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1)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9-11)
무례한 첫돌 선물
유학생 상대로 목회를 할 때에 젊은 대학원생 부부 교인들이 많아 일 년에 몇 번씩 아이가 태어났다. 그럴 때마다 다른 모든 일은 제쳐두고 병원으로 달려가 꽃과 카드를 사서 선물로 주며 갓 태어난 아기에게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주었다.
지금 동방박사들도 방금 출산한 가정을 방문해 선물을 주었다. 헤롯이 별이 나타난 시점과 여행 기간을 감안해 2살 미만의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최소한 돌도 한창 지났을 수 있다. 어쨌든 신생아나 첫돌 아기에게는 주로 어떤 선물을 주는가? 한국 같으면 금반지가 최고다. 그 다음으로는 옷, 장난감, 그림책, 꽃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박사들의 선물은 그런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고 어찌 보면 무례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세 가지 선물이 각각 메시야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배워 왔는데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황금은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값지고 불변하는 것의 대표이라 아주 귀한 자에게 선물한다. 유향은 관목의 송진에서 난 향료로 성전 제사 때에 헌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에 방부제로 쓰이지만 비싸서 고귀한 신분이라야 장례에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황금은 우리를 다스리는 왕, 유향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제사장, 몰약은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직접 달려 죽으실 구세주로서의 메시야를 각기 상징함에 틀림없다.
갓난아기에게 주는 선물이란 일차적으로 그 장래를 축복하는 의미를 갖는다. 황금은 왕 혹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므로 선물로서 아주 좋다. 유향도 오늘날로 치면 목사 같은 성직자가 되라는 것이니까 괜찮다. 그러나 몰약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이제 돌이 겨우 지난 아이더러 죽음에 대비하라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만약 목사가 방금 태어난 아기에게 안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다 순교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이 아이를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발을 끊는 것은 둘 째 치고 그 자리에서 봉변이라도 안 당하면 다행이다.
이런 문제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의 왕권, 신성, 인성을 예표하여 드린 것으로 믿으면 되지 뭐 그리 따질 필요가 있는가?”라고 넘어가면 안 된다. 성경 말씀을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 풀어가려는 뜻이 아니다. 이런 기록을 신앙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옛날이야기 듣듯이 하니까 잘못이라는 것이다. 강대상에서마저 “이방의 점성술사들마저도 아기 예수의 메시야 됨을 인정하고 경배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입니까?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구세주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정도로만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으니 그렇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맹목적인 신앙이다. 그러면 말씀이 신자의 현실의 삶에서 아무런 권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국 신자들은 성경 구절과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데는 아마 세계에서 일등일 것이다. 교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면에서도 그렇다. 교회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 제자훈련 코스 등이 너무나 체계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막상 그 말씀이 생활에서 삶의 지표와 능력이 되는 면에선 오히려 그 정반대인 것 같다. 말씀을 말씀으로만 대하지 살아 있는 말씀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 말씀을 붙들고 의심하고 갈등하고 씨름하여 자신의 삶 속에 용해시킨 체험이 너무 부족하다.
하나님의 어떤 면을 가장 믿는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늗다고 말할 때에 그분의 어떤 면을 믿는가? 하나님에게는 사랑, 공의, 선, 거룩, 전지, 전능, 무소부재, 영원, 자존, 초월 등등 수많은 속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어떤 부분을 가장 크게 신뢰하는가? 요컨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왜 하나님을 믿는가?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삶이 고달프며 인간관계에 상처가 많고 장래에 대한 불안이 끊이지 않아 평강이 없어서일 것이다. 천국, 영생, 성화, 거룩,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의 확장 등등은 사실은 이차적이다. 인생살이에 자꾸 환난이 겹치니까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전능성(全能性 omnipotence) 때문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하고 모순된 현상이 하나 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실패하고 그래서 힘이 빠지는 부분이 어디인가? 바로 그것도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부분이다. 신자가 골치 아파하는 여러 고통과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힘들어서 믿었으면 힘든 일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여전하거나 어떤 때는 더 심한 것 같다.
솔직히 자신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지 못했고,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낼 수 없고, 전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들 앞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며, 소속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인해 힘이 빠지며 괴로워서 자기 믿음에 실망하는 자가 있는가? 그런 잘못들은 단지 주일 날 대표기도의 단골 메뉴로만 올려놓고 잠시 입술로 마지못해 회개하는 척하고 치우지 않는가?
대신에 “이 지병이 언제 나을 것인가? 사업은 도무지 흥할 기미가 안 보이고 갈수록 돈이 궁해지며 집안에 크고 작은 문제들은 자꾸 불거져 나오고 사람과의 관계도 올무와 가시만 맺혀 가는데도 하나라도 제 때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이니...” 정말 미칠 지경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이런 약속의 말씀들이 도무지 허황되게만 들린다.
하나님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 어쩌면 유일하게 기대하는 전능성에서 가장 많이 실망한다면 우리 신앙은 뿌리부터 흔들리는 셈이다. 재벌 회장을 아버지로 둔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장 믿는 부분은 당연히 돈이다. 그런데도 아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고 스스로 벌어서 쓰라고 한다면 그 신세가 지게꾼을 아버지로 둔 사람과 하나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교회 출석하여 한 2-3년은 기도 생활 열심히 하다가 차츰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줄면서 신앙과 삶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불신자 시절 아무 것도 몰랐을 때는 제 마음대로라도 했으니까 차라리 불안과 염려가 적었던 것 같다. 이제는 하나님이 혹시 나에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서 화가 난 것은 아닌지 이전에는 없었던 걱정조차 하나 더 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능성이 손상되거나 상실되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영원토록 신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럼 신자의 기도가 잘못되었는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신자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고 그분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할 말을 못하면 그 사이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전능성이란?
대부분의 신자가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속성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마치 유치원생들이 슈퍼맨을 생각하는 수준으로 이해한다.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 하나님이고 주문을 외우며 램프를 슬슬 문지르는 것이 기도다. 그래서 신자가 원하는 대로 거인이 전부 다 해결해서 갖다 바쳐야 된다. 신자가 기도한 것에 대해 못하는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예스’만 해야지 만약 ‘노’를 하면 전능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 심지어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의심한다.
하나님은 전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 하거나 심지어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슈퍼맨 영화를 보면 원체 힘이 세니까 조금만 힘주고 앉으면 의자가 부서지고 숨만 조금 세게 내쉬어도 사람이 날아가기에 더 조심조심하는 것과 같다. 이조시대에도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진 왕에게 오히려 법으로 해선 안 될 일들을 아주 많이 규정해 놓았다. 인간사회에서도 능력과 권세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사용함에 항상 절제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에겐 더더욱 그렇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졌다.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다스리고 계신다. 그런데도 그분이 하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 있다. 죄인을 보이는 그대로 심판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죄악을 다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럴려면 모든 인간도 함께 죽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아니 그분이 죄에 찌들고 심지어 당신과 원수 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뜻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는 바탕 아래에서만 신자를 다스린다. 이 원칙을 떠나서는 당신의 전능성을 결코 행사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는 정말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죄인인 인간을 당신의 공의대로 하자면 당장 벌을 주어야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또 이것 이상 당신의 능력과 권세를 가장 크게 절제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부분에서도 얼마든지 그 권능을 절제할 수 있기에 신자의 간구대로 당장 응답이 되지 않는 경우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상식적으로 돌잔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물인 몰약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는 통로였고 바로 그것이 당신의 전능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 중에 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믿고 대망해 왔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메시야가 수난의 종으로 십자가에 죽어서 구원 사역을 이룰 것이라고는 미리 알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도저히 예의에 어긋나는 몰약을 선물로 선택했을 리 없다. 실제 그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탄생되리라는 예언조차 몰랐었다.
요컨대 그들은 “당신의 아들 죽을 준비를 미리 잘 하라!”는 뜻으로 선물을 고른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기들의 상식 범위 내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물을 택했을 뿐이다. 당시로선 편도로만 최장 2년가량 걸리는 여행길인데다 아이스박스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 썩지 않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만 골랐다. 물론 그들이 성령의 계시를 받아 준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은 부피가 작고, 썩지 않으며, 보배합에 넣어 놓을 정도로 고귀한 것이어야 했다. 그들로선 고귀한 분이 태어났으니 가장 고귀한 것으로 경배 드려야겠다는 진심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물을 스스로 선택한 아기 예수
이 기사에서 신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선물을 받은 당사자 예수는 아직 아기라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록한 마태로선 그 몰상식한 선물에 대해 뭔가 언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예수의 부모도 “방금 태어난 아기에게 죽을 준비를 하라는 몰약을 줄 수 있는가?”라고 야단치며 그들을 쫓아내고 소금을 뿌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예수의 부모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마리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선물을 아무 불평 없이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는 뜻이다.
“시므온이 저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이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標的)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2;34,35) 선지자 시므온이 난지 팔일 만에, 즉 동방 박사들이 경배 오기 훨씬 전에 성전에서 할례의 결례를 드린 아기 예수를 두고 한 예언이다. 마리아에게 이 아이가 크면 칼이 네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슬픔과 고통을 수반할 일이 생길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가름하는 표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난지 열흘도 안 된 아기를 둔 엄마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예언이었다. 아무리 이스라엘 사람의 흥하고 망하는 표적이 된다고 해도 아기에게는 저주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동정녀 탄생을 예고하러 온 천사에게서 이미 그런 비슷한 말을 들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2) 세부적인 내용은 달라도 이스라엘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했다.
마리아는 그런 일들을 겪고 난 후에 또 다시 박사들로부터 황금, 유향, 몰약의 선물을 받았다. 그녀로선 이 아이의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하나님의 크고도 영원한 계획 가운데 태어났으며 결국에는 죽음으로써 그 계획이 완성되리라는 것은 깨달았을 것이다. 성령의 잉태를 직접 체험한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와 권능과 은혜를 그녀만큼 확신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따라서 비록 자기 아들이 큰 불행을 겪더라도 그 일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으로 지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갓난아기의 부모 된 입장에서 축하 선물로 몰약을 받았지만 불평과 의심이 생기지는 않고 담담하게 각오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 아기를 자기 아들로서보다는 하나님이 세운 큰 선지자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지금 마리아의 믿음과 영적 상태를 논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박사들이나 마리아 어느 누구도 왜 몰약 같이 말도 안 되는 선물을 갓난아기에게 해야 되는가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들 모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 뒤에 있으며 그분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진다는 부분에서만은 한 치의 의심도 안 가졌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재대로 이해하고 그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동방박사의 세 가지 선물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상징하게 됐다. 그러나 그런 결과도 하나님 당신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룬 것이다. 따라서 몰약 선물의 의미는 아직도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는 상태에 있는데도 당신께서 그런 죄인들을 위해 죽으러 오셨다고 스스로 말한 셈이다. 아기 예수로 말구유에 태어나면서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비천한 종의 형태를 취하신 것을 드러내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몰약 선물을 당신이 받음으로써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는 몰약 만큼 좋은 선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태어나셨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의 가장 저주스런 모습으로 죽을 것이라고 몰약을 통해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언이 이뤄지기까지 동방박사들, 마리아, 여호와의 천사, 저자 마태 등이 합력하도록 그들을 동원하셨다. 단적으로 말해 아기 예수는 자기가 받을 선물 세 가지를 자기가 선택하여 받았다는 것이다.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까 신비한 일은 식은 죽 먹기 식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는 모든 일들 안에 숨어 있는 신비를 통해 그분의 전능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궁상 맞은 신앙의 모습
신자가 겪는 모든 고통, 슬픔, 분노, 억울함, 환난 등을 무조건 전부 신자가 원하는 대로 신원하고 해결해 주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전능성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전능성이다. 또 당신의 모든 뜻에는 당연히 당신의 모든 권능이 다 작용되므로 전능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권능이 드러나는 모든 일에는 하나 빠짐 없이 당신의 뜻이 함께 하고 있기에 전능이다.
다른 말로 당신의 뜻이 없는 곳에 당신의 능력만 있어선 결코 전능이 아니다. 너무나도 기초적인 진리이지 않는가? 왕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옥새만 훔쳐다 찍은 조서는 금방 무효가 된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왕은 필요 없고 그 옥새만 빌려 달라고 졸라댄다. 왕이 전능하지 옥새가 전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모두는, 심지어 인간의 눈에 아무리 작아 보여도 인간으로선 도저히 예측, 상상, 기대, 측량조차 못하는 그분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해 있다. 인간의 짧고 얄팍한 판단으로는 죄, 실패, 우연, 모순, 절망 같이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속에도 하나님의 선, 성공, 필연, 신실, 소망이 한량없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인간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신자가 하나님을 의심하든 안 하든, 나아가 신실한 신자마저 이해가 다 되든 안 되든, 당신의 일은 당신께서 당신만의 방법과 때에 이루신다는 것이 전능성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선의 모습이다. “당신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당연히 당신의 선한 뜻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역으로 말해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합력하여 선이 되지 않는 모습이 하나라도 있다면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신자들은 그 합력하는 기간과 방법이 단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고 불평하고 있다.
신자가 기도할 때의 진정한 속내가 어떠한가? “하나님 다른 것은 다 두고 이것 하나만은 꼭 해주시면 안 되나요? 가진 것이라고는 돈 뿐인 재벌 회장이 고린 자비 행세하면 그 아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저능하신데 이런 것 하나도 못해 주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뭐 제 삶을 사치하고 화려하게 바꿔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목에 걸려 있는 가시 하나 뽑아 달라는 것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세계 최대 갑부 록펠러는 여행을 가면 제일 싼 모텔에 자는데 반해 그 아들은 월돌프 아스토리아 같은 최고급 호텔에만 숙박했다. 기자들이 하루는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싸구려 호텔에 자고 아들은 그 반대인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록펠러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들에게는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신자가 볼 때는 록펠러와는 비교가 안 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데도 도대체 평균 수준의 삶은커녕 문제만 산적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잊고 있는 한, 신자는 아무리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아들이 된다. 거지의 아들이 거지인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재벌 아들이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거지 행세하는 것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재벌회장 아버지는 아들더러 자기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대어줄 수 없다고 하는 데도 매일 비서실에 와서 푼돈 나부랭이라도 달라고 손 벌리고 징징 짜는 것만큼 궁상맞은 꼴이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신다. 그렇다고 신자가 무조건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기만 하면 복을 주시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 신앙이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누가 더 인내력과 배짱이 센지 겨루어 보는 싸움이 아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쪽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당신께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로선 하나님에게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놓아야만 한다.
신자는 현재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과 처해 있는 어떤 상황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을 가장 하나님답게 인정해야 한다. 그분의 뜻과 계획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된다. 어쩌면 알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바로 주님이 인도하심이고 또 그 길에 그분이 임재하고 있다는 것만 완전히 확신하고 있으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그분의 전능성도 당연히 함께 하고 있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나타나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만 나타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전능성이 언젠가는 합력하여 반드시 선으로 이룰 것이기에 온전히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든 금방 해결되고 형통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간구하고, 그래서 혹시라도 안 되면 언제 어떻게 되나 애를 태우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신자의 온당한 반응이 아니다.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열어 두고 기다리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분에 대한 신뢰와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 어떻게 선을 베풀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분이 나의 과거, 현재, 미래에 간섭하신 모든 것들이 시쳇말로 때려 죽여도 선과 의와 거룩이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나 누구를 만나도 기쁨과 감사가 넘쳐 당당해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고달픈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 특별히 그분의 전능성을 붙들었지만 그분의 능력에만 의지해선 절대로 그 고달픔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에 혼선이 와서 현실의 고달픔 위에 영적인 고달픔까지 이중으로 겹친다. 그러나 그분의 성품을 의지하고 무슨 일이든 합력해 선으로 이끄실 것을 소망하면서 그분의 궁극적인 영광을 바라 볼 때에는 현실의 고달픔과는 아무 상관없이 참된 평강이 넘치게 된다. 우리 또한 언제든 주님이 마련해 주신 몰약의 선물도 달게 받을 줄 알아야만 신앙생활에 참된 성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17/2002 나무십자가교회 설교 6/5/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