 그것도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비참하게 순교했다. 말하자면 천사들의 꾸중은 단단히 그 효과를 본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주신 그 꾸중의 유효기일이 사실 따로 없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주님의 제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흰옷 입은 천사들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성경 자체가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천사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다. 성령의 감화를 통해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영으로 말씀하고 있다. “지금 너희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자리에 서게된 줄 아느냐? 그런데도 아직도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의 힘을 빌어 세상에서 남들보다 잘난 것을 증명해 보이려드느냐? 신자가 된 것이 너 혼자만의 복을 위한 것이 아니요 세상의 출세를 위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가 신자된 복은 너희가 받은 은혜를 아직도 받지 못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일 말고는 없다. 오직 주님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것 뿐이야”라고…
우리가 예수를 알고 구세주라 고백하며 주일 날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축복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무엇이던 구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모든 권세와 함께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 그러나 그 영광과 축복이 이웃에게 나눠주라는 의미에서만 축복과 영광이 된다. 혼자 독점하고 있으면 주님의 영광과 권능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신자의 개인적인 종교적 열심과 감정적인 만족을 채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속에 가둬놓고 감춰져 있으면 썩기만 할 뿐이다. 주님의 영광의 빛이 가려질 뿐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은혜도 맛조차 보지 못한다. 내 잔이 넘치고 넘쳐서 남의 잔에까지 채워질 때만이 썩지 않을 뿐더러 자꾸자꾸 채워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신자된 신분과 특권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왜 신자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풍성하신 축복을 약속하셨는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새벽기도나 성경공부나 주일예배 때에 그저 목을 빼고 하늘만 정신없이 쳐다 보면서 돈 벼락이나 안 내려주시는가 미련을 가지고 있어선 신자라 할 수 없다. 또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비한 표징을 사모하여 하늘만 쳐다보느라 정작 신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은 잊고 있지나 않는가? 천사들에게 꾸중 듣기 전 세상에 미련을 두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하늘의 능력만 이용해 세상에서 앞서려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
우리도 주님의 꾸중과 징계가 따르기 전에 과감한 결단들을 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어야 한다. 인간적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주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의 일생을 걸고 바로 순종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영생의 확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주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지금 당장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땅끝이다. 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의 끝날이다. 미련과 주저로 자꾸 허송세월 할 여유가 없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이웃들에게 증거하고 나눠주는 것 뿐이다. 길게 하늘로 빼올린 우리의 목을 지금 바로 주위의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 길만이 승천하신 주님의 그 영광을 이 땅에 다시 재현(再現)하는 길이다.
'위로 향한 고개를 옆으로 돌려라'
주님께서 우리 신자에게 주신 그 모든 신령한 복을 이동시킬 수 있는 복의 통로로, 복이 통과하는 파이프로 쓰임받는 것이 신자임을 오늘 다시 상기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지금 당장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땅끝이다. 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의 끝날이다. 미련과 주저로 자꾸 허송세월 할 여유가 없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이웃들에게 증거하고 나눠주는 것 뿐이다. 길게 하늘로 빼올린 우리의 목을 지금 바로 주위의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 길만이 승천하신 주님의 그 영광을 이 땅에 다시 재현(再現)하는 길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