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5)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주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행1:20-26)
제비 뽑기로 승진하는 회사
어떤 이단 종파에서 운영하는 한국의 한 재벌그룹에서는 신년 초에 단행하는 인사이동을 그룹 회장을 겸하고 있는 그 종파의 교주가 직접 추첨해서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 아침에 직원들의 경력과 자질과는 전혀 상관 없이 자재부장이 영업부장으로 가고, 영어 하나 못하는 생산 과장이 해외 지사로 발령 나는 등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고 한다.
본문은 베드로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증거 한 후에 유다로 인해 결원된 제자의 자리를 보충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제비로 뽑아 보충하는 모습이 오늘날의 신자에게는 어쩐지 생소할 뿐 아니라 뭔가 미신 같은 느낌마저 든다. 무작위(無作爲)로 선정하기 때문에 정당한 사람이 뽑히지 않고, 또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히 생길 것 같다.
실제로 당시의 제비 뽑기는 항아리에 선택할 사항들을 적은 돌들을 넣어놓고 흔들고 난 후에 손을 넣어 돌을 집는 형식으로 진행 되었고 당연히 그 돌에 적힌 대로 매사를 결정하였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항용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사죄 받는 대속죄일에 죽여서 제물로 바칠 속죄양과 산 채로 광야에 있는 사단-아사셀에게 돌려 보내는 양을 제비를 뽑아 선택했다.(레16:8) 또 가나안 입경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열 두 지파에게 분배할 때(수14:2)에도 제비를 뽑았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차피 동물인 양에게 희생제사에서 어떤 역할을 맡길지 결정하고자, 또 무생물인 땅을 대상으로 지파간에 이익 다툼을 막고자 했던 것이라 별로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늘 날의 신자로선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제비 뽑기의 예도 많다. 이스라엘이 대적을 맞을 때에 전쟁을 치러 나가야 하는지, 승리가 자기들의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제사장의 에봇에 들어 있는 두 보석 우림과 둠밈을 제비 뽑기 하듯이 사용했다.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그런 중차대한 일을 과연 제비 뽑아 결정할 수 있으며 또 과연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반영되어지는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여리고의 기적적인 승리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성에서 패배를 당했을 때다. 패배 원인을 여호와께 바칠 전리품에 눈이 어두워진 누군가가 일부를 취해 숨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그 범인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수7:14-20) 제비 뽑기를 사용했다. 12지파에서 한 지파를 선택하고, 차츰 가문으로 좁혀 나가면서 마지막에 정확하게 범인인 아간까지 오직 제비 뽑기로만 찾아 내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며 또 하나님이 실제 간섭한 것인가? 현대인들의 사고 관념으로는 미신적이고도 우스꽝스런 이단 종파의 행태와 비슷한 제비 뽑기가 성경에 하나님의 수단으로 곳곳에 버젓하게 등장하는 것을 미처 이해할 수 없다.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이단 교파의 특징은 성경에 있는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들, 특별히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제사나 절차 등을 자기들 종교에 그대로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성소, 성전, 기물 등을 짓는 식양(式樣)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문자적으로도 똑 같이 지킴으로써 자기들이 정통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으며 그렇지 못한 정통 교단을 도리어 공격하는 구실로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다. 나아가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으로 신비감을 고취시켜서 누구나 갖고 있는 절대자에 대한 외경심 내지 근본적인 종교심에 호소하려는 뜻이다.
사람들은 뭔가 그럴 듯 해 보이고 신비한 외양에 쉽게 속아 넘어가 그런 형식과 절차를 따르라고 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도와 목적은 도외시한다. 내용이 따르지 않는 형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또 번제를 기뻐하지 않고 순종을 원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한다고 비방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시고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이단 종파는 참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경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비 뽑기의 형식만 성경의 문자적 기록대로 답습해선 현대판 바리새인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지금 기독교 교회의 최초 구성원들이 그 교회를 이끌 지도자를 선출할 때 사용한 제비 뽑기에서도 자꾸 그 형식 때문에 갖게 되는 선입관부터 버려야 한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부터 살펴 보기 위해 그 과정을 객관적, 논리적으로 추적해 보자.
베드로는 21.22절에서 사도가 해야 할 가장 큰 임무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에 따라 사도가 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도 자연히 예수님의 세례부터 승천까지 항상 함께 다녀서 그 모든 것을 직접 보았던 제자라야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자격 요건을 하자 없이 갖춘 두 사람 맛디아와 바사바가 천거되었다.
자격을 다 갖춘 자가 한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복수 후보자가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밖에 없다. 조직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합법적인 최고 권위자가 주권으로 지명하거나, 조직원 전원이 참여한 투표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거나, 마지막으로 제비 뽑는 것이다.
그런데 지명은 독선적이 될 수 있고, 개인적 친분 내지 연공서열(年功序列)에 좌우되기 쉬워 비민주적으로 흐를 소지가 항상 많다. 그리고 지금 주님은 승천하셔서 안 계시고 아직까지 지명할 권한을 가진 대표자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에선 지명은 애당초 논의에서 제외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투표와 제비 두 가지 방법 뿐이다.
다수결 투표의 단점
다수결 투표와 제비 뽑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인식은 전자가 민주적, 현대적, 과학적인 방법인 반면에 후자는 비민주적, 원시적, 미신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너무 단순한 시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다른 논리의 검증도 거치지 않고 무조건 다수결 무기명 투표가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 가장 좋은 선택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아니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서구식 교육의 산물이다.
다수결이 진정으로 유효하려면 투표자 모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지성적 판단 수준이 비슷할 때에 한 표가 한 표로서의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등가성(等價性)이 발휘된다. 어떤 차별 혹은 우월 주의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따져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나아가 투표자가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도 많다. 세 김 씨가 맞붙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 세 번을 통해 벌써 증명되었다. 투표자들이 감정에 치우칠수록 사태 판단을 냉철하게 하기보다는 선전과 선동에 따라 더 좌우된다. 그리고 다수결 투표의 이런 구조적 단점들 때문에 투표 결과에 과연 진심으로 승복하느냐는 것도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대놓고 반대 내지 취소 할 수는 없겠지만 승자와 패자 간에 항상 감정의 찌끼는 남고 오히려 그 관계가 틀어지고 심지어 단절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수결 투표란 하면 할수록 처음의 선한 뜻은 없어지고 서로 편가름을 하게 된다. 교회 안에서조차 목사와 장로가 투표 때문에 분쟁이 생기고 또 기왕에 생긴 분쟁도 오직 투표를 통한 서로간의 힘겨루기로만 해결하려 들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인 단점은 반드시 다수의 뜻이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정이나 선동에 휩쓸린 투표, 혹은 집단 이익을 앞세워서 객관적인 판단을 못하는 투표 등 얼마든지 다수가 악이 될 소지가 많다. 따라서 이미 투표로 결정된 악은 단지 다수가 원하고 절차상 하자가 없는 민주적 결정이라는 이유 때문에 악이라는 것을 알고도 고쳐 볼 도리가 없다.
한국교회에서 장로나 안수집사 투표 때면 반드시 교회마다 한번씩 큰 홍역을 치르지 않는가? 바로 이와 같은 다수결 투표의 단점들과 후유증이 어김 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비 뽑기가 더 좋은 이유는?
성경에서 제비 뽑기를 권장하는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모든 결정과 선택의 과정에 인간의 개입을 완전히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결 투표에 나타나는 모든 결점은 인간끼리 서로 누가 잘났는가를 증명하고자 하는 데서 파생한다. 그러나 무작위 추첨의 경우는 후보자, 투표자, 혹은 추천자든 누구라도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할 길이 없으므로 그런 단점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강요를 지었던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이 미리부터 투표의 단점들을 예견하여 제비를 지지했다. 또 현재 서울 강남에 있는 한 대형교회에서 구역편성을 제비로 시행하고 있고 많은 교회들이 중직 선출 방법을 제비로 대체하려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의사결정은 사실은 투표나 제비도 아닌 만장일치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3-6)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사실 반대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는데도 어떤 일을 그것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무리하게라도 추진하려는 데서 생긴다. 그래서 만장일치가 안되면 될 때까지 설득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자연히 분쟁은 없어진다. 그리고 도저히 하나가 안될 때는 그 일을 안 하면 된다. 교회란 무리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어떤 일에도 반대 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을 위해 그 일을 빨리, 근사하게, 해 드려야 하고 이 일을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들이라는 편견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 말썽의 근원이 된다.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일도 후유증을 최소화 내지 무력화 시킬 수 있도록 가능한 90%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설득하고 기도하고 기다려 준 후에 시행하면 된다.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영혼을 구원하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지 교회라는 조직체의 외형적 실체가 커지는 것이 아니다. 투표나 제비는 외형적 일을 하는 데는 할 수 없이 필요할지 몰라도, 영혼 구원과 성장에는 아무 필요가 없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머리 되신 예수님께 순종만 하면 된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제 막 태동되려는 인류 최초의 교회에서도 영혼 구원을 위해선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다. 그러나 외적 조직의 보완을 위해 제자를 보충하는 일에는 투표 내지 제비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인간끼리 서로 잘난 것을 증명하려는 투표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에 오직 하나님의 뜻만 겸손하게 묻기로 했고 그 수단은 제비 뽑기가 최적이었다. 또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전적으로 순종하려 했기에 제비라는 형식이 미신적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확률의 게임인가 믿음의 게임인가?
물론 제비가 온전한 제비가 되려면 “인간의 뜻의 배제”와 “하나님의 뜻의 구현(具現)”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다 만족되어야 한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뤄진 제비는 인간의 기준과 판단으로는 도저히 우월을 가릴 수 없는 자격을 갖춘 자가 두 사람인지라 그 결정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 첫번 과제는 해결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 제비에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반영될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맨 먼저 제자들은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24절)”라고 기도했다. 여기서 ‘주’는 문맥상으로나 원어의 사용 용례를 따져 성경에서 드물게도 예수그리스도가 그 기도를 들어주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기도한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기도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되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여 그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를 뽑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로 칭하셨던 사건(눅6:12,13)을 기억했다. 그래서 “주여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맨 처음 12명을 뽑으시듯이 주님이 뽑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이다. 제자들은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이 일도 주관하실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비를 미신적으로 보는 이유는 순전히 확률의 게임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사람이니까 50%의 확률이다. 또 제비는 결정자나 피결정자의 의사가 하나도 반영이 안되고 오직 운(運)으로만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신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의 제비는 그렇다.
그러나 신자들이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그 가운데 분명히 일어날 것을 믿는데도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오히려 미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는가? 뭇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제비의 전과정에 주권적으로 간섭하셔서 선택 및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겠는가 말이다. 그들은 주님의 의사가 분명히 반영된다는 믿음으로 제비를 뽑았다. 구약을 비롯해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제비는 확률의 게임이 아니라 믿음의 게임이었다.
지금 만약 투표해서 결정한다면 적게는 최초 제자 11명에서 많게는 다락방에 모인 사람 전부 120명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인간들이 투표할 때는 피선거권자의 인품이나 선호도 자기와의 관계 등이 항상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제비에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다수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소수 즉 약자의 편만 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편만 든다. 하나님 본인의 마음대로이며 오직 당신의 뜻만이 결정의 기준이 된다.
믿음의 게임이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제비의 결과에 대해서 당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복 하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도해서 뽑았으니 내가 원하는 자가 안 뽑혔지만 누가 뽑히던 하나님의 뜻이다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체념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번 일에 어느 모로 보나 모든 형편에 가장 적합한 자를 고르셨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뽑히지 않은 자가 자격 미달이라 무시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에 누가 뽑히던 뽑힌 사람이 맡아서 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었다. 선택된 자의 실력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선택된 자가 일을 잘하든 못하든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장점과 단점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선 인간이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당신께서 드러낸다는 것이다.
혹시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단지 미련하고 근시안적인 인간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따름이지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는 절대 실수나 잘못된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모든 측면을 다 확신하고 순복 한다는 것이 믿음의 게임 - 즉 제비를 뽑는 근본적인 뜻이다.
반면에 투표는 뽑힌 자가 일을 잘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반대한 측에서 반드시 불평불만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 봐라. 우리가 그럴 거라고 미리 경고했지 않느냐? 이제 와서는 어떻게 할거야 엎질러진 물인데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지않느냐”라고 반발이 대단할 것이며 교회 분쟁의 또 다른 불씨가 된다. 모든 의사 결정이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서만 이뤄지기 때문에 불평 불만은 어떤 경우든 안 생길 수가 없다. 항상 자기들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이 숫자만 믿고 뽑았다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물론 신자들이 하는 투표에도 하나님의 뜻이 개입될 수 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 주권대로 하시옵소서. 저희들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시행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자기들 입으로 어떤 결정이 나도 죽겠다고 해놓고도 투표 결과가 달라지면 오히려 펄펄 살아나니 문제다. 투표 전 과정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해달라고 기도하고 믿는다고 입술로는 시인해 놓고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가의 다락방의 성도들이 제비 대신에 투표를 시행했더라도 본문과 똑 같은 결과가 나오고 그들 가운데 어떤 불평 불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와 믿음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당사자에게 감정상의 앙금이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으리라고는 아무도 보장 못한다. 투표로 선택된 자에게 우월감이, 떨어진 자에게 열등감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바로 그런 가능성마저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제비다.
제비의 결과는?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본문의 제비의 결과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반영되었는가?”이다. 먼저 두 사람의 후보자 가운데 바사바는 그 이름의 뜻이 “안식일의 아들”이다. 아마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경위를 봐서도 경건한 집안의, 지금으로 치면 장로의 아들로 학식과 재력과 인품을 갖춘 인물이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한다.
거기에다 별명 유스도의 뜻도 “정의(正義)”다. 어떤 사람에게 별명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거나 조롱거리이거나 둘 중 하나지만 여기서는 당연히 전자(前者)의 뜻일 것이다. 그 별명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약한 자를 잘 돕고 불의를 용서 못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맛디아는 아무런 출신배경이나 특징이, 심지어 별명 조차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그냥 평범하고 순박하여 세상적으로 별 볼일 없으며 사람들 사이에 인격이나 능력으로 인기나 존경을 바사바만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뽑힌 것은 오히려 맛디아였다. 맛디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 이름 그대로 이뤄졌다.
아마 제자들은 이 결과를 이외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기도했을 때에 그들은 속으로는 바사바를 점 찍고 있었을 것이다. 장로의 아들로 경건하며 인기도 있으니 그가 뽑힌다면 아무도 불평 안 할 것이고 또 정의롭기 때문에 일도 잘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맛디아가 사람이 착하긴 한데 착한 것만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가 저들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로 나왔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시고 천한 자를 들어 쓰시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지금 제자들의 생각이 너무 인간적으로 치우쳐서 그것을 막기 위해 그러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약한 자만 사랑하고 또 항상 인간의 생각과 반대로만 가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는 별도로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뤄질 뿐이다. 또 그것을 이뤄나가는 방법도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가장 완벽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길만 택하신다. 상식적이든 비상식적이든, 일상적이든 초자연적이든,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단지 그분의 뜻이나, 그 뜻이 이뤄지는 모습이나, 이뤄진 이후의 결과나 모든 것이 완전할 뿐이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뜻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다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나님 홀로 완전하시고 다른 모든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에게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무슨 목적으로 뽑으시는가 만이 고려 사항이었다. 제자를 보충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22절)”을 뽑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인격적이고 정의롭고 똑똑하고 인기 있는 자가 그 일을 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항상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잘 끌다가도 자칫하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자기를 증거하기에 바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하면 인기가 올라가고 당연히 근사한 별명이 붙게 된다는 뜻이다. 정의롭다라는 말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남에게 상처주기 쉽다는 말도 된다. 똑똑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기 계획대로 밀어 부치기 쉽다는 의미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면 부활을 직접 본 사람(Eye-witness)이어야 하는데 맛디아나 바사바나 그 조건으로는 둘 다 하자가 전혀 없었다. 반면에 정의롭고 똑똑하며 인기 있는 자들은 자기의 의나 자랑이 그 증거에 보태져 부활 사건 자체의 의미는 오히려 줄어 들 수 있다. 주님은 부활이 분명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전해지길 원하셨다. 말하자면 순박한 자가 본 그대로 하나의 가감 없이 당신의 부활을 증거해 주길 원했던 것이다. 또 그래야만 부활이 제대로 전해지고 그 의미도 살아날 뿐 아니라, 순박한 자라야 앞으로의 모든 사역에서 철저하게 당신의 인도대로 순종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인간으로선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영혼의 영역과 믿음의 세계까지 파악하셨을 것이다. 숨겨진 죄악이 따로 있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두 사람의 진정한 마음의 자세를 주님이 파악하셔서 맛디아가 선택되도록 하셨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맛디아가 맡을 일에 맛디아가 가장 적합하기에 완전하신 주님이 완벽하게 뽑은 것이다. 나아가 맛디아가 해야 할 일도 주님께서 이뤄주시기 때문에 주님은 얼마든지 제비로도 당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수결투표는 불완전한 편견과 선입관에 좌우될 수 있고, 외적 판단만으로 뽑게 된다. 그러나 제비는 진심으로 기도하여 준비하면 그 과정에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이 작용하게 되어 오히려 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될 수 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하나님의 제비 뽑기에 걸린 성도들
우리가 성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도 비유컨대 하나님의 제비 뽑기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작위로 추첨해서 성도의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에 맞추어 선택이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에 가장 적합한 자로 우리 모두 뽑혔다는 것이다. 본문식으로 해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문제는 주의 자녀가 되어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들어 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맡을 직분자로 뽑히느냐 마느냐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교회에선 주로 맛디아보다는 바사바 같은 사람만 선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압도적 인기로 당선된 바사바로 인해 나중에는 더 큰 분쟁이 야기 된다는 것이다.
그럼 투표에서 제비로 그 선출 방법을 바꾸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선출 방법이 문제가 아니다. 어떤 선출 방법이든 우리의 생각이 문제다. 확률의 게임에서 믿음의 게임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럼 기도하고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똑 같이 불완전한 사람들 앞이 아니라 영원토록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서느냐의 문제다.
신자란 세상사람 앞에서 세가지 평가, 예수 믿는 분과 예수 믿는 자와 예수 믿는 것들의 구분을 당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본문에 따르면 신자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 평가를 당한다. 맛디아 같은 성도인가 바사바 같은 성도인가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자신을 죽이는 순박한 신자인가 아니면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믿어 하나님을 증거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내세울 가능성이 있는 성도인가 둘 중 하나라는 말이다.
제자들이 제비로 맛디아를 뽑은 것은 여러 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부작용과 후유증만 막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이 하시기에 누가 뽑히던 그 자를 통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하신 주님의 주도권을 순박하게 인정한 것이며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끝까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들도 그렇게 되면 투표든, 제비든, 심지어 지명에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십자가로 구원 받은 모든 신자의 소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을 증거하여 다른 사람도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 오게 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말의 지혜나 세상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하며 또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해주는 이도 오직 하나님이다.
혹시라도 우리가 신앙 생활하며 바사바처럼 똑똑하고 경건하며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기를 원하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자칫하면 외적인 종교 조직체를 잘 운영하는 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는 부족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맛디아 같이 오직 사람들에게는 오해와 멸시와 심지어 핍박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만은 순박해지길 원해야 한다. 전도도 주님이 하시고, 교회를 세우고 이끄시는 이도 머리 되시는 주님이다. 그래서 오히려 바사바가 많이 모인 교회 보다 맛디아가 한 둘만 있어도 그 가운데 참다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가 태동할 수 있다.
주님은 무슨 일이든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못하실 것이라고는 없다. 투표든 제비든 지명이든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면 반드시 하신다. 그렇다면 신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게 순복하는 것 뿐이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제비 뽑기의 참 뜻이다. 아니 제비 뽑기란 오히려 우리를 순복하는 자로 바꿔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바사바인가 아니면 맛디아인가?
11/2/2005
제비이든 투표이든 정작 놓쳐선 안될 가장 중요하며 전제 되어야 할것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내실것이라는 확신하는 믿음의 바탕아래 기꺼이 그에 순종할 결단이 선행되어야 함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