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내면의 마지막 페이지
사도행전강해 (9)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행2:22-28)
의인은 없다.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입고 담대해진 베드로는 천하 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을 상대로 담대하게 설교를 이어갔다. 그 요점은 말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 약속이 얼마 전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말세는 이미 시작되었는데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며 그 이름을 불러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한 마디로 인간이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그럼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베드로의 설교에 동의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부터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설교의 결론을 맺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청중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사도들에게 되물었다.(37절) 자기들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구원의 방도를 제시했다.
바꿔 말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해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면 막상 말세가 닥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죄가 만연해도 자신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모두들로부터 존경 받는 자라도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자부한다면 아예 믿음, 아니 구원 밖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자에게는 기독교는 단지 자신의 학술적 종교적 지식 범주를 넓히는 장식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말로 자신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전은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자부하는가? 아니면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인가? 그럼 자신을 죄인 혹은 의인 어느 쪽이라고 생각했든 간에 그렇게 간주한 근거는 무엇인가?
자기를 죄인 혹은 의인으로 스스로 판별하려면 죄의 본질에 대한 자기만의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못하고 여부도 각자가 갖고 있는 죄에 대한 정의(定意)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떠올리는 죄의 모습은 살인, 강도, 폭력, 강간, 사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죄들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그 다음으로는 술, 도박, 성적타락, 사치, 탐욕 같이 도가 지나치게 방탕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도 상당히 자유롭고 의로운 자는 즉, 외견상 도덕적 인격적으로 의롭다고 칭송 받는 자들은 기독교 신앙 밖에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간과하는 아니 잘 모르는 죄가 또 따로 있다. 바로 말로, 나아가 생각으로 범하는 죄다.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마5:28)”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시기, 질투, 저주, 분노, 음란한 생각들 같은 것이다. 이 단계까지 오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해진다.
말하자면 윤리적 죄에서조차 엄밀히 따져 죄인이 아닌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도를 하다보면 많은 불신자들이 자기는 십계명을 어긴 적이 없으니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강변(?)한다. 살인, 강도, 폭력, 간음 같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죄의 본질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그런 범죄자들은 거의 모두 감옥에 격리되어 있기에 이 세상은 벌써 의인의 천국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 아직도 올바르게 살아가기에는 너무 힘들고 두려운 곳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꿈을 꿨다. 일생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장부를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결산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페이지에는 제법 큰 글씨로 자기가 지은 죄들을 적어 놓았는데 거의 대부분 기억났다. 바로 행동으로 지은 죄였다. 두 번째 장에는 작은 글씨로 제법 빽빽하게 적혀 있었는데 일부 생각나기도 했는데 말로 지은 죄였다. 세 번째 페이지에는 현미경으로 보아도 보일락 말락 한 글씨로 시커멓게 적혀있었다. 생각으로 지은 죄로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이제는 다 끝났는가보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장부에 아직 한 장이 더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그 장을 펼치자 글씨는 간 데 없고 완전히 새까만 먹지였다. “하나님 이 페이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이것은 바로 네 영혼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행동으로 지은 죄만, 간혹 말로 지은 잘못까지는 죄로 간주한다. 종교적 윤리적으로 상당히 경건한 자라야 생각으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반면에 정작 기독교에서, 정확히는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죄의 본질은 인간 내부의 완전히 시커멓게 변해버린 영혼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의 영혼은 부패된 채로 태어난다. 하나님을 외면 거부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분을 싫어하고 미워하기까지 한다. 오직 자신의 욕심과 기분대로만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죄다. 이 땅에서의 안락과 풍요만을 위해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추구한다. 또 그 원죄(原罪)로 인하여 다른 모든 도덕적 죄들도 파생된다. 예의 심판대 앞 사람의 경우처럼 마지막 장, 즉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부분의 시커먼 먹지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검은 먹물이 베어져 나온다.
불신자들의 죄 개념
나는 그런대로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심지어 교인들 가운데도 의외로 많다. 어쩌다 실수로 죄를 짓게 되면 세상이 워낙 악하고 유혹이 많아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었다고 핑계를 댄다. 또 세상에 적응하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었고 남들도 똑 같이 행동하니까 넌지시 죄가 아닌 것처럼 정당화하기도 한다. 나아가 자기 본성은 원래 선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끔 지은 그 죄들도 고치려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다시 안 지을 수 있다고 본다. 또 바빠서 그럴 기회와 시간이 모자라 그렇지 마음먹고 수양하면 진짜 선하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죄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그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한 베드로에게 풀어서 다시 설명해주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한 마디로 죄란 인간의 더러운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죄가 생겨서 인간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생각은 인간이 외부 여건 때문에 행동으로 죄를 짓고 말투가 거칠어진다고 본다. 또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때로는 나쁜 생각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 내면에 처음부터 썩어빠진 영혼이 존재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아니 영혼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으니 썩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한 마디로 인간 외부에서 발생한 죄가 인간 내부로 파고든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과 죄는 완전히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모든 원인과 요건이 인간 외부에만 있을 뿐이다.
불신자들이 죄의 본성을 이렇게 밖에 생각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행동으로 범하는 죄가 그 잘못된 결과나 파급 효과가 크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말로 범하는 잘못은 시비로 번져 멱살 잡고 싸우지 않는 한 상대에게 가시적 직접적 피해가 없다. 상대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까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생각으로 짓는 죄야 더더욱 문제 될 리가 없다. 아니 아예 죄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들에게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 또한 짐승과 달리 사고 고뇌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갖고 있는 존재이면서 말이다.
결국 죄마저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의 세계관 가치관이 그렇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이기에 이 땅에서 어떻게 하든 형통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풍요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거나 간혹 사후세계에 대해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도 구태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고 오히려 그곳이 더 중요하며 보이는 영역마저 관할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한다. 영원한 삶과 절대적 가치는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 필연적 결과로 죄의 범위도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저해하는 것에 한정한다. 쉽게 말해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결코 죄가 아니다. 그래서 동성애 같이 당사자끼리 좋아서 그것도 남에게 전혀 피해주지 않고 은밀하게 행하는 것은 절대 죄로 매도(?)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죄라고 간주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 죄의 기준을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과 상대의 기분 내지 현실적 피해에만 둔다. 하나님이 남녀를 엄연히 구별하여 창조한 질서와 당신의 피조물이기에 아름답고 거룩해야 한다는 기준에 의해 오히려 성적 범죄를 가장 중하게 다루는 기독교와는 정반대다.
세상은 결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아니하는 힘이 오히려 이 땅을 주관한다.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내면이 외면을 관할하지 외면이 내면을 주장하지 못한다. 비록 구체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인간의 모든 행동은 뇌의 지시를 받는다. 자동차가 스스로 과속하는 법은 없듯이 죄도 인간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다. 죄스런 행동, 즉 범죄(犯罪 crime)는 어디까지나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악한 성향, 즉 죄(罪 sin)에서 출발한 결과일 뿐이다.
다른 말로 인간의 영혼이 썩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오염되고, 우리가 악한 것을 생각하거나 계획했기 때문에 말과 행동으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나마 영혼의 썩은 냄새가 생각, 말, 행동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 나오기 때문에 인간의 진짜 실체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냄새가, 즉 행동의 죄는 훨씬 약하다. 숯검정 같은 먹지에서 검정이 베어져 나오는 동안 검정의 강도가 옅어지는 셈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또 생각나는 대로 하나 빠짐없이 자동으로 행동으로 옮겨진다고 가정해보라. 가장 먼저 부부끼리 서로 죽였을 것이다. 아니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부모 자식끼리 칼부림 났을 것 아닌가?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인용된 다윗의 고백을 보라.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했다. 자기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을 감사했다. 역으로 말해 썩어빠진 영혼을 그대로 두면 음부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대신에 영혼이 깨끗해져야만 죄에서 사함을 받아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된다는 것이다. 죄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의 요체가 썩었던 영혼이 썩지 않게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죄인이 죄를 짓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자라면서 나쁜 세상 때문에 죄에 물들어 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갓난아기도 엄마 젖이 적다고 신경질을 부린다. 그 정도로는 본능이지 죄라고까지 말할 수 없다면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도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본능 탓으로 돌릴 것인가? 그렇다면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말고 다른 차원의 잘못, 예컨대 서로 시기 질투하며 미워하는 것은 어떤가? 어린아이에게도 본능과 상관없이 고급한 사고활동이 수반되는 죄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부모나 선생이나 어른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느 부모가 형제들끼리 서로 시기하고 반목하라고 가르치겠는가?
순진하고 깨끗했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죄를 배운다면 맨 처음 죄 지은 자는 도대체 누구를 본 딴 것이며 어떤 외부의 영향이 작용한 것인가? 또 죄가 갈수록 자꾸만 늘어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가? 선조들에게 배우기만 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그 수자는 줄어야 하는데 늘어났다면 결국 후손이 새로운 죄를 첨가한 것 아닌가?. 오늘날도 원시 상태의 오지(奧地)에 가도 나름대로 죄와 도덕률은 다 있다. 죄가 잘못된 사회와 남들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욕하는 것도 살인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정죄하셨다.(마5:22,27). 불신자들은 악한 행위 후에 겉으로 잘못이 드러나야만 죄라고 간주한다. 살인이라면 누군가가 죽어 있어야 하고, 간음이라면 간부(姦夫)와 정부(情婦)가 반드시 성행위를 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바는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와는 상관없다. 형제를 욕함으로써 욕한 자가 스스로 형제의 자리에서, 또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음으로서 남편의 자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정작 있어야만 할 자리에서 이탈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썩었다는 것은 썩지 말아야 할 것임에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썩은 근본 원인도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 함에도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그분을 배반하고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끊기고 새롭게 사단과 유착되었다. 요컨대 죄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Seperation) 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연히 그 후에 파생되는 모든 과정과 결과도 이 원초적 분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죄의 일관된 본성은 내면적으로는 분리이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도 올바른 관계가 굽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죄가 사법적인 범죄나 도덕적으로 방탕한 죄거나 즉, 악한 행동으로 드러난 어떤 현상뿐이라면 감옥을 갖다 오면, 그 방탕한 생활을 그치면, 죄스런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후련해지고 깨끗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듯이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예컨대 남편이 외도했고 그 일을 아내가 용서했다 치자. 그러나 그 부부관계는 아무리해도 그 일이 있기 전으로 원상회복이 되지 않는다. 감정적 앙금이 평생토록 없어지지 않거나 이성적으로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완전히 사라지던지 간에 죄의 상처와 흔적은 반드시 남는다.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이 벌어진 것이다.
설령 남편의 외도를 아내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갔다고 쳐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아무리 해도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내를 맞대면 하면 괜히 부끄럽고, 심지어 아내가 없어도 까닭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단순히 미안하다는 감정과는 다르며 도덕적 죄책감의 차원도 아니다. 뭔가 구체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적 상태가 된다.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데 이는 지정의로 인식할 수 있는 자기와 실체적 자신(Inner Self)과의 분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 그 여파가 알게 모르게 아내와의 사이에 영향을 미쳐서 자신의 일부를 자꾸 감추려 든다. 아내가 그런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해도 이미 그 부부사이는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변질되었는데 둘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한 영적 동물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인간은 항상 그분과 교제해야만 진정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올바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며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마저 거부했다. 그분과의 분리가 일어나면서 그 영혼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 창조 당시 의도됐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참 인간으로서의 가져야만 할 정체성은 사라지고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 묶인 정체성이 그 영혼에 자리 잡았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영혼이 시커멓게 먹지로 변한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최초의 범죄를 살펴보라. 하나님의 금령(禁令)을 어긴 행동 자체는 사실상 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들어왔다. 사단의 유혹도 그와 하나님을 이간시키려는 데에 모든 초점이 모여졌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1,4,5)” 쉽게 말해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싫어해서 먹지 말게 했다고 꼬드겼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오히려 먹게 해서 당신 같이 위대하게 만들어 주셔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너희를 나쁘게 만들고 있다”라고 속삭인 것이다. 아담의 마음에 “아니 하나님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의심을 심어주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분리의 틈을 만들었다.
아담은 범죄 하기 전에, 말하자면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이미 죄에 물든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가 생기자 그분의 숨을 받아 쉬어야 할 영적 존재로서 기능이 정지되었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상실됨으로써 자신과의 분리마저 일어났다. 그리고 범죄의 모든 결과도 분리로 나타났다. 아담에게 지혜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만 깨닫고 두려워서 숨었다. 죄의 본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리다. 죄의 원인도 분리이며, 죄의 과정도 분리이며, 죄의 결과도 분리다.
구원을 얻으려면?
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 가지고 타고나는 스스로의 본성이다. 말하자면 태어난 이후부터 죄는 자동적으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단순히 죄의 습성이 태생적(胎生的)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는 중국의 유학자 순자(荀子)가 단지 인간의 윤리적 본성만을 다룬 성악설(性惡說)과는 다르다. 원죄는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되어서 사단의 조종 아래 묶여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인간 본성이 선한 모습을 띄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하나님을 배척하고 인간이 자신을 내세우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의 모든 선행은 사실상 자존심과 체면을 세우며 자기 자랑을 위한 목적일 뿐이다. 그 심령의 진짜 중심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따지면 여전히 참담한 죄에 불과하다.
죄의 본성이 이러하다면 구원의 정확한 의미와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도인지 그 이유도 밝혀졌다. 우선 하나님과의 굴절된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라, 교회에 출석하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죄의 출발이었으므로 그 분리의 틈새가 매워지지 않는 구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의 분리를 없애려면 인간부터 참 정체성으로 회복되어져야 한다. 만약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었다면 구원을 얻으려면 악한 행동을 그만 두고 선행을 많이 하면 된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 그들의 논리로선 타당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하게 인간이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고 한다. 그럼 그 구원도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싫어했던 원죄 하의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믿고 좋아할 수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길 말고는 없다.
밤중에 몰래 찾아와 구원의 방도를 물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7)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아주 존경 받는 바리새인이자 공회원이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며 율법에 능하며 구제, 선행, 금식, 기도를 성실히 행했던 자였다. 말하자면 당시로선 저 사람이야말로 법 없이도 살기에 천국에 일등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 받던 자였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새삼 구원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어찌하여야 할꼬라고 물은 것과 동일했다. 그로선 아무리 선행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남들에게는 감춰져 있지만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스스로는 도무지 깨끗이 씻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예수님이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지만 기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미리 아시고 그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바로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구세주였음을 믿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과의 분리가 없어지는 것인가? 또 왜 그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인가? 대답은 오직 하나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대우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체질이 진토 같고 사단의 노예로 묶여 있다는 정확한 실상을 오직 그분만이 아셨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모두다 세상에 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만 빼고는 한 결 같이 불쌍하게 여기셨다. 단 한 사람도 외부에 드러나는 육체대로 알지 않았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 종교가도 모든 인간이 내면에 갖고 있는 시커먼 먹지를 보지 못했지만 그분은 보셨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죄 값을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지불했다. 죄인인 인간을 아니 당신을 죽인 인간을 절대 견책하지 않으셨다. 아니 그들이 자기가 하는 짓을 모르니 오히려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빌었다. 다른 말로 너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 죄에서 구원 받으려 스스로 노력해도 절대 마음의 평강이 없었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라는 뜻이다. 지난 악행을 도무지 갚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선행을 하는 순간에도 죄의 시커먼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었고 앞으로도 도무지 그 미혹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죄의 본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으로선 하나님이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주셨다는 확신을 얻지 않고는 도무지 영혼의 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에게 침묵으로 선포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내가 이처럼(내 생명을 너희를 위해 대신 바쳐 죽을 만큼) 너희를 사랑한다. 제발 다른 모든 것은 생각지 말고 그 사랑만은 깨닫고 받아 들여라.” 인간이 죄에서 구원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오는 것뿐이다. 다른 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원래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이 예수님과 관계가 굽으면 다른 모든 관계에 굴절이 올 수밖에 없다. 마치 옷을 입을 때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첫 단추를 바로 잡지 않고는 그 다음 단추는 아무리 바로 끼운들 옷이 바르게 될 수 없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모르면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것이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않는 한 다른 모든 관계는 아무리 겉으로는 바로 서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허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 좀 더 선한 사람이 되어볼까? 아무래도 교회 가면 인생을 헤쳐 나가는 지혜와 환난을 이겨내는 믿음을 얻을 수 있겠지. 혹시 사후 심판이 있을지 모르니 예수 믿으면 영생을 준다고 하니까 믿어볼까?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저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전부 추하고 더러운 것뿐입니다. 제가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 아니라 제 영혼이 썩어 빠져서 죄는 자동적으로 따라 나왔습니다. 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죄를 적게 지을 수 있는지 방법이 아닙니다. 오직 저 라는 존재 위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 구원의 필요성이란 구원은커녕 죄의 본질이, 아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른다는 증거다.
예수 믿기 전의 자신을 생각해보라.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은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아니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 않는가? 먹고 마시고 자라고 공부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이르게 된 것이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한 것인 양 자랑했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 소리 쳤지 않는가?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절대적 사랑과 완전한 공의 앞에 이것 이상의 큰 죄가 따로 있겠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 땅에서 공중 권세를 행사하고 있던 사단의 모든 거짓 계략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또 사단에 붙들렸던 각 개인의 영혼을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셨다. 말세에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부어짐으로써 부패된 영을 거듭나게 했다.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었던 분리(分離)의 간극(間隙)을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메웠다. 하나님의 영으로 지금까지 먹지 같이 시커멓던 내면의 마지막 장을 양털같이 희게 표백시켜 주시는 길이 모든 죄인 앞에 활짝 열린 것이다.
하나님과 불화했던 인간인지라 양심적, 윤리적, 사회적, 사법적, 심지어 종교적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는 구원에 너무나 부족하다. 아니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이뤄지는 것이 없다. 잠간 죄책감에서 감정적으로 놓이는 것 말고는 말이다. 예컨대 부모님에게 불효했던 것을 뉘우치는 정도로는 자신의 전 인격체가 거듭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 분리된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시 화해되지 않은 한 절망뿐이다.
골고다 십자가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 그대로 섰을 때에만 나를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를 사랑하시며 매사에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분을 발견할 수 있다. 또 그 순간 지금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으며 내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아니 가장 큰 죄임을 확인하는 것이 구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행동과 말과 사고의 죄를 씻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그 죄들을 아무리 깨끗케 해도 마지막 영혼이 썩은 채로는 하나님과의 분리는 소멸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아직 행동과 말과 사고의 죄의 권세에서 완전해지진 않았어도 그 영혼이 독생자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당신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서 규정하고 다른 종교에서 지적하는 죄로는 결코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런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그런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즉,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착하고 선한 사람은 많다. 심지어 친구를 위해 대신 죽을 아주 의로운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는 진정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자뿐이다. 심령이 너무나 가난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만 간절히 부르는 자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물어보자.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그분의 이름을 어떤 의미로 불렀는가? 또 지금은 무슨 이유로 그분을 찾는가?
10/21/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