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7)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5-9)
강남 교회에 주눅이 든 노인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에 혼자 사는 노인을 힘겹게 전도하여 교회를 소개해 주었더니 한두 번 출석하고는 중지해 버렸다고 했다. 이유인즉 서울 강남의 그런대로 큰 교회이다 보니까 번듯한 자가용 하나 없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지하철 타고 걸어서 교회에 갔더니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오늘의 본문에선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자들이 거절당하고 허름한 자들은 환영 받았다. 세례 요한이 곧 이 땅에 새 시대를 실현할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했다. 또 그 시대에 걸맞게 준비시키려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씻는 침례를 베풀었다. 그런데 유독 당시의 상류계급으로, 도덕적 종교적 지도층인 바리새인과 사회적 정치적 지도층인 사두개인들에게 만은 침례 베푸는 것을 거절했다.
요즘으로 치면 교수, 국회의원, 재벌 회장이 교회에 출석하겠다는데 목사가 거절한 셈이다. 대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당장에 안수 집사나 장로 직분을 주려 들거나 심지어 그들더러 그런 직분을 줄 테니까 제발 좀 나와 달라고 할 것이다. 한 미국 이민교회의 교인이 “박찬호 선수만 전도하면 십일조로 백만 불은 나올 텐데”라고 농담한 적이 있듯이 말이다.
요한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고 야단치며 쫓아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속으로 아브라함을 자기들 조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든 이 이유들은 언뜻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침례를 베푼 세리, 창녀, 죄인을 비롯한 일반 서민들에 비해선 그들이 선행과 구제에 훨씬 열심이었고 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도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작 요한의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침례 받은 서민층 유대인들이 아닌가?
성경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표현했지만 실제 혈통은 그게 아닌데 그런 척 가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요한의 의미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면서 그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완악한 불신자라도 절, 성당, 교회 어디든 종교 집회에 참석하게 되면 한 번쯤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자기 인생을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죄를 덜 짓고 경건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 시쳇말로 침례를 주는 데 세금 붙는 것도 아니고 요한이 전세 낸 것도 아닌 다음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도 이왕이면 침례를 주어서 그런 반성과 결단을 하게 하면 나쁠 것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요한이 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아브라함이 조상’이라는 의미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다. 그 중 핵심적인 오해는 회개에 관한 것이다.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무엇인가? 너무 초보적인 질문인가? 아니면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한 질문인가? 그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서로 자존심 세우느라 부부싸움을 대판 했거나, 친구에게 심한 말로 상처를 주었거나, 자녀에게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스스로 분에 못 이겨 손찌검을 했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밝힌 일들을 반성하는 일인가? 그래서 손해를 입힌 상대에게 찾아가서 보상하고 용서를 빌며 앞으로 절대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회개인가? 아니다. 세상에선 그런 것을 두고 회개라고 하지만 성경에선, 특별히 본문에선 그런 의미가 아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마27:3,4) 예수를 판 유다가 분명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고 뉘우쳤고 또 은 삼십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그가 성경적인 회개를 한 것은 아니다. 자기가 죄 지은 것을 인정하여 고백하고 반성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가 한 행위의 도덕적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간혹 겉으로는 체면 때문에 못하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최소한 속으로는, 어느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다. 아무리 아담이 범죄하여 그 형상이 부패되었지만 그 희미한 흔적이 우리 속에 양심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그래서 아무리 천하의 흉악한 강도나 살인범이라도 반성은 한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를 저주한 다른 쪽 강도가 전혀 뉘우치지 않았을까? 단언컨대 수천 번은 몰라도 적어도 수 십 번은 “왜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 그 때 조금만 참았더라면 이 꼴이 안 되었을 텐데...”라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자기를 연민했다가는 다시 자기를 비하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십자가형을 받아 엎드러진 물이 되어 도저히 다시 담을 수 있는 길이라곤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과 뉘우침이 엉뚱한 상대를 향해 원망과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어진 것뿐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서 죄를 지으면 자동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다만 사람마다 그 작동 속도나 세기가 다를 뿐이다. 스스로 죄책으로 뉘우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선 부끄럽고 또 까닭 모르게 자꾸 두려워진다.
물론 아담의 원죄와 사단의 훼방이라는 바이러스가 먹어서 때때로 그 프로그램이 일시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약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양심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완전히 태연한 자는 없다. 요컨대 사람이 착해서 뉘우치는 것이 아니요, 또 뉘우친 사람이 착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회개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무엇이 다른가?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라고 했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럼 뉘우치는 것과 돌이키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뉘우치는 것은 단순히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에 그치는 반면에 돌이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죄를 안 지어 착해서 천국에서 크게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해야 하듯이 스스로 작은 자로 인정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겸손이라는 도덕률을 잘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가야 한다. 겸손의 미덕을 지키는 것은 그 사람이 돌이키지 않아도 뉘우치기만 해도 가능하다.
지금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지 스승에게 질문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 궁금해서 질문했을 수도 있지만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렸거나 자기가 남보다 나으니 더 높아지겠거니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그런 잘못된 질문에 대해 뉘우치라는 것이 아니라 속에 가득 찬 교만과 욕심을 완전히 빼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한 것이다. 뉘우침과 돌이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이해가 되는가?
돌아온 탕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눅15:16,17) 뉘우친 것이 아니라 돌이켰다고 했다. 뉘우치는 것은 돌이키기 전의 상태다. 돌이킴이 없는 뉘우침은 있을 수 있으나 뉘우침 없는 돌이킴이란 없는 법이다. 뉘우침에 그쳐선 안 되고 돌이킴까지 가야 한다.
탕자가 가진 돈을 밤마다 술과 여자와 도박으로 탕진하며 방탕에 빠져 있을 때에 뉘우침이 과연 한 번도 없었겠는가? 정말 떳떳하고 재미있고 신이 나서 죄책감이 한 번도 들지 않았을까? 유흥에 빠져 있을 때는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플 때에 그 마음과 영혼이 과연 평안했을까 말이다. 최소한 죄책감은 몰라도 허무와 환멸은 느꼈을 것이다. 또 최대한 양보해 갖고 있던 돈이 자꾸 줄어들자 이래서는 안 되는데 후회하고 뭔가 할 일을 찾아보려고 노력도 했을 것이다. 후회와 반성은 아무리 천하의 탕자라도 때때로 아니 잠에서 깨어나는 매일 새벽마다 한다.
돌이킴은 둘째 아들이라는 원래의 신분과 지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이전에 서있었고 지금도 반드시 되어 있었어야 하는 형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가롯 유다는 뉘우쳤지만 돌이키지 못했다. 아무리 스승을 배반했더라도, 아니 그렇게 했기 때문에 더더욱 예수님의 무덤 앞에 가서 또 지난날의 동료를 찾아가 석고대죄하며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대제사장과 그 하속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고 그들 앞에 가서 잘못했다고 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유다가 지은 죄의 피해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수혜자였지 않는가?
실제 현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부싸움을 했다면 단순히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라는 말로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싸움 하는 동안에 생긴 응어리진 것, 미워한 것, 서로 자존심 세운 것 모두를 완전히 다 부숴야 한다. 그래서 싸움하기 이전의 사랑하던 그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자녀에게 스트레스 풀듯이 상처 주는 말을 하며 손찌검한 것도 정말 부모가 먼저 자식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며 눈물로 사죄해야 한다. 실수였든 고의였든 그런 일들로 주름진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온전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회복 될 때까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대화하고 기도해야 한다. 가족 간의 이전의 사랑하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뉘우쳐도 회개한 것이 아니다.
회개에 합당하지 못한 열매
회개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이해하니까 요한이 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너무 쉽게 도덕적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한 자들이었다. 뉘우칠 일만 따진다면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 가장 적었다. 그들의 문제는 돌이키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일반 유대인들은 돌이키기 위해 혹은 돌이켜서 침례를 받았는데 그들은 그런 돌이킴이 없었던 것이다.
돌이킴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잘못된 자리에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위치는 어디였는가? 요한이 예리하게 지적한 말 가운데 이미 설명이 되어 있다. 그들이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틀렸다는 의미로 요한이 말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자리에 있지 않으므로 그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닐 리가 없다. 요한의 지적은 선민으로 당연히 천국 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믿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율법으로도 정결하며 도덕적으로도 선한데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기까지 하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지금 요한이 베푸는 침례의 의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말하자면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천국 가기 위해 회개나, 돌이킴이나, 심지어 뉘우침도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완악했다. 그러니 당연히 현재 너희들이 서 있는 자리가 천국과 거리가 멀고 구원의 반대 편에 있으니 먼저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어린아이처럼 되도록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곧 오실 메시야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를 받으러 나온 뜻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침례 요한이 누구인가? 지금으로 치면 한창 대중의 인기를 모으며 떠오르는 차세대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호기심으로 나왔거나, 아니면 자기들 같이 경건한 자들이 또 다시 죄를 씻는 침례를 받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러러 볼까 기대하고 나온 것뿐이었다.
성경은 놀랍게도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정죄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세례를 받으려 나왔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세례 베푸는 그 장소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만 한다. 나아가 그들이 떼를 지어 나왔다고 말한다. 미리 만나서 작당을 하고 나왔다는 뜻이지 않는가? 도대체 요한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무엇을 하는지, 왜 사람들이 저렇게 모이는지 궁금해서 나온 것이다.
뉘우침만 해도 아주 개인적인 사안인데 돌이킴은 더더욱 그렇다. 정말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도저히 구원 받을 자격조차 없는 죄인이라고 자복하며 다시는 이전의 죄 많은 생활과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헌신과 결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돌이킴은 가장 가까운 집안 식구와도 상의할 문제가 아니라 혼자서 골방에 들어가 가슴을 치며 통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돌이켰음을 고백하는 장소에 볼거리라도 생긴 양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나왔다.
그래서 요한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당연히 천국 갈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제 오시는 메시야로부터 그렇게 착각하는 너희들을 찍어 불에 던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최고위층들에게 광야의 한 선지자가 대놓고 저주하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오늘날의 많은 신자도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천국 보험 들듯이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는지 호기심으로 교회에 나오는 자가 있다. 또 자신은 이미 그런대로 선하지만 고상한 계명들을 배워 자기 인격과 품성을 더 경건하게 가꾸는 것을 신앙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자도 많다. 그래서 몇 가지 자기 허물과 죄를 형식적으로 조금 뉘우친 것을 가지고 마치 크게 회개한 양 착각한다. 침례 요한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교회마다 찾아가서 동일한 저주를 퍼 붇지 않겠는가?
구원을 받는 회개
신자가 되는 회개, 신자로써 해야 하는 회개는 달라야 한다. 불신자들도 뉘우치고 경우에 따라 돌이킬 수도 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오해와 상처를 씻어서 이전보다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돌이킴은 그것보다 한 칸 더 나아가야 한다. 아니 돌이키기는 돌이키되 돌이키는 내용과 대상이 달라야 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박물관에 아주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 가려는 것을 한 주교가 못 들어간다고 막아서 있는 장면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AD 390 년경에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가 그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고한 사람 1500 명을 학살했다. 그래서 밀라노 성당으로 들어서려는 황제를 어그스틴을 회심시킨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딱 막아선 것이다. 당황한 황제는 성경에 나오는 다윗도 큰 죄인이었지 않느냐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다윗의 죄를 모방하느냐? 다윗의 회개를 모방하느냐?”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를 뉘우쳤다면 두 번 다시는 그녀를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비록 그 남편 우리야가 죽은 후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또 다윗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도 이미 결혼한 후이지만 그의 회개는 달랐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과 허물과 실수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시 바라보고 그분과의 일그러졌던 관계를 원상회복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 부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와서 세 번 똑 같은 질문을 하면서 그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전혀 묻지 않았다. “봐 네가 잘못했지? 내가 뭐라고 했어?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고 했잖아? 그 때 너는 자칭 의리가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 말을 속으로 비웃었지? 그런데 정확하게 세 번 부인하자마자 닭이 울었잖아? 이제는 네 잘못을 제대로 알겠지? 그러니 나에게 용서를 빌고 회개하라.” 대신에 다른 말씀은 일절 없이 오직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만 연속해서 세 번 던졌다.
사실 베드로는 그 훨씬 이전에 뉘우쳤다. 세 번 닭이 울자 바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스승을 부인했던 죄를 반성하고 뉘우쳤는지의 여부가 아니었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 가운데서도 다시 스승과 제자, 메시야와 구원 받은 죄인의 관계로 원상회복하고 싶은가를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찾아 오셔서 그를 원래 있었던 장소로 다시 돌이키는 초대를 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일방적 은혜를 베풀어 그 죄를 씻어주셨고 구원해 주셨다. 제자의 세 번의 배반을 스승은 세 번의 사랑으로 갚아 주셨다.
신자의 회개는 어떤 죄를 지었어도, 다윗처럼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그 남편이 거추장스러워 전쟁에서 부하를 시켜 죽음에 내모는 비열하고 극악한 죄를 지었어도,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 그 죄로 인해 비틀어진 인간과의 관계도 바로 잡아야 한다. 부부 싸움을 했어도 각자가 먼저 하나님 앞으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불신자의 경우는 이 절차가 없다. 단지 서로 뉘우치고 잘해야 서로 간에만 돌이키고 만다. 불완전한 죄인끼리 여전히 죄 가운데서 행해진 불완전한 회개일 뿐이다.
나단 선지자가 우리야를 살해한 죄를 통렬하게 지적하자마자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했다. 아마도 밧세바와 결혼 할 때에 우리야의 가문에 왕으로서 해 줄 수 있는 모든 보상과 사죄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뉘우침과 돌이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나단에게 왕으로서 할 바를 다 해 주었고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 감히 왕에게 무례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따지지 않았다. 대신에 곧 바로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동안에도 밤마다 자기 영혼에 안식이 없었고 죄책감에 두렵고 떨리며 부끄러웠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다윗의 죄악은 우리야와 밧세바에게 저지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께만 범죄하엿다고 고백한다. 모든 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비뚤어졌기에 범하게 되고 또 그 죄로 인해 그 관계 또한 더욱 비뚤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죄를 사하고 바로 잡아주실 이도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뜻이다. 그로선 이미 양심에 바탕을 둔 개인적인 뉘우침은 했지만 영혼의 회개를 하지 않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즉 돌이킴이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처절하게 고백한 대로 그 죄는 항상 그의 앞에 있었다. 하나님의 인자, 자비, 긍휼이 아니고는 자기 죄를 말갛게 씻길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주께만 범죄 했다”는 자백의 의미는 “주님 제발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인자를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자기의 모든 것을 건 절규였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언제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오면 무슨 죄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한 마디로 회개를 아주 잘못하고 있다. 교회만 나오면 그냥 습관적으로 지난주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너무나 형식적으로 빌고 치운다. 집에서 혼자 이미 뉘우쳤다고 보고하는 것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일단 교회에 나왔으니 뉘우치는 형식만이라 해야 될 것 같은 의무감, 체면치레, 심지어 신앙적 자존심으로 마지못해 하는 것 같다.
신자가 되었다고 십자가만 턱없이 잘못 믿고선 뉘우치는 시늉만 할 바에야 차라리 불신자 시절에 도덕적으로라도 괴로워했던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양심에 의한 뉘우침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더 큰 문제는 대충 해치운 그런 회개를 바탕으로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달라는 요구사항만 잔뜩 늘어놓는다. 다윗은 금식하며 주께만 범죄한 것을 가장 먼저 애통해 했고 또 아무 죄 없는 불륜의 씨앗을 살려달라고 했다. 이미 태어난 자식을 살려 달라는 간구는 사실은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뼈를 깎는 과정의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적 회개로 모든 죄를 문자적 자의적(自意的) 복음에 근거하여 스스로 사해버린 후에 정말 뻔뻔하게도 하나님과 흥정 아니 일방적 요구로 돌입하지 않는가?.
어떤 죄든 그 죄를 짓게 된 근본 원인이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죄를 짓기 이전의 하나님과의 사이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탕자가 다시 둘째 아들의 자리로 완전히 돌아오는 것이 회개다. 탕자 상태에 있으면서 아무리 많이 뉘우치고 심지어 뉘우칠만한 죄를 짓지 않더라도 여전히 탕자일 뿐이다.
뉘우치는 것은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돌이키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지은 상태, 즉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무지하고 무능하며 철저하게 부패한 죄인임을 진정으로 자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성경의 회개는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뉘우쳐서 돌이키는 것이다. 뉘우치는 것 하나 만으로는 아예 부족하다.
당신은 예수를 믿었을 때에 뉘우쳤는가? 돌이켰는가? 혹시 뉘우치기만 하고 돌이킨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닌가? 지금도 죄를 지어도 대충 뉘우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가? 혹시 교회 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돌이킨 적이 없다면 여전히 탕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말로 예수를 믿어 어린아이처럼 되었는가? 인간관계에서 순진하고 착하라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만은 갓난아이처럼 서 있는가 말이다.
(나무십자가 교회 4/7/2006 주일 설교, 7/12/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