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말4:23-25)
신앙과 신앙생활
예수님은 제자를 부른 후에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했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본격적인 신약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태동했지만 어쨌든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생긴 셈이다.
본문은 그 교회가 한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회당에서 가르쳤다. 예배를 보고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다는 뜻이다. 또 천국 복음을 전파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전도와 선교 활동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었는데 구제하고 봉사하고 교제를 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이므로 교회와 신자들도 당연히 그 본을 따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들만 잘하고 있으면 교회와 신자로서 할 바를 다 했다고 아니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한 개인으로서나 공동체로서나 마땅히 해야 할 바의 초점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두고 믿음이 참 좋다고 표현할 때에 어떠하다는 뜻인가? 일반적으로 주일 성수를 성실히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며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제자 훈련에 앞장서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며 때때로 금식을 하고 기도원에도 자주 올라간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신앙생활을 표현한 것이지 신앙 자체를 평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니며 그 반대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반드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거나 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요컨대 신앙생활과 신앙을 혼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한국 신자들은 신앙을 성숙시키기보다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과 동료 성도들의 권면도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인 볼 일로 주일을 한 번이라도 빠지면 본인부터 금방에 지옥에 떨어질 듯이 두려워하고 주위에선 신앙이 아주 나빠진 것으로 지레짐작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주일을 마음 놓고 빠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앙생활에 뒤처진다고 신앙마저 비례해서 나빠진다는 법은 없고 도리어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신앙을 키우려고 신앙생활을 잘해야 함에도 오히려 신앙생활 잘하는 데에 모든 신앙을 동원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본문에도 동일한 원리가 나타나 있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친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역활동이었지 예수님이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사역활동을 한 결과 즉,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으니라.”가 최초의 기독교공동체가 지향한 목표였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공동체에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최종 목표도 예수를 잘 좇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친 것은 당신을 좇게 하는 수단이요 통로였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예수를 잘 좇지 않으면 신앙은 안 좋은 것이다.
예수를 좇는 것은?
그럼 예수를 잘 좇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살려야 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주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갖다 대며,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인가?
그러나 솔직히 한국의 통칭 천만 기독교인 중에 그렇게 사는 신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며칠 전 한국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언뜻 보았다. 보험사기를 치는 부자(父子) 사기꾼이 아주 근사한 집에 사는 고객을 찾아가서 현관 벨을 누르면서 하는 말이 “예수 잘 믿어 복 받고 천국 갑시다.”였다. 현재 예수 믿는 신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말 많은 사기꾼 정도밖에 안 된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신자가 예수님이 가르친 그대로 살려면 진짜로 한 눈이 실족하면 그 눈을 빼버리며 살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런 각오와 그에 상응하는 실천도 없이 예수를 믿어 교회에서 시키는 신앙생활만 잘하면 마치 자기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고급한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예수를 잘 좇는다는 것은 간단하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다. 또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본문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능력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온갖 병자들이 예수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별 것 아닌 것 같은가?
사람들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온 수리아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예수 앞으로 나왔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에서 신의주까지 전국 방방곡곡 뿐 아니라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불원천리 멀다 않고 온 것이다. 정말 예수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가까이 있으면 밑져야 본전이니까 시험 삼아서라도 올 수 있다. 그러나 온 수리아와 요단강 건너편에선 헛걸음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쉽게 오지 못한다.
또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들도 찾아 왔다. 요즘 식으로 하면 감기 몸살에 걸렸거나 단지 체질이 약한 자를 의미한다. 고질병, 불치병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병약한 자도 다 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 그 먼 거리에서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사실보다는 그렇게 찾아 올 수 있었던 믿음이 우선이고 또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먼 거리를 여행할 힘과 돈만 키우려 든다.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어떤 약한 것이라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먼저 갖는 것이 바로 예수를 좇는 첫 걸음이자 전부다.
간혹 당시에는 예수님에게 직접 치유를 받았기 때문에 무슨 병이든 나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반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입술로 기도할 때마다 어떻게 고백하는가? “예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럼 2천 년 전과 비교해 지금의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로 인정한 것 아닌가? 아니면 신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는 각기 별개라는 뜻인가? 그런 사람은 자기가 믿지도 않는 사실을 기도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능력이 안 나타난 것뿐이다.
또 그 때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 했고 지금은 영으로 함께 했다고 그 능력이 떨어질 리도 없다. 당시에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은 전혀 안 했어도 신앙은 아주 좋았고 지금 신자들은 신앙생활은 아주 열심히 해도 신앙이 안 좋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는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온전히 믿고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들고 나와 예수님 앞에 그냥 그대로 내어드렸다. 그분에게 100%의 주도권을 온전히 일임하였다. 그들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어떤 인간적 세상적 불순물이 섞여있지 않았다. “그분께 가면 어떤 약한 것도 고치고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 단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예수님도 당신 앞에 나온 자들을 어떠한 편견과 선입관이나 편파적 판단 없이 대하셨다. 말하자면 온전하고 순수한 믿음을 드렸더니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잘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예수님의 예수님다우심을 단 한 치의 가감(加減)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살아서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주님이 당신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까닭은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분명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떤 형편과 위치에 처해 있든지 그 계획을 수행해가는 필연적 과정 중의 하나임을 알기에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나는 비록 연약하고 무지하고 불완전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의 기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은혜로 나를 지키고 인도하셔서 그 계획된 목적지에 나를 기필코 세우시고야 만다.
주님은 내 혀의 말과 마음의 생각과 영혼의 흐름까지 다 알고 계신다. 심령의 아주 깊숙한 부분에 감쳐진 모든 더럽고 추한 것과 눌리고 억매인 것까지 아시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당신만의 사랑으로 어루만져 치유해 주신다. 혹시라도 내가 시험과 죄악에 빠져 그분의 손을 놓칠지라도 그분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현실의 뒤에서 당신의 권능과 은총은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신다.
나의 성경 실력, 예배 참석률, 헌금 액수, 봉사 횟수, 심지어 금식과 기도한 횟수와 시간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분은 나를 신실하게 사랑하고 계신다. 제자훈련 수료증, 새벽기도 개근상, 전도 폭발 증서, 심지어 전도왕 타이틀 등을 가슴에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고 갑자기 내 신앙과 영성이 늘어나고 예수를 잘 좇아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그런 훈련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도 의문이다. 또 그런 훈련에 참석률이 저조하면 아주 열등한 신자인 양 몰아가는 분위기가 오히려 참 신앙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란 자기의 성경적 지식과 기도와 금식과 구제와 십일조 등에서 바리새인들의 수준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진실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의 내면에 있는 지성, 인간성, 도덕성, 종교성, 영성 등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그 약한 부분부터 먼저 하나님께 더 의지하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두 손 들고 먼저 나올수록 오히려 영성이 높은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절대 숨기지 않고 완전히 발가벗겨서 주님의 치유, 용서, 회복, 소생, 위로, 생기가 그 위에 임하도록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세상에서 아무리 실패하고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 앞에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다면 설령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어도 신앙은 좋은 것이다.
한 마디로 신앙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할 줄 아는 실력이다. 무슨 일이든 꼭 예배드리고 기도하여 시작하라는 뜻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곳에 주님이 임재해 있다는 것을 확신한 바탕 위에서 그 일을 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큰 능력으로 나를 보호하고 인도해 주고 있다는 것을 믿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주님은 신자에 대한 영원한 계획을 갖고 신자와 동행하며 신자 또한 범사에 그 사실을 확신하면서 주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당연히 주님은 내가 하는 일을 다 알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신자가 한시라도 잊지 않아야 한다.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신자가 술 담배를 할 때도 예수님이 그곳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자가 되려면,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술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만 가르친다. 그럼 교회가 금주금연학교이고 예수님은 그 교장인가? 한국 신자들은 라면 한 그릇을 놓고도 4-5분씩 넘게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기도를 잘 한다. 술 담배도 몸에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기도를 한다는 뜻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에게 그 일에도 신자를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신자의 뜻보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를 소원한다는 의미다. 그럼 신자가 술 담배를 할 때도 그런 소원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신자가 술 담배를 하니까 주님마저 쑥스러워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는가? 그럼 진짜로 사단에게 잡혀서 술에 대취해 맨홀에라도 빠지게 되면 주님은 직무를 유기하신 것 아닌가?
“신자 체면에 예수님이 계신데 감히 어떻게 술 담배를 하지? 기도까지 해놓고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더 못하겠다. 술 담배가 기독교에서 금하는 죄인 줄 아는데 어떻게 그것을 앞에 두고 기도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핑계가 앞선다면 너무나 가난하고 치사한 신앙이다. 왜 주님과 함께 떳떳하게 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덤비는가? 차라리 기도하고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지 못할 바엔 아예 안하는 것이 낫다.
참 신자라면 술 담배를 두고도 라면 먹을 때보다 몇 곱절로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술 담배가 도덕적 종교적 범죄라서 당장 끊으라고 응답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당신께서 함께 하는데 내가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깨우침을 주신다. 모든 약한 것을 치유하고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자꾸 다른 것에 의존하려는 것이 얼마나 잘못인줄 알게 해준다.
술 담배란 잠시 잠깐 그 괴로움을 망각하게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또 그런 순간적인 망각이나 쾌락으로는 절대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한다. 오히려 정상적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현실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지각하지 못함으로써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렇다고 술 담배를 건강상, 도덕적, 종교적 이유로 끊으려 들면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이다. 신자는 술 담배가 주는 순간적 쾌락과 망각이 주는 유익보다는 그것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는 폐해가 얼마나 더 큰지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얄팍하고도 헛된 유익은 포기하더라도 더 큰 폐해를 없애야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생긴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끊게 해 주신다. 갑자기 담배 맛이 씁쓸해지고 술을 마시기만 하면 토하게 해서라도 끊어 주신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새 생명으로 덧입혀 주셔서 그 인생과 존재와 삶 전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신자는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는 영원한 존재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그 일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술 담배는 그 일에 전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참된 신앙이 술 담배를 멀리하게 해 주는 것이지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서 술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 세대에 감사하라.
지난주에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오면서 시간이 조금 남아 해변 국도 1번을 한 시간 남짓 드라이버 했다. 들꽃이 만발한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화창한 봄 날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한 것보다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더 감사했다. 도로가 뚫리지 않고 자동차가 발달되지 않았더라면 너무나 아름다운 그 경치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현 세대는 많은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에 정말 감사해야 한다. 그런 혜택 중의 하나는 수명이 아주 늘어난 것이다. 오래 살아 즐길 것이 많아서 좋다는 뜻이 아니다. 이전에는 수명이 짧아 한 번 큰일에 실패하면 쉽게 좌절하고 또 그것으로 인생이 끝이어야 했다. 어떤 일을 제대로 시도도 못해본 채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30-40년이나 더 살 수 있어 한 번의 실패뿐 아니라 몇 번의 실패도 다시 회복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저 같은 경우 참으로 많은 것들에 실패했다. 인생의 중요한 부분마다 한 번씩 실패의 쓴 잔을 마셨다. 그래서 정말 괴로웠던 때는 술에 취해 자살을 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담력이 약해 자살 하지 못한 것이 지금 와선 진짜 감사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가 아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그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다면 예수를 믿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아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의 인생 실패도 다 회복시켜줄 수 있다. 매일매순간의 모든 일에도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그분의 사랑과 은총이 없으면 우리는 도저히 살 수조차 없다. 한 순간의 성공도 없고 모든 것이 실패뿐일 것이다. 역으로 말해 어떤 실패도 그분께로 나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으로 변한다.
아브라함을 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가? 그는 신앙생활을 잘한 적이 결코 없지 않는가? 그 때는 성경도, 제자훈련도, 찬양예배도 없었다. 이슬람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자는 선교 구호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니 아직 알라 신이 생기기도 전이다. (알라 신이 아브라함보다 늦게 생겼다니 분명 참 신은 아닌가 보다.)
그가 신앙생활을 한 것은 오직 하나 기도뿐이었다. 가끔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기는 했어도 아직 제사장이나 종교적 예배 양식도 없었다. 단지 예물을 바치고 기도한 것이 예배의 전부였다. 다른 말로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만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에 그분과 개인적 인격적 교제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남들 같으면 이미 인생을 정리하고 쉬어야 할 나이에 그렇게 했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를 벌써 다 써버린 후에 새로운 출발을 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어준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전의 인생은 완전 실패였다는 뜻이다. 남들은 다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라고 탓해도 오직 믿음으로 자기 인생의 안전을 보장하는 경제적, 사회적, 법적 보호망인 본토, 친척, 아비집을 버리고 떠났다. 그것도 신앙생활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결과로 말이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보시고 죽은 자와 방불했던 아브라함을 다시 살려서 약속의 씨앗 외아들 이삭을 백세에 주셨다. 그를 살리고 구원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해줄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의 이전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 완전한 성공으로 바뀌어졌다.
왜 믿음의 영웅인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전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도저히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이 미쳤다고 조롱할 정도의 어리석은 짓을 하나님이 시켰다는 이유만으로 감행했던 자들이다. 남에게 큰 피해 끼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고 주위사람들이 권면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꿈에 자기 인생을 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뤄주실 분에게 걸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노아, 아벨, 아브라함, 사라, 이삭, 요셉, 모세, 기생 라합 등 그렇지 않았던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니까 그분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그분의 때와 방법에 따라 반드시 그분이 이루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자기들로선 상상도 못할 빛과 거룩 가운데로 인도하여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리라는 신앙만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자기의 전부를 거는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를 잘 좇는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좋다는 유일한 표식이자 판단 근거는 딱 하나 있다. 신앙생활의 성적표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낙망, 좌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가이다. 단순히 의지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어떤 실패와 환난에서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는 소망을 붙드는 것이다. 신자가 자기 실력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그분이 이 자리에까지 나를 이끌고 오셨다. 그것도 나에게만 해당되는 그분의 계획을 가지고 말이다. 앞으로도 그 계획 가운데로 나를 이끌고 가실 것이므로 내 쪽에서도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신앙은 눈앞에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을 보기 때문에 어떤 실패에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실망하고 힘이 빠질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주님이 나보다 더 괴롭고 안타까워하면서 나를 치유하고 소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헬렌켈러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녀는 “두 눈이 멀쩡하고 귀도 잘 들리지만 소망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망이란 반드시 위험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아니 위험 속에서만 소망이 생긴다. 아무런 위험이 없으면 그 상태로 좋은데 또 다른 소망을 가질 이유나 필요가 없다. 소망이 없이 그저 무사안일한 인생만큼 불행한 인생이 없다. 다른 말로 위험이 없는 인생만큼 소망이 없는 인생이 없다는 뜻이다. 위험을 인내할 수 있는 자만이 소망이 얼마나 귀한 줄 안다. 또 소망이 귀하고 주님을 믿는 자 만이 그 위험을 끝까지 견뎌내어 감사할 수 있다. 위험은 소망을 낳고 그 소망의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망은 불신자도 가진다. 그들도 위험을 감수하고 심지어 위험에 도전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자기의 소망일뿐이고 또 그것을 이루는 힘도 자기다. 신자는 거기에 딱 하나가 더 보태져야 한다. 신앙인가? 아니다. 신앙의 대상이자 근원이신 우리 주님이다. 신자의 소망은 오직 주님일 뿐이라는 뜻이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좋은 자만이 주님을 소망하고 동시에 주님이 주신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신앙생활은 잘하고 있는데 신앙이 아직 약한 것 같은가? 아니면 신앙은 좋은데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는가? 둘 다 잘못이다. 그중에서도 전자가 더 문제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종교적 실력을 늘리려하기 보다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진심으로 자기 전부를 걸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그 후에 자기와 그 분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어떠해야 할지 정말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 술 담배를 하면서도 그 관계를 하나님 그분의 뜻 안에서 올바르게 세우기를 간절히 기도해보라. 그럼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과연 잘하는 것인지 깨닫게 해 주실 것이며 어떤 실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도 완전한 성공으로 바꿔 주실 것이다. 당신도 신앙생활보다 신앙을 바로 세우면 얼마든지 믿음의 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6/16/2006 나무십자가교회 주일설교 9/8/2006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