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기독교 신앙의 본질
흔히들 타 종교인이나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선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전혀 없다.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거나 현실적 형통만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기도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주를 만들고 이끄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무 인식도 없고 또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교회를 성실히 출석하는 대다수의 신자들마저 믿음으로 승리하는 기쁨과는 전혀 무관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충성하며 세상 권세와 사단의 세력과 싸우는 것은 둘째다. 심지어 본인이 근본적으로 죄가 사해지고 구원 받은 확신마저 없으며 환난이 닥칠 때도 하나님을 완전한 도피처로 삼지 못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역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이 된다. 나아가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리가 없는 신자들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 부분에선 결코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기는 믿되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면 당연히 제대로 믿지 못할 것이며 또 그런 상태에서 신앙의 승리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기 위해선 가장 먼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신자 개인에게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고는 승리가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신자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히12:2)다. 그런 의미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 신앙 생활에서 기쁨이 넘치는 승리를 맛보기 위하여 복음서 중에서 가장 기본인 마태 복음을 순서대로 살펴 보기로 하자.
예수님의 첫 족보
본서의 저자로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의 족보로부터 시작한다. 이 복음서는 특별히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유대인을 주 독자층으로 하여 저작된 책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생의 근거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는데 그 뿌리를 아브라함과 다윗에 두고 있다.
설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인물인 한국의 단군과는 다르게 역사적으로 분명히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아브라함은 단군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시조(始祖)였다. 또 다윗은 세종대왕에 비견 할만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겼고 제일 존경 받는 임금이었다.
보통 족보를 기록할 때에 그 가문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을 앞세운다. 예를 들면 “영조대왕 때에 이조판서를 한 충정공(忠正公) OOO의 14 대손 OOO”라는 식이다. 지금 예수님의 족보에 건국시조와 가장 존경 받는 왕을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그런 뜻은 아니다. 일단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후손도 너무나 많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단군의 후손이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세종 대왕의 후손일 수 있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다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각각 언약(Covenant)을 맺었다. 아브라함에게 혈통적 후손이 되며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삼아 그 통치를 받았던 유대인들도 한 사람 빠짐없이 그 언약에 함께 참여한 셈이다. 따라서 이 복음서를 읽는 모든 유대인들은 그 언약의 실현을 소망한 자들인데 이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가 구약의 예언대로 다윗 가문에 출생함으로써 그 언약이 성취 되었음을 저자는 강조하고싶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 이 복음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는 신자들도 자동적으로 그 두 언약에 동일하게 참여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의 유대인들은 그 언약들을 소망은 했지만 성취를 체험하지 못했다. 반면에 예수님 이후의 기독교 신자들은 그분이 이루신 사역의 결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성도들의 신앙 생활이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이었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오직 예수를 제대로 믿을 때만이 기쁨이 넘치는 승리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약속?
그럼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오늘 날의 신자도 그 언약에 동참해 함께 승리를 누릴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우상 숭배를 하던 이방 땅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러 내어 큰 민족의 조상과 세상 만민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약속의 내용을 많은 신자들이 너무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 같다. 본토를 떠나는 대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고, 친척을 떠나면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고, 아비 집을 떠나도 이름이 창대케 된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떠나온 것이 땅인데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것도 땅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 전의 별 볼일 없던 사회적, 경제적 위치와 신분이 여호와의 지시를 잘 따랐더니 창대케 되어 질적, 양적으로 훨씬 나아지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으로만 이해한다. 쉽게 말해 예수를 잘 믿으면 병도 낫고 사업도 형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비유컨대 자원이 빈약하고 인구가 많아 경쟁이 격심해 아무리 고생을 해도 성공이 좀체 보장되지 않는 한국 땅에서 불러내어 광대하고 물자와 기회가 풍부한 미국 땅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 이민 와서 잘 믿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게 해주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인다.
신자들이 이런 오해를 갖게 된 결정적 이유는 성경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일상적으로 먹는 빵에다 젖과 꿀까지 흘러 넘치니까 그 바뀐 생활이 얼마나 풍부하고 고급스러울까 지레 짐작한 것이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그것도 넘치도록 주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율례대로 살아가면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된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의미도 있다. 말하자면 제대로 된 다른 산업은 없고 젖과 꿀이 주산지인 땅이라는 것이다. 아리조나 사막에 가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땅이 너무 척박해 양을 키우고 벌을 치는 일 말고는 할 것이 없다. 아브라함이 정착할 가나안 땅도 사실은 목축과 양봉이 주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척박한 땅이다. 애초부터 우리의 기대처럼 모든 산물이 풍부하고 고급스러울 경제적 환경이 아니다.
대신에 애굽이나 아브라함이 떠나 온 갈대아 우르 땅이 오히려 그렇다. 주식인 곡물이 흘러 넘치고 산업과 교역의 중심지로 풍요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실제로 젖과 꿀이 흘러야 할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자주 들었고 그 바람에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피난 가기도 했다. 또 그가 죽을 때에 소유한 땅이라고는 돈을 주고 산 무덤으로 쓸 막벨라 굴 하나 뿐이었고 자식도 백 살에 난 아들 이삭이 전부였다. 비록 첩들과 그 첩들에게서 자식들도 낳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을 별 볼일 없던 곳에서 불러내어 신천지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
그럼 하나님은 우르에서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왜 아리조나 사막 같은 곳으로 보내었는가? 또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도 않았는데도 자식은 하늘의 뭇 별처럼 주시고 이름을 창대케 하며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신다는 거창한 약속을 하셨는가? 그에게 주신 언약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믿음의 후손이 된 현대의 신자가 예수를 믿어 승리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신자들이 창세기 12:1-3의 언약에서 흔히 1,2절의 장미빛(?) 약속에만 너무 집중하고 3절은 대충 읽고 치우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정수가 3절에 숨겨져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복을 받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아브라함인가 아닌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다. 아브라함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켜서 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당사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저주와도 무관하다.
이 깊은 뜻을 알겠는가?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불려 나온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1,2절에 명시된 계획을 갖고 그를 불러 내었기에 그 약속은 반드시 이뤄진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이미 보장되었다. 따라서 구태여 그가 복을 더 받고 저주를 덜 받고는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에선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 언약의 숨겨진 뜻이다.
다른 사람이 복을 받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 근거가 아브라함 쪽에 있지 않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했거나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은 너무 착하고 의로우니 복을 주시고, 저 사람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믿지 않으니 저주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제 삼자가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복이나 저주를 받았다.
나아가 제 삼자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제 삼자와 아브라함의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지만 정작 아브라함 본인은 그 축복과 저주의 주체(subject)도 객체(object)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 제 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역전되었지만 한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월등했던 적이 있었다. 그 전력상의 열세를 막아 주는 것은 물론 미국의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었기에 월등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감히 남침하지 못했다. 그 조약은 남한이 외국의 침입을 받으면 미국이 침입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미군이 자동으로 개입하게끔 명문화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조약의 핵심은 미국 국회의 동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전 한국 동란 때와는 전혀 사정이 달라졌다. 만약 당시에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참전 결의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국은 혼자서 참전하기 힘들었거나 설령 국회의 동의를 받아도 시간이 지체되어 전황이 어떻게 변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한국이 침입을 받으면 미국에 원조를 요청할 필요가 없이 미국은 무조건 바로 응전하게 되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는 바로 미국 땅이었다. 북한을 막아주는 것은 미국이지 한국 군사력이 아니다. 결국 전쟁도 따지고 보면 미국과 북한과의 싸움이며 한국은 직접 당사자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도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해 치는 자를 하나님이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어떤 일을 겪어도 하나님 당신이 전적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절대로 죄악과 사단의 세력이 너를 머리 털 하나라도 다칠 수 없게 해 주시며 혹시라도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할지라도 피할 길을 미리 다 예비해 놓으시겠다는 뜻이다. 나아가 너를 도와 주는 자는 너를 더 도와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한다.
믿음의 본질
신자에게 이 약속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들리는가?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이 약속이 실제 신앙 생활에선 전혀 당연하지 않게 적용되고 있다. 흔히 강단에선 신자들더러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시기 바랍니다”라고 권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믿으려고 노력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레 믿어졌으니까 어떤 추가적인 고민이나 갈등 없이 그냥 믿는 것이다. 신자에겐 믿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이미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자니까 당연히 믿어야지”가 아니라 “완전히 믿고 있으니 문자 그대로 당연히 신자(信者)”라는 것이다.
역으로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신자와 항상 함께 하지 않으면, 그래서 신자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 벌써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지 않는가? 신자의 경배와 믿음의 대상 자체가 되지 못한다. 신자와 아무 유효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이미 하나님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지난 주에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너무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말고 과일을 많이 먹으라고 했다. 마침 한국 배 한 상자를 누가 보내 준 것이 있어 그것만 계속해서 먹었다. 기껏 12개의 배도 그 모양, 색깔, 맛, 신선도 등에서 하나 같이 다 달랐다. 이런 단순한 과일도 다 다른데 피조물 중에 가장 복잡한 인간이라면 세계 60억 인구 중에 단 한명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그 한 사람 한 사람마저도 수시로 생각과 감정과 믿음이 죽 끓듯이 변덕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도가 신자가 원한 대로 혹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대로 응답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그 분이 단 한명도 서로 같지 않고 또 그 한 사람도 수시로 달라지는 우리를 일대일로 완전히 꿰뚫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항상 신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은 불가능할 것 아닌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은 한 마디로 “혹시 네가 나를 잊거나 떠나는 한이 있어도 나는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신자가 믿음의 후손으로 그 언약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약속이 단 한치의 가감과 변경 없이 바로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언약은 구태여 신자의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너무나도 엄연하고도 단순한 사실(fact)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반응만 하면 된다. 어떤 환난과 위험이 닥쳐도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으므로 마음 턱 놓고 사는 것이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다. 환난이 닥칠 때에서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던 지켜보고 계시지 떠나거나 관심을 끊는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나아가 신자만 지켜 보지 않고 제 삼자, 신자 주위의 모든 환경, 만나는 사람과 사건들을 다 감찰하고 계신다. 마치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은 미국이 24시간 레이다망으로 북한 전역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듯이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무런 세상적 보호장치 없이 그것도 그로선 갈 바도 모르는 척박한 땅으로 보낼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이 완전히 책임지기 때문이지 않는가?
신자의 책임
그렇다고 신자가 이제 아무 일을 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또 그 반대로 신자가 어디든지 마음 놓고 가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단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이 떠나지 않고 지켜는 주신다는 것이다. 아빠가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산보를 가면 한번도 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어디를 가도 지켜 주지만, 아이가 갑자기 차가 다니는 큰 길로 뛰어 들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것은 벌써 위험과 환난이 따랐다는 뜻이며 또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이 특수한 경우에는 환난과 순교의 길로 인도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이 신자를 일부러 병 주고 약 주고 식으로는 인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지만 반드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만 가라”는 것이다. 또 그 지시할 땅으로 신자가 제대로 가게하기 위해서라도 그분은 당연히 신자를 단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도 하나님의 그런 지켜 보심의 면전(面前)에 일년 365일 24시간 서 있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축복의 주체나 객체가 될 수 없고 신자 주위의 사람이 그 축복의 직접 당사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신자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발생하게끔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신자는 다른 사람의 지켜 봄 앞에도 자신이 일년 365일 24시간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단 한 시도 잊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신자를 보고 정말 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옳고 바르며 가치 있다고 느끼고 그들도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복을 받게 된다. 이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는 것은 오직 신자의 책임이다. 그래서 신자가 복의 근원이 되며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 했다는 것은 바로 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신자에게 위험과 환난이 따르면 한미 상호 방위 조약처럼 하나님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되는 언약의 더 깊은 뜻이 드러난다. 신자를 보호하기도 해야 하지만 신자를 통해 그 이웃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 그 이웃을 복 주시고 그래서 당신의 왕국이 확장되어 지는 것을 간절히 소원하고 계획하셨기에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로 만방에 채우겠다는 것인데 그 일을 신자가 이웃 앞에 신자답게 사는 모습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자를 언제 어디서는 철저하게 보호해야만 그 왕국이 견실히 설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집을 짓는 일군을 불러 모아 놓고 숙식과 삯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군이 그 일을 하겠는가? 아니 어떻게 그 집이 지어지겠는가? 반면에 일군들은 이미 보장된 숙식과 삯에 대해선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집 짓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다.
신자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언약에 참여한 것이며 나아가 이 언약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이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이미 십자가 보혈로 다 무너뜨린 그 권세와 함께 신자가 가는 땅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예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에 자기가 가려고 했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완전히 떠나야 한다.
신자가 예수를 믿어도 신앙 생활에 승리의 기쁨이 없는 것은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아직도 예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만 풍성하고도 화려하게 꾸밀 생각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어떤 환난과 대적이 닥쳐도 예수님이 자동적으로 직접 그것들과 상대하게 된다. 북한이 미군을 보고 절대 남침을 하지 못하듯이 어떤 대적도 신자를 보지 않고 함께하신 예수님 때문에 절대 덤비지 못한다. 어찌 신자가 승리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인가? 여러분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고 있는가? 매일 매 순간을 승리하고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이웃들이 당신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말이다.
(나무 십자가 교회에서 12/9/2001 주일 설교한 것을 정리한 것임) 1/27/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