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2)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8-11)
주일날도 출근을 강요하는 사장
어떤 신자가 불신자가 사장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사장이 주일날에도 근무하도록 강요하면서 성경에도 안식일에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구해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지 않느냐고 핑계를 대었다. 그러자 신자 직원이 “맞습니다. 그러나 같은 소가 매안식일마다 같은 구덩이에 계속해서 빠지면 아예 구덩이를 매우든지 소를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구덩이를 매우는 것은 직장을 사직하는 것이며, 소를 팔아야 하는 것은 믿음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빗댄 것으로 계속 이렇게 주일을 못 지킬 바에야 조만간 둘 중 하나를 택하겠다는 뜻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신자된 가장 기초적인 표시다. 그 의미와 본질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일을 지키는 문제를 너무 쉽게 여기거나 아예 자유로운 분들이 있다.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미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가 40일이나 금식해 완전히 주리고 지친 예수님에게 두 번이나 시험을 걸었지만 실패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고 제의했다. 당연히 예수님은 경배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하면서 그 제의를 거절했다. 이 기사를 잘 분석해보면 하나님께 경배 드린다는 것, 쉽게 말해 주일을 지킨다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걸었다. 요한 사도가 지적한대로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차례로 건드려 예수님으로 실족 시키려는 흉계였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약1:15) 모든 욕심이 죄의 출발점이라는 것인데 마귀도 예수의 인간적 욕심을 걸고넘어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지라 만약 모든 사람들처럼 욕심에 걸려 넘어지면 죄를 범하게 된다. 말하자면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려는 메시야의 사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사단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금식 중이었던 예수님에게 아예 그 사역을 시작조차 못하게 방해를 놓은 것이다.
절대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순전한 가정으로 예수님이 만약 세 시험 중 하나에라도 넘어 갔다면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바뀔 뻔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설령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여전히 구원의 효력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사단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참소하겠는가? “뭐! 예수가 너희를 죄에서 구원했다고? 웃기는 소리하지도 말아. 옛날에 완전히 굶어 죽게 되었을 때에 나한테 사정사정 하길래 내가 간단하게 돌을 떡으로 보이게 해 주었더니 돌인 줄도 모르고 잘만 먹던데? 그런 자가 어떻게 메시야란 말이야?” 사단은 기고만장하여 인간을 더 교활하게 조종하고 지배하려는 구실로 삼을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을 이 세 종류의 죄에 전부 다 빠트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예수님에게는 죄를 이겨내느냐에 관한 시험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어떤 종류였든 한 가지라도 시험에 빠지기만 하면 사단으로선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어떤 종류의 시험도 안 통한다는 것을 알고는 세 번째는 아예 노골적으로 자기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요컨대 사단 자기한테 경배하라는 것이 사단이 처음부터 노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사단에게 경배하고 하나님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죄의 본질에 관한 사단의 시험을 이겨내었기에 죄인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숨어 있는 사단
이제 하나님에게 경배 드리는 것의 의미도 자동적으로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 사단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이다. 사단의 말을 안 듣는 것이다. 너무 간단해 싱거운 듯 여겨지는가? 아니다. 아주 간단한 예만 하나 들어보자. 여러분이 신문이나 주간지를 볼 때에 “오늘의 운세” 란을 재미있게 보는가? 아니면 아예 신경을 안 쓰는가? 그런데 혹시 신경을 안 쓰는 이유가 단지 말도 안 되고 맞을 확률이 없다는 과학적 확률의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만은 아닌가?
무당이나 점쟁이 혹은 사당에 온갖 잡신을 모셔 놓고 아침저녁으로 분향하는 사람들만이 사단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통칭 목사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일 예배에 목사는 설교를 하며 예배를 집전하고 성도는 그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께 경배 드린다고 말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무당과 점쟁이는 사단의 종이고 그들에게 재수나 운세를 물으러 가는 것은 마귀에게 경배하는 것이 된다. 신문은 무당이 아니기에 그저 재미로 본다고 변명할 수는 결코 없다. 신문이나 잡지에 난 운세는 전부 무당과 점쟁이들이 쓴 것이다. 목사의 설교를 신문에 등재했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들이 아주 쉽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사단은 언제든지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성령의 전이 되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으니 사단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사단은 절대 한 밤중에 공동묘지에서 산발(散髮)을 하고 입에 피 묻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전부 겁을 먹고 도망 가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사단이 더 잘 알고 있다. 당장에는 겁이 나서 그런 모습을 보고 복종할지 몰라도 기회만 나면 도망가려고 할 것인데 사단이 최후의 비상수단이 아닌 다음에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사단이 세 가지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 욕망을 자극하여 죄에 빠트리려 시도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단이 건 시험의 내용 자체에는 정작 더럽고 추하고 무서운 모습은 없다. 죄의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선한 것이었다.
우선 40일 간이나 금식해 주린 사람에게 떡을 주겠다는 것은 선한 일이지 않는가? 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도 하나님의 천사가 붙들어 주어 하나도 다치지 않는다면 그만한 은혜도 없다. 나아가 천하만국이 번영하고 부흥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 하라”는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외적인 모습 자체에는 죄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다.
영국의 변증신학자 C. S. Lewis는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큰 속임수는 사람으로 사단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사단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선하고 아름답고 이성적인 모습 뒤에 숨어 있다. 예수님에게도 심지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하면서 시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지 않는가? 사단은 절대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 번째 시험도 사단이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내었다고 단순히 이해하고 치워선 안 된다. 여전히 겉으로 드러난 부분 뒤에 숨겨진 부분이 있음을 구분해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사단이 시험을 건 겉모습 자체는 여전히 근사했다. 자기 본색을 숨겼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 드러나지 않았던 시험의 목적을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직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될 것 같아 본문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자.
사단은 높은 산에 올라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한 번만 순간적으로 슬쩍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 세상의 좋은 것은 몽땅 다 보여 주었을 것이다. 요즘 식으로 치면 뉴욕 맨하탄의 빌딩 숲과 LA 비버리힐즈의 고급주택가와 남태평양의 유토피아 같은 휴양지 섬들과 중동의 석유가 쏟아지는 것과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 등을 두루 구경시켜주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너무 대단하지 않니? 이것이 전부 네 것이 될 수 있어. 내 말 한마디면 모든 사람이 방금 본 것들 전부 너에게 갖다 바칠 거야. 또 너에게 완전히 복종할거야.”라고 계속해서 속삭였을 것이다. 한참 세뇌 작업을 먼저 한 후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야. 아주 쉬워. 정말 조건이라고 할 정도도 안 돼. 눈만 한 번 딱 감으면 돼. 다른 것이 아니고 주일날 교회만 안가면 돼. 대신에 운동도 하고 쉬면서 책을 봐도 돼지. 정 뭐하면 집에서 성경보고 예배를 보든지.”
사단이 인간을 걸고넘어질 때에 절대로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경배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일날 교회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오늘 하루 일하면 수입이 얼마인데, 골프장에서 신나게 친구들이랑 한 게임하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면 스트레스가 확 풀릴 텐데, 이런 생각들로 머리속에 뱅뱅 돌게 만들 뿐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신자가 돈이 없어 쩔쩔매거나 피곤하여 병이 드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교회를 잘 섬기려 해도 돈이 있고 건강해야지”라는 핑계까지 생각나게 만든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돈과 건강이 필요 없다. 교회를 걸고 넘어져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인간의 죄성을 살짝 건드리는 사단의 속임수일 뿐이다.
경배의 본질
지금 사단이 예수님에게 건 세 번째 시험은 사실 유혹이나 시험이 아니었다. 일종의 제안, 거래, 계약이었다. “잘 생각해 봐라.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자.”는 아주 정당한 상호 교환 계약이었다. 천하만국과 눈 한번 감는 것을 맞바꾸자고 하면서 마치 사단이 아주 손해 보는 듯 접근해 왔다. 말하자면 주일 예배만 빠지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다. 예배 보는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면 훨씬 유익할 것 같은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사단의 속임수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본질을 모르게 , 오해하게, 또 잊게끔 하는데 있다. 경배는 신자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먼저 뒤틀리게 만든다. 그에 따르는 결과인 예배나 그 유사한 의식도 신자로 하여금 그 본질을 잊게 만들고 형식에만 신경 쓰게 한다.
그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단은 오늘날도 신자에게 단 하나 주일 성수만 빼고는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고 유혹한다. 한 인간이 하나님과 진실된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만은 막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주일날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지킨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 전부와 하나님 한 분과 둘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세상 전부를 다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이 참 경배다. 하나님 대신에 그 잃어버릴 것에는 신자의 생명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의미는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저는 기쁩니다”라는 고백이다. 예컨대 공산당이 총부리를 갖다 대고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살려줄게 라고 했을 때에 저는 죽었으면 죽었지 예수님과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겠소 하며 총 맞아 죽는 것이 경배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는 조서를 보고도 어떻게 했는가?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에게 감사하였더라.”(단6:10) 열린 창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보고 왕에게 고발하면 당장 사자 굴에 들어갈 텐데도, “날 잡아 갈려면 가시요”라는 뜻이지 않는가? 도대체 무슨 심보며 배짱인가?
열린 창은 그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열정의 표시였다. 그에게는. 두고 온 성전과 동족들의 안위가 항상 걱정이었다. 훼파된 성벽들과 황무지로 변한 조국의 산하와 그 가운데서 힘들어 할 백성들을 향한 마음이 너무나 안타깝고 뜨거워서 창문을 열지 않고는 못 배겼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극렬한 풀무 불에 타 죽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어떤 대상에게도 경배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당장 아파트 렌트비가 내일 코앞에 닥쳤는데도 돈이 모자라기에 하루라도 더 일해 그 부족분을 보충해야 할 만큼 아주 힘들다는 것 하나님은 잘 아신다. 또 그런 이유로 주일을 빠진 것에 대해서도 그분은 이해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같은 소시민이자 믿음이 연약한 자들더러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순교하라고까지는 요구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님은 신자의 현실적 형편이 어려운 것을 단순히 이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할 길과 다음 단계의 축복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대신에 그 사람이 주일 날 나가서 렌트비 부족분의 돈을 버는 것이 자기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신다.
돈을 벌 수 있는 일과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주신 이가 바로 당신이다. 언제든 그 일을 끊을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갈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이다. 반면에 주일날 일을 하지 않아도 일순간 그 몇 배의 돈을 벌리게 해 줄 수 있거나 지금까지 마련해 놓은 렌트비 마저 몽땅 없어지게 하실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이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또 주일날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지켜주셨고 주위의 많은 도움의 손길을 붙여주신 이가 하나님이다.
이처럼 세상만사를 주관하여 현실적으로 자신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나아가 호흡하고 있는 것 자체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신자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분께 경배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주일 날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불신자들에게는 주일을 지킨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종교가 없으니 당연하다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똑똑해서 자기 힘으로 자기가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경배할 대상이라고는 자신 말고는 아예 없다. 혹시 주위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적당하게 사례만 하면 그만이다.
주일날 더 놀아도 된다.
신자가 주일을 안 지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것과 같다. 예배라는 의식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사를 주관한다는 확고한 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주일도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나아가 교회 따로 생활 따로 식으로 주일과 주중의 생활방식이 전혀 다른 교인도 사실은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꼴이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더 심한 배역일 수 있다. 세상에선 천하만국을 차지하겠다고 설치고는 교회에 와선 천하만국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고백이 과연 쉽게 나올 수 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천하만국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교회에 나온 것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일을 순전히 자기 편의에 의해서 지킨다는 의미다. 천하만국을 주어야, 물질의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어야 하나님께 경배하겠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경배가 아니라 계약이요 흥정이다. 사단과 흥정해야 할 문제를 하나님에게 나와서 거래하자고 덤비는 꼴이다.
불신자 남편을 둔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교회 성도들과 함께 계속 전도했고 그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거의 다 열렸는데도 주일에 교회 가는 것만은 완강히 거부하고 계속 골프만 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교통사고가 났는데 이상하게도 차는 완전히 다 망가졌는데 몸은 말짱하게 하나 다친 데 없었다.
하나님의 경고인가보다 싶어 덜컹 겁이 났다. 그래서 평소에 알고 지내며 존경하던 목사님을 찾아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까?”라고 상담을 했다. 한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있었던 실화다. 목사님의 대답인즉, “계속 빠지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한두 번 말을 해서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였다. 하나님이 당장에 벌을 주지 않으니까 언젠가 완전히 망할 일이 생겨야 비로소 항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되기 전에 정신 차리시지요”라는 표현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과 배역을 오랫동안 참아 주신다. 그러나 실패와 허물 뿐 아니라 시험에 빠져 죄악에 헤매는 것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계신다. 당장 아파트 렌트비가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물론 다 알고 계신다.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고 억울한 일들과 그 원인이 무엇이며 누가 잘못했는지 다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더러 십자가에 다 짊어지고 올라가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살이 터지고 모든 피를 흘리셨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사53:5) 그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시어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 우리의 한숨을 듣고 계시며 눈물을 보고 계신다.
경배란 바로 그분의 품 안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한숨을 찬양으로, 슬픔을 기쁨의 화관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는 것이다. 그분의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음을 확신하기에 다시는 천하만국의 헛된 영광을 찾으려고 그 품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신자가 주일을 안 지켜도 당장에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이면에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다시 주일을 지킬 수 있는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한량 없은 은혜가 그 하나다. 그분은 심지어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서라도 주일 예배에 끌고 오신다. 아니면 끝까지 아무 일이 안 일어나는 무관심이다. 후자의 경우는 설령 본인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떻게 자기 사랑하는 자식이 집을 나가 온갖 방탕한 짓을 다하는데도 가만 두고 보는 부모가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솔직히 물어보자.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한 풀무불에 던지어질 것을 알고도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는 절대 경배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에게만 경배했다. 말하자면 주일을 지키면 자기 생명을 잃을 것을 알고도 주일을 지켰다.
바로 그런 헌신과 열심을 갖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가? “내 생명과도 하나님은 바꿀 수 없습니다. 주일날 하나님을 만날 약속만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확신과 실천이 있는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단의 시험에 넘어간 정도가 아니라 사단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는가?
하나님은 그런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자를 지금도 찾고 계신다. 그런 자를 통해서라야만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은 그런 자를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머리터럭 하나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셨듯이 지켜 주신다. 하나님이 두려운가? 사자 굴과 풀무불이 두려운가? 이 구분을 정확히 할 수 있는 자만이 참된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자다.
(5/12/2002 주일 나무십자가 교회 설교, 8/6/2006 정리)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주일날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지킨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 전부와 하나님 한 분과 둘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세상 전부를 다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이 참 경배다. 하나님 대신에 그 잃어버릴 것에는 신자의 생명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 외식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드린 '열린창에서 기도한 다니엘'같은 모습이길 늘 소망합니다. 감히 상상조차 못할 당신의 전능함이 아닌 저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어 저를 용서하신 긍휼과 그 사랑의 은혜로 새생명 주심에 진정 당신만이 저의 주인되시며 이에 참순종으로 섬기는 것이 내 최고의 기쁨이자 나의 호흡 됨을 고백합니다. 이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지도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길 벗어날때에는 외면치 마시고 다시 또 긍휼히 여기사 회초리를 들어 바로 세워 주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