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肉體)가 주를 앙모(仰慕)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 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63:1-4)
이상한 저녁 식사
몇 년 전에 LA에서 낮 12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로 뉴욕을 간 적이 있다. 한 시간 반쯤이 지나서 스튜어디스가 샌드위치를 나눠 주면서 “Enjoy your dinner!”라고 했다. 이제 겨우 오후 2시인데 잘못 들었나 싶어 왜 저녁이냐고 되물었더니 “지금 당신이 가는 곳은 뉴욕이지 않느냐? 그리고 그곳은 지금 오후 5시인데 그럼 이게 점심이겠느냐?”라고 답했다.
잠시 동안 미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 그래서 뉴욕과 LA 간에 시차가 3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뉴욕행 비행기를 탄 자는 모든 것을 뉴욕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데도 여전히 LA 시간을 잊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신자란 이 땅을 나그네처럼 잠시 살다가 가는 자다. 영원한 본향은 따로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바울 사도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고후5:2)다. 천국행 비행기를 이미 타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하는 그날까지는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이 땅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세끼를 위해 뼈빠지게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투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한다. 말하자면 LA와 뉴욕이 시차가 있듯이 천국과 이땅 사이에도 엄연히 시차가 존재한다.
불신자는 이 땅의 시계에 맞추고 사는 자다. 오직 하루 세끼 끼니를 위해서만 모든 것을 자기가 계획, 판단, 결정, 시행하고 책임마저 자기가 진다. 신자는 다르다. 목적지인 천국에 시계를 맞추고 살아야 한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구체적 일정과 인생의 모든 목표와 가치와 의미를 신령하고도 거룩하며 영원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천국과 이 땅의 시차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찬양이다. 신자들마저 자칫 오해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 하니까 열심히 믿으려고만 든다. 잘 안 믿어지는데 자꾸 믿어보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공적이다. 그것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천국을 가지 못한다.
예수님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나서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통회 자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보혈로 자기의 죄가 양털 같이 희게 씻겼음을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통해 확신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본 자라야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땅의 시계를 천국의 시계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이땅에서 동행한 경험이 전무한 자가 단지 교회에 나와 예수를 열심히 믿고 있다고 천국 가는 법은 없다.
뉴욕행 비행기를 탄 자는 뉴욕에서 할 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하듯이 천국행 비행기를 탄 자도 천국에서 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미리부터 연습하고 있어야 한다. 천국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사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양하는 것이 그 전부나 다름 없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0,11)
찬양의 본질은?
그럼 찬양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찬양인가? 너무 엉뚱한 질문인가 혹은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가?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막상 찬양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크래식 찬송가에 대비해 가스펠송을 불러야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찬양 예배 때에 크래식 찬송가도 부를 수 있는데 그럼 그 때는 찬양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찬송 예배를 드린 것인가? 가스펠송을 불렀을 때만 찬양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크래식 찬송가든 가스펠송이든 둘 다 찬송가이긴 마찬가지로 찬양을 드리는 음악적 수단일 뿐이다.
찬양이란 한자로 ‘기릴 찬(讚)’과 ‘칭찬할 양(揚)’으로 표기하고 또 영어로도 ‘praise’라고 말하듯이 칭찬을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칭찬한다는 뜻이며 노래이든, 말이든,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하나님을 칭찬하면 바로 찬양이 된다.
그럼 이제 칭찬이 무슨 뜻인가 알아 봐야 한다. 별 시시한 것을 다 묻는가? 이 또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자가 의외로 꽤 많다. 칭찬이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특별히 좋은 사실을 좋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그 속에 과장, 가식, 편견, 선입관, 감정, 자랑, 욕심, 이해 관계 등이 하나도 개입되어서도 안되고 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단순히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칭찬하려고 구태여 미사여구나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별로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접근해보자. 사촌이 논을 사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럼 당연히 찾아 가서 진심으로 “너 정말 그 논을 잘 샀어”라고 말해 주는 것이 칭찬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배만 배배 꼬이고 아픈가 말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못된 존재인지 모른다. 예수를 믿고 난 후라도 그 더럽고 추한 본성과 습관이 완전히 버려지고 고쳐지지 않는다. 사촌이 논을 샀으면 응당 가장 먼저 달려가 축하한다라고 말해야 할 그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목사인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속으로는 썩 내키지 않아도 체면상 어쩔 수 없어 찾아가 공치사이지만 축하는 한다. 그러나 꼭 “논에 물이 안 빠져 벼를 심기만 하면 썩는다고 하던데?”, 혹은 “바로 위의 더 좋은 논이 훨씬 싼 값에 나왔는데 바가지 쓴 것 아니야?” 등의 말을 덧붙인다. 겉으로는 마치 함께 걱정해 주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비아냥거리며 고추 가루를 뿌려야만 그나마 반쯤 속이 시원해지는 존재가 인간이다.
찬양이란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아직도 이정도로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하고 추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없이는 저는 단 한시도 제대로 살 수 없으며 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영혼을 겸비하게 드러내지 않고는 진정한 찬양이 절대 이뤄질 수 없다.
나아가 그런 엎드림이 있는 신자의 경우에는 사람들 간의 칭찬도 바뀌어진다. 단순히 아이가 공부 잘했다, 친구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것을 가지고 신자의 칭찬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사촌처럼 자기와 한 핏줄 넘어선 관계에선 좋은 일이 일어나도 배가 아프지만, 자식이나 친구처럼 아주 가까운 자에게 그 정도 칭찬은 신자가 아니더라도 기본 양심만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신자의 칭찬은 자녀, 아내나 남편, 부모, 친척, 친구, 성도, 이웃, 동료 등 자기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 또한 너무나 유한하고 연약하며 불쌍한 한 인간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결점과 허물 투성이인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용납해주는 것이 칭찬이다. 특별히 예수님이 그 속에 없는 자는 흑암에 갇혀 사망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 형통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이 그 심령이 사실은 너무나 갈급하고 메마르며 방황하고 있는 상처 투성이임을 인정하여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칭찬이다.
십대 자녀가 어느날 갑자기 귀를 뚫고 머리는 이상하게 염색하고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니까, “내가 그래도 교회 집사인데 그 꼴이 도대체 뭐냐? 당장 원래대로 하지 않으면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거야!”라고 고함부터 지르면 그것은 훈계가 아니다. 그런 야단을 맞은 자녀가 당장 그 다음날로 마약에 손대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대신에 신자 부모라면 이렇게 권면해야 한다. “네가 요즈음 스트레스 받은 일이라도 있니? 혹시 말 못할 고민거리가 생겼니? 부모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함께 기도할 수 있으니 무슨 일인지 툭 털어 놓고 말해 줄 수 없겠니? 혹시라도 아직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라면 혼자서라도 하나님께 기도부터 해 보아라. 그리고 언제라도 솔직히 다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기다려 주마. 언제든 의논하고 싶은 때에 이야기 하자. 그러나 이 부모는 언제 어떤 일이 있던 항상 네 편이고 네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은 절대 잊지 말아!” 상대가 어떤 형편이든, 특별히 어려운 형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에서만 칭찬이 출발하며 또 바로 그것이 칭찬의 본질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금요일 저녁 찬양 예배에 주로 어떤 마음을 갖고 나오는가? 고달프고 힘든 유학과 이민 생활의 허전하고 갈급한 심령에 은혜를 받으려 나오는가? 온갖 스트레스와 상처를 치유 받기를 원하는가? 그래서 정말 열심히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했더니 어떻게 되던가? 속이 완전히 뻥 뚫리고 염려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는가? 대부분의 신자가 그렇지 못하다. 예배 후에는 반쯤은 풀린 것 같지만, 그것도 잠시 잠간뿐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예배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 없다.
기도와 찬양할 때에 신자의 마음 밑바탕에 이런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그 동안 얼마나 교회 봉사에 열심이었고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헌금도 힘에 부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이 기도에 이토록 침묵하십니까?” 찬양 예배에 몸과 마음만 참석하고 갔지 실제 찬양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여호와는 구원의 산성이요 피난처요 반석이시라고 목청껏 외치고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열렬하게 기도했어도,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좀 심하게 표현해 자기 넋두리만 실컷 늘어 놓은 꼴밖에 안 된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지 잠시만 점검해보자. 지금부터 하는 질문에 진정으로 대답해보라. 지금 현재 겪고 있는 환난, 고통, 상처들을 하나님은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알고 있다면 그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그 일을 직접이든 간접이든 아니면 능동적이든 단지 허용했든 그분이 하신 일인가 아닌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하나님만의 뜻과 계획이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당신께서 그 해결책을 예비해 놓으셨는가 아닌가? 그 해결책이 선하겠는가 악하겠는가? 나아가 설령 현재 주위 여건과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도 안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분인가 아닌가? 그래서 결국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인가 아닌가?
이 모든 질문에 과연 평소에 얼마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 그런 확신에 근거하여 실제 삶을 살았는가? 아니 기도할 때만이라도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갖고 나왔다 할지라도 끝나고 나면 당신의 응답이나 계시는 못 받아도 최소한 이런 확신을 재점검은 하고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과연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단지 따발총 쏘듯이 하나님에게 자기 필요한 물건의 리스트만 죽 읊은 것으로 마치 기도를 아주 성의껏 다한 양 착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있으니 가르쳐 줄 셈이었는가? 이런 간단하고도 몇 안 되는 질문에도 제대로 된 해답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찬양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저 로또에 당첨되듯이 화끈하게 대박이 터지는 은혜를 받아야만 찬양을 한다. 반면에 평소 때는 매번 “하나님 왜 이 일이 빨리 응답되지 않습니까?”라는 의심을 안은 채 그저 울고불고 주여주여 목이 터져라 기도하는 것은 좀 화끈하게 빨리 해결해 달라고 아부 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범사를 당신만의 전적 주권으로 주관하신다. 때와 방법과 결과를 오직 당신이 정하고 택하고 책임지신다. 이 간단한 진리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들면 아무리 기도와 찬양을 해도 사실은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만 인정한 셈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시계를 땅에 있는 자기의 시계에 맞추라고 떼를 쓴 것이다.
떼 쓰는 것까지는 너무 사정이 급박하다 보니 그럴 수 있으리라 이해해 줄 소지가 조금 있다. 아예 하나님에게 협박까지 한다. “이번 이 일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해결 안 해주면 십일조 안 내겠다는 것이다. 십일조 문제는 믿음이 연약해 또 그렇다 치더라도 숫제 “이번 일이 안 되면 교회 그만 나올지 몰라요”라고 덤빈다.
다윗의 찬양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는 아무리 최고 수준의 음악으로 찬송을 부르고 심오한 성경적 지식으로 기도를 인도해도 사실은 찬양을 한 것이 전혀 아니다. 단지 찬송가 컨서트에 감정을 좀 강하게 보탠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 다윗이 한 찬양을 보자. 지금 그가 처한 형편과 주위 상황은 어떠했는가?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며 자기를 괴롭히는 질병이나 대적이 없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속에서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왔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물이 없어 곤핍한 땅에서”(1절) 주를 찾고 앙모했다.
어려울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는 단지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와 다르다. “주의 영광과 권능이”(2절) 이미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완전하게 드러날 것임을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3절)고 하는 고백 때문이다. 즉 자신의 살고 죽음과는 상관 없이 주의 영광과 권능이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기의 고난을 주님의 도움으로 끝내려는 일반적인 간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기 형편과 상관 없이 주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영원무궁토록 변함없으니 그 영광을 드러내시옵소서. 그래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4절)라고 고백한다. 평생에 찬양만 하겠다는 것이다. 복을 받을 때 만이 아니라, 슬프나 기쁘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상관 없이 무슨 일에도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범사에 주님이 주인 되심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손을 든다고 했지 않는가? 주님이 주신 은혜로 인해 손을 드시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의 사상으로는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대신하고, 전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이지 그 사람이 한 어떤 특정한 일과는 무관하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찬양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존재와 전인격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서 어떤 상황과 장소와 시간에서도 그분과의 관계를 그분 뜻대로만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찬양의 본질이자 전부다.
하나님은 어떻게 반문하실까?
신자들이 자꾸만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혹은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의심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실 것 같은가? “지금 네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그것도 반드시 내가 정해 놓은 시간과 코스와 방법 그대로 거치지 않고는 내가 예비해 놓은 축복과 영광의 종착지에 절대 갈 수 없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지금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영광이 너무 크기에 네가 지금 걸어가야 할 그 가시밭길이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이런 응답을 확실하게 들었을 때에 신자는 다윗처럼 “주의 인자가 (나의)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혹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환난은 직접 내가 한 일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So, what?) 더 심하게 안 한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라.” 이 때도, 아니 이때야말로 주의 인자가 그래도 내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찬양을 부르는 자다.
물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영원히 멸망토록 하실 리는 절대 없다. 그러나 토기장이이신 그분이 우리를 천한 그릇 혹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심지어 잘못 굽혀진 그릇은 그 자리에서 바로 완전히 박살 낼 권한이 있음을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 그래서 자기가 세상과 사람 앞에 비록 천한 그릇으로 보일지라도 오히려 그 속에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얼마든지 드러남을 확신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된 찬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찬양은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로 끝이 나야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기 보다는 배부터 아픈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는 우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용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하나도 아프지 않고 칭찬부터 나오게끔 거룩하게 변화시켜주실 분도 오직 그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찬양하는 하나님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찬양(?)하였다. 그분이 우리 앞에 엎드리며 송축하고 앙모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서 칭찬해 주었다는 뜻이다. 창조할 때부터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지만 당신을 대신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청지기로 선 모습을 심히 기뻐하셨다. 그럼에도 인간 또한 여전히 연약한 피조물이라 선악과를 두시기로 하고 자유의지를 주시면서 기뻐하셨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피조물로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그런 과분한 칭찬을 받고도 불만과 의심에 가득 찬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지만 여전히 당신의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영원한 죽음 만이 형벌로 기다리는 너무나 불쌍한 모습의 죄인을 타락한 채로 용납하셨다.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그 모습 그대로 용서해주셨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칭찬을 당신의 자녀에게 한량 없이 부어주셨다. 그리고 그 칭찬은 영원토록 다함이 없으시기에 지금도 그분의 십자가 아래에 진심으로 엎드리는 자를 심히 기뻐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환난과 죄악과 흑암의 세력들이 당신의 백성을 사방으로 우겨 싸도록 허용할지라도 절대로 하늘 쪽 방향만은 막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당신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진정으로 인정할 때에 당신의 능력과 은총을 쏟아 부어주기 위해서다.
성경이 이렇게 권면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은 신자는 궁극적으로 얻을 천국의 영광을 소원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환난이 끊일 수 없지만 그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한다. 단순히 의지적으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 요법에 불과하고 그 효과도 일시적이다.
보통의 경우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려면 정신이 좀 나간 이상한 자가 되지 않고는 힘들다. 그렇다고 신자가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맹신 혹은 광신자가 되라거나 항상 초자연적인 신비한 경험만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에게 정신이 ‘뿅’ 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던”(롬5:6) 그 사랑을 기억하면 신자가 아무리 환난 중에 있어도 반드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기에 그 영광을 기대하며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환난이 닥치더라도 “이번에는 하나님이 또 어떤 은혜를 베푸실까?, 어떤 신묘막측한 방법과 때에 당신의 뜻을 이뤄내실까?, 나에게는 얼마나 큰 은혜와 유익이 되며 나를 또 다시 어떤 모습으로 바꿔주실까?, 그래서 결국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내 가정과 주위 사람들을 통해 얼마나 크고 아름답게 확장되어질까?”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소망을 키우라는 것이다.
비유컨대 사랑하는 애인이 곧 도착할 기차역에 나가 기다리는 그런 가슴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환난을 이겨내라는, 아니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환난이 크고 힘들수록 예비된 축복과 권능 또한 더 크고 영광스러우리라 확신하라는 말이다.
불신자는 이땅에서 이땅의 시계에만 맞추어 사는 자다. 하루 세끼 끼니를 얼마나 풍족하게 채우느냐에만 인생의 모든 목표와 가치를 두고 산다. 그래서 그들은 환난이 끝나야만 즐거워 한다. 울음이 반드시 그쳐야만 비로소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다르다. 환난 중에 즐거워 하라는 말은 울음 중에, 울면서도 웃으라는 뜻이지 않는가? 왜냐 하면 반드시 웃음이 이미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단지 그 웃음의 크기와 때만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십자가의 사랑을 확신한다는 것은 울면서도 웃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세상 사람에게는 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예수에게 뿅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땅의 시계를 하늘의 시계에 맞추어 살기 때문이다. 당신의 시계는 지금 하늘 시간으로 고쳐져 있는가? 아직도 땅에 맞추어져 있는가? 이미 천국행 비행기를 탄 자가 시계를 고치지 않았다면 목적지인 하늘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출발지인 땅에 미련이 있다는 의미밖에 없다.
(12/9/2005 Salt Lake City, Utah 주 소재 유타대학촌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 금요 찬양 예베에서 설교한 것을 정리한 글임)
은혜로운 글 감사합니다. 귀하게 쓰임받는 목사님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