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4)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2-6)
사단의 궁극적 관심사
예수님의 족보에 비천하고 불륜을 저지른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구세주인 그분은 의인 대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리, 창녀, 병자, 죄인들 같이 실패하고 소외된 자들을 만나 치유해 주었다. 나아가 바로 그 허물과 죄와 실패 때문에 그들을 더욱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풀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신자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한정 없이 인자한 분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무슨 짓을 해도 빙그레 미소 짓고 야단치지 않는 분이다.
따라서 신앙 생활도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살다가 꼭 문제가 생겨야 “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실 줄 믿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떼를 쓴다. 초신자 시절이면 몰라도 교회 출석한지 꽤 오래되어도 이러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주님이 참다 못해 화를 낸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의 신앙 생활 자체에 능력과 기쁨이 없어진다. 매년 되풀이 되는 실패와 나태 속에서 항상 고달프고 도무지 믿음이 성숙해지지 않는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무슨 일이든 용서해주며 복 주시기를 원하는 분, 즉 단순히 진통제나 해결사 수준으로 전락시킨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지금도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는 신자 된 진정한 권세를 누리지 못한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경우도 단지 죄인을 용서하러 오신 주님을 강조하기 위한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령하고도 엄청난 비밀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4,15)
아담과 이브가 사단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에게 반역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질렀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심판을 내리셨고 사단에게도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저주를 내렸다.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와는 무관하게 출생함을 의미한다. 당연히 성령으로 잉태되는 구세주가 사단에게 묶인 인류를 구원해 낼 것이라는 성경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선고 받은 후에 사단의 유일한 관심사는 무엇이었겠는가? 항상 무엇에 가장 신경을 썼겠는가? 말이 이상하지만 사단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라. 가장 먼저 자기 머리를 부술 여자의 후손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 알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어나지 못하게 하거나 태어나더라도 죽이려 들 것이 틀림 없다. 따라서 구약 성경의 모든 전후 관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배경은 사실 사단의 바로 이런 몸부림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사단은 죽기 살기로 예수의 탄생 자체를 방해 하려 들었다.
그런 영적 배경 위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진행 되었고 또 그 내면에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으로서 줄 수 있는 온갖 은혜와 축복을 베푸셨다. 그저 작은 구실만 생기면 기회다 싶어 하나님을 배역하는 인간을 비록 징계는 하셨지만 끝까지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그루터기의 싹으로 보관한 것이 구약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까닭은 오직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3:16)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주시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사단의 방해는 격렬했고 그럴수록 하나님은 더욱 교묘하게 그 씨를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장차 오실 왕, 메시야를 사단의 방해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단이 상상도 못하는 비천하고도 불륜을 저지른 여인들의 태에 숨기셨다가 소년 양치기 다윗의 모습으로 남기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말구유까지 낮추어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했다.
다말과 유다의 불륜 사건의 의미는?
네 여인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다말의 경우만 대표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언뜻 보면 이 사건은 성경의 순서로 보아 엉뚱한 곳(창38장)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요셉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 갑자기 나타나므로 마치 별개의 사건을 아무 의미 없이 편의상 삽입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기록된 순서에도 반드시 뜻이 있다.
이 사건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요셉이 형제들 11명을 제치고 아비 야곱의 총애를 받는 사건이다. 꿈에 두 번이나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한 것을 두고 자랑했다. 그 때 형제들은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고 따지면서 그 꿈과 그 말로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37:8)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형제들이 공모하여 요셉을 굶거나 들짐승에 물려 죽게끔 구덩이에 빠트린다.
이것이 과연 단순하게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생긴 우연한 일이겠는가?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사단은 항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다른 민족들은 전부 자기 수하에서 종으로 부려 먹었고 참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이스라엘 뿐이었다. 따라서 자기 머리를 부술 여자의 후손도 결국 이스라엘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지구 상에 노아 이후 하나님을 알고 믿는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것은 물론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적 약점과 허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끊임 없는 사단의 방해가 그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후손들이 삼대 만에 열 두 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드디어 왕이 될만한 자가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꿈에서 왕으로 정해졌다면 틀림 없었다. 요셉은 사단이 가장 먼저 지목하여 없애야만 할 대상이었다. 형들의 시기심이라는 죄성을 사단이 조종하여 요셉을 죽이려는 흉계를 꾸미도록 했고 그 당장에는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태는 마침 우연히(?) 나타난 미디안 상고들로 인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일말의 양심을 느낀 유다가 죽이기보다는 노예로 팔아버리자고 제안했고 요셉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사단으로선 썩 내키는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 이후 기근으로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모두 애굽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사백 년간이나 노예살이를 하게 됐으니 직접 사단을 대적할 자가 나타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애굽은 바로 사단이 마음 놓고 활동하는 본거지였으니 말이다.
성경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후에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정말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결코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요셉을 처리하고 한 숨을 돌리려는 사단 앞에 유다가 자기 대적의 유력한 후보로 등장했다. 요셉을 살려내는 유다의 모습을 보고 혹시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짐작했고 그래서 유다의 장자 엘과 차남 오난을 큰 무리 없이 제거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범죄로 하나님께 벌을 받았지만 그들 죄의 본성은 궁극적으로 사단의 조종 아래 놓여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는 참에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를 맺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심지어 죄악의 아비인 사단이 봐도 너무 추하고 더러운 사건이다. 사단이 어떤 마음을 먹었겠는가? 그런 불륜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결코 구세주가 될 수 없으리라 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후손이 다윗이었고 또 그 다윗의 후손이 메시야였다. 유다는 율법에 규정된 계대결혼을 어겨가면서까지 삼남 셀라마저 형들처럼 죽을까 염려하여 며느리 다말에게 기업을 잇도록 해주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단은 인간의 죄성을 악용했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허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해나가신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인간적 생각만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가장 큰 특기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생각과 어떤 사단의 모략조차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하신 뜻대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게 하신다. 며느리 다말을 들어 사용하여 말도 안 되는 불륜사건을 일으키게 하더라도 여자의 후손을 다윗의 가문에서 나도록 하신다. 사단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당분간 다말에게서 난 후손을 자기의 대적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정말 놀랍고도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애굽 종살이의 의미는?
성경에는 이런 비슷한 예가 얼마든지 많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 잘못도 없이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의 땅 애굽에서 4백 년간이나 노예 생활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 그대로 살았다면 명맥을 제대로 잇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야곱의 대에 가서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의 외딴 시골 마을에 한 외국인 부부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외국인이지만 늙고 자식이 없어서 그냥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00살에 아이를 낳더니 삼대 만에 아들만 12명으로 불어나고 가축과 재산이 엄청나게 불었고 노비도 수백 명을 거느리는 거부(巨富)가 되었다. 나아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온 동네가 작당을 해서 한 밤중에 전가족을 몰살하고 그 재산을 차지해 나눌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지금이 아니라 4000년 전의 일로 가정해보면 충분히 있을 법하고도 남는 일이지 않는가? 바로 야곱이 이와 같은 경우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은 하나님이 기근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이런 사태를 대비해 피신 시킨 것이다. 정말 그 후손의 수가 하늘의 뭇 별처럼 되어 감히 가나안 족속이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만든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도록 한 그분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사단으로선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보냄으로써 자기 대적이 태어날 것을 막았다고 기고만장했을지 몰라도 사실은 거짓의 아비 사단이 오히려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셈이다. 사단이 요셉에게만 주목하고 안심하고 있을 즈음에 하나님은 오히려 전혀 엉뚱한 다말을 통해 다윗의 씨앗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자기 가족들을 눈물로 다시 상봉할 때에 뭐라고 고백했는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7,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민족이 바다의 모래처럼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당신만의 큰 구원으로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애굽 종살이를 허용한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아예 태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시도는 집요했다. 애굽에 있었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창하자 바로가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때도 담대한 믿음의 산파와 영민한 십보라를 동원해 모세를 비롯한 메시야의 선조들을 지켜 주셨다. 급기야 하늘의 징조를 보고 여자의 후손이 태어날 것이 확실해지자 다급해진 사단이 사악한 왕 헤롯을 조종해 2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이를 몰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꿈에 현몽하여 다시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메시야의 선조도, 그 본인도 하나님은 사단의 훼방에서 당신의 때가 될 때까지 지켜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사단보다 약한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당당하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 매번 사단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비겁하고 치사하게 메시야의 씨앗을 꼭 창녀, 과부, 노예, 종의 모습으로 숨겨야만 하는가? 혹시 사단에 비해 그 힘이 약한 것인가?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가? 더 능력 있고 떳떳한 방법을 모색할 지혜가 모자라는가?
무엇이 정당하고 비겁한가, 혹은 옳고 그른가의 구별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권능의 원천도 오직 하나님이다. 심지어 사단의 경우도 그 능력을 사용할 권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 그분은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죄인을 심판하실 수 있으며 사단도 단숨에 요절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오직 그분만의 선하고 정당한 뜻이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 핑계, 반론, 불만, 불평을 갖다 댈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에 당당하고 선해 보이는 방식으로만 이 땅을 다스렸다면 벌써 이 지구는 없어지고 단 한 명의 인간도 살아 남지 못한다.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다. 구태여 예수님의 족보에 네 명의 비천한 여자를 동원시킬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 당장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일을 그 죄인들을, 특별히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다말이나 라합 같은 비천한 여인의 족보에 예수님의 씨앗을 숨긴 것이 결코 사단을 속이기 위한 교묘한 위장이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마저도 그렇게 큰 은혜와 권능을 입고도 여전히 죄로 실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모든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연약하며 불완전하고 죄와 사단과 사망의 그늘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라는 것이다. 아기 예수가 오실 때까지는 당분간 세상을 사단의 독무대로 놓아 두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죄악으로 실패하고 사악한 사단에 조종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당신의 영광을 절대 남에게 특별히 사단에게는 빼앗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메시야가 탄생할 민족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하여 당신의 거룩한 율법을 주었고 세상 어느 민족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은혜와 권능으로 붙들어 주셨다. 사단을 피한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켰다.
하나님은 당신이 정한 계획은 반드시 이루신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신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전환점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이 택하셔서 쓰신 백성들이 반드시 있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비천하고 가련한 네 여인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불쌍한 죄인이라 선택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날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 안에서 각자 특유의 소명을 감당했다. 그것도 온갖 허물과 실패와 죄로 인해 하나도 내세울 것 없는 여인들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새롭게 되어 사단의 온갖 훼방을 생명을 걸고 이겨내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는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계획하고 하나님에게서 큰 일을 기대하라”고 했다. 이 네 여인의 공통점은 자신은 어떻게 되든 끝까지 믿음의 가계 안에 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절실하게 소원했다는 것이다. 일신상의 안위와는 상관 없이, 당장 내일의 끼니가 없어지더라도, 사회적 체면과 위신은 아랑곳 않고, 조국과 민족의 배반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심지어 목숨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했다. 비록 너무나 비천하고 죄 많은 모습이지만 그런 자신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있으며 그 일에 쓰임 받고 있음을 확신했다.
또 다시 한 해가 새로이 시작되는 시점에 우리 모두 서 있다. 여러분은 새해의 계획을 어떻게 잡고 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큰 계획을 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계획을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나를 통해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아니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바로 지금 내 인생이 그분의 계획과 뜻 가운데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하는가? 그분의 구체적인 계획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으며 또 나를 통해 그분의 놀랄만한 영광이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는가?
모세는 살인자요 도망자였다. 인생 초반 40년은 바로의 궁정에서 호사스럽게, 중반 40년은 광야에서 보잘 것 없는 양치기로 보냈다. 자기 민족을 위한답시고 단 한번 자기의 의분을 내세우다가 인생의 2/3를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 없이 허비했던 자다. 그런 모세도 하나님이 불러 내었고 도저히 상상도 못할 큰 이적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죄악과 우상의 땅에서 건져내는 일에 쓰임 받았다. 그가 계획하거나 심지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에 부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에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새해에 성경 통독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와 이웃 구제에 더 열심을 내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다. 신자라면 반드시 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새해 계획마저 하나님이 나를 향해 세우신 계획과 맞바꾸는 일부터 계획하여야 한다. 아직 구체적인 소명에 대한 계시를 받지 않아도 좋다. 정말 “나를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부르소서!”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인생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신앙 생활에 승리가 끊이지 않고 기쁨과 활력이 샘솟을 것이다. 정말 가는 곳마다 밟는 땅마다 하나님이 차지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미 하나님이 계획해 놓은 신 일에 단지 쓰임만 받고 있는데 그 일을 못 이룰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비록 내 모습은 이 네 여인보다 하나 나을 것이 없어도 말이다.
(나무십자가 교회에서 12/30/2001 설교한 내용임)
정리 2/2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