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4)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2)
당신이 베드로였다면?
예수님이 제자를 처음으로 부르는 모습이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그 과정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주목해서 보아야 할 공통점이 하나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네 명 모두 바로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따랐듯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인 생업과 가족을 즉각 포기하고 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사를 읽은 신자가 이해하는 관점이나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초점을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최우선에 두어라.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불평불만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바쳐 순종하자”는 것에 둔다. 바른 성경해석일 뿐 아니라 정확하게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이해와 말씀에 현재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전혀 반대니까 큰일이다. 가족과 생업에 너무 목매달고 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최우선은커녕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 남짓 주일 예배 때만 그렇다. 그것도 헌금 수표를 적는 손이 매번 덜덜 떨리면서 말이다.
행복이 물질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 같고 가장 가까운 가족들마저 진정 사랑하지 못하기에 자꾸 죄책감에 빠져든다. 성도들과도 서로 용서하며 사랑하기는커녕 시기와 질투가 그 사이를 가른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이제는 그만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모든 세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생업과 가족부터 우선 좀 부유하게 만들어 놓고 나면 더 잘 믿을 것 같다. 다른 한 편으로는 계속 이렇게 믿느니 제자들처럼 생업과 가족을 단숨에 버리고 예수를 정말 화끈하게 따르고 싶기도 하다.
신자들의 이런 마음 상태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또 가족과 생업에 목매다는 것을 두고 성경이 나쁘다고 정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죄책감부터 드는 신자의 근본적인 신앙 상태다. 성경을 접근하는 자세가 너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것은 당연히 가르치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가장 큰데 성경을 항상 도덕률이라는 단순한 공식에만 대입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솔직히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입장을 바꿔 놓고 한 번 생각해 보라. 예수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나 안수 집사, 장로의 믿음 수준에서도 과연 생업과 재산을 몽땅 버려두고 예수를 즉각적으로 따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아무런 주저 없이 확고하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신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 왜 거의 불가능한 일을 두고 모든 신자의 근본적 신앙 목표로 가르쳐져야만 하는가? 꼭 목표가 거창해야만 그 반쯤이라도 따를 수 있기 때문인가?
혹시라도 예수님의 제자를 오늘 날의 목사나 선교사로 생각해서 평신도의 경우와 다르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그들이 나중에는 사도가 되었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평신도에 불과했다. 아니 이 단계에선 아직 믿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즉각 그렇게 했다.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을 삶의 최우선에 두고 세상 것을 멀리하자고 성경 공부할 때는 열심히 다짐하지만 교회 문만 나서면 언제 그랬던가 싶다. 성경의 권면이 하나님의 말씀이긴커녕 종교적 구호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무나 잘 따라하지 못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를 부인하고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더더구나 아니다. 모든 신자는 실제로 예수를 삶의 최우선에 두고 이들처럼 생업과 가족을 그 뒤로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선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부터 정확히 따져 보아야 한다.
이상한 권능의 젊은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준다는 말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열정이 펄펄 끓어올랐던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소명은커녕 그 개념도 몰랐고 심지어 본인의 구원 문제도 해결 안 된 상태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고기 대신 사람을 낚게 되니까 세상적으로 뭔가 근사한 큰일을 하게 될 모양이라고 짐작했을까? 말하자면 작금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대박’을 꿈꿨을까? 혹은 어차피 이름 없는 어부로 평생을 보낼 바에야 이참에 썩어빠진 기득권층을 뒤엎고 노동자, 농민, 어부가 주인이 되는 새 세상으로 개혁해보려고 결단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했으니 이왕 종말이 될 것 밑져야 본전이라고 보험 들듯이 따라 나선 것일까?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위에 든 이유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 생각하는 시간이 걸려야 했다. 또 어떤 특정 행동을 취하려면 평소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가치관 내지 소명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위에 든 이유들이 맞으려면 그들은 출세, 개혁, 전도, 구원, 종말 등에 확고한 입장이 정리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갈릴리 어부였고 성경에 구체적 설명이 전혀 없듯이 예수님이 부르자 즉각 따랐을 뿐이다 영어로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That's it!
오래된 영화 ‘벤허’에 보면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벤허가 예루살렘의 로마 총독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살아선 돌아 올 수 없다는 노예선으로 끌려간다.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이 행렬지어 가는 중에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통과하게 되었고, 갈증 난 죄수들에게 우물물을 퍼다 나눠 마시게 했다. 벤허의 차례가 되자 출발할 때부터 상관에게서부터 그런 명령을 받은 호송대장이 그 물통을 털치고 그에게만은 아무도 물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화면에는 등만 보이는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 아무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벤허에게 물을 퍼다 주었다. 그러자 호송대장이 채찍을 들고 자기 명령을 어긴 그 사람을 치려고 가까이 오다가 자꾸 머뭇거렸다. 화면에 크게 확대 된 대장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누가 감히 내 명령을 어겨?”라고 당장 쳐 죽일 듯이 오다가 차츰 “어! 이게 아닌데?”라는 식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중에는 고개를 갸우뚱 돌리고는 그 사람과 벤허를 번갈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에게 무엇인가 도저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했고 또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완전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 속으로 “도대체 내가 이 이름도 없는 시골 청년에게 왜 이리 맥을 못 추지? 내가 나를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경험은 생전 처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 호송대장은 지금껏 보아 온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다른 무엇을 예수에게서 발견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즉각 따른 이유에 너무 심각하고 고상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나 필요가 없다. 마치 공산당 단합대회 하듯이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순종하자는 구호를 부르짖고 결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냥 이끌려 간 것이다. 마치 금속이 지남철에 딸려가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초자연적 능력 혹은 마술과 최면술 같은 비술(秘術)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또 아주 고매한 인격이나 품성을 드러내거나 대화를 통해 감화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었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예수님이 제자 삼으려는 가르침에 깨우쳐져서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한 인격체에 그냥 빨려 들어간 것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당시에 갈릴리 어부였더라도 예수님이 오셔서 부르시면 바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믿음이 좋든 약하든 상관없이, (사실 이 단계에선 누구도 믿음이 없었지만), 아무 주저 없이 예수를 그냥 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었고 또 그분이 직접 택해서 찾아 왔고 불렀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자신의 지정의로 인식할 수 있었던 사실은 아마도 “이분은 보통 랍비와는 다르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뭔가 있다”는 것이 유일했을 것이다.
누가 제자인가?
이제 자연히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 예수 믿는 참 신자인가를 구별하는 기준이 도출되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도 우주만물을 짓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고 심지어 믿기도 한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새벽 장독대에 찬물을 떠 놓고 “비나이다”라고 손을 비빌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간구하고 의지하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그런 절대자와 자기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래도 비록 칠성신, 천지신명, 부처님, 하늘님 등 그 이름은 다양해도 어떤 절대적 힘이 자기들 삶의 중요한 부분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만은 인정한다.
그렇다면 신자는 그들과 어떤 면에서 달라야 하는가? 예수님의 제자와 “비나이다” 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신 것을 믿는 것인가? 물론 맞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교리적인 믿음이지 않는가?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온 신자에게는 그 진리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기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막상 불신자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실질적인 차이는 본문에서처럼 예수 그분에게 뭔가 있다는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첫 제자들이 종교적 열심 내지 깨우침이 뛰어났거나 그분의 고매한 인격에 반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지만 뭔가 새로운 일들이 펼쳐져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뿐이다. 그렇지 않은데 생업과 가족을 하루아침에 버릴 바보는 없지 않겠는가?.
요컨대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무엇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건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진 뭔가에 자기들의 전부를 건 것이다. 이분은 내 삶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만 붙들었다. 자기 나름대로 가졌던 꿈이나 계획을 그 분을 이용해 달성하거나 키우려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 최고 어부가 되고 나중에는 지중해까지 가서 참치를 잡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꿈을 접었고 순전히 예수가 앞으로 자기에게 무엇을 시킬지 그 일에 흥미와 기대를 갖고 따라 나선 것이다.
아침마다 찬물 떠놓고 “비나이다!”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직 자기 계획과 소망을 끝까지 성취하고자 하는 열심과 치성뿐이다. 어떤 초능력이 자기 꿈과 계획에 보태어지면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다. 절대자를 믿긴 믿되 여전히 불신자일 뿐이다.
제자들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 당장에는 앞뒤 구분도 못한 채 예수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 말씀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따랐다. 단지 뭔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리라는 것만 알았다.
예수를 대면한 벤허의 호송대장의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반면에 예수를 따라나선 제자들에게는 자기들도 모르는 담대함과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물론 곧바로 방금 자기들이 저지른 일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인해 생업과 가족에 대한 염려를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 그분과 함께 하는 동안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위로와 평강이 넘쳐 생업과 가족에 대한 미련이 생길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예수를 일대일로 직접 대면한 자라면 누구라도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된다. 불신자는 바로 이런 절대자와 개인적 대면의 경험이 전혀 없다. 자기 인생을 걸고 예수를 따르는 헌신이 없었던 자이며 그럴 수도 없다. 오직 자기 꿈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기 바쁘기 때문이다.
이 땅에 버려진 존재
현대 실존 철학의 거봉인 하이데커는 모든 인간을 두고 “버려진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 땅에 언제 어떻게 왜 살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또 그래서 인생에 어떤 특별한 의미와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와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버려짐을 당한 존재, 심하게 말해 내팽겨쳐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유일하게 확실히 알고 있고 또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지 자기가 현재 실존(實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도착하는 종착점은 어디인가? 현재의 실존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풍성하며 평안하게 하느냐 만이 삶의 목표가 되는 자리다. 그것도 자기가 노력하여 자기 나름의 의미를 자기 실존에 보태는 수밖에 없다. 인생은 스스로 가치를 추구해 살던지 아니면 그냥 이 땅에 아무렇게나 존재하던지 둘 중 하나로 지내다가 존재의 종말을 맞으면 그만이다.
쉬운 말로 그저 오늘 하루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가 만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것이다. 자기만이 자기 인생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계획과 소망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내면 된다. 그래서 무당이든, 칠성신이든, 부처든, 성당이든, 심지어 교회든 내 계획만 이뤄주면 복채, 시주, 공양미, 십일조 무엇인들 바치겠다고 나선다. 한 마디로 삼시 세끼에 매달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 계획만 이루겠다고 덤비는 교인은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존재라는 인식이 없다. 기독교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심지어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교인 가운데도 불신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첫 제자들, 즉 지구상의 첫 기독교 신자들이 신자가 될 때에 보여준 가장 큰 특징이 즉각적으로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따랐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데에 초점을 두어선 안 된다. 생업과 가족이라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버릴 만큼 예수님의 가치와 의미를 인식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 대한 계획이 있어서 불렀기에 그것에 자기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분이 계획한 일이 있어 나를 불렀다면 언젠가는 그분이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확신이다. 하나님 안에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기대하고 또 그 기대대로 그 분의 인도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아니다.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의 제자인양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자, 다른 말로 그분에게서 버려진 자와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가?
근래 한국 교회에선 제자 훈련이 최고 유행이다. 이름도 다양한 코스를 수료하면 증서를 주고 또 그러려면 일주일에 며칠씩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 다 좋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자훈련을 수료했다고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풍부한 성경지식의 틀 안에서 기도, 금식, 큐티 등의 훈련을 잘 받았고 또 실제로 행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과 생업에 일주일 내내 목매다느라 교회에는 주일날 한 시간만 출석해도 된다. 단지 예수님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만 분명하게 인정해서 그것에 자기 인생 전부를 걸면 된다.
그러나 인생 전부를 건다는 것이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는 역사상 최초의 신자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 교회를 세울 사도로 부름 받았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3년간의 특수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모든 신자가 다 전문 사역자가 되라는 법은 없다.
대신에 나의 생업과 가족이 예수 믿기 전의 생업과 가족과는 전혀 다르다는 인식이 있으면 된다. 내 생업 안에도 예수의 뭔가가, 내 가족 안에도 예수의 뭔가가 있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업과 가족으로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하면 된다. 가족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다른 가족도 예수를 믿게 되고 그래서 한 마음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가정을 꾸려나가면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생업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공의와 사랑이 직장의 모든 업무 진행과 의사 소통을 지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에서 대표 기도하는 장로라도 아직은 교인일지 몰라도 예수의 제자는 아니며 심지어 신자 됨도 의심해 봐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교회의 제자 훈련 코스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택해서 찾아 왔고 불렀고 그래서 나는 두 말 안하고 그분을 따랐다는 분명한 체험만 있으면 된다. 또 그분을 따라 나섰을 때에 앞으로의 내 인생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흥분이 있으면 이미 아주 훌륭한 제자로 구태여 그런 코스를 밟지 않아도 된다. .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때가 되면 내가 아니라 그 분이 이루시고야만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추어 그분이 나의 삶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변화시켜주신다. 신자는 단지 그런 변화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여 그에 걸맞게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나는 이제까지는 몰라도 앞으로는 절대로 이 땅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나를 불렀다는 소명감이 인생과 삶의 전 분야에 여실하게 묻어져 나와야 한다. 예수님이 당신의 목적에 맞게끔 지금 이 모습의 인생으로 살게 하시기에 두려울 것이 하나 없다. 예수님을 제외한 어떤 세상 사람이나 주위 환경이 자기 인생을 절대 흔들 수 없기에 언제 어디서나 당당해야 그분의 제자다.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는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난 의라”(빌3:7-9)
그는 그전부터 문제가 많아 고치려 했거나 필요 없었던 것을 버린 것이 아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기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보려 했던 모든 소원과 열정을 그분을 아는 지식과 완전히 맞바꾸었다. 가장 좋은 것조차 그보다 더 좋은 아니 유일하게 좋은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자 가장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 힘으로 그 소원과 열정을 충족시켜보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 줄 깨달았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건대 여러분에게 가족과 생업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을 위해서 일주일 내내 목매달아서 허덕거려도 된다. 단 그것들로 내 현재의 실존을 더 풍성하고 안락하고 화려하게 치장하려 했던 자신의 계획과 열정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 대신에 바울처럼 인생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으로 바뀌었기에 가족과 생업도 그리스도를 아는 통로요 수단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분과 이 땅의 모든 것과 바꾸지 않은 자는 아무리 말씀과 기도에 능해도 소용없다. 겉으로는 기독교적 형식과 교리적 내용을 다 갖추고 있어도 여전히 “비나이다” 신앙일 수 있다. 교회는 열심히 다녀도 인생의 행방을 몰라 헤매며 허공을 치는 듯한 삶을 살 뿐이다. 대신에 자기의 생업과 가정에도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이기에 그분의 계획과 뜻대로 확 뒤집어서 변화시켜 달라고 소원하는 자에게는 절대 실패가 없다.
예수님이 주신 것에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분에게 무엇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 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에게 전혀 다른 무엇이 있다고 여겼다면 지금껏 소유하고 지키고 차지하려 했던 모든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갈 바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을 일시에 다 내려놓고 그분의 뒤를 따라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당신은 지금 진정한 예수의 제자인가? 아니면 단지 어떤 교회에 소속된 교인일 뿐인가?
(6/2/2002 나무십자가 교회 설교, 8/31/2006 정리)
대부분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신학적 교리적 피상적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므로
듣는 이의 마음의 생각과 뜻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죄악된 상태에서 몸부림칩니다만, 목사님의 도움으로 소망을 안고 갑니다!
깊으신 말씀의 참 뜻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