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
시작과 끝인 예수님
오늘은 신자에게는 너무나 기쁜 날이다.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주후 4세기에 가서야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지켜지게 되었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실제 생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시 로마에는 12/24부터 1/6까지 동지제(冬至祭)라는 이방신의 축제가 열렸다. 또 3세기 때의 로마 황제 아울레리안은 12월 25일을 태양신의 축제일로 지정했다. 말하자면 12월 25일은 세상에선 우상들에게 온갖 난잡한 의식을 드렸던 대표적인 날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주교가 예수님이 우상과 사단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그날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채택했고 지금까지 그 관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복음은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2:8) 날에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 광야의 기후 조건으로는 겨울 밤에 도저히 들판에서 목자들이 양 떼를 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일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겨울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는 것이 단순히 날짜를 따져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성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지 않는가? 그럼 하나님에게 생일이 있는가 없는가?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은 피조물로서 기껏 70-80년의 짧은 생애를 그것도 딱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나 의미가 있지 하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 영원까지 계실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던”(골1:16, 17) 분이다. 히브리서에선 하나님의 아들을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7:4)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세상과 인간은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고 그분으로 인해 끝이 난다.
착각 중에 있는 신자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라면 자꾸 강보에 싸여 구유에 예쁜 아기가 놓여 있고 그 앞에 동방 박사들이 엎드려서 선물을 드리는 장면만 연상한다. 그래서 마치 자기도 동방 박사 중의 한 사람이라도 된 양 예수님을 위해 뭔가 최고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기 예수에게 생일 선물을 바치고 근사한 생일 잔치를 해드려야겠다는 것이다. 이는 착각 중의 착각이다.
다윗이 블레셋 지경에 있던 언약궤를 되찾아 온 후에 그 궤를 모셔 놓을 전을 건축하겠다고 나서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7:5,11)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계속해서 그들의 진중에 거하며 행하였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의 대적을 그들 앞에서 멸하시고 이스라엘의 이름을 존귀케 해주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분이 해주지 않은 일 또한 하나 없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해드릴 일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인간을 위해서 해주신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감사함으로 그 은혜를 찬양하는 것뿐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인 그분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꼭 오셔야만 했던 이유, 그렇게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목적, 오셔서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외면하고 부인할 때, 심지어 죄 가운데서 저주할 때에 조용히 찾아오셨다. 인간이 전혀 그분을 찾지 않을 때에 오셨다는 것은 당신께서 인간을 위해 할 일이 있었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것은 물론 인간을 죄에서 건져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거짓말하고, 서로 미워하며, 폭력이나 간음하는 그런 윤리적 죄만 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죄, 하나님을 자기 존재의 중심에 모시지 않았던 죄에서 건지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는 영역에 머물면서 자기 정욕과 감정과 판단대로만 일생을 꾸려 나갔던 죄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땅만이 전부인줄 알아 오직 먹고 마시는 것만을 목표로 삼아 헛되고 헛된 것만 추구했던 인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 바로 신자 모두의 영적인 생일인 셈이다. 저는 33살에 예수를 처음 믿었으니까 올해 크리스마스는 저의 21번째 영적 생일이다. 이제 겨우 성년이 되어 믿음에 대해 조금씩 알아나갈 정도밖에 안 된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커서 도저히 그 깊은 내용은커녕 크기조차 제대로 측랑할 수 없다. 반면에 날이 갈수록 저의 죄는 눈송이처럼 더 크고 더럽게 발견되어지기에 한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해가 더해질수록 예수, 예수, 오직 예수님 뿐이다.
오늘 여러분이 선물 교환 잔치를 위해 갖고 온 선물도 기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서로 인사치레로 나눠가지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 나오니까 일일이 인사할 것 없이 단돈 10불짜리 선물 하나로 교인 전부에게 생색낼 수 있으니 편리해서 좋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피 안에서 생일을 맞았기에 각자 모두에게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선물이어야 한다.
흔히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를 사하려고 죽으셨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해 죽으신 것은 틀림 없이 맞다. 그러나 “우리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저주 받을 나무에 달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며 죽었어야 할 자는 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철저하게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확신과 감사가 넘쳐야 한다.
너무나 절묘한 크리스마스 시즌
미국의 2대 신문의 하나인 워싱턴 포스트지의 자료실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보관해 놓았다. 예수님에 대해선 “순교자”라는 항목으로 분류해 놓았다고 한다. 예수님이 이천 년 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세상의 역사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을 때에 비로소 구원을 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를 불신자들은 서로 선물 주고 받으며 한해 인사를 대신하는 명절로 생각한다. 예수님을 순교자라고는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신자마저 크리스마스에 교회의 예수님 생일을 기념하는 예배와 선물 교환 잔치에 참석한 것으로만 그치면 여전히 교리에 따른 것 뿐이다. 크리스마스를 자신의 영적 생일로 받아 들일 때만이 비로소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일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신비하지 않는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생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지 않는가 말이다. 나아가 비록 인간이 후대에 인위적으로 지정한 날이지만 예수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이 된 것도 너무나 큰 은혜이지 않는가? 틀림 없이 하나님의 간섭이 그 배경에 작용한 것이다.
새해로 바뀌기 딱 일주일 전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자라도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았으며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살지 고민해보는 때다.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 한번쯤은 심각하게 묵상해보는 시기다. 바로 그런 시기에 크리스마스가 있다. “너희가 과연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삶에서 참 위로와 평강과 자유와 능력이 생겨나더냐? 오히려 너무나 갈급하고 허망하지 않더냐? 올해도 향방 없는 달음질이었고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같은 삶이지 않더냐?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너희 인생을 잠시나마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시켜 생각해보라!” 모든 불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있다.
하나님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오직 예수 안에서 올 한해를 되돌아보고 또 다가오는 새해를 계획해 보라는 것이다. “지난 해도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서 정말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능력이 넘치며 인생으로서의 참 의미와 가치를 확신하며 살았더냐? 그래서 내년에도 그렇게 살 자신이 있고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느냐? 그래서 네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나의 영광을 맞보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서 너무 심각하고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주일날 예배 드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교회 나오는 것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신나고 즐겁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오직 그 힘으로만 새해를 살기로 소원하는 것이다. 세상의 권력, 돈,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에서 주는 성령의 능력만으로 죄악과 세상과 사단을 얼마든지 물리칠 자신이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당신만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세우신다.
지금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을 되돌아보기 원한다. 내 인생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히 새롭게 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권능에 완전히 붙잡혀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분의 영광으로 완전하게 덧입혀질 것을 확신하는가? 그래서 이제는 절대로 그분을 몰랐던 썩어져 가는 옛 사람으로는 비록 내 생명이 없어지더라도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나라는 존재가 오직 예수 안에서 시작되어 예수 안에서 끝날 것을 믿는가?
진정 그런 확신이 있는 자라면 2부 순서의 주일학교 재롱 잔치, 각 셀별 찬양 경연, 선물 나누기 등의 순서에서 정말로 즐겁게 박수치고, 기쁘게 찬양하며, 일어나 맘껏 춤을 추어라. 오늘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겨우 돌이 된 사람부터, 두 살, 세 살, … 열살, 스무 살, 몇 십 살 등등, 단지 그 햇수만 다를 뿐 우리 모두의 영적 생일이다. 우리가 우리 생일을 자축하는 날이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인 그분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신다. 너무나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힘들고도 고달픈 이민 생활 가운데도 모든 신자가 온갖 정성과 열심을 바쳐 예수님 당신이 새롭게 해주신 인생에 대해, 그래서 새롭게 얻은 두 번째 생일에 감사함으로 잔치를 벌리는 모습을 보고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생일이 없으신 그분은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영원토록 우리의 눈물을 보고 우리의 한숨을 듣고 계신다. 이 잔치가 정말로 우리의 새 생명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담겨져 있다면 우리의 눈물과 한숨은 오직 그분의 몫이 될 것이다. 생일이 없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여주기 보다는 나의 영적 나이가 올해로 몇이 되었는가 헤아려 보아 십자가 앞에 오직 감사함으로 경배드림으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뜻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12/24/2005
*아름다운 교회(미국 캘리포니아주 Rowland Height 소재, 고승희 목사 담임)의 성탄 전야 예배에서 설교한 것을 정리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