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와 신자의 가장 큰 차이
하나님을 힘써 알자 (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1-34)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지 여부인가? 아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란 기독교인(좁게는 개신교인)과 비기독교인의 나눔이다. 그런데 비기독교인이 무신론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신적 존재에 대한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진 타종교인들을, 간혹 비종교인들도, 포함한다. 따라서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구별 짓기는 무리다.
솔로몬 왕이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 요컨대 한 가정이나 성을 올바르게 세우는 이는 가장과 성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신자의 가정은 복을 받아 형통하고 불신자의 가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흔해 빠진(?)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성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와 경성함이 헛되다고 했다. 분명히 열심히 수고하고 경성했다. 게으름을 부리거나 누워 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불신자 가운데도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기에 형통하며 화목한 가정이나 사업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으므로 단번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괘씸해서 일부러 벌을 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가 없기에 죄에 빠진 인간들과 사단의 조종을 받는 세상의 훼방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작 본인부터 연약하고 무능할 뿐 아니라 죄스런 본성과 탐욕을 버리지 못해 언제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지혜로웠던 솔로몬마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부귀영화를 성취했음에도 인간적 지혜와 능력만으로 해 아래 이뤄내는 것이라고는 허사뿐이라고 실토했지 않는가?
그의 시편을 반대로 따지면 신자는 때로 수고와 경성을 등한히 해도 하나님이 모든 훼방을 막아주시며 또 실패를 선으로 바꿔주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신자가 하나님만 믿고 제 멋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더더욱 성실하게 수고하고 경성해야 한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그분을 모시고 살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인간적 수고와 경성을 넘어 서는 그분의 거룩한 인도에 따라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이 바로 신자가 불신자와 가장 현격하게 다른 점이다.
하나님 나라와 의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종교적, 도덕적, 영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한다. 즉 예배, 성경공부, 기도모임, 전도, 봉사 등 교회 행사에 우선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또 신자가 자신의 품성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죄를 짓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도 한다. 나아가 신자가 자신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깨달아 충성하고 헌신해야 한다고 한다. 완전히 틀린 해석들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정작 의도하고자 하는 바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
성경은 가장 먼저 앞뒤 문맥에 바탕을 두고 해석해야 한다. 지금 예수님은 신자더러 염려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불신자가 염려하는 모습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결론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내렸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의”는 지금껏 해온 통상적 이해와는 달리 아주 현실적인 문제와 연관된 뜻이 된다. 순전히 문맥상의 의미로만 따지자면 염려하지 않으려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역으로는 염려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뜻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 바로 직전에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한 마디로 목숨과 몸이 더 중요한 줄 아니까 음식과 의복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지어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다. 예수님이 그런 너무나 상식적인 말씀을 할 리가 없다. 실제 예수님 당시에는 지금처럼 자기 과시 목적이나 유행과 취미에 따라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결코 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아주 중차대한 과제로 삶과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날의 신자도 사치스럽게 살려고 그런 것을 구하지 않는다. 요즘 같은 극심한 불경기에 아파트 렌트비를 못 내면 당장 다음 달에 길거리로 쫓겨나니까 염려한다. 로토에 당첨되는 대박을 터트리고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 당하니까 두려워한다.
당연히 예수님이 신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모르고 하신 말씀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가장 중요하니까 더더욱 그 문제를 깊이 묵상해보라고 촉구하셨다. 그리고 묵상을 하려면 먼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것이다. 물론 그저 구경만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새는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지도 아니하며, 꽃은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도 천부께서 다 먹이고 입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새와 꽃들이 염려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느냐고 다그친 것이다. 그것들이 왜 염려하지 않는가? 생각이나 말을 아예 못하고 나아가 종교성, 도덕성, 영성이 전혀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하고 의로운 손에 완전히 붙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와 꽃도 하나님이 그렇게 붙들어주시는데 하물며 인간인, 아니 신자인 너희들은 더더욱 그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전혀 없으니까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치지만 왜 너희마저 염려하느냐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넘치는 은총 가운데 붙잡혀 있다는 것만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그런 것을 먼저 염려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나아가 염려한다고 키가 한 자가 더 자라며, 내일 일이 너희 뜻대로 바뀔 것 같으냐?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 하에 있지 않느냐? 그럼 과연 너희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이냐? 세상만사를 절대적 주권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믿고 의지하는 것 아니냐?”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가장 근본적 의미는 자신이 그분의 거룩한 통치 속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 통치 속에 나타나는 그분의 원리와 목적을 알라는 것이다. 종교적, 도덕적, 영적으로 헌신하고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그 다음 단계로서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거룩한 뜻을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히 그 뜻을 따르게 될 것 아닌가 말이다.
불신자도 기도한다.
예수님은 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도 기도를 하지만 그 내용은 오직 물질을 구하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불신자들 나름대로는 눈에 안 보이는 신적 존재들이 있고 또 그 신들이 물질을 주관 내지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세상살이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전혀 의외의 횡재도 하니까 그런 기분파(?)적인 신에게 잘 보이거나 혹은 훼방만 하지 말아달라고 빌 필요를 느낀다. 아무리 완고한 무신론자도 아주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하늘이 도와달라고 어떤 방식으로라도 빈다. 완전한 의미에서 무신론자는 사실상 없다.
그런데 오직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구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좋으니 그것을 채워주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자기들이 “비나이다!, 비나이다!”라고 읊어대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지금 자신들의 간구를 받고 있는 신적 존재가 어떤 자가 되어도 좋으니, 심지어 기독교의 하나님일지라도, 내 소원대로만 이뤄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천지신명들에게 빈다. 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가능한 더 많이 빌고 바쳐야 그에 비례해서 많이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물질을 채워주는 신적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 존재가 왜 그것을 채워주는지 혹은 채워주어야만 하는지도 관심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 존재와 자신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는 전혀 생성되지 않거나, 어떻게 되어도 문제없다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빌고 있는 신적 존재 자체가 아예 실재(實在)하지 않으니까 평생 가도 어떤 관계도 생기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불신자들은 복만 준다면 무당에게 찾아가 돈을 바쳐 가며 굿을 한다. 심지어 아들을 얻기 위해 무당의 조언을 받아 조강지처와 이혼도 서슴지 않는다.
또 그들은 당연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벌려고 한다. 아마 그들 중에 자신은 법을 지키며 정당한 절차에 따라 실력과 정직과 신용을 동원해 돈을 번다고 반발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반발은 타당치 않다. 아이스크림 장사는 일 년 365일이 비가 오지 않고 무덥기만 소원하고, 반면에 우산 장수는 비만 오기를 바라지 않는가? 결국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간구한다는 의미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만의 자신과 자기 가족의 형통과 안일만 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그것도 심히 흡족하게 만드셨다. 그 이유는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모든 인간은 새와 꽃과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 존재로 만드셨다. 거기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그분께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그들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를 가르셔서 출애굽시켰으며 그 이후로도 그분은 이스라엘의 장막 중에 거하고 행하시며 많은 기사와 권능을 베푸셨다.
지금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있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그분을 한 번이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촉구한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과연 어떤 분인가? 그분이 너희에게 어떤 존재인가? 너희는 또 그분과 어떤 관계인가? 그분 안에서 너희의 신분과 특권이 정말로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없어질 것이란 이유 때문에 불안과 염려에 떨며, 또 이방인처럼 그것만 구하려 하느냐?”
두 마리에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참새마저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마10:29)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생명을, 그 수명까지 정확하게 붙들고 계신다. 만물은 하나님이 죽음을 허락해야만 죽는다. 바꿔 말해 그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리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부족하거나 없어도 죽지 않는다. 목숨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면 죽는 날까지는 그런 것들이 당연히 인간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계신다. 또 하나님이 그 필요를 알고 계신다면 즉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해 주신다면 구태여 그런 것으로 염려할 이유는 없다.
불신자도 기도하지만 신자의 기도와 다른 점은 비는 대상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신자마저 오로지 현실적 문제에 사로잡혀 그것을 먼저 혹은 그것만 간구하고 있다면 그들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 양식만 빌렸지 내용적으로는 똑 같다. 또 그것만 열심히 기도한다는 자체가 오직 그 문제만 염려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소지한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이 완전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불신앙이지 않는가?
불신자와 신자의 가장 큰 차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중에서 인간을 심히 좋은 존재로 만드셨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믿음을 허락한 당신의 백성은 더욱 사랑하시며 그들을 통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신다. 그런 은혜와 권능 가운데 들어와 있는 신자라면, 즉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아는 자라면 그분께 가장 먼저 보일 반응은 당연히 경배다. 생명을 주시고 지금까지 이르게 하신 그분께 온전히 감사하게 된다. 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전적인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그분이 앞으로도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 가운데로 자기를 인도하실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겸비하게 그분께 돌리게(worth +ship=worship) 된다.
요컨대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그분 앞에 완전히 항복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길 가다 강도를 만나도 당장 손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강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다. 강도가 어떤 사람이며 잘못하면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의 왕이나 대통령이 부르면 그저 굽실거리며 나아가지 않는가? 이 또한 그들이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도무지 이들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을 제대로 알게 된 인간이 보일 반응은 오직 하나, 그분께 경배드리는 것뿐이다. 또 당연히 무엇이든 그 분 뜻대로 순종하게 된다. 내가 그분을 위해 뭔가 일을 해드리는 것이나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그 훨씬 다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의미는, 그분의 이 땅을 향한 통치가 얼마나 선하고 공의로운지 또 신자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풍성하고 다함이 없는지 먼저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으로 염려하지 않고 또 그것만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언제 어디서나 범사에 그분께 감사하며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16)
다윗이 어떻게 고백했는가?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시고,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까지 통촉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자신의 하나에서 열까지 아시며 언제 어디로 가든, 심지어 죽어서 음부에 떨어져도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다. 나아가 자신의 형질과 영혼 깊숙한 모든 부분까지 아신다고 했다. 생각과 말 정도가 아니라 다윗 자신도 잘 모를 수 있는 자신의 기질 뿐 아니라 영혼의 미세한 흐름까지도 다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짓기 전부터 이미 자신을 당신의 책에 다 기록해 두었다고 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보다 그분이 자신을 더 속속들이 다 알고 있더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개인적으로 너무나 친밀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너무나 신기하다고 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보일 반응이 경배 말고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오직 그분께 꿇어 엎드리며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총을 든 강도 앞에도 엎드리는데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주면 어떤 신이라도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자보다 더 악해서라기보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그 신과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 신에게 감사와 경배를 돌릴 이유나 필요는 더더욱 없다. 설령 신이 자기 인생에 방해를 하지 않거나 특별한 복을 주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우상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도 전혀 없지만, 이미 자기가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제물을 바쳤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요컨대 그들은 신의 존재도 인정하고 또 그 신에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하기는 해도, 혹시 때로는 감사까지 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신에게 진정한 경배는 드리지 않는다. 특별히 여럿이 모여서 그분께 감사 찬양하며 예배드리지 않는다. 당연히 신의 뜻에 따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신이 자기를 향해 특별한 뜻이 있으리라 꿈도 꾸지 못한다. 참으로 모순이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잘 보이려고 뭔가 바치며 기도까지 해놓고는 그 신 자체는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신을 자기 맘대로 부려먹겠다는 심보다. 사실은 없는 신을 자기 필요나 욕심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5-17)
취사나 난방용으로 나무를 태우다가 남는 나무가 있으면, 아마도 기괴한 형태가 되었을 테니까, 우상으로 깎아 만들고는 자기를 구원하라고 그 앞에 부복하며 빈다고 했다. 이방인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달라고 비는 대상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상에게 전혀 능력이 없다. 아니 자기가 만든 우상이라 사실상 자기가 자기에게 비는 꼴밖에 안 된다. 십계명에서 자기를 위해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고 한 까닭이다. 바꿔 말해 그들이 우상을 경배하더라도 진정한 존경심을 갖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과 세계의 모든 가치를 그 신에게 절대 돌리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신을 어찌 우주의 주인으로 모시며 또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온 땅이여 경배하라.
새와 꽃, 즉 땔감으로 쓰는 나무마저도 하나님 손에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것은 사실상 그런 것들조차 하나님만 온전히 믿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들이 종교적 계명과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한 아주 종교적이며 신령하기까지 하다.
시편 기자들의 고백을 들어보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8:1)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66:4)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148:3-6)
하나님의 폐치 못할 명대로, 즉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완벽한 섭리함을 받는 모든 피조물은 자연히 창조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다. 아니 피조물들이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분께 찬양 드리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절대로 그분의 섭리를 거슬리지 않는다. 정말 시편 기자의 표현대로 온 땅이 그분을 찬양하게 된다. 하늘의 해와 별과 달마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게 인간에게만은 당신을 경배할지 여부를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겼다. 그리고 그 의지가 하나님이 목적한 바대로 작동될 수 있는 시금석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그들 눈앞에 두었다. 말하자면 물질은 에덴동산 중앙에 서 있어서 아담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선악과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 대신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세상의 물질 앞에 부복했다. 여전히 원죄 아래 있는 불신자와 이방인들의 실정이다.
그들에게 물질은 결국 자기와 자기 가정의 안락과 형통만을 위해 존재한다.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다. 또 그 다스림은 혼자서 할 일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을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통해서 해야 함을 안다. 그래서 이제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한다. 그분의 시키는 대로 따른다. 죽으라면 죽는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분이 자신의 모든 필요한 것을 알고 채워주시기에 생명을 유지하는 부분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정말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소망과 열정이 생기며 자연히 헌신과 충성을 바치게 된다.
물론 신자도 당장의 끼니나 다음 달 아파트 관리비가 모자라면 불안하고 염려가 된다. 불신자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여전히 연약하고 무능하며 불완전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가? 신앙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강한 믿음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간절히 간구하면서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까지 참아내면 되는가?
믿음이 의지력의 강도에 따라 좌우되는 인내력 테스트는 아니다. 불신자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염려 불안이 없어진다. 반면에 신자는 그 전에 염려 불안이 없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니까, 즉 다윗처럼 그분이 자신에게 그것들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니까, 그래서 내 생명을 앗아가는 그날까지 어떻게 하든 그것들은 당연히 채워주실 것이니까, 또 그러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신자가, 어쩌면 대부분이 주일 날 예배드리러 와서 오직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간구하는 것은, 또 그러고도 염려 불안을 없애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믿음은 어디 있으며 예배는 왜 드리는가? 기독교적 형식을 빌어서 이방인의 기도를 드린 것 밖에 더 되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안 다면 그럴 수는 없다. 호세아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는가?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지 않았는가?(호4:6) 교회에 와서도 오직 자기와 가족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구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또 망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만약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본문과 똑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다. 아니 알려고 하는 자를 찾기도 힘들다. 나아가 강단에서마저 하나님 그분을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적 사고와 철학이 난무한다. 성경을 성경대로만 제대로 가르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그분을 경배할 수 있는가? 왕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자에게 가서 무조건 부복한다고 상을 받을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 겉모양이 험상궂다고 강도인 줄 알고 무조건 먼저 손부터 쳐들고 지갑에 있는 것을 다 꺼내 줄 수는 없지 않는가? 불신자들이 하는 행태와 방불하다. 괜히 신령해보이니까 무당이니 점쟁이들이 오라고 하지 않는데도 먼저 찾아가 돈까지 바쳐 가며 항복하는 행태 말이다.
오늘 날 신자는 완전히 타종교인이나 불신자와 별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기독교 교인은 많아도 참 하나님을 믿는 참 신자는 드물다. 죄 안 짓는 선한 신자가 드물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기에 오직 그분의 의롭고 강한 손 안에 자신의 모든 존재와 삶과 인생을 온전히 붙들어 매고 있는 자가 드물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으며,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상관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우리가 당신과 원수 된 상태에서 그분을 심지어 저주하고 있을 때에도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꾸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지 않는가? 정말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달았으며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 긍휼 외에는 단 한 치의 소망도 없었다는 것을 철두철미 확신했다면 먹고 마실 것으로 염려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입만 앞서는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없다. 구원 이후의 남은 인생이 전부 빚 진 자로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단순히 의무감이 아니라 그분의 너무나 크시고 풍성한 은혜와 권능을 누리며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나아가 어떻게 주일 예배에서마저도 먹고 마실 것만 열심히 구하고 돌아가겠는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안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참된 경배가 사라졌다. 형식적이고 표피적인 예배만 판을 친다. 목사마저 십자가의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 아니면 알고도 다른 목적 때문에 일부러 안 가르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러니 예수를 모르는 신자로선 그저 자신의 안일만 빌 수밖에 없다. 정말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겠다. 진짜, 진짜 그래야 한다. 기독교 신앙을 제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 아니 그렇게 거창한 명분도 사실은 필요 없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부터 그 믿음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염려에 사로 잡혀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너무 경건하고 고상하고 신령한 측면으로 따지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그분의 온전한 통치를 제대로 받으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서 그분 앞에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죽이며 엎드리기만 하면 된다. 특별히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좀 더 알기 쉽게 말하면, 내일 먹고 마실 일로 염려 불안이 들면 공중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잠시만 진짜로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그분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묵묵히 그분과 함께 걷게 된다. 그분이 어떤 길로 인도하든, 때로는 굶기고 환난에 처하게 하든 그 반대로 풍요와 안락을 누리게 하든, 그 모든 길에 그분만의 영광이 언제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드러날 것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8/10/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