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5)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마3:1)
그 때에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만 했을 뿐 아니라 직접 예수에게 침례도 주어 그 메시야 되심을 확증했다. 요한의 사역을 기록한 마태복음 3장은 “그 때에”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그 때”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백 년간이나 선지자의 외침이 전무해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이 들었을 때에, 바벨론 헬라 로마 제국의 지배에 시달렸던 이스라엘 민족이 구세주를 대망하고 있을 때에, 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30세가 넘어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을 때다. 또 이런 때들은 공통적으로 예수가 30세가 넘어 공사역을 시작하려는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에 시간적으로 30여년의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아무 설명 없이 그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예수의 성장기 시절에 관해선 12살 때에 성전에서 선생들에게 묻기도 듣기도 했는데 그 지혜와 대답에 대해 사람들이 놀랐다는 기록(눅2:41-52) 외에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청바지의 무릎 부분을 째서 입고 머리카락을 염색을 했는지 아니면 학교 공부에 충실한 모범생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온갖 억측을 보태는 경우가 있었다. 현재의 66권으로 확정된 정경(正經), 그 중에서도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목격한 사도들에 의해 쓰여졌다. 오직 사실에 입각해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외경(外經)이나 위경(僞經)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렸을 때도 많은 기적을 보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 요셉이 목공일을 잘못 해 놓은 것이 있으면 아이 예수가 감쪽같이 고쳤다든지, 인도에 가서 불경을 배우고 마술을 터득해 왔다는 식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다.
신자들 가운데도 간혹 예수의 성장 과정과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자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 전혀 기록이 없는 것에 더 감사해야 하고 또 그 뜻을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기독교라는 종교의 체제와 조직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력화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낮고 낮아져 더 이상 낮아질 곳이라고는 없는 십자가에 달리러 오셨다. 처음부터 죽으러 왔으니 이 땅에 당신에게 관계되는 흔적이나 유품을 남길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베일에 숨겨 신비감을 조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은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외모와 체격은 보통 사람 중의 보통 사람이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4:15)였다. 가장 평균적인 인간이 겪는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다 겪었다.
또 유품이 없었다는 것은 가진 것 모든 것을 다 나눠주며 베푸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나아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후손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뜻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분의 정체성과 연결 지을 고리는 없다는 것이다.
영국 스코트랜드에 있는 쉐익스피어의 생가에 가면 어렸을 때 쓰던 책상과 펜을 진열해 놓았다.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최고의 희곡작가가 될 소질이 일찍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또 미국 일리노이주 한 시골에 가면 링컨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데 방 한 칸의 시골 오두막집으로 치즈에 파리가 들끓고 장작 패던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 시골 농부의 아들로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다는 뜻이다.
만약 예수님의 경우도 그런 생가가 있어서 대패와 톱, 빵과 물고기 장난감, 고기 잡는 그물, 닳고 닳은 율법 두루마리들을 진열해 놓았다 치자. 그것을 관람한 누구라도 비록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율법에 정통했고, 어부들을 제자로 삼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꿈을 꾸었다고 해석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 어려운 환경에도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여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에 드러난 특유의 지혜와 능력은 일차적으로 그의 성장 배경, 교육, 직업,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으로 어느 누구도 그분의 생애를 비슷하게나마 흉내 낼 수 없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세상적인 것에 전혀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권세, 사랑, 은총, 지혜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스승의 유품을 전시해 기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인간적인 욕심으로는 근사하게 정리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스승을 더 존경하고 경외하도록 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사용했던 책상, 대패, 율법 두루마리 같은 물건들도 수집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 총독부나 유대 공회의 눈치를 보느라 예수의 유품을 챙기지 못했는가? 그래서 그분의 겉옷마저 로마 군인들에게 빼앗겼는가?
아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3년간의 사역을, 특별히 십자가의 구원을 그런 것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성장할 때 혹은 사역할 때의 유품들로는 무덤에 장사한지 3일 만에 부활한 그 엄청나고도 신령한 복음의 의미를 극히 일부나마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었다.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무리하고도 불필요한 해석을 나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스승이 십자가에 죽자 뿔뿔이 세상을 향해 흩어졌던 무식한 어부들이요 돈이나 밝히던 세리였다. 스승보다도 더 평범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성령을 받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의 전 인격과 영혼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 모든 실패했던 허물과 더러운 죄들이 씻어짐으로써 삶과 인생 자체가 바뀌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들이 주는 기쁨과 평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충만을 체험했다. 날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감격을 맛보며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는 권능을 이미 덧입었음을 실감했다. 이제 그들에게도 세상에 썩어 없어질 유품은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갖지 못했다. 바울, 실라, 디모데, 베드로, 요한, 마태 같은 사도들 또한 자기들과 연관된 유품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들이 스승, 아니 구세주 되신 성자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자신들의 바뀐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은 떡과 잔을 나누는 것 하나면 족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회상하며 그분의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 앞에 매번 자신들의 전부를 드리면 바로 그 자리에 영원히 살아 있는 예수님이 임재해 있었다.
유품을 보며 생전의 업적을 논하는 것은 죽음으로 끝을 맞는 인간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이름과 빛과 흔적 없이 태어나시고 자라셨다. 마지막 3년간 만 세상에 하늘의 빛을 비추셨다. 그리고 그 하늘의 빛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소진하여 태워 없앴다. 세상에는 자신의 흘린 피와 찢긴 살 이외에는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았다. 육신의 시체마저 그대로 부활하셔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다.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에 근 30년이 건너뛰는 기록이야말로 이 땅의 것으로는 도저히 상징조차 할 수 없었던 그분의 거룩하고 신령한 삶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분이 메시야 하나님임을 성경에서 이만큼 생생하게 증거하는 부분도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암흑시대로 들어간 이유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예수님의 유품이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뭔가 계속해서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7-10)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실패했고 영적으로도 암울했던 시기다. 성경은 그 실패가 시작된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자 그분의 축복과 권능의 임재가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부관이었던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지파별로 땅을 분배했다. 이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첫 단계의 일을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러자 곧 모세와 여호수아의 두 세대가 다 죽었고 세 번째 세대가 그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다음에 손자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치 만석꾼 부자의 재산을 방탕한 손자가 흥청망청 다 탕진해버리듯이 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가 굴복되고, 홍해가 갈라지며, 광야에서도 엘림의 단물과 반석의 생수를 맛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신령한 음식으로 주리지 않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이적들을 눈으로 목도했다. 이 세상의 어떤 민족도 이렇게 크고 기이한 은혜와 권능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3대도 채 못가 여호와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그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제 삼 세대에 이르렀더라도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아침저녁으로 밥상머리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그 행하신 일들을 계속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정말 대단했어! 우리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 오고 앞에는 시퍼런 바닷물이 넘실댔지. 배 한척 없는데 어떻게 바다를 건너며 칼 한 자루 없는데 어떻게 바로의 병거를 대적하겠어. 애굽 군대의 칼에 죽던지 물에 빠져 죽든지 둘 중 하나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래서 하나님은 왜 꼭 이 광야로 몰고 와서 죽이는가 모두 아우성을 치며 원망했지. 그 순간에 모세는 역시 달랐어. 하나님의 종답게 우리를 야단치더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한 후에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었어. 그 때 바다가 양쪽으로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면서 짝 갈라지며 맨 땅이 드러났어. 대신에 우리를 쫓던 바로의 군대 앞에는 시커먼 구름이 막아 주는 바람에 우리 쪽으로는 한 발자국도 쫓아오지 못했어. 우리가 무사히 다 건너자마자 구름은 걷혔고 바로의 군대가 겁도 없이 쫓아 들어 왔는데 양쪽으로 늘어섰던 물기둥이 무너져 덮치면서 다시 바다가 되어버렸어. 한 편으로는 애굽 군대가 불쌍하기도 하고 다른 편으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정말 두려움과 떨림 없이는 설 수가 없었어. 홍해를 건너자 마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데 온 회중이 성령이 충만해져 저절로 춤을 추었지.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한번 만 더 맛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을텐데....”
손자들이 듣고 또 들어 나중에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정말 하면 할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그들이 여호와를 몰랐을 리는 결코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 세대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다. 그 이후의 세대는 알기는 알되 섬기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은 그 믿음에 크게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때때로 의심과 불만이 생겨도 그분이 하나님 다우심에 대한 믿음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손자 세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겼다”(11절)고 한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여호와는 자기들 선조의 하나님, 과거의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던 반면에 바알은 바로 자기들의 신, 현재의 신, 보이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바알 신의 교리가 심오하고 그 계명이 거룩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심지어 바알에게 기도해 응답 받은 체험도 없었다. 바알은 온갖 형상과 조각들로 눈에 보였고 또 바로 곁에 있었다. 예수님의 형상과 유품과 삶의 궤적이 남아 있지 않아 뭔가 부족한 것같이 여겨지듯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으면 여간해선 믿지 않는다. 원죄로 인한 안목의 정욕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사자도 보지 못한 이스라엘
출애굽 시의 열 가지 재앙은 전부 애굽 신들과 여호와 하나님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와중에 성경은 이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두 번 어지간한 재앙을 당했으면 바로의 마음이 움직일 만한데도 오히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더 고집을 부리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왜 그랬는가? 구태여 열 번 씩 애굽신들과 대적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단번에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면 바로 출애굽의 되었을 텐데 말이다.
애굽 신들은 전부 나일 강, 파리, 개구리, 독종 같이 눈에 보이는 신들이다. 반면에 여호와에 관한 형상과 흔적은 이 땅에서 인간의 육안으로는 일절 볼 수 없다. 열 가지 재앙의 배경에는 결국 보이는 신들과 보이지 않는 참 하나님과의 대적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애굽과 유대인들의 완악한 마음과 하나님의 대결이었다. 우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우상의 배경에 있는 사단도 하나님과 열 번이나 대적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에게는 도대체 그 이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출애굽을 요구하자 바로가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이 어떠했는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바로로선 수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하면서 그들의 신들을 다 겪어 보았다. 뭔가 그럴싸하고 큰 신상이라도 있어야 겁을 먹을 것인데 말만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니 기도 안 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 나가서 자기들 신에게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거창한 성전과 신상은 둘째 치고 변변한 제단도 마련하지 못할 광야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낸다는 말인가? 순전히 도망가기 위한 핑계인가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재앙들도 모세가 마술지팡이로 술수를 부렸다고 생각해 자기들 술객들과 힘을 합해 끝까지 대적했던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가축의 초태생을 비롯해 애굽의 장자가 전부 죽었다. 바로의 장남마저 죽게 되자 마지못해 항복하고 출애굽을 허락했다. 그러나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께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홍해까지 추격해올 리가 없었다. 바로로선 이제 장남이 죽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기일 수 있다고 생각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우리가 보아도 정말 갑갑할 정도로 열 번 씩이나 애굽 신들과 대결했다. 하나님이 그들보다 힘에 부쳐서가 아니다. 애굽인들을 데리고 괜히 심술궂게 장난친 것도 아니다. 바로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도저히 믿기지 않은 반면에 보이는 자기들 술객과 우상에 의지하려는 고집이 너무 세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400년간 보고 들은 것이 전부 깎아 만들어 볼 수 있는 형상이었다. 또 애굽이 그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니까 모든 물자가 풍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백성들에게도 어느 듯 보이지 않고 침묵하는 여호와보다 눈에 보이는 황소 신이 은근히 더 좋아졌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긴 하지만 인간에 불과한 자기들 지도자 모세가 잠시 없어지자, 그것도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는데도, 당장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를 대신했지 않는가?
열 가지 재앙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은 바로를 혼내주려는 것보다 당신의 백성들이 보이는 형상에 경배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오직 계시와 말씀으로만 만날 수 있음을 알게 해주려 한 것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의 근거와 능력은 오직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을 섭리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
나일강, 우박, 메뚜기, 개구리 등이 애굽의 풍년과 흉년을 결코 좌우하지 못한다. 그것들도 전부 그것들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주권에 달렸다. 애굽에 곡물이 풍부해지는 것이 그런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풍요로운 땅에 애굽 백성들을 살게 해 주었고 적절히 우박 메뚜기 나일강등을 조절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마저 마치 그런 우상 신들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바로 잡아주되 이미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익숙해진 그들의 사고와 습관에 맞는 방식으로 고쳐주어야 했었다. 우상들과 대적하여 눈에 보이는 열 가지 이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또 우상들 자체가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었기에 그 신들이 패배하는 모습도 자연히 눈에 보이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당신의 형상을 직접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직 모세를 통한 말씀으로 다 이루셨다. 심지어 마지막 장자를 죽일 때에 애굽 전국을 휩쓴 죽음의 사자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전부 집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닫게 해서 볼 수 없도록 했다. 그 죽음의 사자도 하나님 당신일리 없는데도 말이다.
정작 싸워야 할 신앙의 싸움
신자가 싸울 신앙의 싸움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을 몇 회 독파했는가, 기도원에서 며칠 간이나 금식했는가, 구역장으로 얼마나 봉사했는가, 같은 일들은 사실 이차적인 문제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얼마나 확실하게 믿고 신뢰하여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온전히 그분께 맡길 수 있는가의 문제다.
예수님은 부활을 의심한 제자 도마에게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며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셨다. 도마가 그렇게 한 후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셨다.
또 제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제발 우리에게 보여 주면 좋겠다고 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지 않는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9-11)
빌립이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 안에, 당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먼저 믿어라고 했다. 역으로 말해 그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예수님과 동행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눈앞에 보고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을 보고도 못 믿겠으면 그 행하는 일을 인하여 당신을 믿어라고 했다. 여전히 믿음이 보는 것보다 먼저이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아야 믿겠다는 유대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야단치시고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했다. 그 요나의 표적이었던 십자가는 완악한 인간들에게는 사실 아무 표적거리가 되지 못한다. 비참한 모습으로 저주의 죽음을 당한 것은 오히려 시험과 올무가 될 뿐이다.
십자가는 표적은 표적이되 여전히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상징으로 보여 준 것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십자가의 비밀을 알 수 있고 또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 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믿어진다는 것이다. 그 현명하고 종교성이 신실한 니고데모가 구원을 소원해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결국 성령(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실망해 돌아갔지 않는가?
왜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도래를 외칠 때까지 하나님은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 하셨는가? 인간들이 자꾸만 보이는 하나님을 찾기에 하나님은 더 숨으셨기 때문이다.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자꾸 보아야 믿겠다고 들면 더 안 보인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해야, 최소한 아무 조건 없이 진정으로 그분을 갈망해야 비로소 하나님은 보인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초월적이고 신비한 분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아가 오묘하고 기이한 기적으로만 일하신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당신께서는 너무나도 신실하게 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영원토록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예수를 알게 된 당신의 자녀를 거룩과 의와 생명으로 풍성하게 덧입히고 계신다. 요컨대 예수의 영으로 신자의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으로 신령한 일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 세상의 형상과 흔적이 필요하겠는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나 실체가 아니며 그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좌우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보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진정한 실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신자가 어떤 환경과 여건에 처해 있던 그것이 전부나 실체가 아님을 확신하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전적인 소망을 둘 수 있는 능력이다.
아무리 육신이 춥고 배고프며 아프더라도, 마음이 상처와 억울함으로 괴로워하든, 심지어 흑암과 죄악 가운데서 헤맬지라도 그 힘든 실패와 환난들은 단지 보이는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그런 어려움들을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만 연결시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이다. 종교적 실력이나 교회 활동의 성실성이 결코 믿음이 될 수 없다.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부모, 배우자, 자식, 친구마저 자신을 배반하고 어려움을 몰라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그분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며 고난의 한숨을 기쁨의 탄성으로 바꿔주실 수 있다. 간혹 앞은 홍해요 뒤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는 사면초가에 처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속속들이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기에 그런 어려움에 그분께서 몰아넣으시고 또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셨지 않는가?
예수님의 성장기에 아무런 기록과 흔적과 유품이 없다는 것은 바로 그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행했던 일은 세상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하늘의 것으로 보여 주었다. 이 땅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를 하고 있다. 그분의 성장기에 잃어버린 30년 세월이, 이 땅에 아무런 흔적을 남겨두지 않았음이, 나아가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만큼 은혜와 능력이 되는 것이 기독교에는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이는 것들에게 경배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믿을 때 그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알기 쉽게 말해 지금 당신의 바로 곁에 예수님이 와서 그윽한 사랑의 눈으로 당신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이 땅에 사는 동안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는가 말이다.
(나무십자가 교회 3/17/2002 설교 7/1/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