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1-4)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 북한
오래 전에 북한을 다녀오신 분의 간증 집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너무 굶다보니 허기가 져서 순간적으로 자기 아이가 닭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신없이 잡아 죽여 삶아 먹었는데 기운을 차리고 난 후에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미쳐 버렸다고 한다.
예수님은 밤낮으로 40일을 금식하셨다. 눈앞에 돌이 프라이치킨으로 보이는 바로 그 때에 사단이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보라는 시험을 걸어 왔다. 안 그래도 이미 떡덩이로 보이는 데 구태여 만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판국이다. 가만히 있으면 있는 대로 사단에게 넘어가는 셈이다. 이처럼 사단의 시험은 너무 교묘하다. 사단인 줄 알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냥 그 흉계에 넘어가게 된다.
예수님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사단을 대적해 물리치셨다. 어떻게 이겨냈는가? 간단한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겨냈다. 진리 앞에는 어떤 큰 흑암의 세력도 바로 서 있지 못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정말 문자 그대로 떡을 말씀으로 이겨냈다.
그런데 대개의 신자들은 이 말씀을 너무 초보적으로 이해하고 그친다. 예컨대 “아무리 먹고 마실 것이 없어도 절대 죄에 빠지지 말라. 육신적 정욕이 발동하면 인간적 의지로 이겨내어 도덕적으로 절제하는 생활을 해라.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의 바탕에 깔려 있는 근본 사상은 육신적 본능을 충족하는 것은 차원이 낮은 짓이고 심하면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가 열심히 돈 벌어 고급 차를 타고 큰 저택에서 여유 있게 살아선 안 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고 믿는다. 신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인격적으로 고상하며 신앙적으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 해석의 시발점도 당연히 예수님이 극한 상황에서 시험을 받아 이겨내었다는 데에 둔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절제력과 의지가 너무나 대단하지 않는가? 그렇게 오래 금식했다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속담에 3일 굶어서 남의 집 담장 넘지 않는 자 없다지 않는가? 자기 아이도 삶아 먹는 판에 사단까지 대적해 이겨내다니 정말 메시야 하나님답다”고 감탄만 하고 치운다.
작심삼일이라는 경구가 말해 주듯이 인간 의지의 평균적인 한계는 삼일 째다. 금식도 가장 힘들 때는 3, 4일 째다. 그렇게 오래까지 금식을 해보진 못했지만 이미 40일 째 들어서면 아마 신체가 허기진 것에 적응이 되어 음식에 대해 무덤덤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일차적인 무기는 당신의 의지력이 아니었으며 또 그 시험의 성격도 도덕적 절제력을 테스트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하여 어디로 인도했는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앞장서서 가시면서 다다르게 한 곳은 바로 먹을 것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였다. 백성들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런 사막에서 객사시키려 데리고 나왔느냐고 하나님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완악한 백성들을 당신만의 한없는 긍휼로 참으시고 대신에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셨다. 그 후 가데스 바네야의 반역으로 40년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했지만 주리지 않을 뿐 아니라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다. 모세는 그 모든 일들을 이렇게 회상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광야에서 만나를 준 이유가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역으로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만나를 내리게 된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때에 이스라엘이 먹고 마실 것이 없어도 의지력으로 절제하며 자신들의 인격과 도덕성과 신앙으로 그 고통을 이겨냈었는가? 그래서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시험과 유혹을 잘 이겨내었기에 하나님이 상으로 만나를 주셨는가? 아니다. 먹고 마실 것이 아예 없어서 하나님으로선 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질을 밝히는 세속적 삶과 궁핍한 중에도 도덕적으로 사는 삶 중에 어느 쪽을 택하는지 보시려고 만나를 주신 것이 아니었다.
사울에 쫓기던 다윗 일행이 사흘을 굶자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거룩한 떡을 얻어먹었다. 요즘 식으로 치면 거지가 교회에 가서 목사 개인 돈으로라도 밥 한 끼 사달라고 한 것과 같다. 사람이 가장 이겨내지 못하는 시험이 굶주리는 것이다. 당장 하루 세 끼를 먹지 않으면 육신 뿐 아니라 사고 활동마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빅톨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쟌발장은 굶다 못해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 소설의 제목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레’(les)는 정관사(the)이고, ‘미제라블’(miserable)은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쟌발장이 도저히 굶다 못해 저지른 범죄라 오히려 동정을 살만하다는 것이다. 목사라도 월말에 아파트 렌트비가 모자라면 목회를 접고 돈이나 실컷 벌어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최근에 다른 교회에 나가는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하나님은 몰라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술 담배도 예사로 하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주일 날 교회를 가는 것은 사람과 교제하고 사업의 정보도 얻고 자녀 교육도 잘 시키고 싶기도 하지만 더 절실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했다. 이민 생활이 너무 힘들어 교회만 가면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지만 하나님 제발 저를 좀 도와달라고 먹고 마시는 문제를 가지고 절실하게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한 것을 두고도 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여 배반했다고 너무 단순하게 매도할 수는 없다. 그들이 터뜨린 불평의 표면적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애굽에선 비록 노예였지만 먹고 마시는 것에는 걱정이 전혀 없었다. 여호와를 경배하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려는데 이 모양 이 꼴이 뭔가? 차라리 애굽 고기 가마 곁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먹고 마실 것이 많은데 여호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먹는 것만 준다면 거기에서 황소신이든 태양신이든 상관 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하나님 정말 어쩌란 말입니까? 이러면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살며 또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까? 꼭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태여 말을 하자면 솔직히 하나님 따라 나온 것에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일 것이다.
하나님을 먹고 마시는 것만을 위해서 찾는다면 불신앙이 맞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먹고 마실 것조차 공급되지 않으면 그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을 절실히 찾아야 한다. 불신자라도 힘들고 불안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는가? 지금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상황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수많은 기적과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것은 불신앙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평이 역설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절규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도 만나를 통해 그들의 도덕적 절제력을 시험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몽땅 레미제라블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관해 성경이 정말로 지적하는 것 그래서 신자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도덕적 종교적 금욕주의가 아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정욕과 본성을 절제하여 세상의 유혹과 죄의 시험에 이겨내어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 성경의 일차적인 교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 의지력, 인격, 지성, 교양, 자존심, 체면, 도덕성, 종교성으로도 먹고 마시는 유혹과 시험을 어지간해선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단순히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떡에 관한 유혹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정말 떡을 먹지 않고 40일이나 금식을 했다면 모를까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 모두 불신자시절 뿐 아니라 신자가 된 이후까지 오랜 삶의 체험을 통해 솔직히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지 않는가?
예컨대 자기 아들을 삶아 먹은 북한 주민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죽어서 지옥에 일착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여전히 쟌발장처럼 아니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레미제라블’일 뿐이다.
신자들이 왜 평소 때는 가만있다가 힘들 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 기도에 나와 하나님께 울부짖는가? 심지어 이민 온 불신자 교포가 왜 교회에만 나오면 눈물이 흐르고 기도가 절로 나오는가? 굶어죽는 것을 의지로, 도덕성으로, 교양으로 이겨내는 데 도무지 한계가 있더라는 뜻이지 않는가?
다른 말로 시험과 죄악을 이겨낼 힘이 점점 없어져서 이제 한계에 다다랐고 그럴듯한 계기만 생기면 언제든 남의 집 담장까지 넘어야할 형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내 혼자라면 어떻게 하든 참아보다가 정 안되면 굶어 죽으면 그만인데 딸린 처자식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싶으니 더 미친다. 저 아이들을 위해선 사기나 강도나 무슨 짓인들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막상 도둑질, 강도질할 용기와 배짱은 도저히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알고 계시면 제발 제가 강도짓 하는 것만은 막아주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신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불평도 사실상 그런 우리 속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강도짓도 그렇지만 애굽의 고기 가마 곁으로 돌아가는 것은 외면적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반면에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주셔서 강도짓 하는 것만큼은 막아주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불평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나 우리의 실패를 변호하고자 한 말이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의 진짜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상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상식적으로 인간은 아무 걱정이 없을 때에 죄를 짓지 않고 경건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그런 상식이 틀렸다고 역으로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먹고 마실 것 하나 없는 극단적 상황에 일부러 밀어 넣었다. 그것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당신이 앞서 인도하여서 말이다. 엄격하게 말해 불평을 터뜨린 이스라엘에겐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별도의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이스라엘이 먹고 마실 것에 대해 본성적인 불평을 터뜨리게 하고 그 불평을 들은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불평은 몇 번 말한 대로 기본적으로 먹고 마실 것은 주셔야 우리가 강도짓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길 것 아니냐는 항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 메추라기, 생수, 의복, 신발 등 먹고 마시고 입을 기본적인 것은 진짜로 다 해결해 주었다. 이스라엘이 그것들을 얻으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은 “그래 좋다. 먹고 마실 것을 책임져 줄 테니 정말 내 말을 잘 듣고 강도짓을 하는지 안 하는지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극한 상황이 닥쳐도 절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항상 경건을 유지하고 거룩을 잃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걱정이 많을 때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누구라도 하는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이다. 역으로 걱정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찾는가 보자는 것이 바로 만나 시험에 숨겨진 그분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먹고 마실 걱정이 전혀 없을 때에도 당신을 찾기를 원하신다. 돈이 많든 적든 관계없이 당신을 찾는 자를 찾으신다. 나아가 당신을 찾을만한 현실적 이유가 단 하나가 없어도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신다. 그분이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영원토록 동일하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는 떡을 사랑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드러날 수 있는 환경과 사건 가운데로 신자를 억지로 밀어 넣으신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진정으로 당신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그분이 채워주시는 현실적 필요가 좋아서인지를 정확하게 꼬집어 내신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떡(물질)과 말씀(도덕적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떡과 하나님 당신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재벌회장이든 공장의 직공이든, 대학총장이든 일자 무식꾼이든 자기 처지와 상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물으신다. 형통하는 처지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반대로 궁핍한 처지라서 그분에게 불평하면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신자가 간혹 사흘을 굶다보면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갈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욕할 수 없다. 성전 구석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회개한 세리를 주님은 사랑하셨다. 세리가 왜 하늘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가? 당연히 돈에 눈이 어두워져 잠시 하나님에게는 눈이 멀었기 때문이지 않는가? 돈을 밝힌 것보다 하나님을 멀리한 것을 더 가슴 아파하는 자를 하나님은 더 찾으시고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단의 시험의 실체
사단은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여 허기졌을 때에 먹을 것으로 시험을 걸었고 예수님도 하나님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겨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단이 지금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예수 앞에다 두고 ‘자! 떡을 먹을래 말래“라고 약 올리며 그 인내력과 절제력을 테스트 한 것은 아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사단은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의 여부만 걸고넘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만나 시험이 떡과 돌의 대비가 아니라 떡과 하나님의 대비였듯이, 예수님의 이 시험도 떡과, 정확하게는 사단과 하나님의 대비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네 마음대로 해 보라는 것이 사단의 진짜 의도였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마느냐, 그 분이 이 땅에 당신을 보내신 목적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다. 사단은 지금 “네가 이렇게 굶었지 않느냐? 먹고 마실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을 부인하고 어서 빨리 내 편으로 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유혹했던 것과 하나 변한 것 없이 똑 같다. “선악과도 못 먹게 하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을 부인하고 내 편으로 오라!” 이런 사단의 유혹을 물리쳐야 할 신자에게 하나님이 하는 질문도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실을 주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두 번째의 “과실을 주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그 내용면에선 “네가 사단을 사랑하느냐?”와 하나 틀릴 것 없다. 너무나 엄숙하고도 심각한 질문이 아닌가?
나아가 본문에서 정작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과 사단이 누가 더 힘이 센지 겨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에 질 수도 있다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단에게 눈도 깜짝하지 않으실 분이지 않는가?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40일을 굶었다고 아니 백일을 굶은들 사단에게 지실 분이 절대 아니다.
이 시험은 사실은 사단 쪽에서 먼저 걸어 온 것이 아니었다.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마귀더러 시험을 걸어오라고 일부러 요청한 셈이다. 최소한 마귀가 시험을 걸어 올 것이라는 것은 다 알고 계셨다. 이 또한 만나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안에 들어 있는 시험이었다.
당신께서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우리와 똑 같이 굶으셔서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시험을 직접 이겨내려고 했던 것이다. 자청해서 우리의 고달픈 삶을 체험하려고 굶어 죽을 정도까지 내려가셨다. 헐벗고 굶주리어 고달파하는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의 절제하여 더러운 떡을 먹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성전의 세리처럼 오히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신다. 그래서 세리가 통분해 했던 그 아픔마저 아시고, 굶주림의 고통과 함께 그 비참한 심령마저 십자가에 안고 가시기 위해서 이 시험을 받으셨다.
다른 말로 북한에서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 그 현장에도 예수님은 눈물 흘리고 계신다는 말이다. 흉포한 죄악이 광기를 부리고 연약하고 부패한 인간이 그 죄악의 노예가 되어서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질고를 지고 있음을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도 그분은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긍휼로 하나님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그 고통에서 구원해 주도록 간구하고 계신다. 만약 잔발장도 실존 인물이었다면 빵 한 조각을 훔치는 그곳에, 19년간 옥살이 하는 그곳에, 출옥하여 성당에서 은촛대를 훔치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정말 헐벗어서 사단이 주는 더러운 떡마저 먹으려는 아니 받아 먹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은 함께 계신다. 사단의 목소리만 듣지 말고 당신이 택하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당신의 음성도 함께 들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을 두드려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다. 수고하고 짐을 졌기에 더더욱 오라고 하신다.
일거리가 떨어져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니까 남의 집 담장을 넘어야 하는가 마는가 갈등하고 고뇌하며 내가 예수를 믿는데도 아직도 이 모양 밖에 안 되는가 비통해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와 계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 광야의 첫 시험을 이겼기 때문이며 역으로 그러기 위해서 그 시험을 자청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면 떡을 전적으로 부인한 것이 된다. 그러나 ‘떡으로만’이라고 했으므로 떡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떡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단순한 뜻에 그치지 않는다.
떡을 주시는 이도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의 주인으로 모실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평강과 만족을 줄 수 있다. 반면에 떡은 진정한 만족과 평강을 절대 주지 못한다. 떡이 조금 덜 중요하거나 만족과 평강을 조금 부족하게 주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있다고 하나님 없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시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부족해저 하나님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부족하지 않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항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실현시키는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둔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역설적으로 먹고 마실 것의 걱정이 전혀 없는 가운데 광야에서 다 쓸쓸히 죽었다.
먹고 마실 것이 많아서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나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배반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적 종교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 당신만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오히려 지옥에 떨어져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만 바라본 십자가상의 강도는 낙원에서 깬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덕적 삶을 살기 이전에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만은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 하나님 당신만을 사랑하였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아니 그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 또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그 신분과 특권을 절대 포기할 수 없고 포기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조금만 염려가 생기거나 조금만 풍족해지거나 간에 왜 그 신분과 특권을 쉽게 잊고 포기하려 드는가?
(4/28/2002 나무십자가 교회 설교, 7/26/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