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7)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2,23)
미신적인 임마누엘
예수님의 족보는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끝없이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와 징계와 은혜를 번갈아 베푸시며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예수님의 탄생은 여전히 죄와 흑암에 묶여 실패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때가 차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이다. 예수 탄생 600년 전 사람 이사야도 마태와 동일한 맥락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했다. 즉 메시야가 이땅에 오신 근본 목적이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대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오셔서 함께 임마누엘 하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강림하셔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내주(內住) 하심으로써 그 예언은 완전히 실현되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전지전능하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여 섭리하시는 바로 그분이 영원토록 신자와 함께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너무 미신적 신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자가 많다. 마치 수호천사나 눈에 안 보이는 슈퍼맨이 그림자처럼 신자를 수행하면서 모든 화액을 막아주고 위험에서 건져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막혔던 교통체증도 풀리고 강도에게 총을 맞아도 스쳐 지나가고 돌 뿌리에 넘어져 제풀에 코가 깨지는 법은 전혀 없게 해준다고 기대한다.
물론 하나님이 택하여 그 자녀가 된 자가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런 일들이 생긴다. 반드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고 지켜 주신다. 심지어 기도를 하지 않아도 정말 긴급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기적 같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보호하신다. 그러나 수호천사라는 개념은 신자가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 시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하며 성경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3:5-9)
하나님이 신자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임마누엘을 참 흥미롭게도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것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탐욕을 부리지 말고 검소하게 자족하며 살아라는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돈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여 선택하라는 종교적 계명도 아니다.
돈이 떨어져 형편이 별볼일이 없어지면 신자들은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은 아닐까? 버린 것은 아닐까?” 즉 신자들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주해 있는가 없는가 판단하는 기준을 돈이 많고 적음에 둔다는 것이다. 형편이 나빠지면 힘이 빠지고 하나님마저 힘이 빠진 것 같이 느껴지는 신자라면 하나님을 기껏 수호 천사 수준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에게 하나님이 진짜로 함께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브리서 기자는 나아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다. 이 또한 검소하게 살아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내 삶이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판단하는 근거 또한 돈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불신자는 돈의 다소(多少)를 가지고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신자는 물질과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자족하는 삶의 유일한 근거여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신자에게 “너희가 왜 예수를 믿느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수호천사로서 모든 위험과 대적에서 지켜 보호해주시고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풍족하게 채워 주시기 때문에 믿는가? 아니면 예수님 그분이 바로 네 삶의 모든 것이 되어 그분의 임마누엘만으로 만족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 신앙의 뿌리를 과연 어디에다 대고 있는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자신의 전 존재와 삶 자체의 가치와 목적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치를 가져야 한다. 욥처럼 정말 하루 아침에 전 재산, 전 자식, 마누라까지 다 잃고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그 고통 때문에 차라리 죽고싶다는 고백이 나올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끝까지 그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현재 가진 돈의 다소에 상관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임마누엘이 된다.
공산당에서 탈당한 스파이의 증언
미국무성의 고위 관리이면서 공산당 스파이로 13년 간의 이중 생활을 했던 휘테이크 챔버스가 자서전 ‘증인’(Witness)에서 자신이 왜 공산당원이 되었고 또 왜 탈당했는지를 이렇게 밝혔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평생을 걸고 끊임 없이 추구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하나는 꼭 살아 있어야 할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공산주의(Marxism)에서 발견했기에 공산당에 입당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은 가진 자와 못 가진자 간의 갈등에 기인하므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공산주의에 자기의 전 인생을 걸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또 탈당을 한 이유는 공산 세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며 그 체계가 오히려 더 부패하고 불평등한 죄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탈당했다고 덧붙였다. 볼티모어의 아파트에서 자기 딸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귀엽다. 눈코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고 콧물이 흐르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그야말로 자기 인생의 가장 큰 기적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과연 저런 아이가 자연의 원자들이 우연히 합성해서 생긴 것일까? 전기적 자극으로 단백질 원자가 분자가 되고 그래서 단세포를 형성하여 아메바에서 물고기와 원숭이를 거쳐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의심이 생겼고 생각하면 할수록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심증이 들기 시작했다. 저렇게나 아름답고 너무나 섬세한 아이라면 반드시 선하고 완전하며 정미한 설계자 창조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솟았다.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손가락이 자기 영혼을 만져준 것 같은 체험을 했고 그것이 자기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의 삶의 목적이 꼭 살아 있어야 할 이유와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 한 말은 너무나 맞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개선하고 해결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의도도 참으로 선하다. 그러나 그전에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가장 근본적인 과제다.
창조주와 교통 할 수 있는 영혼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 그 영혼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원래 의도한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인식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로지 인간 사회의 공리(公利)를 위해 편의에 의해 제정된 법칙과 규율 안에서만 삶을 영위하는가?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이고 그것들을 윤택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라고 세운 청지기로서 고귀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오직 적자생존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남보다 많이 빨리 차지하려고 짐승처럼 살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유물론적 사고체계로 물질 우선 주의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신본주의적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인생을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한 상태에선 아무리 인간끼리 공평하게 소유하고 분배하려 해도 절대 제대로 실행될 수 없다. 인간의 어떤 합리적 이론과 심오한 사상체계라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인간과 인간끼리 만나 생산 되는 것은 대립과 갈등뿐이다. 모든 인간이 불완전하고 유한하며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류 수천 년의 역사는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서로 대적한 것 뿐임을 증명하고 있다. 역사가 H. G. Wells는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다. 역사에서 인간이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갈파했다. 심지어 나찌 독일도 그 방법론에선 잘못되었지만 원래 목적은 이상향(理想鄕)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독가스 실에서 수백만의 해골을 양산(量産)했을 뿐이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음란과 시기와 질투와 위선과 사기와 궤휼이 인간의 속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이 솟아난다. 스스로 도저히 주체할 수도 없다. 이 또한 우리의 수없이 실패했던 지난 경험이 증명한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했듯이 자기의 과거 경험에서도 배울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측면에선 몰라도 죄에서 벗어나 거룩해지는 측면에선 그렇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이 예수를 알기 전에는 사단에게 묶여 완전히 부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는 그 심령 깊숙이 상처와 염려와 분노와 절망감이 가득 차 있어 결코 평안해지지 않는다. 항상 공허하고 갈급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부재(不在)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고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종교적 노력만으로는 그 영혼이 바로 치유될 수 없다. 영혼을 치유하려면 영혼을 인간에게 심어 준 자만이 할 수 있다.
인간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기갈이 생긴다.(암8:11)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에는 반드시 망한다.(호4:6) 히브리서 기자도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라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한다”(13:9)고 증거 하였지 않는가? 역사가 Wells가 세속의 역사에선 하나도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진실이다. 그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역사에서 배울 것은 실패하는 방법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역사는 인간의 끝없는 실패로 돌고 돌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 절대로 아무 목적과 계획과 뜻이 없지 않다. 인간은 물질이 우연히 조합하여 형성된 가치 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이 땅에 지은 이도 낳은 이도 없이 그냥 내던져진 고아들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은 참으로 고귀한 존재다.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되찾아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은 절망과 사망뿐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말 고귀하게 살아가야 할 한 인간의 전 평생에 비해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은 정말 한 줌도 채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라면 집, 자동차, 먹고 사는 문제에 붙들려 허덕이다 평생을 허비해야 할 짐승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이웃 집에서 좋은 차를 사면 배가 아파 며칠 잠을 못자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언제까지나 보이며 인생을 시시하게 살아선 안 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자 스스로 수호천사 수준에 머물게 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전우주보다 더 크신 초월자로서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섭리 운행하시는 절대자가 그 자녀를 절대적인 선과 사랑으로 영원토록 존귀케 해 줄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그 분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그 계획을 완전히 이루셨다. 그 후 당신의 택하신 백성과 항상 함께 하셔서 새 생명을 풍성하게 부어주신다. 더 이상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가 신자를 옭아매지 못한다. 예수님은 신자를 단순히 지키고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영원과 연결시켜 주신다. 아니 신자는 이미 그렇게 바뀐 존재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변함 없이 받고 있다.
정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예수를 믿기 전에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어서 술에 취해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 한 적이 한번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아 현실적으로 너무 큰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영원과 연결된 그분의 자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 내 실력이 모자라고 세상이 협조해 주지 않아 망했다고 만 생각했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 망한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두 종류 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영원한 멸망으로 달음질 하는 자와 하나님을 알고 소유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미 들어선 자다. 후자의 경우 즉 신자는 이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뜻에 따라 이 땅에서 그 소명을 이루는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뜻대로 살면서 긴급 사태에서만 하나님이 임마누엘하실 것이라고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소유한 것뿐이지 하나님 당신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임마누엘 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수호천사 정도로 격하시키고 있다. 하나님더러 계속해서 자기가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곳으로 무조건 오라는 것이다. 그 일은 예수님이 성육신한 십자가 사건으로 끝이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젠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 그 분께 나아갈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예수의 은혜를 알게 된 이후로는 신자가 하나님께로 자기 전부를 바치며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이땅으로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이 임마누엘의 필요 조건이라면, 구원 받은 신자 쪽에서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며 나아가는 것이 임마누엘의 충만 조건이다.
지금 당신은 임마누엘의 반만 누리고 있는가 완전한 전부를 누리고 있는가? 혹시라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직도 하나님을 수호천사라고 믿어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만 서있고 빛쪽으로는 한발도 디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아직도 하나님 대신 돈이 목적인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1/20/2002 나무십자가 교회 주일 설교, 정리 3/8/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