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1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7-12)
몇 가지 세례를 받았는가?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거절하면서 이제 곧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특별히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이 주는 물 세례와는 달리 불과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두 세례의 차이는 우선 외적 형식과 매개체가 물, 성령, 불로 서로 다르다. 또 내용적으로도 세례 주는 목적과 세례 받고 난 이후의 결과가 다르다. 요한의 세례는 본인의 말대로 죄를 회개키 위해서 주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세례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기 위한 세례다. 물의 세례는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세례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어져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지는 세례다.
그렇다면 신자로선 “나는 무슨 세례를 받았는가?”라고 자문(自問)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과 성령과 불의 세례 중에 몇 개를 받았는가? 물 세례는 받았는데 나머지 두 가지 세례는 받은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럼 나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가?
그 답을 얻으려면 가장 먼저 성령과 불의 세례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물 세례는 대부분의 신자가 교회 출석하면 얼마 안 되어 일정 교육을 받은 후에 예수 믿기로 헌신하여 교우들 앞에서 받는다. 반면에 성령과 불의 세례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비슷한 일이 자기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불 세례라고 해서 흔히 말하듯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훑어 지나감으로써 그 자리에서 암 같은 불치병이 낫고 감정이 충만해져 영혼에 평강이 넘치는 체험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주 특수한 경우 개별적으로 그런 체험이 가능하다. 그러나 성령과 불의 세례로 구원과 심판이 나눠지는데 구원 얻은 모든 신자가 다 그런 체험을 할 수도 없고 실제 그렇지도 않다. 또 요한이 그런 초자연적인 체험을 미리 염두에 두고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앞뒤 문맥을 잘 따져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성령과 불의 세례(11절)를 그 다음 절(1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것이 바로 성령과 불의 세례다. 알곡을 모을 때에 메시야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했다. 성령의 바람을 불어 알곡을 쭉정이와 구별하여서 곳간에 먼저 넣은 후에 남은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불세례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으로 또는 성령 충만의 초자연적인 체험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최소한 본문에선 다르게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성도는 성령과 불 세례 둘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만 받으면 되고 불신자는 불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요한이 베푼 물 세례와 오늘 날의 물 세례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죄를 씻어 메시야가 오심을 예비하는 일은 요한의 당대에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메시야가 오신 이후로는 성령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었음을 확신하는 신자가 물 세례를 받는다. 물 세례가 요한 때처럼 성령 세례를 준비하는 의미나 혹은 그 자체로 어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신자가 된 자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 받은 자답게 살겠다는 서약의 의식일 뿐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물 세례는 시간적 전후 순서만 다르지 내적으로는 성령 세례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신자는 세 가지 세례 전부를 받았는지 따질 필요 없이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 여부만 점검해 보면 된다. 만약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아무리 교인이라도 쭉정이로 분류되어 불에 태워질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
그럼 과연 내가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 믿기로 했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 당연히 성령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방언을 해야 하는가? 맨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회개했던 적이 있어야 하는가? 갑자기 내 속에 신령하고 거룩한 기운이 들어차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 같은 기분이 든 적이 있었어야 하는가? 이런 저런 것 다 꼭 필요치 않다. 그런 체험을 전혀 하지 않았어도 된다.
성령 세례를 너무 신학적으로 어렵게 접근하거나, 초자연적 체험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이해하는 길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8) 신자는 이미 성령의 전이 되었다고 한다. 알곡을 모아 구원을 주신 성령은 그 후 신자를 떠나지 아니하고 천국 갈 때까지 신자 안에 내주(內住)하므로 너무나 당연하고도 확실한 사실이다. 성령은 누구인가?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든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부인이 하루는 특별한 일도 없는데 새까만 장례식용 드레스를 입고 집안을 왔다 갔다 했다. 루터가 궁금해서 주위의 친척이나 친구 중에 죽은 자가 있는지 물었더니 부인이 하나님이 죽었다고 대답했다. 루터가 “당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은 항상 살아 계시어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잖아?”라고 따졌다. 그런데도 부인은 “내가 볼 때는 아무래도 하나님이 죽은 것이 틀림없어”라고 했다.
다시 루터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재차 다그쳤더니 그녀의 대답이 이랬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꼴이 바로 그렇지 않느냐? 완전히 기가 죽어 염려와 불안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는 그렇게까지 좌절할 수가 없지 않느냐?” 반대파의 음해와 핍박으로 루터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을 때였다. 부인의 말에 크게 깨달은바 된 루터는 다시 힘을 얻고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다.
우리 가운데도 루터처럼 근심과 실망에 빠져있고 심지어 죄악 가운데 있는 자가 많다. 그럼 그런 자 모두가 성령을 받지 않았는가?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미 성령을 받아 구원을 얻었고 심지어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던 중이었다.
루터의 예처럼 따지자면 자신이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알아 보는 질문의 내용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지금 평강한가 아니면 염려 불안에 휩싸여 있는가? 소망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실망에 사로잡혀 있는가? 빛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가? 거룩하게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죄악에 빠져 있는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쪽으로 달려가기 바쁜가? 주님의 참 생명의 풍성한 능력을 맛보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와 회한과 허무로 방황하고 있는가?
솔직히 이런 질문에 하나도 걸리지 않을 신자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허락해 놓고 당신의 자녀를 떠날 리는 절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다. 루터가 그랬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떠난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성경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자기의 주시라 시인”(고전12:3)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보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도저히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와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우리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이 말씀이 진리인지 알 수 있지 않는가? 예수를 부인하고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죽도록 싫어했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찬양하고 십자가 이야기만 나와도 눈물이 베여 나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성령의 세례가 없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다시 말하건대 성령 세례를 너무 어렵게 따지지 말라. 메시야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마1:23,24)이 성도 각 개인에게 성취된 것이 바로 성령 세례다. 설령 신자가 임마누엘을 체험하는 은혜가 약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떠나간 것처럼 생각되어져도 된다. 단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신자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신자의 감정과 의지가 아무리 연약해져 있을지라도 함께 하신 하나님은 약해질 리도 떠나갈 리도 없다.
임마누엘이 약해지는 이유
대부분의 신자가 왜 지성으로는 임마누엘을 믿으면서 감정과 의지로는 그 확신만큼 뒷받침 되지 못하는가? 왜 수시로 하나님이 나를 떠났거나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비례해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는 의식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렇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자꾸 내 쪽에서 사랑해야 하고 내가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내가 그분을 내 곁에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믿는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함을 믿는가?”라는 질문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한다.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잘 믿고 있으니 너무나 당연히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잘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머뭇거리기 일쑤다. 이제는 하나님 쪽에서 하고 있는 일에 관한 질문으로 바뀌었기에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의미를 마치 부시 대통령을 알고 있는 정도로만 이해한다. 또 정말 안타깝게도 믿음도 하나님에 대한 그런 정도의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사람 아니 전 세계의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부시를 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전직 대통령 부시의 장남으로 일류대학을 나와 텍사스에서 사업을 했고 또 주지사를 거친 후에 대통령이 되었고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시와 자기가 서로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부시 쪽에서 자기를 개인적, 체험적으로 잘 알아서 언제든 백악관 만찬에 초대할 정도의 사이가 되어야 한다. 또 실제 그럴 정도 사이가 되면 사정은 확 달라진다. 어쩌면 당장에 영주권도 얻을 수 있고 먹고 사는 문제도 대통령이 조금만 배려해주면 평생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 세례를 주신 후에 임마누엘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을 일반인이 부시 대통령을 아는 정도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에서 건져서 당신의 뜻과 계획 가운데로 인도하려면 당연히 부시가 나를 언제든 초대할 정도로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그 정도 차원으로 신자를 확실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신자로 확신케 하기 위하여, 즉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하기 위해 성령을 신자 안에 내주케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이름, 생년월일, 부모, 자라온 배경, 가문, 학벌, 친구 관계, 성격, 기질, 장단점, 특기, 취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는가? 그분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절실히 소원하며 또 내게 꼭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의 연약하고 허물 많은 성격,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고집과 편견과 선입관, 나만 갖고 있는 부끄럽고 추한 습관,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짓고 숨겨 놓은 일들, 어느 누구도 모르는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과거지사 등을 전부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나아가 내가 지금 현재 품고 있는 온갖 이상하고 음란한 생각, 탐욕스런 궁리를 꿰뚫어 보실 뿐 아니라, 내가 그런 것들을 속에 꽁꽁 감추고 겉으로는 아주 교양 있고 품위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계신다고 확신하는가?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가? 내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와 부끄러웠던 허물들을 다 아시고 지금도 세상을 향한 온갖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주일만 겨우 교회 왔다가는 정도임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를 긍휼과 자비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분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정죄하지 않으시고 내가 더 성숙해져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가? 기도할 때마다 그분이 나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신다고 고백하는 그대로 단 한 치의 가감 없이 실제로 확신하는가?
지난주에 저희가 새집으로 이사 갔는데 전주인이 뒷마당 나무들을 엉망으로 관리해 놓았다. 멕시칸 정원사를 불러다 가지치기를 시켰더니 오후 반나절을 정말 열심히 일해 말끔히 정리해 주었다. 무거운 전기톱을 들고 나무 둥지 위로 올라가서 보기에도 힘들고 위험해 보이는 작업을 시원시원하게 해치웠다. 체격과 힘이 우리 동양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제가 미국 이민을 오기 전에 미국 가면 대체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궁리하다 이민 직종을 소개한 책을 사다가 읽은 적이 있었다. 세탁소, 리커스토어, 구두수선, 청소, 햄버거 가게 등 한인 이민자들이 많이 하는 직종 중에서 유독 가드너가 마음에 들었다. 잔디를 깎고 꽃 손질도 해주면 몸과 정신 건강에도 좋은 일석이조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어제 멕시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순진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체력이 그들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고 가뜩이나 병약한 제가 할 수 있는 직업이 전혀 아니었다.
하나님은 제가 이민 오자마자 전혀 다른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인도하셨다. 지금 같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리라고는 한국에선 아니 미국 땅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때까지 꿈도 못 꾸었다. 그분은 저를 한국에서 온갖 실패를 겪게 하고 결국은 조국과 가족을 등지고 물설고 낯선 이국땅으로 내몰더니 또 다시 그분만의 계획을 갖고 저를 한걸음 한 걸음 이끌어 주셨다.
제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왜 이리 재수가 없나라는 불평 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선 몽땅 사기치고 아부 잘하고 약삭빠르게 권력 동원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도둑놈들이라고 비난과 원망을 퍼부었다.
솔직히 예수를 믿은 후 얼마 동안에도 하나님이 언제쯤 나에게 돈 벼락을 내려주시는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신앙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씩 알아나가자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 기대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어둡고 추하고 더러웠던 모든 실패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크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불러 주셨고 저를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해주셨다.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저를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것이다. 지나고 나니 내가 진작 꼭 했어야 했고 되어 있었어야 할 자리에 이제야 서있게 되었구나, 그것도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가 없었다면 전혀 불가능했으리라고 철저하게 깨달았다. 나의 모든 실패 했던 체험들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그런 체험들이 사실은 이 자리에 오게까지 한 필수적이며 유익한 훈련 및 준비과정이었음을 절감했다. 또 그런 실패와 죄악까지도 목회를 하는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기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신자
신자가 성령 세례를 받아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되는데 특별한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확신이 있다면 성령을 받은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
천하를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바닷가의 모래 한 알이나 공중의 티끌 보다 못한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그 천하를 나를 위해 운행 하고 계신다. 나아가 나의 인생을 역사상 전무후무한 당신만의 독특한 계획과 뜻 가운데로 이끌어 주고 계신다.
그런 사실을 확신하는 신자라면 당연히, 아니 저절로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7-12)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님의 성령 세례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너무나 간단한 데에 있다. 주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는 인간에 불과하다.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사람들로 죄를 씻어서 구원과 심판에 대비케 하는 역할 밖에 못하였고 또 물은 죄를 씻는 회개의 상징일 뿐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세례는 문자 그대로 성령을 주시는 세례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세례다. 하나님의 세례라고 해서 갑자기 인간을 도덕적으로 고상해지고 영적으로 신령하게 바꿔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인간이 그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과 이제 기도로 교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가 환생한 자라는 말들을 하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했다. 모든 인간 가운데 처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한 역사적 대답이었다.
그런 그도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는데 그러자 곧 닭이 울었고 그는 뛰어나가 심히 통곡했었다. 그러나 그 통곡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한 인간적 윤리적 고뇌에 찬 후회와 반성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나아가 예수님이 자기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완전히 실감하지 못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간 그를 직접 찾아 오셨다. 그리고 스승을 배반한 그를 아무 추궁도 하지 않으시고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거푸 물으셨다. 예수님은 이제는 스승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조차 막혔고 도저히 자신의 죄를 씻을 길이 없어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배드로의 심중을 너무나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이다.
세 번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또 그대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을 때만 해도 그는 단순히 주님의 능력이 크며 또 그것은 그동안의 사역을 보아왔을 때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니 생각했을 수 있다. 그보다는 자신의 너무나 초라하고 비겁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주체할 수 없는 큰 실망에 휩싸였다. 세상에선 의리가 있으며 제자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 한 사나이가 완전히 바닥까지 깨어진 아픔을 절감한 까닭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용서를 받고는 너무나 그의 영혼이 큰 안도와 평강으로 인도되어졌다. 주님이 이렇게도 세세하게 나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랬다. 다윗처럼 정말 하늘과 바다 끝까지 도망을 가도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권능 앞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베드로에게 비로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인격적, 체험적, 개인적으로 임하셨다.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제 신자로서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확인할 것이 남았다. 성령 세례를 받은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한다면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님이 내주하는 성전이 되었다. 그보다는 지금 현재 예수님이 나에게 임마누엘 하고 계신 것이 과연 얼마나 크고도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다가와 있는가이다. 요컨대 현재 열심을 내고 있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어떠한가 말이다.
혹시 베드로처럼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는가? 그래서 내가 주를 위해 한 일들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한가? 아니면 주님이 오늘도 나를 먼저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음성을 듣기를 소원하는가? 다른 말로 내가 하나님을 알아가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날마다 삶의 세밀한 구석에서부터 확인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 사실이 너무나 기이하고도 감사하게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부시 대통령이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도 세상에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데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나무십자가 교회 4/14/2002 설교, 7/16/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