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대비하지 말고 종말을 살아라.
사도행전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2:17‐21)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예수님의 제자 120명이 동시에 방언을 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베드로는 그 현상을 두고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말세에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면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꿀 것이라고 말한 그대로 실제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전 처음 보는 초자연적 현상이지만 하나님이 예언했고 또 그분이 성취했으니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선 그런 외적 현상에 크게 신기해 할 것 없으며,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바는 다른 데 있다는 뜻이었다.
베드로가 성전 마당에서 이 설교를 할 당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채 열흘이 안 된 서기 30년의 봄이었다. 예수님이 출생 후 33세에 돌아 가셨지만 현재 통용되는 서력기원은 실제로는 3-4 년 정도의 착오가 있다. 어쨌든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이 다 이루어졌다고 설교했다. 그럼 가장 먼저 서기 30년대 초반이 과연 말세인지, 또 그 때가 말세라면 지금은 어느 때에 해당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불신자는 말세를 세상이 종말을 맞는 시기로 이해한다. 신자는 거기에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행하는 시기까지 함께 감안한다. 그렇다면 주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의 종말은커녕 예수님이 과연 언제 오실지 막막할 따름인데 베드로가 설교했던 주후 30년이 말세라니 너무 말도 안 되지 않는가?
물론 작금 지구 환경과 기상에 종말적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당장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자칭 재림 예수라는 자들이 심심찮게 나타났지만 한 때의 이단 소동으로 그쳤을 뿐이다. 또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주장들도 많았지만 한 번도 그대로 된 적이 없었다. 예수님 당신부터 재림의 시기에 관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전1:7)”라고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셨지 않는가?.
주님의 재림은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그 본질상 인간에게는 영원한 비밀로 가려져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마지막 심판의 시기를 인간이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에 가식적이고 과장된 믿음을 가지려 할 것이며 강요된 회개도 성행할 것 아닌가?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거짓 믿음에 넘어가 심판을 굽게 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심판 날자가 코앞에 닥치면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앞서 진정한 회개와 중생이 드물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담이 최초로 한 한탄.
약 30 년 전 한국에선 남자들의 장발 단속이 한창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어른들에게는 젊은 남자가 여자처럼 귀가 덥히도록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것은 불량기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하나의 패션유행으로만 간주했기에 우등생이나 불량청년이나 할 것 없이 머리를 길렀다. 물론 장발로 인해 은연중에 자유분방한, 말하자면 어른들이 염려하는 불량기가 어느 정도 발동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죄와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어른들은 “요즘 젊은 아이들이 갈수록 어른 말은 안 들어 악해지는데다 남자가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다니 말세야!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그 30년 후 이전의 장발청년들이 부모가 되어서는 “남자가 머리에 염색하고 귀걸이까지 하다니. 세상은 정말 말세가 되었어!”라고 똑 같이 한탄하고 있다. 이조시대에는 남자가 머리를 길러 여자처럼 땋았다. 아직도 미개 사회에서는 남자도 귀걸이 코걸이 발걸이 등을 누가 많이 하느냐로 사회적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 유행이나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므로 그에 반한다고 윤리적 잘못으로 구분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인류 역사 이래로 노예 제도는 아무 죄책감 없이 통용되다가 근대에 들어와서야 겨우 폐지되었지 않는가?
그리고 간음과 동성애 같은 죄는 세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확고한 죄로 인식될 줄 알았는데 최근에는 이마저 상황과 사람에 따라 죄가 아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자유와 인권이 신장된 표시로 간주한다. 온갖 죄들이 인간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외적 모습이 갈수록 다양하다 못해 교묘하기까지 해서 선으로 둔갑한다. 그러다보니 절대적 선악간의 기준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전통적 윤리의 퇴보나 실종으로 말세에 가까워졌다고 보지 않는다. 개중에는 오히려 인간이 진보된 증거라고 자랑한다. 그 모든 배후에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단의 음흉한 술수가 도사리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윤리적 타락은 원죄로 부패한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상시적(常時的)이며 보편화된 현상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곧바로 장남 가인에게 그 원죄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지 시기심만으로 친동생 아벨을 살해했다. 그 후 죄는 거칠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갈수록 추악하고 흉포하게 변했고 인간을 아예 노예로 붙들어 매었다. 모든 인간을 자기 노예로 만들려는 사단이 배후에서 조종하기에 죄란 본질적으로 포만감을 절대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늘어나고 커져만 간다.
가인 이후 인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라. 아비와 두 딸이, 또 시부와 며느리도 성관계를 맺으며,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와 간음한 후에 그 부하를 전쟁에 보내어 죽이고, 무죄한 선지자들을 산 채로 톱으로 켜서 죽여 그 피가 땅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마저 저는 것과 병든 것으로 바쳤고,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해서 우상에게 바쳤고, 심지어 어른들은 자식을 잡아먹으며 생명을 부지했다.
성경은 결코 음란 폭력물이 아니다. 죄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유일한 종교 경전이다. 위에 예를 든 모든 죄악들이 불신자가 아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죄에 묶인 인간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가? 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자기들 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기록할 리는 없다. 인간더러 죄의 실상, 아니 자신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라고 하나님이 기록한 것이다.
죄의 뿌리는 결코 교육의 부재 내지 부족 혹은 열악한 환경 때문이 아니다. 예컨대 현대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최초 발생은 인간과 원숭이의 수간(獸姦)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수간이나 동성애가 오늘 날에 와서야 갑자기 생긴 죄가 아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줄곧 있어 왔다. 아담 이래로 인간 본성에 깊숙이 자리 잡은 흑암의 세력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원인이었으며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1:26,27).” 초대 교회 당시나 그 이전에도 동성애는 성행했었는데 그로 인해 정신적, 영적 피폐와 더불어 온갖 성병에 결려 이미 벌을 받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AIDS 가 동성애자들 사이에 쉽게 전염되는 것을 볼 때에 인간과 짐승, 남자와 여자로 엄격히 구별하여 창조한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천벌로 보아야 하듯이 말이다.
인간은 지역과 시대별로 그 정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항상 더럽고 추했다. 아무리 부분적 혹은 외양적으로 선해진 측면이 있었더라도 인간 본성에 자리 잡은 죄의 본질은 단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요즘은 완전 말세야 말세. 내가 클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쯧쯧!”이라는 한탄은 아담이 가장 먼저 했을 것 같다. 가인이 하는 짓을 보고 그런 한탄이 절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요컨대 신자도 윤리적 타락 여부만으로는 말세를 가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연 재해에는 차별이 없다.
최근 지구 환경과 기상이 황폐화되어 가니까 말세가 가까웠다고들 말한다. 기후가 미친 여자 널뛰기처럼 수시로 변해 아예 기상예보는 무용지물이 될 지경까지 갔다. 오존층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그 영향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쩌면 죄보다 오히려 이 문제가 지구 종말을 더 재촉할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갤럽사는 매년 미국성인들을 대상으로 종교의식에 관한 여론을 조사하고 있다. 주로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믿는가, 지옥과 천당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와 같은 아주 기초적이고도 보편적인 질문을 한다. 미국인들의 반응이 70, 80년대는 비종교적으로 흐르다가 80년대 후반부부터 지금까지는 오히려 더 종교적으로 변하고 있다.
죄악의 타락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누구라도 인식할 수 있고 또 환경오염으로 지구 온난화의 부작용이 급격하게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요엘의 예언처럼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날”이 실제로 곧 닥치지 않는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생활 여건도 말세 의식을 부채질 하고 있다. 집 밖을 나서기가 너무 불안하며 재정적으로도 도무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자연히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 신자는 늘지 않고 오히려 줄고 있다. 어떤 종교 내지 방식으로도 좋으니 마음의 위로만 받겠다는 것이다. 어디엔가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은 갖고 싶어 하지만 그 방안이 꼭 기독교는 아니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신자들은 도무지 신자답게 살지 못하며 교회도 말세를 염려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성스러워야 할 교회마저 썩어져 가니까 사람들은 말세가 더 가까워졌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동성애 죄를 저지르는 인간을 그 불의하고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두어 AIDS라는 병이 생기게끔 했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인간으로 끝없는 탐욕에 방치케 하여 환경도 함께 부패해지고 그로 인해 멸망케 되는 방식으로 심판하실 수 있다. 예컨대 광우병, 조류독감,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원인을 모르는 수많은 병들이 환경오염과 연관되어져 생겼지 않았는가? 지금도 치료법이 개발된 병보다 원인조차 모르는 병이 훨씬 많다고 하지 않는가? 작금 인간이 하는 짓들과 그로 인해 파생될 모든 상황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인간 스스로 파 놓은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꼴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히 흡족한 존재로 지으신 후에 첫 계명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처음 주신 계명이란 가장 중요하고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근본 명령이다. 또 인간이 죄로 타락하기 전에 주신 명령이라 외적 여건과, 특별히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명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다 아담의 죄로 인해 피조세계도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마땅히 인간은 왜곡된 피조 세계를 더더욱 아름답게 다스려야 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히려 죄악을 더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을 파괴시키고 있다. 그 필연적 결과를 인간이 다 덮어써도 마땅하며 또 이런 추세로 계속 나아가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 지구에 환경적 대재앙이 닥치면 어차피 똑같이 몰살한다. 아무리 혼자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쳐보아야 허사다. 지금이라도 모든 나라와 민족이 동시에 순간적으로 모든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에는 지연 파괴는 계속 진행될 것이다. 예상되는 재앙이 절대 연기되거나 취소되지 않을 것이다. 신자 불신자의 구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연 재앙으로 인간이 멸망해 버리면 예수님의 재림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오실 필요조차 없어지는데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무엇이었는가?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 인간의 죄악 때문에 땅을 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오해는 말아야 한다. 자연 재앙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피조 세계가 아담과 함께 이미 저주를 받았고 노아 홍수의 벌마저 받은 위에다 하나님 쪽에서 또 다른 벌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그분은 당신께서 이 땅의 만물에 부여 해놓은 운행섭리를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망친 결과까지 그분이 책임지지는 않는다. 반드시 인간이 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자연 재앙으로 인해 재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한 멸망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엄청난 피해는 겪게 되겠지만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은 아니다. 예수님도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마24:7)일 뿐이지 끝은 아니라고 했다.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죄악에 빠져 있었고 항상 전쟁과 자연 재앙이 끊이지 않는 역사를 살아 왔다. 말세를 가름할 기준은 따로 있다. 인간이, 특별히 신자가 정작 염려해야할 사항도 전혀 다른 것이다.
말세를 정하는 기준
말세를 정하는 기준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성경적 말세란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을 하러 오실 재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분의 재림의 가능성은 승천하신 직후부터 항상 열려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승천하시자마자 사실은 말세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 승천하신지 겨우 열흘이 지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한 것도 베드로의 해석대로 말세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물론 예수님이 승천하자마자 시간적으로 곧바로 오실 계획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재림에 대한 시기와 방식에 대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신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말세를 대비하며 살아선 안 된다. 대신에 이미 말세이므로 말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말세라면 그에 대비해서 신자 스스로 뭔가 준비하고 또 이루어야만 한다. 예컨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전도하든, 교회를 성장시키든, 자신의 영적 성숙을 이루든 간에 스스로 노력하는 일이 먼저다. 반면에 말세에 걸맞게 사는 것은 자기에게 이미 완전한 변화가 이뤄졌기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분이 되어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세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이 내려지는 때를 일컫지만 정확히 말하면 신자에게는 구원의 완성이며 불신자에게만 최후의 심판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결말은 어차피 심판으로 끝난다. 재림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도 말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구원에 더 초점을 두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가 종말을 주로 심판과 결부해 이해하는데 그 솔직한 속내는 종말의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 난처한 경우에 빠지지는 않게겠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지금 자기가 사는 모습이 하나님 앞에 도무지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면 심판을 두려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종말을 대비해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처럼 모순이 있는 말이다.
심판은 하나님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다. 노아 때에 땅을 더 이상 벌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신 정확한 이유를 다시 살펴보자.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지 않는가? 사람의 마음은 어느 세대나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따로 특별한 때에 심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피조물에게까지 구태여 피해가 가게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심판을 안 하겠다는 취소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유보하신다는 뜻이다. 언제나 심판은 예비 되어 있고 또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예정된 심판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인간을 더 많이 구원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심판으로 따지면 노아 이래로 분명히 한번은 더 남았지만 구원의 경우는 어떠한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다음에 다른 구원 방식이라곤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길은 아예 없다.
예수님이 실제로 재림하실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은 절대 없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듯이 예수님 이외 제2 제3의 메시야가 올 리도 만무하다. 재림의 때는 바로 내일인지 서기 20억년인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요엘이 말한 그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때가 바로 신자 각자에게는 말세다. 신자란 어떤 자인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안에 들어 온, 다른 말로 이미 말세 안에 살고 있는 자가 아닌가?
말세에 대한 신자의 바른 자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고 폭풍우를 잠재우는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적권능(神的權能)을 많이 보이셨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그 일을 비밀에 부치라고 당부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셨다. 주의 영화로운 날이 아직 아닐뿐더러 그 자체가 주의 영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광은 오직 십자가로만 나타난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렸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도 완전하게 드러났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4,5).”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하신 기도다. 창세전부터 계획되었고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던 그 영화가 바로 그 다음날 십자가에서 찬란히 빛을 발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역사적으로는 말세가, 신자 개인에게는 구원이 시작되었고 재림으로 그 말세와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흔히 이해하는 식으로 설명하자면 말세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 되었고 재림으로 오히려 말세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흘리신 당신의 피로 인류 영혼을 노예로 묶고 있던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셨다. 그 보혈의 은혜를 진정한 겸비함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의 사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당연히 지구의 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 당신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시고 이미 새 생명을 선물로 주셨지 않는가? 그것도 내 쪽에 아무 공로 없고, 심지어 그분과 원수 된 상태에서 오직 무한하신 긍휼을 입었지 않는가? 더 이상 무엇을 염려할 것이며 또 종말을 대비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1-35)
여러분들은 교회에 어떤 이유로 출석하는가? 지은 죄를 회개하면서 착하게 살고,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므로 하나님께 어려운 일을 간구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꼭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이유라면 구태여 교회에 안 나와도 된다. 집에서 물 한잔 떠 놓고 “비나이다!” 해도 되고 다른 종교의 예배처소에 가서 회개해도 된다.
교회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천국의 영광을 일부나마 이미 맛본 자가 그 은혜에 감사해 그분을 찬양하러 나오는 곳이다. 또 그런 자들이 함께 모여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길 왕국을 만들어 나가는 곳이다. 또 당연히 그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아직 그런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애끓는 열정과 헌신으로 넘치는 곳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란 십자가로 영생을 이미 소유한 자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절대로 인생의 전부 내지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한 자다. 따라서 그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반드시 이미 얻은 영생이 그 빛을 발해야 한다. 쉽게 말해 돈과 쾌락을 더 이상 추구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자신의 영혼에 채워서 거룩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죄악과 사단과 죽음의 권세에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을 세상과 사람들 앞에 보여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을 다 이루셨지 않는가? 지금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세상 끝 날까지, 다른 말로 재림이 언제 닥치든, 함께 해주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말이다. 왜 그렇게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없는가? 신자는 말세를 대비하려 하지 말고 십자가로 바뀐 자신의 신분과 특권에 대한 확고한 인식 아래 말세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하늘에 기사가 일어나며 땅에 징조가 있을 것이며 해와 달이 변하는 것, 쉽게 말해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 재앙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인간의 죄악이다. 인류가 멸망하는 원인은 오직 하나다. 끝까지 완악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 거부, 반발하는 것 때문이다. 정말로 모든 종족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 자연 재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 회개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이 지구를 조금만 태양에서 멀게 해서 순식간에라도 해결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 서로가 서로에게 주께 대하듯 한다면 모두 협력하여 이 땅을 아름답게 가꾸게 될 것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온 자는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이미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었다. 더 이상 정죄가 없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심판이 불시에 닥친다 해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재림 때에 신자는 영광 가운데 구원이 완성될 것이므로 오히려 벅찬 기대와 기쁨을 갖고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작금의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을 보라. 그야말로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라고는 하나님의 긍휼뿐 아닌가? 예수님이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주는 길 말고는 인류에게 과연 소망이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이미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그 소망의 뿌리를 심으셨다. 또 오순절에 만민에게 당신의 신을 부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셨다.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으며 앞으로 얼마가 될지도 아무도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는 하나 있다. 그리스도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 전과 후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미 구원 받아서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데 반해 그렇지 못한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심판뿐이다. 이미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자들은 그 이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평생을 두고 순간순간마다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선 신자에게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비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현재 말세를 살고 있는지 여부뿐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로 베푸신 모든 축복들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자꾸만 사라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애통해야 한다. 단순히 자연 재앙만이 아니다. 인간끼리 참 사랑으로 섬겨서 서로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를 부부관계나 부모자식 관계에서부터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신자를 바라보는 이 세대들이 동성애자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며, 아니 그보다 그 안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해주어야 한다.
신자가 말세가 두려워서 그저 구원 받는 데만 신경 쓴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비겁한 도피자로 밖에 비취지 않는다. 대신에 말세를 살고 있으면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자연히 그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당신은 솔직히 말세를 두려워하는가? 말세에 살고 있는가?
10/7/2008
오늘 분명하게 배우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말세를 두려워하는지 말세에 살고 있는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아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