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삼하7:18-22)

조회 수 2362 추천 수 147 2008.08.24 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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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힘써 알자.(3)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7:18-22)



대양을 건너는 여객선이 큰 폭풍우를 만났다. 당장이라도 배를 전복시킬 듯이 집채만 한 파도가 끊이지 않고 덮쳤다. 중앙의 큰 홀에 모인 승객들은 불안에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한 소녀가 전혀 염려하지 않고 아주 밝은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었다. 어떤 승객이 “너는 겁나지 않니?”라고 물었다. 소녀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 배의 선장이 저희 아빠인데 제가 아빠를 잘 알거든요.”라고 대답했다.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온전히 의지한다면 어떤 환난에도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한 점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만약 예의 소녀도 선장이 평소에 잘 알아 무조건 믿고 따르는 아빠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여는 아이들처럼 불안에 휩싸여 울고불고 난리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한 지식이 너무 모자란다. 그 이유를 교회 쪽에서 찾으면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더 많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역으로 따지면 많은 신자들이 현실의 형통을 먼저 찾기에 그런 인간적 이야기를 더 좋아하게 되고 대신에 성경은 등한히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신실한 신자도 많지만 그들조차 여간해선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니까 문제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자주 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망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니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사 중의 하나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지능을 부여 받았다. 그 두뇌 능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실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용량의 5%도 채 안 될 정도다. 그런 우수한 지능으로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즉 실수와 죄악과 허물과 상처 등이 하나도 망각되지 않고 거듭 회상된다면 틀림없이 우리 모두가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두뇌는 자신에게 유익하지 못한 정보는 아예 저장하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 취사선택해서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 능력이 하나님에 대한 정보에까지 적용되니 문제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한 정확하고도 확고한 기억이 부족하면 자연히 믿음은 떨어지고 별것 아닌 문제와 환난에도 그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망각은 결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당신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말씀을 성경에 가장 많이 하셨다. 단순히 달래기만 하려는 뜻이 아니라 당신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면 신자와 맺은 언약은 당신께서 틀림없이 성취해 주신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망각 습관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말하자면 그분을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특성을 신자들은 오히려 가장 쉽게 망각한다. 그 특성이 무엇이겠는가? 본문에서 다윗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은 “광대(廣大)하신 분”이라는 점이다. 그분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다.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도무지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비유나 상징으로 형상화조차 할 수 없다.  

가장 실감나게 유추할 수 있는 크기를 가지고 한 번 따져 보자. 현대의 과학 지식으로는 우주의 지름을 500억 광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광년은 잘 아시는 대로 빛이 1년에 가는 거리다.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km 이므로 일 광년의 거리는 약 9.5조 km이다. 이 거리에 또 500억을 곱해야 하므로 우주의 크기는 도무지 숫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이, 아니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대하다. 한 마디로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어떠한가? 성인 남자라 해도 겨우 160-80cm 신장에 60-80 kg의 체중이다. 반면에 인간이 살고 있는 태양계의 크기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현재 개발된 최고 빠른 로켓트로 태양계를 다 통과하려면 10만년이나 걸릴 정도다.

그러나 그 정도는 기실 아무 것도 아니다. 전체 거리가 5광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태양계는 우주 전체에 비하면 먼지 정도 밖에 안 되고 거기다 인간은 태양계, 아니 지구 하나로 보아도 티끌에도 못 미친다. 우주는 분명 너무나도 광대하다. 그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더더욱 아예 말도 못 꺼낼 정도로 광대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광대는 당연히 정밀한 것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은 광대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세밀하신 분이다. 수학적으로 무한대에 이르는 극대에서부터 나노의 초정밀 세계에 이르는 극소를 다 아우르신다. 흔히 드는 예지만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만 더 떨어졌더라면 인간은 다 얼어 죽었을 것이며, 그 반대로 조금만 더 가까웠더라면 다 타서 죽었을 것이다. 지구는 반드시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이 위치에서 현재와 똑 같은 자전과 공전의 주기를 가져야 한다.

우주 전체로 보면 티끌에 불과한 태양계이긴 해도 빛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는 8분이나 걸린다. 현재 인류가 보고 있는 태양은 항상 8분 전 과거의 태양이다. 크리스천 저술가 필립 얀시의 이런 비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만약 한 쪽 발은 태양에 다른 발은 지구에 둘 수 있는 거인이 있다면 그는 태양과 지구를 8분의 편차가 없이 동시에 볼 수 있다. 얀시는 하나님은 당연히 그런 거인보다 더 크시기에 우주 전체를 다 한 눈에 내려 보실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주의 한 끝과 다른 끝에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분이다. 우주의 지름 500억 광년의 시차(時差)조차 그분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시간 밖에 계시기에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 아니 시간 자체를 만드셨다. 그분은 오직 영원토록 현재일 뿐이다. 그래서 태초부터 영원까지 자존하실 수 있음은 너무나 지당한 진리다. 모세가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2,4)라고 고백한 그대로다.

반면에 모세가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표현했는가? 그 수명은 지구에만 적용되는 시간으로 따져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 년일 뿐이며, 그것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라는 한탄이 따른다고 했다. 베드로 사도 또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고 당부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분에게는 지구상의 인간이 느끼는 하루나 천년이나 아무 구분 없이 항상 현재의 한 순간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 밖에 계신 분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나 그분의 당신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사랑과 공의에는 단 한 치의 오차가 없음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이다.

지름이 500억 광년이나 되는, 어쩌면 훨씬 더 넓을지도 모르는 이 광대한 우주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너머도 그 보다 더 광대하신 하나님의 영역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광대한 우주 전부가 그분의 것이다. 당신께서 시작하셨고 지금도 당신의 능력으로 아주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다. 결국은 그분에 의해 결말 맺어질 것이다. 그분이 빛이 있어라 함에 빛이 생겼다. 언제든 빛이 없어져라 해도 순식간에 없어진다. 이 광대한 우주를 단숨에 새롭게 바꾸거나 완전히 멸절시킬 수도 있다.

그분에게는 능히 못하실 것은 하나도 없다. 전우주의 모든(all thing) 것을, 어떤(anything) 것도, 모든 것을 하나씩(everything) 하실 수 있다. 그분 앞에 모든 가능성이 아무 거침없이 활짝 열려 있다. 이런 식의 설명조차 그분을 제한하는, 어쩌면 너무나 우스운 묘사에 불과할 수 있다. 어쨌든 그분은 모든 가능성 위의 모든 가능성이자 최고최선의 가능성이신 분이다.    

다윗이 실감한 광대하심

다윗이 하나님을 광대하다고 고백한 그 배경이 사뭇 흥미롭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에 블레셋 족속들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가나안 땅을 평정했다.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破)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하게 거하게”(삼하7:1) 하셨다. 그 결과 자신은 백향목 궁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데 반해 하나님은 장막에 임시적으로 거하면서 자주 옮겨 다니셔야 하는 것에 마음에 불편을 느꼈다. 그래서 성전을 짓겠다고 결정하자 선지자 나단도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3절)라고 적극 찬동해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했는데 일종의 꾸중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 당신께서 다윗을 택하여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고 또 모든 전쟁에서 승리토록 하였고 왕궁에 평안하게 거하도록 했는데 왜 죄책감을 느끼느냐는 것이다. 그분은 한 시도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않고 진중에 함께 거하면서 모든 일에 동고동락하셨다. 한 마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셨지 그들더러 당신의 집을 지으라고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끼리 통하는 말로 바꾸면 당신께서 굳이 대접 받으려고 그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은 당신의 뜻을 오해 내지 이해 부족에서 나온 인간적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꾸중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실은 잘 몰라서 한 일을 두고 야단치실 리는 없다. 하나님은 점잖게 알아듣도록 타이른 후에 오히려 더 큰 축복의 약속을 해주셨다. 다윗 가문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은 이스라엘 왕국이라는 현실 세계에서보다는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성취 되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7:11-16)

다윗의 계획은 말하자면 우주에서 티끌 크기만 한 지구에서 또 그 지구의 먼지에 불과한 한 인간이 500억 광년의 밖에 계신, 아니 그 전부를 다 포용하는 분의 집을 짓겠다고 덤빈 꼴이다. 비록 그분의 임재의 상징에 불과한 언약괘를 모실 집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태양을 항상 8분 뒤에야 볼 수 있는 인간이 천년이 하루 같은 자를 위해서 뭔가 큰일을 해드리겠다는 셈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고도 가소로운 일 아닌가?

비유컨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한 푼 두 푼 동전 모은 것을 가지고 아빠에게 당장 수백만 불짜리 저택을 지어주겠다는 것보다도 더 허풍 섞인 말이다. 인간 아빠는 아기의 정성이 아주 갸륵하긴 해도 도무지 말도 안 된다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랐다. 비록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에 대해선 깨우쳐 주었지만 다윗의 생각만은 진지하고도 기쁘게 받아들어 주었다. 아예 무시하거나 그저 웃고 넘기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하셨다.

나아가 다윗의 후손을 통해 당신의 위가 영원히 견고케 될 것이라는 언약까지 해주셨다. 다윗으로선 전혀 예상치도 않은 복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 죄송스럽다는 마음으로 성전을 짓겠다고 나선 것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안해 할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미안해하는 것이 당신께 잘못이라고 깨닫게 해주시면서, 그의 후손이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오백억 광년도 한 순간에 불과하며 모든 가능성 위의 가능성이신 그분께서 찰나 같은 인생을 살다 말 다윗에게 영원한 언약을 해주셨다. 다윗의 입에서 도대체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이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지 않겠는가? 그에겐 정말로 무한한 은혜일 수밖에 없다.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말씀하셨나이다.”라고 말한 그대로다. 특별히 선지자를 통해 인간 언어의 형식을 빌려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말씀해주었다고 한다. 그분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몸을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정말로 이스라엘의 장막 중에 함께 거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이해 가능하도록 말하신 언약이란 필연적으로 그 성취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아니 이미 확실하게 보장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윗도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라고 응답하면서 그분 앞에 완전히 꿇어 엎드렸다. 약속에 대한 재확인, 의심, 질문, 반발, 거부할 여지라고는 단 한 치도 없었다. 단순히 믿음으로 그 언약에 참여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 어떻게 성취되느냐를 가만히 지켜보는 일 뿐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로 다윗의 바로 앞에 임재하셔서 직접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주를 운행하는 선장이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아버지였고 다윗은 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단의 제일 큰 노림수

솔직히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다윗이 실감했던 광대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너무 부족하다. 그저 상식적으로 그러려니 하는 정도다. 실제 삶에서 그 광대한 은혜와 권능을 광대하게 누리기는커녕 아예 느끼지도 못한다. 어쩌다 조금 느껴도 너무나 쉽게 잘 잊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해 아예 망각한 채로 지내는 신자가 태반이다.

그럼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가장 큰 특성이란 잊어버릴 염려가 가장 없다는 뜻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이라 별로 괘념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핑계가 될 수 없다. 문제와 환난이 생겼을 때에 가장 위로가 되며 믿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특성이 바로 그분의 광대함이다. 그렇다면 평소 잊고 있었더라도 최소한 말씀 보며 열심히 기도하면 다시 그분의 광대함을 붙들 수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면 너무 이상한 것 아닌가? 신자의 믿음 외에 제 삼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흉은 바로 사단이다. 사단은 결코 신자의 믿음 자체를 없애려 들지는 않는다. 또 이미 구원을 얻어 성령이 좌정해 있는 신자에게 그런 일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신에 자꾸만 하나님을 축소하고 제한시키려 든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가능한 적은 하나님으로 보이게 만든다. 신자의 시야를 오직 눈앞에 벌어진 상황과 여건에 집중시키도록 한다. 아무리 궁리해도 문제나 환난이 이해가 되지 않게 하고 여간해선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여기도록 만든다. 당장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없어 불안에 휩싸이게 하며 새와 꽃도 천부께서 다 먹이시고 당신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는 까맣게 잊도록 한다.

현재 일어난 문제와 여건에다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억지로 구겨 넣게끔 만든다. 천년이 하루 같고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보시는 분을 기껏 당장 내일 먹고 마실 한 줌의 물질과 상호 비교하게끔 한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를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 정말 이렇게 속이 좁으신 분이지 몰랐습니다.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면 어디가 덧납니까?”이지 않는가?    

광대하신 하나님은 그 광대하심 그대로는 티끌 같은 인간을 바로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신께서 스스로 당신을 낮추어 인간의 규례대로 말씀하고 행하셨다. 자기 백성의 장막에 함께 거하면서 보호 인도하셨다. 그런데도 사단은 인간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게 하지 않고 자꾸만 인간의 규례 안에 가두게끔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처럼, 그가 사단의 간섭을 의식했던 못했던, 하나님이 인간의 집을 지어주시는데도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나서게 만드는 것이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광대하신 예수님을 인간의 의리 상 그렇게 하실 수 없다고 나서서 말렸지만, 본인은 의식 못했어도 사단의 장난에 완전히 넘어갔듯이 말이다. 티끌 같은 인간이 광대하신 하나님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없다. 광대하신 그분이 티끌 같은 인간에게 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그분에게 바칠 것이라고는 다윗처럼 온전한 믿음과 순수한 헌신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력 범위를 넘어서는 분이다. 우주 전체를 넘어 계신 광대한 분이지만,  동시에 티끌 같은 신자 각자의 심령 속에 와 계실 만큼의 광대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그분의 지성, 감정, 의지 또한 부여 받았다. 아무리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라도 성령이 우리 속에 와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에 따라 그 광대하심을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이해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바로 광대하신 분을 광대하신 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꾸 엄청나게 크게만 생각해선 안 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8-11)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인간의 것과 다르다고 했다. 크다고 다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큰 사과와 작은 사과 사이에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는가? 다르다는 것은 사과와 배가 다르듯이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한다. 최고 큰 사과와 제일 작은 배를 서로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하려는 자가 바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피조물과 창조주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고 그런 정체성의 차이에서 다른 모든 차이들이 파생한다. 본질이 서로 다른 차이란  본질이 같지만 단지 질적 양적으로 최대한도 차이나는 것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아니라 아예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과는 전혀 달라서 광대하신 분이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 엄청난, 아니 영원토록 매울 수 없는 간극을 단순히 자신의 위엄을 세우거나 인간을 곤경에 빠트리는데 절대 적용하지 않는다. 신경질적이거나 기분파의 하나님이 아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당신이 만드신 우주를 무한한 사랑으로 한 치의 차질 없이 공평하게 운행하시는 분이다. 당신의 입에서 나가는 약속은 절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지금 나단을 통해 언약을 받은 다윗에게 그렇다면, 그 언약이 완전한 모습으로 성취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 우리의 신앙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하나님답게 인정하는 것이다. 광대하신 그분을 광대한 그대로 내 믿음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그분을 내 신앙의 크기에 맞추어 재단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내 신앙에서 놓아주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에게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한 마디로 그분은 무조건 옳다고 절대적 신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결과도 내일 일만 염려하지 않는 정도가 되어선 안 된다. 자신의 인생의 일주일, 한 달, 일 년, 아니 내 평생, 나아가 영원까지 그분의 의로운 손에 붙잡혀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인생으로 천년도 그분에겐 정말 하루조차 되지 않는데 그분께서 당신만의 사랑과 권능으로 그 하루를 붙들어 주지 못 할 리가 있겠는가? 신자는 마땅히 날마다 그런 궁극적인 소망 가운데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 혹시라도 세상의 것들이 감사와 기쁨을 방해한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여서 내 믿음을 키우기보다는 그분의 광대하심을 계속해서 확실하게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신 가장 광대하신 일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무조건 질과 양적으로 광대하게만 생각해선 안 된다. 바꿔 말해 하나님에게 “능히 못할” 일이 없지만 절대로 “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완전하신 당신의 품성을 위반하는 즉, 절대적인 사랑과 공의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 당신을 외면, 거부, 배반, 저주까지 했다. 의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고 당신을 찾는 이조차 없었다. 모두가 죄악에 탐닉하며 피 흘리기에 바빴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죽어 마땅했다. 하나님을 알고 경배해 왔던 이스라엘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눈멀고 저는 희생을 형식적으로 바치면서 그저 현실적인 풍요와 안일의 복만 달라고 외쳤다. 심지어 더러운 우상을 거룩한 성전 안에 두고 함께 섬겨 가면서 그랬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일개 우상의 반열에까지 끌어내렸다. 당연히 모두 죽어 마땅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일순간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의 광대한 능력도 당신의 광대한 사랑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당신께서 인간의 몸으로 비천하게 이 땅까지 내려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 값을 지고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당신을 배반한 죄를 피해자인 당신께서 오히려 모든 것을 감수하며 용서해주시기로 한 것이다. 죄책의 형벌은 갚아졌다. 그분의 절대적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에서 동시에 완전하게 충족되었다. 이제 죄인 되었던 인간들이 그 사랑 안으로 진정한 회개를 하며 돌아오는 길만 남았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올 수 있었다. 또 광대하시기에 당신께서 심히 좋아할 정도로 최고 걸작으로 만들었음에도 낳아준 부모를 버리다 못해 원수가 되어 저주하는 완악한 인간들의 온갖 멸시와 비방을 당할 수 있었다. 급기야는 죽음을 받아 마땅한 인간들로부터 오히려 하나님에게 불경하다는 죄목으로 하나님 당신께서 죽임을 당했다. 인간이 이해하는 차원으로는 십자가 사건을 도무지 설명할 재간이 없다. 예수님이 바로 광대하신 하나님이었다는 이유 말고는 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광대함이 가장 광대하게 드러난 표시다. 죄에 찌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일이다. 광대한 사랑을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드러낸 것이다. 십자가 외에는 인류를 구원할 길이라고는 전혀 없을 만큼 광대한 사랑이다. 단순히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문제라면 그 방식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죄 값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대신에 죄인은 완벽하게 용서하여 새롭게 변화시키는 길은 십자가뿐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죄악에 찌든 이 세상과 인간들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식이 십자가다.

그렇다면 신자가 광대하신 그분을 가장 완벽하게 사랑하는 방식도 십자가를 통한 것뿐이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진리 됨에 수긍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 땅의 통치 원리가 십자가이기에 신자 또한 이 땅에서 제한되고 한 번뿐인 인생을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남을 위해 희생하는 모범을 보이라는 뜻이 아니다. 우선 사단은 신자로 하나님의 십자가 원리를 자꾸 망각하게 만들려 드니까 그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셨고 그 사랑 안에 들어 온 자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이 당신께서 정해 놓으신 영광의 길로 당신께서 이끌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죄인들을 치유하시고 이 땅을 공의롭게 다스리는 그분에게 전적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며 의존해야 한다.

신자가 싸워야 할 싸움이 바로 이것이다. 신자는 평생을 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단이 자꾸만 자기로 광대한 하나님을 잊게 만들려고 무시로 공작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든 의식해야 한다. 하나님을 너무나 작게 축소시켜 신자의 눈앞에 놓인 여건과 상황에 우겨 넣으려는 시도를 담대한 믿음으로 물리쳐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사단으로부터 좇아 온 것이다. 현실을 부인하고 염세주의처럼 살라는 뜻이 아니다. 현실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유혹으로 다가올 때는 그래서 그로 인해 예수님을 망각하게 될 때는 그 배경에 거짓의 아비 사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말하자면 의지적인 믿음으로, 사단을 이기지 못한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광대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전부를 그 광대한 영역 안으로 던져 넣어야만 이길 수 있다.  

최근에 신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로 바꾸면 큰 비전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이해하듯이 큰 비전이 자기 소원이나 계획을 질과 양적으로 키우는 것은 아니다. 크신 하나님을 크게 인정하는 것이 큰 비전이다. 말씀 한 마디로 500억 광년의 우주 전체를 창조하실 만큼 광대하시고, 그러면서도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광대하신, 그분을 광대하게 인정하고 확신하기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그 광대함의 한 부분으로 바치는 것이다. 이런 비전 없이는 아무리 계획을 크게 잡아 뜨겁게 기도해도 자신의 종교적 욕심을 키운 것이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든 것이 아니다.

신자는 정말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최소한 구원 이후의 삶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최우선의 길은 광대하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붙드는 것이다. 최소한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알아서 그분이 역사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자기의 좁은 가슴에 품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광대한 품속으로 자기가 뛰어 들어가야 한다.

지금 당신의 믿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크기는 얼마만 한가? 당신의 믿음의 크기를 물은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나와 다른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과연 어떠할지 가슴 설레는 기대감을 갖고 기도하는지 또 그리스도 안에서 수십 년 뒤의 거룩하게 변모될 자신의 모습을 그려가며 기도하는지 묻는 것이다. 아니면 당장 현재의 문제와 환난만 한 시라도 빨리 없애달라고 매달리고 있지는 않는지 물은 것이다.

8/24/2008    


날마다순종

2020.12.19 17:27:36
*.14.99.253

이 세상과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한량없는 무한한 사랑이 넘쳐나는 것임을 느낍니다. 그냥 너무나 따뜻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안에 잠기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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