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6)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3:1-4)
염치없는 노방전도자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한국 서울의 명동 입구 오른 쪽에 백화점이 하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고가는 최고로 번잡한 길목인지라 그 백화점의 층계엔 온갖 잡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기독교 노방 전도자가 꼭 한두 사람 정도는 있었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으시오”라고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 목청을 돋우어 외쳐댔다.
제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도 많은데 죽은 후에 천국 가고 못가고가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다. 예수쟁이들은 자기들도 선하고 정직하게 사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면서 남의 죽은 후의 문제는 왜 저리 극성스럽게 간섭하고 끈질기게 관심을 보이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솔직히 표현하면 싫은 것을 넘어 밉기까지 했다.
그런 어느 날 죄악에 빠져 방황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는 저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 한량없는 사랑으로 저를 위로하고 모든 죄를 씻어 주셨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한 후에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 즉 영생을 획득하는 것만큼 모든 인간에게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일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천국이 반드시 죽은 후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서부터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저를 바꾸어주었듯이 영생이란 인간의 존재와 가치 자체가 변화하여 인생의 의미와 목표가 전혀 달라지는 일이었다.
침례 요한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더러 죄 사함을 받아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이제 곧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시대가 이 땅과 각 개인의 삶 속에 강력하게 도래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요컨대 죽기 전부터 현실의 삶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또 그의 메시지를 바꾸어 말하면 천국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으로 회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본문을 읽은 모든 신자가 자신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회개 했는가? 그래서 천국 같은 삶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고 있는가? 여전히 방황하고 갈등하는 허망한 삶을 살고 있는가?” 혹시라도 회개는 했는데 천국이 아닌 것 같거나, 천국 같은 삶을 사는데 회개한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둘 다 뭔가 잘못된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이다.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참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미국 사람의 30% 정도가 지도에서 수도인 워싱턴이 어디인지 지적할 수 없다고 한다. 워싱턴이 어디인지 모르면 어디로 가야할지도 당연히 모른다. 어떤 집사가 너무 길눈이 어두워서 천국도 어디 있는 줄 몰라 못 갈 것이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 길눈과는 상관없이 사후의 천국은 보장되어질 뿐 아니라 이 땅의 삶도 천국으로 바뀐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신자들더러 알아서 찾아 가라는 것인가? 아니다. 이 땅에도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 그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지 못한다면 워싱턴이 어디 있는지 몰라 못 찾아 가듯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천국은 바닷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수백만 불짜리 저택에 벤즈 같은 고급차를 굴리고 월수입이 최하 몇 만 불은 되어 아무 돈 걱정이 없는 것이 천국이다. 그럼 천국 가는 길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죽기 살기로 일해서 돈을 모으는 길뿐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열심히 일해 저축을 많이 해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럼 가난한 신자는 평생 천국을 누리지 못 해 보고 죽으라는 뜻 밖에 안 된다.
좀 도덕적이고 사색적인 사람들은 천국을 현실의 먹고 마시는 것과는 아예 상관없는 것으로 한정 짓는다.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소유욕을 없애고 가능한 세속을 멀리하는 삶을 통해 마음에 평강을 얻으면 세상의 것들로 인한 상처와 미련과 고통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에 아무런 걱정과 욕심이 없어진 상태가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럼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모두가 욕심을 다 버리고 세상을 멀리하면 이 땅을 생육하고 번성시킬 일은 누가 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다 수도승이 될 수는 없다. 나아가 의지력이 강하고 성격이 낙관적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도 마음을 고쳐먹고 어지간해선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끝까지 인내하여 평강을 유지하기가 비교적 쉽다. 반면에 천성적으로 성격이 섬세하고 연약한 자들은, 심지어 병약한 사람들은 어지간히 노력해도 마음을 고쳐서 환난을 이겨내기가 힘들다. 만약 마음을 고쳐먹은 상태가 천국이라면 성경은 또 이렇게 읽혀져야 한다. “너희 생각을 바꾸어라. 천국은 마음먹기에 달렸느니라.”
어떤 목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에 관한 설교를 했다. 그 설교에 은혜를 입은 한 성도가 찾아와 “저도 이 땅에서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천국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모릅니다.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목사님은 “우리 교인 중 OOO가 중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치료비로 재산을 다 날리고 일도 할 수 없어 제대로 끼니조차 못 잇고 있습니다. 그 집에 먹을 것을 사들고 가서 전해드리고 시편 23편을 읽어 드리십시오. 그리고 10분간만 그 분을 위해 기도해 드리세요. 그래도 천국을 찾지 못하겠다면 내가 책임지고 말하건대 교회에 올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이 도덕적인 선한 삶을 살아라, 보람과 가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에 있지 않다. 또 환난 중에 있는 나보다 더 어려운 자의 처지와 비교해 보면 나의 삶이 얼마나 나은지 알아라, 그래서 네가 현재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천국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신자가 그 환자 교우를 위로하는 자리에는 결코 두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 23편을 읽어 주면서 환자를 위해 기도해 줄 때에 그곳에 성령이 간섭하심이 있다. 비록 성경 말씀을 신자가 읽고, 기도도 신자가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 안에 살아 계시며 기도로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두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해 주신다. 어려움이든 형통이든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뛰어넘어 오직 그분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실은 신자가 그 환자를 찾아가기 훨씬 전에 이미 예수님이 먼저 와 계시면서 한 번도 그 환자를 떠난 적이 없다. 주님이 그 교회 목사나 찾아간 동료 성도보다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병자와 함께 한숨짓고 눈물 흘리고 계셨다. 그러면서 누구라도 그 환자를 찾아와 위로하고 사랑으로 섬겨주길 기다렸다. 이 땅에 당신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두세 사람이라도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께 간구하기를 원하신다. 성도들 사이에 인간적 감정이나 의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만이 기도와 섬김을 통해 교통되기를 바라신다. 요컨대 예수님의 영이 신자의 영을 터치해서 스스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바로 그곳에 천국이 임한다는 것이다.
매일 병문안을 가야 하는가?
그러나 신자가 매일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섬기며 말씀 읽고 기도해 준다고 천국 같은 삶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수도승이 될 수 없듯이 모두가 사회사업 자선가도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가정과 직장의 일을 돌 볼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천국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천국에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천국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준 그 목사님이 인용한 시편 23편 말씀이다.
시편 23편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치는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6절) 이 시편 전부가 아니라도 최소한 이 두 구절에 ‘나’라는 대명사 대신에 자신을 대입해 넣어보라. 정말 진정한 자신의 신앙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가?
단순히 예수를 믿었기에 그동안 성경 공부한 내용을 진리로 인정하기에 앞으로도 평생 동안 교회를 출석할 것이라는 정도로는 안 된다. 종교적인 교리로서 수긍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실제로 내 삶에서 천국이 실현되어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어떤 일이 생겨도 하늘에서 주는 평강을 유지해야 한다.
정말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이기에 그분의 전적 통치 아래에 자신의 전 존재, 삶, 인생을 내어 맡겼고 또 천국 가는 그날까지 그래야 한다. 현재 나에게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는 확신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미래 어떤 일이 생겨도 그 확신에 흔들림이 결코 없으리라는 확신까지 있어야 한다. 내 형편, 여건, 신분, 위치에 조금이라도 아쉬움, 미련, 실망, 의심,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세밀하고도 심각하게 따져 보라는 것이다. 알기 쉽게 돈, 건강, 명예, 권세 등에 진짜로 부족함이 없다고 만족하며 감사하는가?
입술로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지금 돈이 부족하니 더 풍족하게 주셔야 그 부족분이 매워지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 부족분을 매워주시면 나의 목자가 될 것이라든지, 매워주시니까 목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또 이 시편의 1절과 6절을 연결시켜 생각해보자. 돈이 내게 부족함이 없는 동안에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다시 1절로 되돌려 생각하면 겉으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돈이 나의 목자시니, 혹은 돈을 부족하게 주는 한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모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한 마디로 진짜 당신의 목자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말이다.
여호와가 진짜로 목자가 안 되면 평생을 가도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 특별히 많은 사람이 그러듯이 돈을 자기 목자로 모시면 더 그렇다. 돈이란 평생 동안 모아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 삶에 돈의 통치가 우선이 되면 신령한 하나님의 통치는 절대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여호와 한 분만으로 다른 모든 것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고 나는 그의 양이 되는 관계가 반드시 먼저다. 여호와라는 목자를 찾아오기는 했는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거나 푸른 초장에 누이면 그 때 가서 목자로 모시겠소는 아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어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여호와가 목자시니 천국이 된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는 그 관계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조금치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병문안을 가고 힘든 자를 섬긴다고 다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닌 까닭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두 당사자 사이에 세상의 것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면, 위신, 자존심, 이해관계, 의리, 도덕, 교양 뿐 아니라 시기, 질투, 분노, 사기, 거짓, 위선 등이 얼마든지 작용될 수 있다. 예컨대 순전히 자기가 선한 일을 한다는 보람과 의미 때문에, 엄밀히 말해 자기 만족을 위해서 남에게 분에 넘치도록 잘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평소 때는 잘 모르는 사람 심지어 싫고 미운 사람도 같은 교회의 성도라는 입장 때문에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찾아가야 할 때도 많다. 성도 간에도 온갖 현실적 인간적 도덕적 종교적 요인들이 그 섬김의 관계 안에 끼어들게 마련이다.
거룩한 교회 공동체
그러나 신자 각자가 아니 그중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주님만이 목자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 사이가 그 전에는 어떠했든 천국을 누리는 데는 문제가 안 된다. 함께 시편을 읽고 손잡고 기도하는 순간 그곳에는 성령의 교통과 간섭함이 분명히 생긴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 둘 사이에 임재해서 각 자의 마음과 영혼을 주장해 주신다.
예수님의 영원토록 유효한 보혈이 두 사람 사이에 흘러넘친다. 아직도 연약하여 세상과 사람과 죄악으로 더럽혀졌던 영혼의 누더기를 벗겨 씻어서 양털 같이 희게 해 준다. 예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두 영혼이 십자가를 중간에 두고 마주 보게 된다. 각자의 영혼이 각기 따로 예수님의 영과 교통하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서로 간에도 아름다운 영혼의 교제가 이뤄진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단 한시도 살아 갈 수 없는 불쌍하고 연약하며 부족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실감한다. 하나님의 너무나도 크고 신령한 긍휼 안에서 각 성도들 또한 서로를 너무나 불쌍하고 연약한 자로 보게 된다. 비록 단 두 명의 성도라도 거룩한 교회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긍휼 안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각 자와 또 두 사람이 이룬 공동체를 통치해 달라고 소원하는 단계를 넘어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완전히 들어간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기다리고 보시기 원했던 천국이 이 땅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실현된 것이다. 당연히 당신의 위로와 평강과 기쁨이 각자에게 솟아나게 해 주신다.
일단 그런 관계가 이뤄지면 아무 말이 필요 없다. 체면치레, 변명, 설명은 물론 병문안과 고난에 대한 격려의 말도 필요 없다. 혹시라도 인간적인 말로 예수님의 통치에 잠겨 있는 자기들 영혼이 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까 은연중에 서로 염려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지금 함께 해 주시는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데, 주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있는데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저절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큰 도움을 주고, 인간적 의리와 사랑을 베풀고, 자기를 희생하며 수고하는 덕을 실천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천국이 없다. 반면에 서로 아무런 현실적 도움을 못 주고, 인간적으로 서로 미워하고 저주까지 했어도, 자기 코가 석자라 제대로 이웃을 섬기지도 못하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면 바로 그곳이 천국으로 변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먹고 마시는 걱정이 없어진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내면의 죄를 반성하고 인격을 수양한다고 평강을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바꿔 먹는다고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낙원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통치해야 천국이다. 아무리 궁핍해도, 아무리 죄가 많아도, 어떤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임하시고 그래서 그 통치 아래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원하면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천국은 도래한다.
다른 말로 인간이 통치하지 않는 곳이라야 천국이다. 인간이 통치하는 곳은 아무리 정의와 공평이 실현되어도 여전히 인간의 왕국일 뿐이다. 과학의 왕국, 철학의 왕국, 사상의 왕국, 도덕의 왕국, 종교의 왕국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이 빠져 있으면 하나님의 왕국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빠진 곳은 또한 사탄의 왕국이다. 어떤 고매하고 심오한 사상, 철학, 도덕, 종교로 세상을 공평하고 의롭게 다스리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 없이는 여전히 사탄의 왕국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실제로 다스리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아니면 사탄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은혜와 권능만큼 위대한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능력으로도 위대할 뿐만 아니라 단 한 치의 오류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충족한 것이다. 오직 100% 순수한 진리와 생명 그 자체다. 세상의 어느 것과도 같거나 심지어 비슷하지도 않다.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인간이 천국을 누리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요 그 힘은 예수님의 사랑이다.
사망의 문턱까지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가?
제 책상 앞에 항상 붙여 놓은 시가 하나 있다. Thomas A'Kempis가 지은 “예수님과의 교제(On Fellowship With Jesus)”라는 제목의 시다. 그 첫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님 (의 십자가 사랑) 없이 세상이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What can the World offer you without Jesus?) 또 끝을 이렇게 맺는다. “가장 부요한 자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거하는 자요. 가장 가난한 자는 예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다."(Richest of all is he who stands in favor of Jesus. Poorest of all is he who lives without Jesus.)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말로는 쉽다. 교리적, 종교적으로는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또 실천하고 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며 그분의 뜻대로 따르겠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엄밀히 말해 이 땅에서 실제로 천국을 누리며 사는 자는 아주 드물다. 신자들더러 진짜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해보라. 진정으로 범사에 행복하며 감사하고 있는지? 세상의 어떤 위로와 기쁨보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정말로 좋은지 말이다.
왜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믿음에 대한 공부와 훈련을 그렇게 많이 했어도 아직도 천국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여호와는 목자이므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리라고만 기대해서 그렇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기꺼이 다닐 수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천국은 주님과 함께 사망의 문턱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어야 도래 한다. 예수님이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대적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이고 원수들로부터 온갖 비방과 모멸과 핍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키려 할 때에 예수님이 그 위험에서 건져 줄 때만 나의 목자가 된다면 그분은 목자가 아니라 보디가드일 뿐이다.
예수님이 내가 부리는 경호원으로 전락했는데 어떻게 그분이 통치하는 천국이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 아닌가?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에 절대로 진정한 평강과 기쁨과 위로가 있을 수 없다. 스스로 불안과 염려가 끊일 사이가 없는데 자신이 자기를 통치하겠다고 나서서 천국이 되겠는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의 천국관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환난은 지옥이고 돈이 천국이다. 목자는 누가 되어도 좋다. 예수님이 목자가 아니라도 된다. 어쨌든 기도할 때만은 그분의 이름으로 하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축복을 충분히 받을 수 있거나 최소한 신자가 할 바는 다 했으니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이 비록 권세 명예 재물 자존심 심지어 세상의 정의와 도덕이라도 개입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단순히 아무 사심(私心) 없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정도가 아니다. 기도할 때에는 우리 모두 진정으로 겸손하고도 경건하게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가? 어떤 일이 생겨도 심지어 사망의 문턱에 다다라도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 신뢰, 경배, 찬양, 섬김, 소원, 갈망 등에 하등의 변화가 없어야 한다.
한 번 더 우리 모두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 여호와 대신에 마음 속 한쪽 아주 미약한 구석에서라도 세상의 다른 것들로 대체하고 있거나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과연 예수님과 함께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기꺼이 기쁨으로 동행할 수 있는가? 아니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오늘날 여호와가 자기에게 진짜 목자가 아닌 가짜 신자들이 의외로 너무 많다. 문제는 신자들이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기독교적 활동만 하고 있으면 여호와가 자동으로 자신의 목자가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되어져 가는 모든 상황과 누가 진짜 자기를 목자로 모시고 있는지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나무십자가 교회 3/31/2002 주일 설교, 7/7/2006 정리)
근데 목사님! 책상에 항상 걸어 놓고 계시다는 토마스 아켐페스의 시를 나누어 주실 의향은 전혀 없으신지요?
주님께선 있는 것을 나누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아는데, 아닌가요?
목사님께서 아끼시는 좋은 시를 함께 맛보고 싶어서 그럽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