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7)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생전 처음 겪는 신비한 현상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을 입자 천하각국으로부터 온 수많은 경건한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큰일을 담대히 증거 하기 시작했다. 그가 행한 두 번째 설교로서 14절에서 40절까지 이어진다. 그 내용을 대략(大略)하면 예수님은 구약에서 오신다고 예언된 메시아로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그의 이름에 힘입어 죄를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행한 모든 설교의 공통적인 주제이자 초대 교회 신자들이 믿음의 근본으로 붙들었던 복음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아다”라는 진리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가장 먼저 세상에 전해야 하고 신자 또한 평생을 두고 자신의 전부를 거기에 걸어야 한다.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의 서론 중의 서론 부분인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전하고 있다. 성전에 모인 모든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내용보다는, 먼저 그들이 생전에 배우지도 않은 이방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현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술에 취했다고 조롱할 정도로 인간 이성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도 설명도 안 되었다. 베드로는 바로 그 부분부터 명확히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베드로 본인도 생전 처음 겪는 현상이었기에 평소의 그라면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성경적 의미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도 진리의 영인 성령의 권능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자신이 전혀 계획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런 성경적 해석을 할 수 있었다면 그의 이성은 여전히 아주 정상적, 아니 더 비상하게 작동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가 설교하고 있는 내용을 이성적으로 온전한 진리로 납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 체험한 절대적 진리로 믿게 된 것이다. 또 그래서 더더욱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혹 사단의 종들도 방언과 비슷한 현상을 일으킨다. 귀신이 그들 몸에 강림하면 나이든 남자 박수가 어린 여자 아이의 소리로 또 그 반대로 젊은 여자 무당이 굵은 남자 목소리로 점괘를 풀어 준다. 악령이 그들의 육신과 생각을 완전히 주장하여 자기들 의지와 상관없이 대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신이 내렸을 때만 점치는 것이 가능하지 강신의 순간이 끝나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바꿔 말해 악령은 인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마음대로 조종한다. 자기 노예로 삼아 인간의 지정의마저 제 멋대로 농락한다. 당연히 귀신 들린 자는 비정상이 아니며 기괴하고도 미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성령은 다르다. 인간의 지정의를 그대로 둔 채 아니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본래의 모습에 더 가깝게 회복시켜준다. 예컨대 지금의 베드로처럼 복음의 진리가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서 언제 어디서든 기쁨으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성령의 시대
저자 누가는 이 일이 일어난 시간이 삼시라고 했다. 이 서신의 수신자가 로마의 데오빌로 각하(행1:1)였기 때문에 해 질 때부터 시작해 해 뜰 때까지를 하루로 보는 유대식이 아닌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를 12로 나누는 로마식 계산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그럼 오전 9시가 된다. 따라서 누가는 아침 9시부터 사도들이 술에 취했을 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특별히 오순절 같은 절기에는 사시 즉 오전 10시까지는 금식하는 것이 관례로 밥도 안 먹는데 술을 마신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아침 9시에 일어났으므로 사도들이 몇 시간이나 영적 훈련을 했거나 이 땅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재료나 수단에 의지해 환각상태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침부터 120명이 동시에 방언을 한 것은 술이나 영적환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사도들이 비몽사몽간에 방언을 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들은 대로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방언은 당사자인 사도들이나 청중인 유대인들로선 생전 처음 보는 초자연적 현상이었다. 즉 제 삼의 힘이 분명히 작용했으되 그 힘이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의 논리는 이런 현상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이는 찬찬히 따져보면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무식하고도 성급하며 비겁했던 그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변화였다. 성령이 진리를 깨우치는 지혜를 주었을 뿐 아니라 전할 말도 그의 입술에 심어준 것이다. 방언은 성령 강림이 단순히 강림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계속 내주하여 큰 권능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여실한 예였다.
.
베드로가 깨우친 방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우선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28‐32).” 쉽게 말해 주님의 심판과 구원이 지금 바로 여러분이 보다시피 이 땅에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일개 어부에 불과한 그가 감히 이런 심판의 선언을 할 수 있다니 너무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잘 따져보면 그리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요엘도 이미 정상적 인간으로선 감히 말할 수 없는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지 않은가? 요엘이나 베드로는 둘 다 평범한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결코 두려운 일이 될 수 없다. 성령의 권능을 입어 선지자로 부름 받은 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할 일이자 삶 그 자체다.
베드로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성령이 내릴 필요도 선지자적 소명을 주실 이유도 없었다. 반면에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 요엘 이상의 권능을 그에게 입히셨던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요엘과 같은 선지자들에게만 성령이 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120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성령이 임했고 똑 같이 방언을 했다. 요엘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제는 당신의 신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신 것이다. 성별과 연령과 신분의 차이 없이 남종이나 여종에게 또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에게 성령이 강림했다.
특수한 목적으로 특수한 인물과 장소와 시간에만 내렸던 성령이 오순절 이후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모두에게 임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이 땅에서의 구속 사역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특정한 선지자가 특별한 계시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사도들이 자기 스승이 다 이루신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 빼고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 받아 방언을 하게 된 모든 자가 설교한 것은 아니다. 열한사도가 다 같이 함께 서있는 가운데 베드로만 대표로 설교했다. 다른 사도들도 처음에는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 베드로만 거기 모인 모든 유대인들을 상대로 아람어(고대 유대어)로 설교했다. 다른 제자들은 틀림없이 뒤에 서서 그의 설교가 청중의 영혼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가 “열한 제자”라고 구태여 숫자를 명기한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유다를 대신할 자로 제비로 뽑은 맛디아도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또 그 선출이 성령 강림 전에 반드시 있었어야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면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가르치고 인도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제비를 뽑을 필요는 없게 된다.
만약 성령 강림이 있고 난 뒤에 유다의 자리를 보충했다고 한다면 지금 베드로의 뒤에는 11명이 아니라 10명이 서있게 되었을 것이다. 무슨 뜻이 되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결원(缺員) 된 모습으로 유대인들에게 서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대신에 열두 제자들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목소리로 한 주님을 증거 하게 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또 세상 모든 족속들 앞에서 완전수 12가 상징하는 대로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왕국이 세워졌음을 선포케 했던 것이다.
지금 베드로가 유대 청중들에게 맨 먼저 강조하고 싶었던 초점은 방언이라는 신비한 현상에 주목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대할 때 중요시 하는 것은 절대로 겉이 아니라 속이다. 신자가 외모를 중시하면 정성과 치성과 열심을 바치려 들게 되고 자연히 과장과 가식과 위선으로 흐르게 된다. 반면에 신자가 자신의 속에다 초점을 맞추면 목적과 동기와 마음 자체를 바칠 수밖에 없으며 진실과 정직과 순수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노스트라다무스와 요엘
오순절 이후는 만민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성령의 시대다. 말하자면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노력과 공적이 아닌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만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령의 특별한 외적 은사를 받은 일부 신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예언을 하지 않고 꿈을 꾸지 않으며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럼 요엘 선지자가 잘못 예언했고 베드로의 설교도 틀렸다는 뜻인가? 마지막 날에는 그렇게 된다고 했는데 그 마지막 날이 베드로의 해석과 달리 아직 오지 않은 먼 장래의 일인가? 여전히 구약시대와 같이 특별한 사람에게 특수한 상황에서만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약속과 예언은 영원토록 진리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직접 예언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일구이언(一口二言)할 리는 없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人者)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많은 신자들이 예언을 점치듯 앞일을 알아맞히는 것으로만 단순히 이해한다. 꿈과 이상도 어떤 일을 사전에 미리 현몽해주거나 환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세 가지 모두 미래의 일을 초자연적으로 미리 알려주는 현상으로서 그 매개체만 다른 셈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신이 내린다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출애굽 한 백성들 전부를 모세 혼자서 상대해 판결 내려주는 일이 너무 과중해 칠십 인의 장로를 세우기로 했다. 장로로 녹명(錄名) 된 자들 외에 회의에 참석도 안하고 진중에 남아 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성령이 내려 예언을 했다. 부관 여호수아가 그들로 예언을 못하게 하라고 요구하자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여호수아는 장로를 세우는 목적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조직을 정비하여 지도자 모세의 명령이 잘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라고만 이해했다. 반면에 모세가 원하는 바는 녹명된 장로들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다 같이 내려 모두 선지자가 되는 것이었다.
모세는 지금 예언하는 것과 선지자가 되는 것을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어지는 민수기12:6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에게 말하기도 하거니와.” 두 구절을 연결하면 어떤 뜻이 되는가? 성령이 내리면 선지자가 되는데,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예언과 이상과 꿈으로 알리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예언, 이상, 꿈 모두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한다는 데에 초점이 있지 인간 선지자가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데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말 선지자(先知者)에 “미리 안다”는 뜻이 있어 자꾸 오해가 생긴다. 영어로 선지자(Prophet)도 prophecy(예언)를 하는 사람이다. 예언의 일반적인 뜻은 노스트라다무스처럼 미래 일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것(Fore‐telling)이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된 Prophecy는 그 뜻이 아니다. 성경의 선지자가 Prophecy한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나 숨겨진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것(Forth‐telling)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리기도 하고 말하기도” 했던 뜻을 세상에 알렸다. 간혹 그 가운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도 포함되었지만 극히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노스트라다무스와 성경 선지자 예언의 차이는 누가 더 정확도를 자랑하는 가에 있지 않고, 그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지 여부뿐이다. 예컨대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망하는지 일정표를 미리 가르쳐 주어 대비하라고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앞일에 대한 예언(豫言)을 했어도 추후 사태가 반드시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져야만 하는 이유와 그 일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이루고저 하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선포되었다.
성경적 예언의 대표적 예를 하나 보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異像)이라.”(시1:1)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상을 받아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바로 이어지는 예언은 이스라엘의 죄부터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유다의 현실적 멸망의 예언보다는 당신 백성들의 죄에 대해 통분해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선지자의 입을 빌어 처절하게 묘사되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자신을 닮게 지은 인간이 그것도 만민 중에 택한 백성이 최소한 자기 주인은 알아보는 짐승보다도 못하게 당신을 거역한다고 한탄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죄를 회개치 않을 때에는 심판과 징계가 분명히 기다리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예언이 분노에 찬 저주의 선포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함께 따른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우리의 모습이 애처롭고 불쌍하여 완전히 진멸하지는 않고 언제나 구원과 용서로 초대하신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2)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뜻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당신의 독생자의 보혈로 사단의 멍에 아래 묶여 있는 죄인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심판에 구원이 함께 따른다면 역으로 말해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히려 심판을 선포하는 셈이다. 심판은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이 절대 아니다. 유다의 죄를 통박하기 위해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웠지만 곧 바로 당신의 숨은 뜻이 구원이라고 말씀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신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든지 못하든지 간에, 아니 당신을 외면하고 거부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선지자다.
성령이 인간에게 회개와 진리의 영으로 임하면 어느 누구라도 예언을 하게 된다. 선지자가 된다. 당장 모세나 이사야 같은 하나님의 일군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신자 자신에게서부터 나타나 하나씩 실현된다. 성령은 가장 먼저 신자 자신의 죄부터 지적해 준다. 그러나 평소 죄책감을 갖고 있던 도덕적 죄부터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죄는 성령을 받지 않은 자, 즉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도 스스로 어느 정도는 회개할 수 있다.
그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면 깊숙한 곳의 근본적인 죄를 깨우쳐 준다. 영혼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원죄를 끄집어내게 한다. 오직 자존심과 체면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세상의 것만 목표로 했던 삶 전체가 완전히 실패였음을 알게 한다. 교양과 지성과 재산과 외모로 가려왔던 내면의 탐욕, 시기, 질투, 음란, 분노, 초조 등이 여지없이 벌거벗겨진다. 자신의 진짜 실체를 얼마나 교묘하게 감추었든지 자기마저 속아 넘어갔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동안 자기는 아주 의로운 양 착각하고 주위에 떳떳하게 자랑하고 다녔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지경이 된다. 요컨대 자신이라는 존재 전체가 썩고 또 썩어 너무나 추하고 더럽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더러운 영혼이 씻음을 받을 길을 이 세상에선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의 도덕성과 종교성과 영성이 남에게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자신에게마저 단 한 치라도 선한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버러지 같은 모습으로 겸비하게 엎드리게 된다. 성령의 권능이 죄에 빠진 인간에게 임해야 비로소 참된 치유와 위로와 회개가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신자가 예언을 하고 이상을 보며 꿈을 꾸는 첫 단계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내년에 무슨 사업을 하고 금년 여름에는 장거리 여행을 삼가라는 식으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사단의 종들인 무당과 점쟁이들은 주로 그렇게 한다. 저들이 더 신령하고 능력이 나아서가 절대 아니다. 오직 우리를 세상의 것들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다. 인간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만이 그 목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는 절대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풍요와 안락으로 가득 찬 분홍 빛 미래만 약속하는 모든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가르침 뒤에는 사단의 검은 마수가 뻗쳐 있다. 그 결말은 뻔하다. 지옥이다. 거짓의 아비 사단이 현실적 형통으로 인간을 속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다. 무당과 점쟁이를 찾아가 돈을 듬뿍 주어가며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넘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천하의 죄인임을 깨닫는 즉각적, 전인격적, 철저한 회개를 한 것이다. 주님은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면 죄에 대해 책망하게 되는데 그 죄를 바로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8,9) 베드로는 이 때 이미 성령의 권능으로 자신을 향해 예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예언의 전부가 아니며 끝도 아니다. 모세의 표현대로 성령이 모든 신자로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게 해주신다. 신령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한다는 뜻이 아니다. 불신자의 영혼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처참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그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애처로운 주님의 심정으로 채워주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1)”고 하셨다. 무식했던 갈릴리 어부이자 제사장의 여종 앞에서도 벌벌 떨었던 그를 오순절의 그 수많은 청중 앞에서 담대하게 당신을 증거하게 만들어 주셨다. 방언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넘어서 더 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야말로 참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이 2000년 전에 한번만 있었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 날의 신자 모두도 성령을 받았기에 이미 베드로처럼 되었다. 선지자가 되는 큰 기적을 맛보았다. 신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죄인들을 향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참된 예언을 하여야 한다. 그들의 죄를 통박(痛駁)하여 회개로 촉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에 바탕을 둔 죄 씻음과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을 깨우쳐주어서 그분 앞에 엎드리게 해야 한다.
세상 모든 종교의 예언은 현실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뿐이다. 겉으로 풍요를 약속하지만 속으로는 썩게 만든다. 성령의 예언은 겉으로는 죄를 통박하여 고뇌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도하지만 속으로는 풍성한 위로와 기쁨이 넘치는 자유로 인도한다. 저들은 육으로는 살리고 영으로는 죽이지만, 신자는 육으로는 죽는 것처럼 아니 때로는 실제 죽기도 하지만 영으로는 살아난다. 나아가 영이 살아야만 육도 살 수 있다. 육이 산다고 영이 산다는 법은 절대 없다. 다른 말로 성령의 예언은 영과 육 모두 영원히 살리지만 성령이 아닌 예언은 둘 다 영원히 죽게 만들 뿐이다.
이제 이 교회에 하나님의 신이 강력하게 임하여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오순절 하루에 믿고 세례 받은 자가 삼천이나 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 같은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주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자들이 먼저 그런 부흥을 간절히 소망할 때에 일어난다. 우리 모두는 이미 예언을 하는 선지자다. 일어서서 베드로처럼 담대히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불신자들의 윤리적 죄를 정죄하고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 자신부터 그들 앞에 증인으로 서야 한다. 이전에는 철두철미 죄인이었음을 그들에게 과감히 고백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던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을 소리 높이 외쳐야 한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죄인임을 깨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끄는 것뿐이다. 또 그 길은 신자부터 옛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서는 수밖에 없다.
성령을 받은 어느 누구라도 베드로처럼 먼저 일어서서 십자가 복음의 참 예언을 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권능이 다른 모든 성도들도 함께 일어서게 할 것이다. 먼저 일어선 자의 뒤에서 아직 예수를 모르는 저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내리기를 기도하게 할 것이다. 모든 신자가 나아가 신자가 복음을 전하는 세상사람 모두도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길 소원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예언을 하고 이상을 보며 꿈을 꾸는 것이다. 신자의 인생에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다. 또 바로 그 일을 하도록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신자가 가는 어디라도 항상 함께 가신다. 여러분은 지금 예언을 하고 있는가? 신자를 넘어서 선지자가 이미 되어 있음을 아는가?
(96.3.24 유타 대학촌 교회 주일 설교를 정리한 것임)
십자가의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의 삶을 평생토록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글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