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아비와 어미도 없는 제사장
마태는 예수님에 대해 가장 먼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각자와 맺으신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유대인 독자들로 알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이어서 다윗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내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1-13)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의사를 보이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성전은 다윗 대신 그 후손이 지을 것이지만 그 왕국은 영원히 견고케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윗 왕조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견고케 해준다기 보다는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날 메시야의 왕국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다윗 왕조는 기껏 4백 여년 밖에 존속하지 못했고 영원한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된 영혼들로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가문에 태어난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이상하고 틀린 말이 아닌가? 과연 예수님이 다윗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요셉은 분명 다윗 가문이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요셉과는 무관하게 출생하셨다. 또 만약 마리아가 유다 지파가 아니라면 더더욱 유다 지파와는 무관하게 된다.
물론 요셉이 예수를 자기의 장자로 인정하여 법적으로는 다윗의 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가만히 끊고자”(1:18) 하였다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야 마음을 고쳐 먹었다. 성경이 뭔가 예수님을 다윗 가문에 억지로 갖다 부친 것 같은 감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비록 예수님이 인간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 당신이신데 족보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살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두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6)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바로 그렇다는 뜻이다. 요컨대 예수님에게는 인간이 생각하는 식의 부모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에게 부모는 있을 수 없으며 예수님 또한 영원토록 자존(自存)하시는 분이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히7:16) 분이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이 한 특정한 시공간을 택해 인간으로 이 땅에 오려면 필연적으로 어느 집이든 속하게 마련이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오셔야 했다. 그래서 다윗 가문과 정혼한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케 된 것이다.
흔히들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대로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 태어났으니 예수님은 메시야 임에 틀림 없다라는 점을 너무 강조한다. 그러나 다윗 가문에서 주님이 태어났다는 문자적, 외형적 예언의 성취는 그분에게 족보가 큰 의미가 없듯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지킨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신자들마저 “하나님이 약속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지켰다. 봐라! 그러니까 그분이 하나님이 맞지 않느냐?”라고 흥분한다면 도리어 우스운 일 아닌가?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사45:23), 그분의 말은 절대로 변개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그분이 생각한 것과 경영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14:24) 성취가 없이 끝나는 빈말은 아예 없다. 하나님이 약속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예상, 가정, 상상하는 것조차 사실은 잘못이다. 아니 잘잘못을 떠나 아예 난센스(non-sense)다.
세상 복음과 하늘 복음
신자가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이 다윗 가문 탄생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보다는 그 가문, 특별히 다윗을 택한 이유다. 사방 대적을 물리쳐서 국토를 가장 넓게 확장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던 위대한 왕이라서 뽑혔는가? 국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의로운 지도자라서 그런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면은 하나님의 선택에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다윗의 인간적, 현실적, 세상적 업적이 뛰어났기에 예수님을 그 가문에 태어나게 했다면,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통치도 다윗의 통치력에서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또 그 둘이 비교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어떤 위대했던 인간과도 비교하여 평가되어질 수는 결코 없다. 인간과 하나님의 비교란 그 자체가 또 다른 난센스일 뿐이다. 그런 면을 다 제쳐두고 실제적인 면에서도 아무리 태평성대로 이끈 왕이라도 예수님의 통치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경의 네 권의 책은 공통적으로 복음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복음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福音, good news)을 말한다. 복된 소식이라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원래 예수님보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어졌다. 바로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로마 황제 아구스도(눅2:1)가 제국을 가장 안정시켜 인간이 지금껏 누려 보지 못한 평화 시대를 구축했기 때문에 그런 별칭으로 불리어졌다. 그는 제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평정해 더 이상 큰 전쟁이 없게 만들었고 식민지 각국에서 산출되는 풍요한 물질적 혜택을 일반 서민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신자들로선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사회적으로 평온해도 결코 그것이 복음이 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여전히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있는 인간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피폐함과 갈급함이 있었다. 외부적인 풍요가 인간 심층 내부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는 결코 없었다.
참 평강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심령이 새롭게 되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께 돌아갈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시의 아구스도로 대변되는 세상 복음에 대비하여 참 복음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길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로마제국 전체로 봐선 태평성대에 태어났지만 여전히 식민지로 제국의 수탈 하에 있는 너무나 궁핍한 유대 땅의 나사렛 마을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도 바로 복음의 의미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세상의 외형적 평안과 하늘에서 주는 내면적 평강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도 세상 복음과는 다른 하늘 복음의 뜻 안에서 예수님의 선조로 선택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장면을 보자.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6,7)
선지자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사람을 왕으로 택했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 장남 엘리압을 보자 첫눈에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으니까 바로 이자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외모가 선택의 기준이 아니라고 다시 깨우쳐주셨다. 그런데 막상 다윗을 택한 후에도 성경은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16:12)고 설명하고 있다.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하나님이 오히려 외모를 보았다는 뜻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는 뜻을 오해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중심에 아주 선한 마음이 가득한 상태, 예를 들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열정, 선한 일을 행하려는 소원,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동정심, 세상과 사회를 위해 큰 일을 이루려는 목적 의식 같이 고상하고 거룩한 마음만 지녀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준비 되고 자격 있는 자를 기쁘게 여기셔서 택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착각 중의 착각이다.
다윗은 이 때 겨우 12살 가량의 소년이었다. 그가 과연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겠는가? 또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얼마나 준비를 했겠는가? 준비된 자를 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만의 주권으로 어떤 사람을 일차 택한 후에 어떤 일을 맡길 때에 해당되는 말이며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택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당신이 주권으로 택한 자를 당신만의 훈련 과정을 거치게 해서 당신께서 준비시킨 후에 일을 맡긴다. 다윗의 경우도 양을 치면서 맹수를 만나게 해 담대하게 만들고 물매 돌 던지는 훈련을 하나님이 시켰다. 심지어 아무 준비나 훈련이 안 된 자도 택해 일을 해나가는 중에 당신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도 많다. 요컨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심과 다르다는 뜻이다.
외모보다 중심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외모를 절대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이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사11:1-3)
다윗보다 350년 정도 지난 시기의 선지자 이사야가 메시야 예수님을 예언한 내용이다. 성자 하나님도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뜻을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면 심판할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신자가 자신의 더럽고 추한 외모에 비해 훨씬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이 알아봐 주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끼리는 서로 속마음을 확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 입장에선 모든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실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중심도 하나님의 관점에선 인간의 외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중심마저 있는 그대로 보기는 마찬가지이며 또 그 중심도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속에 하나님에게 내세울 만한 것이 얼마나 있는가? 아니 하나라도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는가? 간혹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과연 죽고 난 후에 사람의 평생을 일초도 빠트리지 않고 찍어놓은 비데오, 그것도 생각까지 담을 수 있는 테이프를 하나님과 단 둘이서 본다면 단 5분을 견딜 자가 있겠는가? 채 1-2분도 지나지 않아 너무나 부끄러워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지 않을 자라곤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중심에서 우러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말한 그대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마15:19)뿐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도 찾지도 않았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고 그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24시간 관찰할 수 있는, 그것도 중심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폐쇄회로 TV를 작동하고 계시지만 그 화면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대로 심판하면 아무도 살아 남을 자는 인류 역사 이래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토록 이 지구상에는 없을 것이다.
당장 저부터도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했다. 불신자 시절에 전도자 앞에서 “예수가 밥 먹여주나 하나님이 있으면 내 눈 앞에 보여봐라”고 큰 소리 치던 그 자리에서 콱 즉사 시키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였다. 바울 사도를 보라.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 현장을 주도했고 살인 면허를 받아 외국에까지 쫓아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던 자였다. 그런 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늘에서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이 용서해 주시고 도리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삼아 당신의 진리의 비밀을 그를 통해 증거하게 하셨지 않는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내세울 중심이 없다면 왜 성경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신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분이 보시는 중심은 도대체 어떤 중심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즐겨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가지고 역으로 추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분이 즐겨 만났다는 것은 그 중심을 다 보시고도 용납하셨고 또 그런 중심을 가진 자를 의도적으로 찾으셨다는 뜻이 되니까 말이다.
그분은 주로 고아, 창녀, 과부, 세리, 문둥병자, 봉사, 귀신 들린 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자, 38년 된 행려 병자,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다가 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 십자가상의 강도 들을 만났다. 그럼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가? 단순히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이었는가? 아니다. 죄를 지어도 인간 세상에선 최대치, 병으로 쳐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 한 마디로 사방에 한 치의 빈틈이 없이 꽉 막혀 인간 세상에선 도저히 탈출구라고는 보이지 않게 된 자들이었다.
인생살이의 아픔과 상처와 질고로 인해 그들의 심령이 더 이상 내려갈래야 갈 데가 없는 완전히 맨 밑바닥까지 가라 앉은 자들이었다. 더 이상 손을 쓸래야 쓸 재간이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인간적인 도움으로, 예의 다윗 왕이든 오늘 날의 목사든 심지어 부모 형제 배우자 그 어느 누구라도 그들의 영혼에, 나아가 그들의 인생과 삶의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님이 찾으시는 자는 외모는 더럽지만 중심이 깨끗한 자가 아니다. 그런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만약에 그런 자가 있다면 주님이 찾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주님을 찾았을 것이다. 주님은 가장 먼저 우리 속에 있는 절망을 보시길 원한다. 중심에 통회하고 애통하여 도저히 세상에서 도피성을 찾지 못해 벼랑 끝에 서 있는 자를 주님은 찾으신다.
다윗 왕이 위대해서 예수님의 선조로 택함을 받은 것이 절대 아니다. 이스라엘 국가적으로는 성공한 왕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개인의 인생으로 따지자면 그만큼 실패한 자도 없다. 아마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비참하게 실패한 자일 것이다. 일생을 눈물과 고통으로 지샌 너무나도 불쌍한 삶을 살았던 자였다.
간단하게 모든 사람에게 배반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것도 형제들, 아내, 장인 어른, 부하들,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말이다. 자기가 겪은 고통을 그는 어떻게 고백했는가? “나는 정말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22:14,15) 정말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평생을 살았다.
그런 다윗을 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는가? 그것도 간음과 살인까지 저지른 천하의 죄인인데도 말이다. 그의 중심에 하나님 보기에 아름다운 면이 딱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절망의 나락에서도, 어떤 죄악과 흑암의 세력이 자기를 묶으려 들어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 중심이다. 예의 시편에서도 “나를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라는 것이 고통에 못이긴 신음소리만이 아니었다. 간절히 주님의 구조를 요청하는 SOS 신호였다.
소년 다윗의 외모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웠다. 반면에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음란과 거짓과 살인으로 가득찬 여느 사람과 하나 다름 없는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오직 여호와께만 범죄 하였음을 아는 자였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비록 자신이 주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만은 그 얼굴을 자기에게서 돌이키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소원했던 자였다. 어떤 환난과 죄악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해결하고 변화시켜 원상 회복시켜 주심을 믿었다. 용서와 사랑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임을 잊지 않고 그 분께만 자기 인생을 위탁했었다.
혹시라도 다윗이 노년에는 결국 선하고 의로워졌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 말년에도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 조사를 부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행하여 국민들이 온역으로 죽는 벌을 받게 했던 자였다. 그가 자기 형들과 달랐던 점이 외모나 체격이 열등하지만 대신에 아주 착한 심성을 지녔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 그것도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했던 점 하나뿐이었다.
흔히들 신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너무나 힘든 고통을 겪으면 하나님이 나의 억울하고도 긴급한 사정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인간이 절망에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소망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음 소리가 커질수록 하나님은 당신의 귀를 더 넓게 여시며, 눈물을 흘릴수록 예수님도 함께 따라 우신다. 단 우리가 다윗처럼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과 은혜를 보기를 소망하면서 그분의 손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예수님이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을 완성하셔서 이 땅에 영영토록 당신의 통치를 완성하셨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다윗)의 후손이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이어서 예언한 대로다.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4,5,9)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몽땅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고 그분의 사랑은 만방에 넘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분이다. 우리 속에 있는 착한 심성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만약 내가 가진 중심을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보시면 단 일초도 살 수 없으며, 나아가 평생을 두고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중심이다. 그래서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볼 수는 없으되 그 추한 중심을 깨끗케 해 주실 이는 오직 예수님 뿐임을 인정하는 중심이다. 나아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던 그 분 발 앞에 엎드리고 싶은 소원과 열심을 놓치지 않는 중심이다.
지금 당신에게 이런 중심들이 있는가? 혹시라도 없다면 그 중심은 세상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외모를 앞 세워서 살려는 자기 욕심에 가득찬 중심일 뿐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은 보이는 대로 심판하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실 뿐이다. 따로 더 심한 벌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 원하는 중심은 단 하나도 없고 사단이 좋아하는 중심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상실한 중심대로 사단의 종으로 그냥 놓아 두신다는 뜻이다. 다시 묻겠다. 하나님에게 보여 드릴 중심이 과연 있는가? 없다면 그 중심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다시 보는 것 말고는 없다.
(12/16/2001 나무 십자가 교회에서 주일 예배 설교)
감사해서 그냥 '아멘'만 하려고 했더니 "10자 이상 적어 주세요"라고 나오네요.
그래서 다시 한번 "아멘!"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