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천벌을 받을 아버지
한국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내가 남편인 자기는 무시하고 딸만 사랑하자 혹시나 다른 남자의 딸인가 의심하여 질투심에 사로잡혀 친딸을 성폭행하고 임신되자 낙태까지 시킨 아버지가 체포되었습니다. 또 지난주에는 아내가 가출하자 복수심에서 친딸을 성폭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인간이 아니라 정말 짐승보다 못한 놈이자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입니다. 재판을 할 것도 없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공개로 즉석 처형해 마땅합니다.
그럼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그런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론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비록 세상 법정에선 사형을 당해도 하나님의 법정에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 사랑으로 용서하지 못할 죄라곤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죄를 빼고는 말입니다.
그 한 가지 죄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훼방한 죄입니다. 사단의 하수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죄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본인이 끝까지 완악하게 예수를 믿지 않는 죄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믿지 않기에 괘씸하다고 벌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죄와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선 죄에 빠진 인간이 예수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죽은 후에도 자연히 그 끊어진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딸을 성폭행한 짐승 같은 아비라도 복음 앞에 가슴을 찢으며 회개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총살을 당해도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낙원에서 깨어납니다. 그에 비해 그 딸의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물론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면 동일하게 얼마든지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흉악한 죄인 아버지보다 피해만 당한 딸이 복음을 거부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가장 괴로워 못 견디는 것은 죄책감보다는 수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부부싸움하거나 거짓말 한 후에 죄책감으로 인해 가슴을 치며 비탄에 빠진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솔직히 거의 없지 않습니까? 남을 속여 돈을 벌거나 마누라 몰래 바람을 피우면 오히려 통쾌한 승리감마저 느끼지 않습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죄로 타락한 인간의 실체가 사실은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반면에 수치심은 어떻습니까? 이민 사회에서 한국에선 여러모로 나보다 형편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어떻게 돈을 벌고 교회에선 중직을 차지한 자에게서 자신을 무시하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밤새도록 꽁꽁 앓으며 완전히 미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복수하여야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까 치를 떨면서 궁리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를 낳아주고 사랑으로 길러주었기에 존경하던 아버지로부터 아예 상상도 못할 일을 겪은 그 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인지라 반항도 제대로 못하고 꼼짝 없이 당한 후에도 수시로 그러니 얼마나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겠습니까? 그 영혼에 박힌 대못은 영영 뺄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몸과 정신은 완전히 더럽혀져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전부를 집어삼킨 상처를 회복할 재간이 도무지 없습니다. 완전히 미치지 않는 것만도 불행 중 다행일 것입니다.
그 사건 하나만 두고 볼 때에 딸이 잘못한 것 하나 없습니다. 완전히 100% 피해자입니다.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훼방한 죄 말고는 용서 못할 죄라고는 없는 십자가 복음도 그녀에겐 너무나 멀어 보이고, 아니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여겨집니다.
물론 세상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 앞에 나오면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겨 주고 사랑으로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 믿기로 결심하여 교회 생활 열심히 하니까 영생을 얻은 양 생각해선 십자가 복음에 한창 부족한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누구든 구원을 준다는 것 이전에 더 근본적인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죽으실 만큼 철두철미하게 죄악을 저주하고 증오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하찮은 죄라도 절대 없는 양 취급하지 않습니다. 한 죄인이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분과 동일한 크기로 죄악을 저주해야 합니다.
소 도둑질 한 것뿐만 아니라 바늘 도둑 한 것까지 생각나는 대로 가슴을 찢으며 실토해야 합니다. 절대적 선이신 그분 앞에 자신의 진짜 실체를 완전히 발가벗겨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자기가 추하고 더러운 존재인지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마땅하게 내릴 유일한 벌이 죽음뿐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정작 십자가에 죽었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데 왜 예수님이 죽으셨나이까?”라고 통분하며 외쳐야 합니다. 자신이 부셔지고 부셔져서 더 내려갈 곳이 없어지고 성령의 역사로 썩어져갈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십자가 처형의 참 모습
그런데 십자가 구원의 의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담이 처음 범죄한 후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또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을 가렸습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죄가 개입되기 전에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감추고 속일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부부끼리 각자 딴 주머니를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기변명과 핑계 대기에 바빴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와 부자간에도 참 사랑을 하지 못하고 감출 것이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이련만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다가 돌아서면 이상하게 그런 자기가 못나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자신이 오히려 가장 싫고 미워집니다. 남들 앞에선 아무리 좋은 옷, 고급차, 교양, 지성, 가진 돈으로 치장하려 해보아도 자기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열등감과 수치심을 지울 길이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잘 알다시피 인간이 고안해낸 형벌 중에 고통이 최고로 심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산 채로 톱에 켜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금방 혼절(昏絶)해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극심한 고통도 잠깐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그런 고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쇠 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을 물에 적셔 맨 살에 내려칩니다. 멜 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핏줄이 터져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됩니다. 죄수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고 보는 사람으로는 로마제국에 항거할 꿈도 못 꾸게 만들 목적입니다.
또 죄수더러 자기가 달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게 합니다. 스스로 율법에서 규정한 저주스런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자괴감을 느끼도록 하고 예루살렘 전 시민들의 조롱거리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손바닥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박고 무릎을 꺾어버립니다. 그러면 피와 수분이 서서히 빠져 나가고 머리에 산소가 모자라기 시작해 머리가 빠개지는 것같이 아픕니다. 그러나 바로 죽지 않고 그런 상태로 며칠 갑니다. 달려 있는 동안에 벌레들이 기어 올라와 피부 속을 파고 들어가고 새는 눈알을 파먹습니다.
죄송스런 비유지만 오징어가 덕장에서 꼬치에 꽂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서서히 몸이 말라 비틀어져 죽는 동안에 파리 떼가 잔뜩 들어붙는 것과 방불합니다. 새가 완전히 시체를 다 쪼아 먹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아 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당국은 로마시민에게는 십자가 형을 부과하지 않고 노예와 이방인에게만 집행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통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극심한 고통이 따로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졌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적 의상은 겉옷과 속옷과 허리띠와 샌들 네 개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 편제상 십자가를 숙직하던 분대는 네 명이 한 조였습니다. 네 명이 제비를 뽑아 네 가지 옷 중에 어느 것을 차지할지 정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 됩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흔히 보아온 예수님의 초상이나 조각에는 이마에만 작은 핏자국이 흐르고 속옷을 입은 깨끗한 모습이지만 그 실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한 것뿐입니다.
바로 그 상황을 기록한 성경 말씀은 너무나 정미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4,25) 군인들은 각기 나눈 옷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사이에 바로 곁에 여자들이 예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범벅이 되어서 남자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 채 엄마와 이모뿐 아니라 제자의 아내와 흠모하여 따르는 젊은 여자 앞에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시 죄송한 말이지만 금방 죽지 않으니까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채로 대소변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부끄럽고 처참한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달려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도저히 낯을 들 수조차 없어서 혀를 깨물고 자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사실은 누가 올라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 자신 아닙니까? 그럼에도 아무 죄 없으신 그분을 온갖 조롱과 멸시를 퍼부으며 달아맨 자가 바로 인간들입니다. 그럼 십자가에 수치스런 모습으로 달린 주님과 밑에서 조롱하는 우리 중에 누가 더 진짜 부끄러운 자입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들이 자기의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 않습니까?
죽음 앞에 있는 즐거움
오늘의 본문이 어떻게 말합니까?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죄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고 인간을 위해 오직 좋은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만도 모자라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런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처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즐거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죽더라도 사흘 후에 부활하시어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 묶여서 두렵고 부끄러워하는 인간을 구원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은 전혀 개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뻐하며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수치를 주님이 대신 져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뉘 죄로 인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아비의 죄도 아니고 본인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드러낼 영광의 빛을 이 소경에게도 비춰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육신적 소경의 눈만 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열어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그 수치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했습니다. 이제 꼬박 이틀간 성부 하나님과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을 그 고통이 너무나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수치심보다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로부터 버림 받는 것입니다. 자연 재앙 중에 가장 두려운 것으로 흔히 지진을 꼽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발을 딛고 서있는 땅바닥이 흔들리니까 마치 존재의 근원이 무너지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친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자기의 밑뿌리가 잘려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안겨 줍니다. 세상에서 아무 이해타산 없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해주던 사람이 없어짐으로써 혼자만 내버려졌다는 소외감에 끝없이 사로잡히는데 수치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큰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약해지고 노력하다 보면 끝내는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고통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또 따로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의식을 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분을 떠나선 영혼 내면의 깊은 곳이 항상 갈급하고 허망해집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부모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이, 감정적으로는 몰라도, 인생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더 큽니다. 인생과 삶의 기본 방향을 결정하기에 모든 일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이 고통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의 이행조차 불가능합니다.
친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딸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녀는 부모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 영혼은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해졌고 도무지 회복할 방안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 수치심을 부모, 친구, 형제, 자신을 포함 어느 누구도 가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최고의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은 그 부끄러움을 씻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치심 극복만으로 복음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선 사람들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당할 수밖에 없고 또 당할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마저 버림 받은 존재라는 생각은 도무지 지울 길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녀가 성경과 예수님을 아예 몰라도 남몰래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항상 부르짖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면서 봉사도 부모의 죄나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 사이에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 수치와 고통을 도저히 씻어낼 길이 없어서 그의 심령 또한 날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부르짖음은 우리 모두가 생래적으로 원초적으로 갖고 있던 궁극적 갈증과 공허를 당신의 죽음으로 대신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이자 보증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참 인간다워지는 유일한 길
세상에선 친딸을 성폭행한 아비는 감옥에 갑니다. 딸은 십중팔구 정신병원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감옥이 죄책감을 씻어줄 수 없고 병원이 수치심을 없애줄 수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만들어 부끄러운 곳을 감춘 무화가 나뭇잎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가죽을 벗겨 옷을 입혀 주지 않고는 그 두려움과 수치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입니다. 아담이 나뭇잎으로 가려보려 했던 그 부끄러운 모습을 예수님은 오히려 만천하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인간의 공적과 선행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음을 증명해 보였습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 버림 받은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나면서 소경이든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딸이든 그분의 사랑에서 전혀 제한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이 최고의 고통을 겪으며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짐승만도 못한 아비도 진정으로 십자가 앞에 항복하면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치스런 모습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간이 가장 괴로워하는 수치심도 주님 앞에 들고나가면 다 없애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비에게 성폭행당한 딸의 수치도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닦아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심으로 인간의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갈증과 공허함을 없애주신 것입니다. 부모나 자신의 죄와도 아무 상관없는 큰 불행을 당해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지 않나 하는 의심과 불안으로부터 주님은 건져 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만난 사람들이 주로 누구였습니까? 무식한 어부, 세리, 창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도 젊은 남자와 사는 한 많은 여인, 12년간 혈루병을 앓던 여인, 중풍병자, 나면서 소경, 앉은뱅이, 나병환자,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시체였지 않습니까?
하나 같이 사람들로 손가락질을 받던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고통을 지울 길이 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운명이 된 것은 자기의 잘못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피조 세계를 죄악으로 뒤엎은 후 그 흑암의 권세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줄 이미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단을 그대로 놓아두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그런 상태로 방치해 두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당신께서 이 부패한 세상을 더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십자가에서 직접 당하셨던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친부에게 딸이 성폭행당하는 일들이 생기고, 나면서 소경 된 자도 계속 태어날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피해자일수록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들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로 풍성하게 인도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죄책감과 수치감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과 죄악과 시험 속에 있더라도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예수님이 다 씻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믿음의 주일 뿐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을 참 인간답게 바꿔주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만이 인간이 참 행복을 느끼고 의미와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고 상상도 못한 불행을 당해 때때로 낙심되십니까? 짜증과 의심과 불안과 고난이 겹칩니까? 까닭모를 두려움과 밤새도록 수치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수치의 뜻을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보혈의 공로만 끝까지 견고히 붙들고 절대 놓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또 우리 입에서 나도 모르게 절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8/28/2007
이 중에서 적당히 빼고 쉬운 말로 바꿔서 하기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아직 많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