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을 벗기고 있는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광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6-18)
어느 하나님이 불공평한가?
최근 한국에선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비방하고 멸시하는 의미로 개독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신자가 신자답지 못해 듣게 된 소리로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종교마다 부패하고 불합리한 모습은 다 있습니다. 기독교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행은 제일 많이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세상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독 기독교가 욕을 가장 많이,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들어 먹는다면 그 근본적 이유는 기실 따로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기독교 교리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은 이상하게 주는 것 없이 밉다”고들 말합니다. 주는 것 없다는 것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상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미워해선 안 되는 데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지정의가 아닌 영혼의 문제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오직 예수를 믿는 여부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 스스로 기독교는 인간 이성으로 만들어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셈입니다.
흔히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 가야지 어떻게 아무 한 일도 없이 예수만 믿었다고 천국 가느냐고 반발합니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자기 종교만 편애하는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말이 도무지 말도 안 되며 그런 하나님이야말로 최고로 불공평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거짓말을 평생 백 번 한 사람은 천국 가고 만 번 정도 한 사람은 지옥 보내는 데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고 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중간쯤에 반드시 커트라인이 설정되어야 하는데 5천 번이라고 가정해봅시다. 너무 많다고 생각됩니까? 어떤 연구에 따르면 평균 남자는 하루에 5번, 여자는 3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평생을 70년 잡고 계산해 봤더니 남자는 127,750 여자는 76,650번 거짓말하는 셈입니다. 오히려 정확히 하자면 10 만 번 정도가 카트 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평생 10 만 번 거짓말한 사람은 천국가고 10 만 한 번 한 사람은 지옥가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야말로 불공평한 처사 아닙니까? 나아가 그런 하나님은 구원과 심판의 전권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단순히 시험 점수를 채점하는 자에 불과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말 10 만 번도 사실은 아주 적게 잡은 것입니다. 뻔히 알고도 침묵하고 있는 것은 더 치사하고 무서운 거짓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도무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합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지붕에 물이 새는 하자가 있는 줄 알면서도 아무 말 안하면 양치기 소년이 사자가 오는 데도 가만히 있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이 땅이 죄악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있는데도 교회 강단이 침묵하고 있으면 거짓말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을 비롯해 다시 오실 예수님은 가르치지 않고 마치 심판이 없는 양 이 땅에서의 성공, 형통, 위로만 가르치면 엄청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예수님 면전에서 침도 안 바르고 말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교회와 신자마저 이 모양이지 않습니까?
착한 자가 천국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럴 듯 해보이지만 그 깊은 내면을 파고들면 극도의 교만이자 교묘한 죄입니다. 나는 네 같은 종자하고는 아예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하나 없이 살고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자일수록 지옥문에 가장 가까이 서있는 자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그런 와중에도 더 착하고 더 악한 사람을 구분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분은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인간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시시콜콜한 부분과 심지어 그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인간은 점수로 따지면 몽땅 0점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0.000001 점이라도 받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평균 이상은 될 테니까 50점 쯤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로 올 것이 아니라 절(?)로 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평가는 노아 심판 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이다.”(창6:5,8:21)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공정한 평가대로 공평하게 행하자면 이 자리에는 벌써 다 죽고 저를 비롯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간을 완전히 멸해도 입이 열 개라도 말을 못합니다. 그분의 영광에 단 한 치의 손상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심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단 한명의 죄인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시려고 참고 또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 온 자는 “만입이 내게 있다면 그 입 다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고 그 은혜를 주위에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이 또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천국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으로 천국에 간다면 천국의 모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 모인 아니 뽑힌 모든 자들이 서로 자기 자랑하기에 급급할 것 아닙니까? “나는 KBS 수재의연금 모금할 때에 적금까지 해지해서 맨 먼저 냈습니다. 방송에서 제 얼굴과 이름을 크게 비춰줬는데 하나님도 보셨지요?” “나는 40대에 명퇴 당하고 미국까지 끌고 와서 애꿎은 고생만 시키는 무능한 남편에게 바가지는 좀 긁었어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데리고 살아 주었으니 저 잘했지요?” 그중에 가장 압권인 자랑이 뭣인지 아십니까? “저는 거짓말 십만 번밖에 안 했는데 저 십만 한 번 한 죽일 놈보다는 제가 훨씬 착하지요?”
하나님께 자기 자랑부터 들어달라고 혹은 저희끼리 서로 잘 났다고 다투느라 완전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자랑을 다 들어주느라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주인 노릇한 인간이 천국 가서도 주인 노릇하려 설치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지고 인간만 앞에 나선 인간들의 천국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고 율법을 받고 내려 올 때에 그 얼굴에 반사된 빛이 너무 찬란했습니다. 사람들이 육안으로 쳐다볼 수도 없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또 그 영광이 사그라지면 사람들이 실망할까 모세는 수건으로 가렸습니다.(출34:29-35) 본문은 바울이 그 사건을 인용해서 자신이 직접 보고 온 천국의 모습(고후12:1-6)과 신자가 가져야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신자들이 천국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외형적 모습입니다. 길에는 정말 금으로 깔려 있고 거처도 다이아몬드로 휘감았는지, 우리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형체를 할 것인지, 과연 하나님의 보좌는 얼마나 크고 장엄할까 등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죽음 일보직전에서 소생한 사람들이 “도저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쁨이 충만해 이 땅으로 돌아오기 정말로 싫었다.”는 증언에 그저 혹합니다. 또 눈물, 한숨, 고통, 걱정이 없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니까 항상 멕시코 칸쿤 바닷가에 누워서 망고 주스 마시며 여름휴가 온 것처럼 지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물론 그곳은 지상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좋을 것입니다. 또 인간의 상상의 한계마저 초월할 것입니다.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곳을 구태여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분명히 기록한 대로만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에서 천국의 가장 큰 특징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도 주와 같이 영광스런 형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다고 합니까? 수건이 벗겨져서 자유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천국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이 땅과 가장 다른 점이 됩니다. 그럼 이 땅에선 수건이 가려져 있어서 자유가 없었거나 불완전한 자유를 누렸다는 뜻입니다.
천국에서 수건이 벗겨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고 가장 궁금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 정도라면 구태여 성경 기록으로 남길 필요 없고 천국 가면 누구나 저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에 대해 정말 이해되지 않고 불만이 생겼던 일과 그래서 때로는 믿음마저 포기하려 했던 사건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았던 이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으로 내몰린 까닭, 잘못한 것 하나 없었는데도 계속 억울하게 당하기만 했던 사정들이 속 시원하게 밝혀집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그 잘 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도피하다시피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된 까닭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한국에 있었더라면 아예 믿지 않았을 예수를 잘 믿게 하려는 것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더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어서 당신의 나라를 널리 확장시킬 엄청난 계획들이 진작부터 예비 되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중 백이면 99가 땅으로 내려가지 않고 하늘 창고에 그냥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아무리 기도해도 왜 응답이 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기도가 다른 방식으로 더 풍성하게 벌써 응답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음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았다면 덮쳤을 위험과 불행이 얼마나 컸었는지 보게 됩니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어도 가족과 이웃이, 심지어 생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사단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신자의 기도가 금향로에 담겨져 보좌 앞 금단에 보배로운 향기가 되어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기만 해도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신자가 드리는 기도는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땅의 신자가 울면 하늘의 예수님이 더 크게 우시고, 땅의 신자가 한숨을 쉬면 보좌의 하나님이 땅이 꺼져라 안타까워하시는 광경을 똑똑히 목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땅에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이 나를 바로 저렇게 사랑하셨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천국이 뼈 빠지게 일해 자식을 키울 걱정이 없어지기에 눈물과 한숨이 없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도무지 풀지 못했던 모든 억울함, 분통함, 답답함, 억눌림, 갈급함, 공허함, 초조함, 죄책감 등이 하나 빠짐없이 완전히 해소되기에 수건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에 단 하나의 장애도 없어지기에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착하고 순탄하게 살면서 결혼했더니 첫 아이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나 평생을 눈물로 지새야했던 이유를 알게 됩니다.
장애아가 태어난 이유
40 줄에 들어선 집사님 부부가 늦둥이로 둘 째 딸을 봤습니다. 누가 봐도 탄복할 정도로 영리하고 똘똘한 그 아이가 두 돌이 지나자 소아당뇨로 밝혀졌습니다. 인슈린을 생산하는 기능 자체가 상실 되었으므로 평생을 두고 체외에서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하루에 몇 번씩 피를 뽑아 당뇨를 체크해야 하고 그럴 때마다 인슈린을 넣어 주어야 하는데 한 마디로 하루에 주사 바늘을 열 번 이상 찔러야 합니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본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딸을 보는 부모 심정은 더 찢어집니다.
그 엄마가 얼마 전에 아침 큐티를 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똑똑한 아이를 장애가 있음에도 세상에 보낸 것은 이 아이로 인해 당신께서 영광을 받을 분명한 계획이 따로 있음에 틀림없어. 그래서 누가 그를 가장 잘 키울지 찾던 중에 우리를 골랐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아이를 통한 하나님의 뜻과 우리 가정을 향한 사랑을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소명을 감당해야 해.”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사랑 중에 가장 순수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나쁜 길로 가도 끝까지 용서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징계를 하지만 그 징계도 사랑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식 사랑에도 불순물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달성하지 못했던 꿈을 자식이 이뤄줘 대리 만족하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일류대학 나와서 버젓하게 출세하면 자랑하고 싶고 또 은연중에 나중에 자식에게서 키워준 보상을 받으리라 기대합니다.
반면에 중증 장애인의 부모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평생 사랑해 봐야 자식이 부모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나아질 전망도 전무합니다. 죽을 때까지 일방적으로 베풀어야만 합니다. 비유컨대 말없이 서 있는 커다란 벽에다 매일 새로 페인트칠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히 짜증나고 싫고 힘들고 자식이 미울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서 빨리 죽어줬으면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 갈등과 한숨과 눈물과 분노 속에서 돌고 돌다가 결국 되돌아오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직 불쌍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단 하루도 그 칠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돌봐주지 않으면 자식은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부모 쪽의 보람과 의미와 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상대를 살리고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만이 사랑을 베푸는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사랑의 모습입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우리가 불쌍하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애자의 부모와는 달리 그 사랑에는 단 한 치의 짜증, 원망, 고통, 미움이 섞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중증 장애자였습니다. 나아질 전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교양, 지성, 도덕, 철학, 종교로 아무리 갈고 닦아 봐야 교만과 나태와 탐욕만 더 늘어나는 추하고 더러운 존재였습니다. 또 그 모든 것들은 사실 자꾸 부끄럽고 두려워지는 심령의 갈급함과 허망함을 감춰 보려는 헛된 위장술에 불과했습니다. 장애자인 주제에 그 장애를 스스로 고쳐 보려고 쥐약인줄도 모르고 마시려 했던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고통과 죄악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계속해서 더 풍성하게 주시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장애인을 이 땅에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장애인임을 깨닫게 하려는 뜻입니다. 육체적 장애인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영적 시체에 불과함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영혼은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순수합니다. 육체적 필요만 채워주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정작 더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사지가 멀쩡한 우리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사랑을 깨달아서 그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소아당뇨 장애아의 엄마에게는 그 장애가 더 이상 평생 부담이 되는 고통스런 의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을 주위에 선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며 나누는 통로로 변했습니다. 하나님 얼굴에 가려진 수건을 조금 벗겨서 천국의 실체를 이 땅에서부터 조금 맛본 것입니다.
예수가 유일한 길인 이유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죽어봐야 그 영원한 운명을 알 수 있습니다. 생전에 천국을 맛보기는커녕 구원의 확신도 가지지 못합니다. 반면에 예수를 제대로 알고 믿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천국은 기도해서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마5:3)라는 가르침을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하셨습니까? 방금 전까지 중풍이나 문둥병으로 고생하거나 귀신에 들렸었지만 당신께서 고쳐준 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불치병이 낫고 사업이 흥한 것이 천국이 아니라 천국의 실체는 따로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어리석고 유한하며 무능하고 연약하고 불완전한지 나아가 죄로 찌든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철두철미하게 깨달을 때에 천국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단 한 명이라도 구구절절 애통한 사연이 없는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 없이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멀리까지 볼 필요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빠는 가뜩이나 심각한 불경기에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 얼마나 애를 씁니까? 엄마도 조금이나 살림에 보태려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식당 웨이트리스나 가정부 같은 궂은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런 외적인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고생하는 것은 신자 불신자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그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내면부터 완전히 까뒤집어서 그 실체를 보십시오. 나야말로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자부할 때가 많습니까? 아니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싫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까? 솔직히 자신의 진짜 실체를 들여다보려니 오히려 두려워지지 않습니까?
그런판국인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는 길 외에, 그리고 그 죽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긍휼 외에 우리가 구원 받을 방도가 과연 있겠습니까? 스스로 노력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교묘한 것인지 몰라서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발상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입니까? 너희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당신께서 죽으실 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바꾸면 너희가 어떤 상태에 있던 때려죽여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래도 너희 죄는 정말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싫어한다는 것입니까? 당신께서 죽으실 만큼 철두철미하게 죄를 저주하고 증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스스로는 그 죄를 도저히 어쩔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 죄를 내가 감당해줄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오직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신령하고 거룩해져서 땅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보배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개독교가 기독교로 회복되려면?
작금 개독교를 기독교로 바꾸기 위해서 많은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개교회 성장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장로를 임기제로 바꿔야 한다, 헌금이나 십일조를 강요 말아야 한다, 사회 봉사와 현실 참여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목회자 자질을 향상해야 한다, 등등 다양한 대책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절대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만 다시 똑바로 세우면 됩니다. 성경 말씀을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진리를 더욱 진리답게 주장해야 합니다.
무슨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길이므로 그분이 없는 곳은 절대로 사막이요 광야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기에 그분이 없으면 교회마저 거짓과 사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기에 그분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흑암과 죽음뿐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조금 더 좋은 길(a better way)이 아닙니다. 나아가 가장 좋은 길(the best way)도 아닙니다. 오직 유일한 길(the only way)입니다.
지금 일부에선 기독교의 배타성을 벗기 위해서 타 종교와 대화하고 관용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기독교 진리의 유일성마저 부인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는 자마저 나옵니다. 단언컨대 그런 자들은 세상에선 포용력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칭찬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가서는 개독교만 믿었지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없으니 어두운 곳으로 내침을 당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다워지려면 목사부터 철저하게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야말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잘 모르겠으면 차라리 그냥 그대로 읽기만 해도 됩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말씀 자체에 권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장로 제도는 존속해도 심지어 교회에 장로가 아무리 많아도 됩니다. 장로보다 오히려 목사가 문제일 때가 더 많습니다. 교회의 머리로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목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니 문제입니다.
신자도 진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에 살고 예수에 죽어야 합니다. 주위에 십자가 사랑을 전하고 나눠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자기 능력으로 남을 사랑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결코 없습니다. 내 자신의 영혼부터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지 먼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이 나보다 더 불쌍하다고 여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아내, 남편, 자식, 이웃에게 나로선 사랑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의 영혼에도 채워져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길 때에 비로소 천국이 임합니다. 그럼 교회가 아무리 커져 수만 명 교회가 되어도 나쁠 것 하나 없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인지, 또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가공할 정도로 교묘한 세력인지, 그 배경에는 음흉한 거짓의 아비 사단이 도사리고 있음을 제대로 파헤쳐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예수뿐임을 날마다 선포, 기념, 회상, 증거,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예배에서, 성경공부, 찬양, 기도모임, 나아가 성도 교제에까지 십자가 사랑만 나눠져야 합니다. 천국에서 예수가 실종되면 천국마저 인간의 천국으로 변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예수가 실종되니까 인간만 살찌우는 곳으로 변했지 않습니까? 성공과 치유의 신학만 성행합니다. 목사와 장로가 서로 잘 낫다고 자랑하다 못해 싸움으로 지샙니다.
대신에 성도들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고 사는 모습을 주위에 확실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건을 조금씩 벗겨내어야 합니다. 천국은 절대로 고통이 끝나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울음이 끝나고 좋은 일이 생기는데 웃지 않을 바보는 없습니다. 믿음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믿음이 제 역할을 발휘할 때는 울고 있을 때여야 합니다.
흔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울면서 동시에 웃을 수 있는 자입니다. 현실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흐르지만 우리의 소망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에 그 영혼은 속에서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핍박과 고난이 끊이지 않더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 끊을 것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기에 절대로 거꾸러트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불신자로부터 울면서도 웃는 그래서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당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에 미쳤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고통 중에 천국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애인 엄마의 경우 고통은 전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평생 동안 하나 진전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조금 더 깊이 깨달았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천국을 맛본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을 더 깊이 알아나가는 싸움, 즉 수건을 벗겨가는 과정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주의 영이 있고 그곳에서 수건이 벗겨지며 자유해진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로 신자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뿐이어야 합니다. 그 앞에 진정으로 겸비해져 무릎 꿇으면 하나님 얼굴에 가려진 수건은 벗겨지고 우리 영혼이 자유케 됩니다. 왜 신자가 천국처럼 살지 못합니까? 신자마저 천국을 멕시코 칸쿤 바닷가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이유는 그분의 십자가만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딱 하나뿐인 참 사랑이자 완전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과 공의로 불신자를 향해선 구원의 은혜에 더 들어오도록 참고 또 참고 계십니다. 또 신자가 기도만 하면 당장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기도가 잘 나오지 않으면 단지 주여 한숨만 쉬어도 아니 마음만 그분을 향해 열어도 그분은 모든 풍성한 것을 예비하셔서 우리를 향해 즉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분은 신자에게 속고 또 속는 줄 아시고도 우리를 향한 너무나 엄청나고도 신령한 계획을 마련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며 우리를 통해 주위에 천국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는 그런 계획을 말입니다.
3/30/2008 남가주 서머나 교회(김성수 목사 담임) 주일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박신이라는 필명을 쓰신 이유를 댓글을 통해 오늘 처음 알았네요^o^
'울음이 끝나고 좋은 일이 생기는데 웃지 않을 바보는 없습니다. 믿음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믿음이 제 역할을 발휘할 때는 울고 있을 때여야 합니다'
'현실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흐르지만 우리의 소망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에 그 영혼은 속에서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건을 조금씩 벗겨내어 이땅에서부터 조금이라도 천국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과 은혜안에서 더욱 더 아버지의 깊은 경륜을 조금씩이나마 알아갈 수 있는 지혜와 기꺼이 순종하는 결단을 늘 부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염려하고 기도해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또 많은 사랑의 빚을 지기도 했습니다.
치료를 무료로 해주신 분부터, 캐나다에서 일부러 미국 국경을 넘어(약은 우송이 안 되는 바람에) 바르는 약을 부쳐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또 제가 쉬는 동안에 저보다 훨씬 더 은혜롭고 진솔한 글들을 올려 주셔서 이 홈피가 계속 활기 있도록 도와주신
김유상, 정순태, 김계환, 작은자, 이선우님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위의 설교는 이미 김유상 집사님이 게시판에 공지한 것을 글로서 정리한 것입니다.
최근에 방문한 자들은 조금 어리둥절하셨겠지만 박진호는 저의 본명이고 박신은 필명입니다.
제게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나름대로의 몇몇 이유로 얼굴과 이름 없는 사역자로 지내려 했는데
김유상님이 만천하에 카밍아웃 하도록 만드셨네요. 저의 글과 얼굴과 말에 부조화가 안 생겼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기왕에 얼굴리 팔렸으니(?) 더욱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