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3)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2-14)
초대 교회 태동 전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은 인간적 미련을 못 버려 목을 매달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천사들에게 “갈릴리 촌놈들아!”라는 꾸중 섞인 재촉을 받았다. 이제 정신을 되찾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한 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는 장면이다. 주님이 명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이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기독교 교회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가 태동하기 직전의 긴박한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특정 종교를 창시하거나 심오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주려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저 조용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려 오셨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뿌린 그 피가 이제 인류역사상 엄청난 기적을 이루어 낼 것이다. 아담의 원죄로 사망의 형벌 아래 있던 전인류를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예비하신 계획으로 구속하시는 사역이 이 땅에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셨을 때부터 이 땅에 실현되기 시작한 당신의 왕국이 이제는 유대 땅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펼쳐질 것이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린 이 기도가 천국 보좌에 상달 되었을 때 하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흥분에 겨워했을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오래 전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할 때에 전세계 사람이 열, 아홉, 여덟… 입을 모아 Count Down하며 그 역사적인 순간을 숨 죽이며 흥분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지금 하늘에서는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흥분과 감격과 설레임이 3위 하나님께, 특별히 성자 예수님께 있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흘리신 당신의 보혈이 이제 영원무궁한 열매로 결실되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땅에서 기도에 열심이었던 제자들의 당시 심경은 어떠했을까? 하늘의 그 설레임과 감격에 비견될 만큼 흥분과 기쁨에 찬 기도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하늘의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여전히 인간의 연약하고 제한된 영역 내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그들로선 성령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강림하게 될지 일체 지식이 없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또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한 후에 벌어질 역사가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릴 만큼 폭발적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도 후대의 신자로서, 이미 성령의 임재에 익숙해진 우리가 이들의 기도를 통해 반드시 주목해 보아야 할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었다.
주님의 3년간의 지상사역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후 승천으로 자기들 스승과 두 번의 이별을 겪었다. 첫 번째 이별이었던 십자가 사건 때는 그들 전부 실망하여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잘 아는 대로 수제자 베드로마저 주님이 대제사장 앞에 잡혀가 있었을 때 사람들의 추궁에 저주하면서까지 자기 스승을 부인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이별인 승천 때는 본문처럼 다들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다. 어떻게 이런 180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분명히 아직은 성령이 강림하기 전이라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것도 아니며 또 성령의 권능으로 담대해진 것도 아니었다. 산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그깟 죽은 사람의 소원쯤 못 들어주랴 식으로 스승에 대한 의리와 의무감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한 꾸중이 생각나서 이제 주님의 계명을 잘 들어야지 하고 다들 뉘우친 것일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로선 그 말씀이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된 것이 아니다. 스승이 함께 있는 것보다 함께 있지 않는 것이 왜 유익이 되는지 도저히 추측해 볼 재간도 없었다. 요컨대 여전히 성격과 기질 나아가 신앙상에 현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 아닌데도 그들은 무엇인가 바뀐 것만은 틀림 없었다.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끝이 아니다.
1982년 미국프로농구(NBA) 최종결승전 때의 일이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스와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가 7전4전승제로 진행이 되었는데 레이커스가 3-0으로 그 시리즈를 앞서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필라델피아에는 희망이 없는 듯 보였다. 필라델피아팀에는 그 별명이 Dr.J라 불릴 만큼 농구 천재인 쥴리어스 어빙이란 선수가 있었다. 기자들이 어빙선수에게 몰려와서 결승전 시리즈의 남은 게임의 전망과 현재의 심경을 물었다. 도저히 가망이 없는 마지막 벼랑에 몰린 형편이었는데도 그는 “It's not over until it is over.(끝이 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그가 말한 대로 4-3의 기적 같은 역전극이 펼쳐졌다.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다들 어빙 때문에 필라델피아가 압도적으로 이기리라 기대했었는데 막상 뚜껑이 열리니까 3-0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버려 사람들은 절대적 비관으로 일관했지만 그가 역사에 남을만한 명승부로 뒤집어 엎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즈음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은 틀림 없이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고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여 살린 그 큰 권능으로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일으키고 하늘의 천군천사를 동원해서라도 로마를 물리쳐 주지않을까 기대했을 것이다. 아마 로마 총독부와 제사장들을 포함하여 그를 정죄한 유대인들도 막상 예수를 붙들기는 붙들었지만 그때까지 보여줬던 권능이라면 그냥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라고 조롱했다. 그 조롱 속에는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정말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어쩌나 싶은 걱정과,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수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안도감이 반반씩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기대와 추측은 헛것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처럼 메스컴 기자가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한 직후 소감을 물었다면 이구동성으로 ‘It is over.”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스승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눅24:21)라고 말했다. 메시야의 큰 권능을 발휘해 새 세상으로 바꾸어주리라 기대했었는데 벌써 죽은 지가 사흘이 지났으니 이제는 아예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이 사흘 동안은 시신(屍身)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흘 째가 되어가니 예수의 영이 돌아와 뭔가를 일으킬 가능성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마저 완전히 소망이 없어진 상태, 문자 그대로 "It's completely and absolutely all over" 였다.
골고다 언덕은 로마와 그를 따르는 세력들에게는 안도의 한숨이, 메시야를 대망했던 사람들에게는 체념의 한숨이 함께 뒤섞인 곳이 되었다. 제자들이 가진 기대가 컸던 만큼 그에 비례해 실망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더니, 자기를 본 자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더니, 당신은 오직 아버지가 시킨 일만 한다고 하더니, 정반대로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연약하고 벌거벗은 한 평범한 유대 청년의 수치스런 모습만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는커녕 애끓도록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찾았지만 그 아버지마저 외면했었다. 그래서 베드로를 포함하여 모두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외면했고 이곳에 없다”라고 결론 내리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 골고다 언덕에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셨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니까 당연히 있었겠지라는 개념적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체(實體)로서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이루고 계셨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은 손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계시지도 않는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분은 인간의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비밀스레 임재해 계셨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마저 단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부재(不在)했고 활동을 쉬고 있으며 자기 스승의 죽음은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므로서 오히려 인간의 판단이야말로 헛된 것임을 들어냈고 당신의 죽음을 역사상 가장 고귀한 죽음으로 바꾸었다.
예수님은 생전에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약속하셨는데도 유대인들 중에 실제로 그 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 어느 인간도 하나님 앞에 도저히 체면이 안 서고 완전히 머쓱해진 꼴이 되어버렸다. 성경이 지적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부활하신 후 그런 제자들에게 다시 먼저 찾아 오셔서 사랑으로 용서해 주었다.
변화된 제자들
그 40여일 후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과 두 번째의 이별을 했다. 육신이 감지(感知)하고 이성으로 교제 할 수 있는 가시적 영역에서부터 주님은 분명히 떠나가셨다. 그러나 그들은 전과 달리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기도했다. 무엇이 전과 달라졌는가? 믿음이 깊어졌는가? 담력이라도 늘어났는가? 기대가 커진 것인가? 주님의 약속을 하나 의심 없이 믿은 것인가? 엄격하게 따져 이중 어느 것도 그들에게 해당 사항은 없었다.
물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보았고 때때로 만나서 함께 먹고 마셨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들이 더 거룩해졌거나 담대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런 변화는 성령이 강림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럼 과연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딱 하나다. 저들은 이것이 즉 승천이 마치 끝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끝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만은 있었다. 말하자면 목을 빼고 하늘을 하염없이 처다 보고 있었을 때는 혹시 이것으로 완전히 끝인가 생각했더라도 천사들의 “이 갈릴리 촌놈들아!”라는 꾸중을 듣는 순간 아직 끝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을 바꿔 먹게 된 것이다.
주님이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시 일을 진행시킬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부활하신 그 분께서 가서 기도하며 성령 세례를 기다리라고 했으니(행1:4,5) 그저 그 말만 믿고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40일 전만 해도 동일한 분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었던 골고다 언덕이 정확하게 약속대로 삼일 만에 아리마대 요셉의 열려진 무덤으로 바뀐 것만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뭐가 뭔지 도저히 추측할 길이 없지만 반드시 뭔가는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정말 3년 만에 처음으로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가 되어 진정한 기대를 갖고 기도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감정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인격적으로 더 고매해지고, 신앙적으로 더 경건해진 것이 아니다. 오직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확신, 어쩌면 확신하는 정도의 수준까지 못 가고 단지 기대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기대만은 가졌던 것이다. 예의 농구 시합에 비유하자면 골고다 언덕에선 아예 4-0으로 승부가 결정난 것으로 지레 판단해 버렸다면, 지금 마가 다락방에선 설령 3-0으로 비관적일지라도 아직은 끝이 아니고 한 게임이 더 남았기에 그 마지막 게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신앙 여정 중에 생전 처음으로 인간적 욕심으로 종교적 열심을 내었던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권능만 전적으로 바라보는 신앙적 소망을 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지금 이 시간 우리 믿음의 모습을 되돌아 보길 원한다. 솔직히 어느 장소에 서 있는가? 당시의 제자로 되돌아 갔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 신앙의 수준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실망 반 기대반의 상태인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의 절망한 상태인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포기하고 세상으로 되돌아 가고 있는 중인가? 아니면 갈리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가? 부활의 주님은 만났지만 혹시 하늘에서 기적이 떨어질까 여전히 승천하신 주님을 목을 빼 들고 바라만 보고 있는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는가? 간단하게 말해 수난의 금요일 저녁 절망에 있는가 혹은 부활절 아침의 희망에 있는가?
신자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절대 형통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괴롭고 힘들 때가 더 많다. 신자라도 언제든 쉽게 깨어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처 받을 수 있다. 심지어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을 때도 많다. 우리 눈과 귀로 주위 환경을 아무리 둘러 보아도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이나 도저히 소생의 가망이 제로인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가? 믿음으로 그 환난을 이겨내는가?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보면 모든 고초가 해결되고 염려 걱정이 사라지는가? 솔직히 우리 모두 겪어 알다시피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럼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보는 것이 잘못인가? 물론 아니다. 신자들은 진정한 믿음은 결여된 채 단지 종교적 실력을 동원하면 세상 환난을 이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그럴 때마다 되돌아 오는 것은 실패 뿐이다.
그 진정한 믿음의 본질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 주 예수님의 하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도, 갈릴리 바닷가에서도, 엠마오 도상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한번도 안계시거나 역사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의 삶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꾸며, 패배 대신에 승리를 주시며, 죽었던 자를 부활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셔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우리의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시지 아니 하신다. 신자에게는 간혹 실패는 있을지언정 완전한 좌절은 없다.
물론 우리가 환난 중에 너무 힘들고 사방이 꽉 막혀 출구가 도저히 안 보이는 것 같을 때도 많다. 또 바로 그런 때에 우리 믿음의 실력이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 생명과 빛과 희망을 꿈꾸며 소망 가운데 인내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나아가 반드시 그렇게 되어라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도 사실 우리 가운데 거의 없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구체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뭔가는 하고 계시며 언젠가는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그 결실이 아름답게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만은 붙들고 있어야 한다. 여전히 힘들고 우리 눈에 마치 끝이 난 것처럼 보이는 실패일지라도 아직은 절대 끝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끝이다 할 때까지는 끝이 아니라는 것 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의심과 믿음의 차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 눈에 실패처럼 보이는 것도 다 포함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종국에는 선으로 결과되어진다고 약속했지 않는가? 범사에 결말을 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하는 경건한 자라도 인간 쪽에서 섣불리 먼저 결론 내리려 해선 안 된다.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우리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 한다. 주위 환경이나 일이 되어져 가는 형편만 보고 얄팍한 상식과 경험과 지식에 의거해 미리 겁 먹거나 포기해버린다. 그 일들 뒤에는 아직도 합력하고 계시며 절대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신자는 육신과 이성의 눈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 범사를 영적인 눈으로 보지 않으면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의심한다는 것과 믿음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거나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신자가 갖는 의심이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려는 죄된 성향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자가 아무리 믿음이 떨어지고 환난 중에 낙심 될 때도 하나님 당신을 외면하고 부인하지는 않는다. 신자가 의심이 든다고 무조건 잘못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대신에 의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의심은 단지 우리의 판단근거를 하나님 중심에 두지않고 자신의 이성적인 기준에 의지하려는 경향(傾向)일 뿐이다. 나아가 이성이란 그 본질상 의심이라는 속성(俗性)을 갖게 마련이다. 역으로 말해 모든 사물을 판단할 때에 그 지적 활동이 반드시 의심이라는 필터를 거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성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사고란 항상 본능적으로 의심의 꼬리를 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학문이나 사상이 논리적, 계통적, 합리적인 자기발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성이란 하나님을 제외한 차원에선 아주 선하고 좋은 것으로서 세상에선 이성적인 것만큼 큰 장점도 없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에는 이성이 전혀 반대로 작용한다. 하나님을 제외한 영역에서 큰 힘을 갖는 이성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영역 안에서는 오히려 가장 약점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믿음이란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성품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성품과 권능에만 의지하려는 경향(傾向)이다. 이성적 판단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완전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믿음이다. 의심이 그 본질일 수 밖에 없는 이성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의심 없는 확신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비록 믿음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고 해서 신앙생활 전체에서 이성 자체를 완전히 배제시켜야만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영적인 분야에선 이성적 사고로는 일절 추리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로는 추리가 안 되는 이성을 넘어선 영역이 따로 있음을 이성을 갖고 진지하게 인정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느 때, 어떤 환경에서도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넘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볼 줄 아는 능력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다. 힘들 때마다 골고다 언덕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도 주님은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똑 같이 함께 하고 계시며 그 분만의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으므로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십자가나 무덤에 가는 고통까지는 겪지 않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골고다와 무덤에도 계셨는데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문제에 당연히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시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왜 걱정을 하는가? 눈앞의 환난과 고난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왜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가 의심이 들고 짜증이 난다면 그것은 100% 신자의 잘못이다. 어쩌면 스스로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증(自證)하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처음부터 최악의 상태와 완전한 실패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큰 소리 쳤지만 러시아와 워터루에서 무참하게 실패하고 엘바섬에서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불가능이 없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된다. 그 말은 또 그분의 백성에게도 당연히 적용된다
지금 너무 힘드는가? 모든 상황이 완전히 끝 난 것처럼 보이는가? 당장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다락방에 올라가 기도하라. 그들은 갑자기 믿음이 좋아지고 담대해지고 능력이 늘어난 것이 아니었지만 단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확신하고 주님이 맺어 주시는 끝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 또한 다른 어떤 거룩하고 신비한 종교적 실력은 전혀 필요 없다. 오직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만 있으면 된다.
우리의 하나님은 합력하여 기어이 선으로 이루시고야마는 분이다. 신자에게 끝이 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간섭을 시작하시는 시간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합심해서 간구하는 제자들의 기도에 맞추어 하늘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기독교의 태동을, 초대교회의 탄생을, 이 땅을 십자가 복음으로 뒤엎을 일을, 열 아홉 여덟 하면서 삼위 일체 하나님이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지금도 우리가 어떤 지독한 형편에 있든지 “It's not over until it is over”라는 한가지 확신만 붙들고 다락방에 올라가는 순간 똑 같이 삼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