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0)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1-8)
혼동 속에 빠진 예루살렘
예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바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가서 헤롯왕과 대면했다. 그들로선 메시야 탄생지가 어디인지 또 그곳으로 가는 지리를 물을 양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왕이 되실 분이 태어났다는 공식 통보를 한 셈이 되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계속해서 예언되었고 그렇게 대망했던 인자가 출생했는데도 예루살렘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고 심지어 상식적인 수준에도 못 미쳤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이는 오직 이방인 박사 몇과 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뿐이었다. 죄와 고난에서 해방시켜 줄 구세주가 왔다면 정말 기뻐서 춤을 추어야하지 않겠는가? 일본 식민지 점령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한국민들은 태극기를 꺼내들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목이 터지라고 만세를 불렀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다고(3절) 한다. 여기서 ‘소동’이란 원어의 뜻은 무서워서 당황해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내가 두려워서 극심한 혼돈에 빠졌다는 것이다. 만세는커녕 완전히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당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이 더욱 강했을 때였다. 다윗 왕국이 망할 때에 온갖 고난을 겪다가 결국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70년을 보냈다.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도 온갖 외적들에게 시달림을 겪다가 헬라의 지배를 거쳐 이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지난 4백년 간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히 끊기었던 그야말로 침묵과 암흑의 시대였다. 그런 와중에 메시야가 탄생했다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해했던 일차적 이유는 잔인하기로 소문난 헤롯 왕 때문이었다. 이미 70줄에 들어섰음에도 왕권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했고 과대망상증마저 있어 자신의 처와 아들들을 살해 했던 자였다. 오죽하면 당시의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을 정도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헤롯은 동방박사가 그의 면전에서 유대에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 당장 난리를 쳐야만 했었다. 그런데도 메시야가 탄생했으니 자기도 찾아가 경배할 것이라고 했다. 음흉한 속셈을 숨기고 겉으로는 통이 큰 왕처럼 가장했다. 헤롯은 그렇다 치지만 왕이 일단 공개적으로 경배하겠다고 천명했다면 아무리 헤롯의 평소 성격을 알고 있지만 최소한 용기 있는 자 몇 명은 동방 박사들을 따라 나섰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아무도 그러지 않은 것이 유대인 선지자가 아닌 이방의 점성술사가 예언을 했기 때문일까?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해 좀 더 클 때까지 두고 보려 한 것일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아기 메시야에게 경배를 해도 손해 볼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온 성이 오히려 불안에 떨며 소동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유대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온 성이 소동한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만약 우리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과연 박사들을 따라 나섰겠는가? 잘 판단이 안서면 이렇게 가정해 보라. 지금 이 시대에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말하자면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 아니라 이미 재림했다는 확실한 소식을 들었다면 말이다. 황당무계한 소문이나, 광신자 그룹이나, 이단적 종말론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입증된 기독교 지도자가, 예컨대 미국의 빌리 그래함이나 한국의 조용기 목사님 같은 분이 가서 재림 예수님을 경배하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일반 대중들의 반응이 기뻐서 환호하겠는가? 당황되고 무서워 소동을 벌리겠는가? 아마도 우리 모두의 반응도 본문의 예루살렘 성내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이 아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림 때나 재림 때나 두려워서 당황부터 하겠는가?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아직 자신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평생가야 몇 명 전도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둘 중에서 첫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반응은 너무 잘못된 것 아닌가? 신자이기에 당연히 재림 예수에게 경배하러 가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잘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십자가에서 믿음의 출발을 했다. 인간의 선행과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만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지 않는가? 또 기도할 때마다 그 믿음의 증표로 “이 모습 이 대로 저를 받으실 줄 믿습니다!”라고 얼마나 자주 입술로 고백했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떳떳하게 영접하지 못하겠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아주 심각한 문제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고 복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은 언제 죽어도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님의 의로만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재림했는데도 그럴 자신이 없다면 이런 신앙상의 큰 모순도 없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밑바닥에는 잘못된 정서가 흐르고 있다. 우리가 잘한 것 하나 없이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이 그 믿음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강대상에서마저 그렇게 가르쳐지고 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성화(聖化)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신자가 경건의 삶을 훈련하고 연습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죄와 악과는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마치 신앙의 전부이거나 가장 핵심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어떤 면에선 성화를 너무 강조하면 기독교 신앙의 목적 내지 종착점이 도덕적 삶을 달성하는 것인 양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불신자들이 신자를 향해 가장 자주 크게 비난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신자가 왜 저래? 세상 사람과 똑 같이 나쁜 짓을 하고 심지어 더 하네? 하여튼 예수쟁이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위선자들이야!” 물론 불신자들로선 기독교의 본질을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신자마저 자기 신앙의 본질을 착하게 사는 것에 둔다면 정말 큰일이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전혀 다른 것이다.
총 한방 쏘지 않고 무너져 내린 베를린 장벽
동서독을 가르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1989년 총 한방 쏘지 않고 무너져 내렸다. 동독 국민들이 무혈 혁명을 이룬 결과였다. 그런데 그 혁명이 어떻게 발단되었는지 아는가? 그로부터 7년 전에 푸에러 목사가 라이프찌히의 한 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겨우 몇 명과 함께 시작한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기도 모임이었다.
당시 동독에선 집회의 자유가 허용된 유일한 단체가 그나마 교회였다. 그래도 유물론과 무신론의 가치 체계가 근간인 공산주의 사회 하에서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것은 썩 내키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온갖 핍박을 감수해야 했다. 정말 신앙이 투철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 모임이 차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 7년 후 인근의 네 교회가 모여서 기도했고 참가자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그들은 예배를 마친 후에 촛불을 들고 공산 독재 치하인지라 침묵하며 시내를 행진했다. 시민들 모두에게 그 모임과 행진이 알려졌고 예배의 참가자는 5천 명이 넘게 되었다. 드디어 서방 자유 언론의 주목도 받기 시작했다.
급기야 동독 공산당 창립 40주년 기념일인 1989년 10월 9일에도 그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고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발포 명령을 내렸다. 라이프찌히 온 시내에 비상이 걸렸다. 병원마다 응급실에 침대를 더 마련하였고 급하지 않은 환자들은 퇴원시키는 소동이 일어났다. 총에 맞을 부상자들을 수용할 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교회와 극장은 그날 저녁 전부 문을 활짝 열어두어 대피자들을 숨겨 주기로 했다.
기도 모임은 그날 밤에도 예정대로 열렸다. 그런데 동독 비밀경찰 2천 명이 미리 예배당의 좌석을 전부 차지하고 앉아 그 집회를 원천 봉쇄하려 했다. 그럼에도 남은 좌석과 복도와 교회 마당에는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매워졌고 기도 모임을 가진 후 전과 같이 촛불 행진을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발포했어야 함에도 도열한 군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총을 쏘지 않았고 아무 사고 없이 침묵의 촛불 행진을 마칠 수 있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로선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이유로 발포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직접 호네커에게 전화를 걸어 발포 중지를 요청했는지 확인했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매주 촛불 행진에 참여하는 시민이 7만에서 50만이 되고 또 백만으로 늘어나더니 결국에는 전국민이 나섰다. 동독 정부로선 꼼짝 없이 국민들의 자유를 달라는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베를린 장벽도 정부의 어떤 통제도 없이 국민들에 의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지금 신자더러 세상의 불의한 권력과 추악한 죄악을 생명을 걸고 싸워서 선을 쟁취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회 정의와 정치적 공평을 위해선 불신자도 얼마든지 열심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치하 때의 천안문 사태나 한국 군사정권하에서의 광주 사태에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면서 불의한 권력에 항거한 자들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었다.
신자들이 “동독을 무너뜨린 발단이 된 처음 몇 사람의 믿음을 본받자.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구하고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의 목숨을 버리자. 하나의 썩어 없어질 밀알이 되자!”라는 마음으로 몇몇 신자가 모여 기도 모임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믿음은 아니며 또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한국민 중에 얼마나 호응해줄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신자들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어디까지 믿음이 발휘되어야 할 동기이며 또 어디서부터 믿음이 직접 작동되는 내용인지 잘 모른다. 동독 사태의 경우에 동포들에게 자유를 주고 나라를 민주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이 발휘되어야 할 동기일 뿐이다. 또 그런 일을 자기들의 간절한 기도와 금식으로 이루어 내겠다는 것 자체도 결코 믿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적인 내용은 따로 있고 아주 간단한 것이다. 역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다. 현재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권세가 내 주위의 여건과 환경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힘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아무리 어렵고 고달픈 사건들이 우리를 얽매고 있더라도, 말하자면 동독의 공산정부가 그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절대 실제적인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알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독재정권 하에서 국민들이 굶주리고 핍박받는 것은 신자가 믿음을 발휘할 동기였고, 아무리 공산 정권의 권력이 철벽같고 포악하더라도 역사를 움직이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며, 기도 모임을 시작하여 하나님더러 이 일에 간섭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믿음이 작동된 것이며, 정의와 공평한 세계로 바뀐 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신 결과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3차 세계 대전이나 핵전쟁으로 공산 국가들이 패배하지 않는 한 그 철의 장막이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신자는 달라야 한다. 정확하게는 신자가 가진 믿음은 세상 사람들의 이성과 논리와 과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이 죄악과 불의 아래에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로 끝까지 그렇게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할 수 없지만, 심지어 신자가 목숨을 바친다고 금방 세상의 죄악이 없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언젠가는 당신만의 의로 깨끗케 해주신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동독의 몇 안 되는 신자들이 처음 기도 모임을 시작했을 때에 7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운명의 그날 밤에 당연히 군대는 발포하고 자신들은 죽을 것이라고 각오했었다. 정의와 공평의 사회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 하나님만이 이 세상과 역사의 진정한 주인임은 확실히 믿었다. 그분만이 우리를 다스리는 선한 목자이기에 세상의 악들이 어떻게 설쳐대든지 간에 모든 소망을 오직 그분께 두었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이제 우리가 갖는 신앙의 잘못된 부분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신앙생활의 방향 설정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겠는가? 동독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신자가 세상에서 정의를 실천하거나 기도하고 예배 보는 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의 정의와 공평을 쟁취하는 것, 다른 말로 해서 신자가 착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 내지 중심에 두는 것은 정작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자꾸 그렇게 하려는 신자의 솔직한 심정은 무엇이겠는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죄에 찌들었던 자신이 공짜로 구원을 얻게 된 것 같아 좀 미안한 감이 들었고 그래서 이제는 착하게 사는 것으로 그 보답을 하려는 것 아닌가? 또 그보다 더 깊은 실제 속마음은 혹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죄 안 짓고 살 테니까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는 아닐까?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된 출발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계에서도 유일한 주인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세계와 곧 썩어져 없어질 이 땅 양쪽을 다 관장하는 분은 오직 그분이다. 그래서 세상만사는 반드시 당신만의 뜻대로 이뤄지며 그 뜻은 영원토록 선하고 의롭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구원 받아 당신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당신의 백성들은 반드시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으로 덧입히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죄에 빠져 실패하고 넘어져 있더라도 절대로 자기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신자를 사랑한다. 현재의 형편이 아무리 말이 아니고 자신의 꼬락서니가 도저히 볼 품 없어도 죽었으면 죽었지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자는 더욱 크게 사랑하신다. 야곱이 바로 그런 대표적 인물이다. 세상적인 사기꾼으로 아버지마저 속였기에 도무지 의로운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죽어도 놓지 않겠다고 붙들고 늘어졌고 또 실제로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어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반면에 죄를 안 짓고 인격이 고상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또 그러는 것이 마치 신앙생활의 열매를 아주 잘 거두고 있는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는 것보다 세상에서 의인이 되는 것과 자기가 거룩해지는 것에 관심이 더 가 있다면 심지어 신자라고도 할 수 없다.
예수님도 성전 한 복판에 당당하게 서서 십일조와 선행과 구제와 기도에 열심이었다는 바리새인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상급인 세상에서의 칭찬을 이미 이 땅에서 다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왕국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했다. 반면에 성전 구석에서 하늘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저야말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오직 당신의 긍휼을 바란 세리는 믿음이 좋다고 칭찬했다.
신앙의 싸움에서 자신이 경건해져서 하나님 앞에 가 상급을 받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 만을 목표로 하는 싸움이어야 한다. 가장 먼저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누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을 받고 예수의 권능에 의지하여 예수 안에서 거룩해져야 한다.
신자가 예수님의 빛에 가까이 갔기 때문에 그만큼 어둠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또 그분의 빛이 자기를 통해 비춰 나옴으로써 자연히 세상과 사람 앞에 착하고 의롭게 보여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의롭게 살아도 예수가 실종된 상태는 신앙이 아니다. 정의와 공평과 정직과 희생과 섬김 등 그 자체가 믿음의 내용이나 목적이 결코 될 수 없다. 믿음은 오직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그래서 그런 선한 결과들은 항상 믿음의 열매로만 나타나야 한다.
마태가 인용한 미가의 예언(본문6절)에서 베들레헴에서 나서 유대 땅을 다스릴 자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새로운 도덕 선생이나 훈육주임을 보낼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더러 착하게 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실 이는 오직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는 것이 신앙이다. 그분이 목자이면 우리는 그분의 양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그 이상이 되려고 시도하면 하나님 앞에 교만이요 그 이하가 되는 것은 불신앙이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다. 헤롯이 눈도 깜짝 안하고 아기를 몇 십 명이나 죽인 것은 약과다. 공산 정권에선 수 만 명을 총칼로 죽였고 동독 호네커 정권에서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운명의 그날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총칼로 진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찌 독일에선 수백만을 독가스로 죽였다. 그것도 단지 그 인종이 마음에 안 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죄악과 싸워야 한다. 정의와 공평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자만의 전유물일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노력할수록 성공보다 오히려 실패와 좌절이 훨씬 더 많이 생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뿐더러 선한 것은 아예 계획도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진선미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을 가장 많이 받았고 또 메시야을 그렇게 대망했던 유대인들이 막상 아기 예수가 탄생했어도 아무도 경배하지 않았고 온 예루살렘 성내에 소동마저 일어났다. 또 오늘 날 대부분의 신자도 만약 예수님이 재림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떳떳하게 경배하러 가기보다는 당장에 불안해지고 두려움이 앞설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우리 모두의 실패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지 않는가?
신앙이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하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분, 위치, 특권이 이미 영원토록 그분 안에 속하게 되었고 또 그것은 절대로 변함이나 취소가 없다는 것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이름 석 자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기에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그 바뀐 신분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닥쳐도 십자가 소망을 안고 당당하게 사는 것이다.
죄와 사단과 세상의 권력 뿐 아니라 돈, 자존심, 체면, 명예 그 무엇이라도 신자가 예수 안에서 누리는 권능을 훼방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더 경건하고 신령해지기 보다는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과 누구를 만나더라도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내 생명이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만약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재림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단 걸음에 쫓아가 그분의 발 밑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이 참 신앙이다. 혹시라도 내가 착하지 못하고 이뤄 놓은 일이 적어 주님 보기에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은 신앙 양심에 비추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흘리신 보혈의 의미와 그 권능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신은 예수님이 지금 바로 재림했다는 확실한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황될 것인가? 당장 뛰어가 그분을 보고 싶을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당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본질을 재점검해 보아야 한다. 골고다의 십자가 언덕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십자가 복음을 이미 다 알고 믿으며 또 그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죄악과 나태로 혹은 사탄의 방해로 복음을 잊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 외에 신자가 믿음으로 싸울 일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착하고 의로워지는 것은 한창 그 다음의 문제, 그것도 십자가 앞에 엎드린 것의 결과일 뿐이다.
(2/10/2002 나무십자가 교회에서 설교, 5/31/2006 정리)
'마태가 인용한 미가의 예언(본문6절)에서 베들레헴에서 나서 유대 땅을 다스릴 자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새로운 도덕 선생이나 훈육주임을 보낼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더러 착하게 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실 이는 오직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는 것이 신앙이다. 그분이 목자이면 우리는 그분의 양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그 이상이 되려고 시도하면 하나님 앞에 교만이요 그 이하가 되는 것은 불신앙이다'
우리 신자들이 종종 잊거나 자칫 착각,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말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