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1)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4:5-7)
슈퍼맨 놀음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일로 기억하는데 한국에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있었다. 어린이가 텔레비전에서 자주 본 슈퍼맨을 흉내 내려고 보자기를 등에다 매고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다 죽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 두 번째로 받은 시험의 내용이 마치 그런 것 같다.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은 식욕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육신적 본성, 즉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한 문제였다. 이제 두 번째 시험은 인간의 명예욕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하나도 부상을 입지 않는다면 수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단번에 영웅으로 등극하게 될 것이다.
요한 사도는 사단의 시험이 인간의 어느 부분을 파고드는지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6)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면 사단으로 온 것인데 그 전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한 문제라고 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도 처음에는 육신의 정욕을 다음에는 이생의 자랑을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시험이 단순히 명예욕에 관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폼을 잡은 적이 없다. 자기 이름을 절대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 나사렛의 한 이름 없는 목수로 30년을 사시다가 마지막 3년의 공생애를 보냈지만 명예에 욕심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덤볐지만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고 중풍과 나병 등을 고쳐주시고는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모든 사람들의 희롱과 멸시를 받고도 한마디 변명 없이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 명예욕과는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편에 서있었다
사람은 평소에 욕심을 많이 부리는 부분에 쉽게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사단도 누구에게나 그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 예수님의 가장 약한 부분이 명예욕이 아닌데 그것을 건드릴 바보 같은 사단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사단의 꿍꿍이속은 따로 있었다.
해석의 열쇠는 사단이 예수님더러 뛰어내리라고 한 장소에 있다. 그 장소는 거룩한 성이 아니라 성전 꼭대기였다. 예수님을 명예욕에 미친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성문 망루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사람들이 많아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도 사단은 예수님을 굳이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요즘으로 치면 LA Lakers 농구 게임이 있는 날 Staples 체육관 천장에서 뛰어내리게 해 전국 TV에서 생중계 하는 것이 아주 쇼킹할 텐데도 구태여 Aneheim에 있는 수정교회 첨탑 위에 세운 것이다. 사단은 의도적으로 운동경기를 보러 온 대중보다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온 신자들을 골랐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사단은 예수님더러 성전에 온 신자들 앞에서 슈퍼맨 놀음을 하면서 기적을 보여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기독교만큼 기적을 믿는 종교도 없다. 예수님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기도하면 암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이 기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면 신자가 기적을 소원하면 안 되고 또 잘못된 신앙인가?
기적을 부인하는 여선생
어떤 여선생이 과학 시간에 성경의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예를 들면서 말도 안 되는 엉터리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학생들 앞에서 비난했다. 홍해가 원어로는 갈대밭으로도 해석이 되므로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라 고센 땅에 가까운 깊이 6피트(약1.8미터) 밖에 안 되는 호수를 건넌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갑자기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선생이 아니 무슨 뚱딴지냐고 되물었다. 학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6피트 밖에 안 되는 호수를 걸어서 건너갔다 쳐도 그 6 피트도 안 되는 물로서 애굽의 병거와 병사들을 다 수장시켰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기적은 오늘 날도 일어난다. 신자는 기적을 소원할 수 있으며 소원해야 한다. 오히려 기적을 소원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기적을 소원할 것인가이다. 여러분은 기적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기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선뜻 대답하기 힘들면 여러분이 어떻게 기적을 이해하고 있는지 쉽게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금 하나님이 오셔서 마치 알라딘 램프의 거인처럼 소원 두세 개를 들어준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빌 것인가? 머릿속에 무엇이 당장 떠올랐는가?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적이 아니겠는가?
아마 십중팔구는 슈퍼로또에 당첨되는 것 같은 소원이었을 것이다. 수천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루아침에 유명한 스타가 되거나, 백마 탄 왕자가 되어 예쁜 공주와 결혼하여 그 왕국을 차지하는 것 같은 소원 말이다.
이제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적의 정의가 나왔다. 엄청나게 크고 좋은 일을 내 손과 힘이 하나 미치지 않고도 공짜로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다. 기적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내 힘을 안 들인다는 것과 엄청나게 좋은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작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자마저 그런 기적만 소원하고 있다.
예를 든 이야기에서 불신자 선생과 신자 학생의 기적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어디에 있었는가? 선생은 자연계 법칙으로 따져서 바닷물이 절대 갈라질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높은 데서 물건이 떨어지면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고 낙하 가속도가 붙어 그 충격은 체중의 수십 배가 된다고 믿는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사람은 즉사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자연계의 법칙이 깨어지는 법은 결코 없기에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기적이란 엄청나게 크고 좋은 일이 공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슈퍼로토에 당첨될 확률은 사람이 평생에 벼락을 세 번 맞아 세 번 다 살아날 확률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에 별 따기이지만 누군가는 슈퍼로토에 당첨이 된다. 확률이 완전 제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계 법칙으로 일어날 확률이 완전히 제로인 일이 일어나야 기적이다. 도저히 그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자연 법칙과 연관 지어 합리적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여선생은 원인이 없으면 절대로 결과도 없다고 믿기에 기적은 없다고 큰소리 친 것이다. 전형적인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이다.
불신자들은 간혹 잘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직 정확한 원인이 과학적으로 규명이 안 되었을 뿐이라고 간주한다. 언젠가는 그 원인이 밝혀질 것인데, 비록 발생할 가능성이 극히 낮아도 여전히 자연계의 법칙에 따랐거나 그 오차 범위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사건, 사물, 인간관계를 오직 합리적, 경험적, 과학적 사고로만 분석하고 판단한다. 요컨대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믿는 것도 기적이다.
신자는 그 반대다.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 미신까지 인정하거나 초자연적인 것이면 무조건 숭배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어떤 원인이 없이도 특정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자다. 쉽게 말해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당연히 그 배경에는 절대자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절대로 그 전부이거나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고, 사실은 그 힘이 그 현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눈에 안 보이는 힘이란 바로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으로 그래서 범사를 그분과 연관시켜 영적으로 사고할 줄 안다.
말하자면 신자 학생의 대답 가운데 6피트 깊이 밖에 안 되는 물로 세계 최강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서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접시 물에 코가 빠져도 죽을 확률은 있지 않는가?
대신에 하나님 당신께서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또 그 바다를 덮어 애굽을 심판했기에 기적이다. 물의 깊이와 양과는 상관이 없다. 무에서부터 전 우주를 지으시고 섭리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기적이라는 뜻이다. 그분이 하신 일은 항상 인간적인 논리와 분석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자가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도 기적이다.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는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이 실제 일어났지 않는가?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했던 예수를 어느 순간인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 흘리며 찬양하고 있는 일이 어찌 논리와 확률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신자가 구원을 받아도 성령이 어떻게 간섭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안다. 불신자와 다른 종교의 구원관은 어떠한가? 반드시 선행을 하여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어야 천당에 간다. 아주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며, 인과응보적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기적을 믿지 않는 그들로선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어떤 일의 질과 양이 얼마나 크고 좋은가가 기적을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 일이 물질계 안에서만 일어난 것인가 영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의 차이다. 인간 쪽에서 분명한 원인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고유의 목적과 뜻이 있는가로만 나뉘어진다.
사람들은 망토를 매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슈퍼맨이 되고 싶은 욕심을 다들 갖고 있다. 그런데 떨어져도 죽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슈퍼맨이 되어 이생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명예욕은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고 또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세계관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인간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우만 받으면 된다는 뜻이다.
신자는 다르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마찬가지로 슈퍼맨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항복하는 체험을 했다. 그래서 나는 높이뛰기를 50cm 조차 제대로 못하며 너무나 불완전하고 무능하며 부끄러운 죄인임을 깨닫는다. 요컨대 슈퍼맨이 되고 싶었던 욕망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꿈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 후로는 “이제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저를 항상 붙들어 주시옵소서!”라는 간구와 믿음으로만 살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게 자기의 전존재, 삶, 인생을 완전히 내어 맡긴다. 합리적 사고로선 생각도 못하는 일을 한 것이다. 영적인 영역에까지 자기를 연결시키고 오히려 그 영역에서 능력을 공급받는다. 인간 세상에서의 우월 경쟁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 그분과 동행하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슈퍼맨이 되고 싶은 명예욕이 꿈틀거릴 때가 있다. 때로는 직접 망토를 걸치고 빌딩에서 뛰어 내리는 실수 내지는 잘못도 한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자가 손으로 자기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 주실 것을 믿는다. 어떤 때는 그런 믿음도 없이 진짜 죄의 유혹에 빠져 뛰어내리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 신자는 기적을 믿고 기적을 누릴 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기적이다. 죽어 마땅했던 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인생의 최고 기적
예수에게 시험을 걸고 있는 사단의 실체는 무엇인가? 모든 인류를 죄와 사망과 흑암의 권세로 꽁꽁 묶어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이 세상의 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을 묶고 있는가? 산발(散髮)을 하고 입에 피 묻은 칼을 물고서 겁을 주면서 하는가? 아니다.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고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믿게 해 삶의 목표를 오직 눈에 보이는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만 살도록 만들었다.
다른 말로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슈퍼맨이 되고 싶은 욕망에 잠기게 하거나 아니면 슈퍼맨이 나타나 자기를 세상에서 형통하게만 만들어주면 그가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바로 신으로 모시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사람들에게 슈퍼맨의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어린아이가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것을 보고 사실 어른들이 어처구니없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여건만 형성되면 언제든지 등에 보자기를 매고 사람들 앞에서 폼을 잡으며 뛰어내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사단은 지금 예수를 영웅적인 메시야로 만들어 사람들 앞에 세우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님더러 이스라엘 백성을 슈퍼맨 식으로 구원하라는 요구였다. 천군천사를 동원하던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던 로마의 유대 식민지 지배를 무너뜨리라는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에게마저 슈퍼맨의 환상을 심어주어 모든 사람을 갖고 놀고 있는 자기 방식 안으로 끌어넣으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구원 사역 자체를 막으려는 아주 교묘하고도 음흉한 모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전혀 달랐다. 사람들은 슈퍼맨-예수를 메시야로 모셔서 로마를 쳐부순 후에 유다 왕국을 다시 풍요롭게 만들자고 덤볐지만 그 요구를 거절했다. 사단이 사람들을 슈퍼맨의 환상으로 묶고 있으니까 그들을 구원해 내려면 당연히 그 환상을 깨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포기하고 칼을 들으라는 시험을 정말 단 칼에 거절하고 그 십자가를 이제 곧 사단의 심장에 박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를 무찌르지도, 자신이 세상에서 유명해지지도 않고 단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묶여 상처와 질곡과 죄악 속에 신음하던 죄인들을 구원해 내셨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만의 경륜이 아닌가? 하나님 당신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죽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수천 년간 모든 사람의 눈에 비늘처럼 두껍게 덮여 있던 슈퍼맨의 환상을 철저하게 깨트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과 연합하는 죄인은 당신의 보혈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질 수밖에 없다. 또 자연히 그분의 부활과도 연합하게 되며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죄인에게 참 생명을 주신 십자가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적이었다.
예수 안에 살고 있는 신자의 삶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그 전부가 기적이다. 아침저녁 세수하고 화장실가고 식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자녀와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직장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 모두가 영적인 일이다. 신자가 하는 일에 기적이 아닌 것이 없으며 신령하지 않는 것이 하나 없다. 초자연적인 큰 능력이 나타나거나 신비한 현상이 함께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기적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 엄청나게 크고 좋은 일이 공짜로 생기는 것이 결코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영적인 일은 다 기적이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모습이든 아니든 그렇다. 그분의 일에는 인간의 이성적 논리를 뛰어넘는 당신만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논리와 상충된다는 뜻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분만의 의와 선과 영광이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며, 그래서 도저히 어떤 결말이 날지 상상도 안 되는 일이 생겼다면 무슨 뜻인가? 이제 곧 그분만의 경이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의 단계라는 뜻이 아닌가? 또 그 결말이 현실적인 관점에서 형통이든 환난이든 여전히 하나님의 너무나 선하고 의로운 기적이자 신자에게도 가장 유익한 모습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심지어 신자가 환난과 죄악 중에 빠져 헤매고 있더라도 한 순간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한하신 은총과 권능으로 즉시 소생시켜 주시는 기적이 일어난다. 또 반대로 신자는 그런 사실을 확신하기에 흥분과 감격으로 기적을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
재삼 강조하지만 자기 계획과 욕심을 크게 키워서 공짜로 얻어내려는 심보로 기도하는 것은 기적도 아니고 응답도 안 된다. 오히려 그야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악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과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만의 선하신 뜻과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할 때만 그분의 기적을 맛볼 수 있다. 신자 속에 남아 있는 슈퍼맨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죽여야 기적을 제대로 기대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단의 흉계를 완전히 깨트렸다. 이 세상과 사람들을 악하고 추잡하고 치사하게 조종하고 있는 사단의 어떤 모략도 신자를 절대 넘어뜨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은혜와 권능이 되는 일은 결코 따로 없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 역사뿐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기적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아직도 마음속 슈퍼맨 환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럼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하며 진심으로 자기가 찾아 따르고자 하는 대상이 예수님인지 사단인지 다시 심각하게 따져 보는 수밖에는 없다.
(5/5/2002 나무십자가 교회 설교, 7/30/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