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4)
“헤룻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함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19-23)
중국집의 고민
사람들이 중국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갈 때마다 짜장면과 짬뽕 중에 어느 것을 먹을까 갈등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그런 선택을 두고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까지는 없다.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지만 인생살이에는 인간의 판단과 책임에 맡겨진 일상적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언제 누워 자며 어떤 옷을 입으며 무슨 음식을 먹을까 같은 문제들이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인간의 전적 재량 아래 둔 이유를 감히 분석해 보자면 대충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둘 다 좋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따질 필요가 없다. 짜장면과 짬뽕 중에 어느 것을 먹어도 한 끼 점심 식사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좋다.
또 어느 것을 선택했던 그 결과와 파급효과는 순간적이며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맛있는 메뉴를 골라 먹어도 먹을 때만 잠시 기쁠 뿐이다. 서너 시간만 지나면 곧 다시 배고파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혹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시 선택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짬뽕을 먹었으면 내일 짜장면을 먹으면 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선택의 결과가 축복과 재앙으로 확연하게 갈라지고 그 파급 효과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가전제품 선전 문구처럼 아주 오래 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잘못된 선택을 되물릴 가능성이 없다면 더욱 그렇다.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모든 주위여건이 당사자로 하여금 포기는커녕 연기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식으로든 신속한 결단이 강요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기 예수의 아버지 요셉도 아주 중요한 선택과 결단을 해야 했다. 처음에 가려고 한 ‘거기’는 예수의 출생지이자 요셉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이었다.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 근처의 소읍이라 예수를 키우고 교육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 결심을 바꾸어 나사렛에 정착했다. 요즘 식으로 비유컨대 자녀 교육을 서울에서 시키려다 갑자기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간 셈이다. 비슷하게 좋은 것 둘 중에서 고른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극과 극을 오갔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요인은 물론 헤롯 대왕보다 그 아들 아킬라오가 더 잔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이유는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이 꿈에 지시를 받은 것이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애굽으로 피신할 때와 애굽에서 귀환할 때와 지금 나사렛으로 가게 되는 결정이다. 세 번 다 꿈으로 아주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거대한 공동체의 인도
신자들이 이런 성경기사를 보면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못하는가?”라는 불만부터 든다. 남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 다들 기도 응답을 잘만 받던데 나는 왜 아무리 기도해도 속 시원한 답변이 없는가 싶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일일이 인도했는데, 그것도 금송아지 만들어서 그 앞에서 마시고 춤추는 완악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그랬는데 정말 경건한 마음으로 간절히 인도를 기다리는데 아무런 징조나 지시를 받지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라 신자가 그런 직접적인 인도와 계시를 받기는 불가능한 것인가? 그럼 한 가지 질문해보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가 아닌가? 틀림없이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의미와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13:21,22)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 앞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두 기둥이 떠올라 앞서면 따라 가고 멈추면 섰다. 심지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진(留陣)하고 진행치 아니 했다.”(민9:22)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성막 위만 한 번 처다 보면 그날 하루에 할 일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따져보기 전에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스라엘, 아니 인류의 전 역사를 통 털어 이런 일은 딱 한번 있었다. 그 말은 당시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라 그런 특수한 방법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어떤 상황이었는가? 어린양의 피로 죽음의 사자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물경 2백만 명에 이르는 한 민족 공동체였다. 신자 개인이 기도하여 인도 받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확실히 알 수 있는 인도 방법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건축공사 노동판에서 4백년간이나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어느 날 갑자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 그들이 탈출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전혀 몰랐다. 비록 출애굽 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금은보화를 탈취했지만 여전히 그 몰골은 모세를 왕초로 모신 거지 떼나 다름없었다.
광야에서 어떻게 여행해야 할지는 오직 모세만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10가지 기적을 보인 하나님의 종이라도 해도 동족을 버리고 도망간 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따르라!”고 한다고 해서 그 수많은 백성을 통솔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광야를 행군하는 중에 고라당이 반역했고 심지어 형과 누이마저 반발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배고프고 목마르기만 하면 모세에게 덤벼들었다.
만약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없었다면 과연 그 수많은 백성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세를 따를 수 있었겠는가? 사공이 셋만 되어도 배가 산으로 간다는 인생들인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었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가? 당신의 소유로 삼아 거룩한 백성이자 왕 같은 제사장 나라로 세우려는 것이었다.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 땅의 7족을 멸하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그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이제 막 죄악이 들끓는 사단의 도성을 의와 생명이 숨 쉬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출발 단계에 들어섰다. 그 2백만 중에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선 모든 사람이 한 마디의 군말도 없어야 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도 방법이 당시로선 구름과 불 기둥이었다.
이상한 인도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 은혜로운 인도로 처음 도달시킨 곳이 어디였는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는 바닷가였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찌라.”(출14:3) 앞은 바다요 뒤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넣어졌다.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인도라면 주홍 카펫은 깔리지 않을망정 최소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아니어야 하지 않는가? 탄탄대로를 놓아두고 일부러 광야를 둘러서 이런 막다른 골목에 집어넣었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선 하나님에게는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다. 그분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둘로 나누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었다.(창1:6,7) 하늘과 바다를 만드신 분에게 홍해를 가르는 정도는, 인간의 눈에는 굉장한 기적이요 은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정말 식은 죽 먹기였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영광만 드러내려 했다면 언제든지 지중해 쪽 대로로 인도하면서 따라오는 바로의 군대만 기적적인 방법으로 막아주면 되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히려 딴 데 있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면초가로 몰아 부친 것 자체가 당신의 뜻이었다. 인간은 사면초가의 상황이 안 되면 하나님을 결코 찾지 않는다. 사방이 완전히 막혀 빠져나갈 구멍이 도저히 없을 때(No way out)에라야 비로소 하나님을 쳐다본다. 한 곳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무지 아무 수단도 보이지 않아야 그 때까지 열심히 놀리던 손을 비로소 놓는다. 말하자면 신자는 하나님의 큰 능력만 자꾸 구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얼마나 완악하기에 그분의 능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행군했을까? 모세가 아무리 광야 길을 자신은 눈감고도 건널 수 있지만 그 수많은 백성들을 바닷가로는 이끌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다른 길을 택했거나, 아니면 서너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길로 가게 했을지 모른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 인간은 스스로 사면초가의 궁지로 들어서는 법은 절대 없다. 아무리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 온다는 것을 빤히 알아도 앞이 막힌 바다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이 뚫려 있는 곳으로 가게 마련이다. 가뜩이나 배 한 척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많은 백성들이 바다를 건널 꿈이라도 꾸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홍해의 하나님은 정신이 이상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바보였다.
미국 Fox TV에 Cops 라는 경찰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인기프로에 자동차 추적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데 범인들은 백이면 백 타이어가 펑크가 나거나 기름이 떨어지거나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투항한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비록 그것이 지푸라기에 불과할지라도 붙들지 하나님을 자진해서 찾는 존재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알고 또 그분이 세계 최고 강국을 상대로 열 가지 기적을 베푸는 것을 자기들 눈으로 목도한 것이 며칠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보인 반응이 어떠했는가?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그런데 그들이 그곳까지 어떻게 왔는가? 방금 까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아 왔지 않는가? 그런데도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지금 당장 죽을 판에 하나님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아우성쳤다. 하나님도 자기들 먹고 살 것이 해결된 뒤라는 것이다.
결국 구름 기둥과 불기둥 사건은 하나님의 신나고도 초자연적인 인도와는 전혀 무관해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이며 명확했던 인도에 특별한 의미를 전혀 부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도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분께 구체적으로 인도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은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치 않고 그분의 뜻도 안중에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참 신자란 하나님의 인도보다는 그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먼저인 자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자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여호와를 찾고 부르짖었다.(출14:10) 그럼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믿음이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는 엄격한 의미의 불신자라고는 없어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위급한 일이 생기면 나름대로 어떤 절대자에게 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앞두고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불신자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심히 두려우면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신자인 것은 아니다. 불신자는 제발 어느 쪽이든 좋으니 한쪽 구석을 터서 사면초가의 상황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구 한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거룩하게 통치하신다는 그분의 의와 참 생명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신자의 믿음은 당연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환난이나, 중대한 결단의 시기에서 단지 하나님께 울부짖었다는 것만으로 신자 불신자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그 믿음이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을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하면 오직 그 상황을 벗어날 궁리와 간구만 한다. 결과적으로 불신자들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요컨대 신자가 지금 현재 겪고 있는 사면초가를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을 겪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고난이 닥치면 믿음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잘 한다. 인간에게는 사방이 완전히 막혔으니 하나님에게 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면초가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피할 길은 당연히 이미 다 예비 되어 있다는 의미다. 신자가 이런 인식이 확고히 있다면 그 피할 길을 빨리 찾아내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을 하나님이 완전히 열어 주실 때까지 인내하며 그 가운데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구체적 인도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충분하고도 완전한 인도를 받고도 그분의 뜻을 묻지 않았고, 심지어 최소한의 소망과 믿음으로 기다리지도 못해 실패했다. 오늘날의 신자도 이 수준에서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그 자리에 멈출 각오가 있는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2백만이나 되는 거지(?) 떼로 하여금 광야를 횡단시킨 일은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특수 상황이었다. 만약 우리 또한 그런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은 똑 같이 인도하실 것이다. 신자가 완전 거지가 되어 어떤 인간적 수단으로도 헤쳐 나갈 수 없는 난관에 빠져 있다면 지금도 더 특이하게 인도하실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신자 어느 누구도 거지가 되어 광야를 건너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렇게 원해도, 아니 그렇게 인도해도 불평뿐이다.
신자가 정말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구하려면 자신이 먼저 그 심령이 완전히 가난해져야 한다. “저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무능하여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인도만을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제 뜻과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오니 당신의 뜻과 계획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만약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면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따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구름 기둥이 멈추어 있으면 이스라엘이 유진하였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말고 기다리라면 일년이고 십 년이고 기다려야 한다. 나아가 에스더 왕비처럼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생명을 건 완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헌신 없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을 인도해 가려는 속내를 ‘기도’라는 종교적 수단으로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면초가에서 신자와 불신자가 빌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신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더 큰 소망 때문에 기뻐하기까지 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맛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권능은 진심으로 그것을 보기를 소원하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마음에 소원하고 믿는 각오와 의지력만 세어선 안 된다. 자신을 전부 바쳐 생명과 맞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한다. 또 하나님이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음을 확신하기에 에스더가 생명을 걸고 왕에게 면담 신청을 했듯이 신자가 먼저 기꺼이 생명을 바치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바치는 헌신 외에 또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모든 외형적 조건만으로는 신자 개인의 선택처럼 보여도 반드시 그 결단으로 인해 동료 신자와 또 전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를 제사장 나라로 불러서 주위에 복을 나눠주는 복의 근원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신자는 아무리 혼자 있어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 되었다. 이미 하나님과 신자가 항상 동행하는 공동체다. 신자 혼자라도 세상과 사람 앞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과 결단의 문제는 반드시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자신에게만 파급효과가 미치는 개인적 결단을 두고 크게 고민하는 법은 거의 없다. 결국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거룩하게 확장하는 책임을 맡은 자라는 뜻이다.
신자가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신자가 힘들어하면 하나님은 안타깝게 여기고 신자가 충만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신자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투, 얼굴 표정에서마저 하나님이 함께 묻어져 나온다. 신자는 이제 더 이상 자기만의 개인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경외를 받든지 멸시를 받든지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일어난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동역자인데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어찌 신자를 가만 두고 보시겠는가? 신자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시길 그분께서 더 소원한다.
하나님은 신자의 일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영광 받기를 기뻐하신다. 성도가 어느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의 공동체가 형성되거나 최소한 당신의 뜻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속한 어떤 공동체에서도 하나님 대신에 그 집단을 이끌고 갈 책임과 권한을 이미 부여 받고 있다. 세상적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 믿는 직원이 아무리 말단이라도 그를 통해 사장이 영향을 받아야 한다. 눈에 안 보이는 거룩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신자다. 세상의 위계질서와는 아무 상관없이 신자만이 이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어야 할 소명을 받았다. 말하자면 모든 신자가 출애굽 때의 모세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들을 함께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선 필연코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가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신자들이 왜 오늘날에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인도가 없는가 불평하는 까닭이 밝혀진 셈이다. 자신이 사면초가에서 당장 빠져나갈 것만 구해서 그렇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소망을 갖고 감사하며 기뻐한 적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일부러 그런 상황에 밀어 넣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다. 불신자처럼 그저 빠져 나갈 구멍을 지금 당장 마련해 놓으라고 떼만 썼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더욱 사면초가로 밀어 넣을 것이다.
하나님이 귀가 멀어 우리 기도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멀리 있어 구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신자가 그저 주홍 카펫 깔린 길로만 이끌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자기가 왕자이고 하나님은 자기 차의 운전수다. 생명을 바쳐서 그분의 일에 헌신하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주위 공동체에 나눠주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어 보라. 하나님의 구체적 인도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또 이전에는 가시밭길이라고만 여겨졌던 고난과 문제들이 하나님의 숨은 영광이 찬연히 빛나는 주홍카펫으로 변할 것이다.
(나무십자가 교회 3/10/2002 설교, 6/26/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