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게선 죄만 나온다. (행2:22‐28)
사도행전 강해 (10)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 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2:22-28)
모두 정답이면 정답은 없다.
베드로의 계속되는 설교의 초점은 하나님이 세우신 화목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죄를 씻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데에 모였다. 그런데 전도를 해보면 불신자와 항상 의견 충돌이 생기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땅을 창조하였고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존재는 대체로 인정한다. 비록 절대자가 어떤 분인지 또 인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신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가 죄인임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죄를 씻는 길이 꼭 예수여야 한다는 부분에 이르면 딱 막힌다.
사실 이 문제는 어지간한 말로서는 납득시키기가 어렵다.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의 거듭남”인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이뤄지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후 그분과 동행 하는 신자의 삶 전부도 특별한 기적이다. 구원에서부터 천국 가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너무나 오묘한 인도를 벗어나는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구원과 그 후의 삶은 인간이 정해진 규정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과 한 죄인이 은밀하고도 친밀한 관계가 새로이 형성되는 것이기에 제 삼자가 개입하거나 일률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죄의 본질부터 다르게 생각하는데다 기독교 구원 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無知)하다. 인간이 하나님과 이 땅에서부터 교제하며 동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금시초문이다. 이처럼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선 사실 잘 반발하지 못하고 또 설령 반발해도 크게 탓할 수 없다. 대신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구원의 길이 꼭 하나여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오래 전 한국에서 고등학교마다 입학시험을 자율적으로 보던 때의 일이다. 한국 최고 일류고등학교의 시험문제 중 한 문제가 합격자를 발표한 후에 또 다른 정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 하나에 답이 두 개였던 것이다. 그러자 카트라인에서 하나 모자라 불합격된 부모들로선 난리가 났다. 심지어 다른 불합격자 부모들도 덩달아 시험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데모를 했다. 정답이 두 개인 바람에 일대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민족마다, 문화마다 다를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천주교, 불교, 힌두교, 모슬렘, 몰몬교, 통일교, 개신교, 기타 종교들 모두를 다 옳다고 치자. 모든 종교가 정답인 셈인데 어떻게 되겠는가? 시험 문제 하나에 답의 보기가 만 개 있는데 만 개가 다 정답인 경우와 같다. 그럼 종교를 안 가져도, 즉 종교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다거나 아예 구원 받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정답에 속한다. 결과적으로 정답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진배없어진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뿐이다. 그 분께 죄 사함을 받아 천국으로 인도 되는 구원의 길도 당연히 하나뿐이어야 한다. 만약 모든 종교가 다 옳기에 아무 종교나 인간이 알아서 믿어도 된다면, 하나님 쪽에선 구원을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분이 인간 구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또 개나 소나 다 얻을 수 있는 그런 구원이 과연 유효하겠는가?
종교마다 장점은 있다.
모든 종교마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또 귀담아 들을 만한 가르침은 많다. 말하자면 인격을 수양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문제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심지어 이단이나 기괴한 사교(邪敎)라도, 비록 비정상적 방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얻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구태여 종교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도덕, 윤리, 철학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심리치료 등 얼마든지 방안은 많다. 그야말로 불신자들 주장대로 모든 것이 옳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구태여 동원될 이유나 필요가 없다.
솔직히 교회도 그런 목적으로 나오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수신제가라면 그마나 다행이련만 사람을 만나 교제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출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목적이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가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죽어서 영원한 운명이 갈라지는 차원의 이야기다. 종교마다 갖고 있는 장점을 비교 분석하자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
다른 종교들도 사후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는 한다. 그러나 기독교만큼 구체적이고도 확정적으로 언급하는 종교는 드물다. 무엇보다 각 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특성 자체가 다르다. 다른 하나님들이 주는 구원의 길과 내용은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도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도 구원의 길이 종교마다 아주 다양하다고 인정은 한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가 속한 시대와 문화와 사회에 견주어 가장 합당한 것을 고르면 된다고 주장한다. 종교 간의 비교를 통해 가장 합리적(Reasonable)이고 납득되며(Acceptable) 적합한(suitable) 것을 선택할 권한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에선 참선을 통해 득도하면, 몰몬교에선 규정된 수준의 선행을 하면, 유대교에선 민족고유의 율법을 준행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르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러는 것이 전적으로 논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그럴 수 없는 논리의 비약이다. 아니 앞뒤로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그들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한 분이고 구원의 길이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교 분석 선택이란 서로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만약 전부 똑같다면 구태여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무 종교나 가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비교하겠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만의 호불호를 따지는 취향의 문제에 속한다. 한 마디로 구원을 자기가 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가장 먼저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그것도 자기 취향에 맞게, 얻을 수 있다는 것부터 주장해야 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처음부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다른 모든 종교와 그 출발점부터 다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니까 그분이 보낸 독생자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기독교인들로선 기독교 구원이 잘못되었다고 반발하기보다는,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동일한 차원에서 유사한 것들 사이에만 비교 분석 선택이 가능하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구원의 길을 비교하는 것은 비유컨대 헤비급 권투 선수와 플라이급 유도 선수 중에 누가 더 강한지 시합시키자는 꼴이다. 그런 시합을 시키자고 덤비는 자가 바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우열(愚劣)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종류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 인간이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각 종교마다 제시하는 내용을 비교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과연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는지 아닌지 여부부터 선결해야 한다. 만약 자기가 선해질 자신이 있으면 구태여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찾아 볼, 아니 그 정도면 구원 자체도 필요 없다. 만약 스스로 자기 죄를 도저히 씻을 수 없겠다고 결론이 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야 하는데 바로 거기가 기독교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사후의 운명을 가름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선택하고 고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 결정하실 문제다. 당연히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만이 정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면 인간의 논리나 이성만으로는 그 본질은커녕 방식마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 이성만으로 모든 것이 납득되는 구원은 결국 인간이 고안한, 다른 말로 스스로 자기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전제한 구원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은 온갖 잡신들을 다 믿었던 옛날과는 다르다. 종교인이던 아니던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 분이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는 전제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어졌다. 유일신이 아니면 미신적 종교가 되었다. 하나님이 유일하다면 구원의 길도 유일해야 논리적이다. 하나님이 구원 문제로 인간을 혼란에 빠트리기 원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수많은 종교들이 다양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것이라서 그렇다. 한분 하나님이라면 인간이 알 수 있고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제시해 놓아야 한다. 여러 개를 진열해 놓고 너희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것이 오히려 비논리적이다.
십자가의 두 가지 요구
불신자들이 기독교 구원에 반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쪽에선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예수가 자기 죄를 다 감당했다고 하니까, 심지어 다른 종교와 비교 분석하여 선택하는 일마저 할 필요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라고 하니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죽은 로마의 한 사형수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의구심과 반발만 생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요컨대 자기의 구원은 자기가 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장 악한 자가, 기독교에선 하나님 앞에 다 동일한 죄인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분류에 따라, 여러 종교를 비교 해보고는 가장 약하게 선을 권하는 종교를 선택하면 그들 식의 논리로도 전혀 타당하지 않지 않는가?
반면에 지금 베드로는 기독교의 구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풀게 했으며(22절),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23절), 하나님이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24절)고 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고 죽이고 되살렸다는 것이다. 또 그 결과 다윗이 예언한 대로 우리 영혼이 썩임을 당하지 않는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개입된 부분도 베드로가 두 가지 언급하긴 했다. 우선 다윗이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 이후 근 천년이 지나서야 이 땅에 오셨기에 예언할 당시의 다윗은 자기가 말한 뜻을 구체적으로 몰랐다. 그의 예언과 구원이 직접 연관이 없다는 뜻이다. 또 예언이란 성령의 간섭이 있어야 되므로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뿐이었다.
두 번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인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한 그 죄목으로 죽였다. 말하자면 그분이 제시한 구원의 길을 완전히 부인 아니 무시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이 구원에 능동적으로 관여한 측면이라고는 아예 없었다.
그럼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두 가지 가능성밖에 남지 않는다. 그분이 정말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이든지 인간이 무시해도 될 만한 단지 한 명의 사형수였든지 말이다. 또 그 후속 논의도 논리적으로는 두 가지 결론으로만 이끈다. 만약 정말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로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실제로도 구원을 하나님이 이뤄주신다. 그 반대로 예수를 로마 사형수로만 간주하면 기독교도 단지 인간이 만든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는 아무 연관이 없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에서 선언하는 내용 자체가 예수만이 하나님이 베풀어 놓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므로, 아무리 여타 종교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려 해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다른 종교와 비교 검토하여 선택할 대상 자체가 아니다. 성경의 선언을 그대로 받든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내포하고 있는 본질상 인간의 지정의로 합리성, 논리성, 선호도를 논할 차원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분의 십자가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철저한 믿음에 의한 순종 아니면 철저한 불신에 따른 거부뿐이다. 또 실제로 인간들이 그렇게 반응하고 있지 않는가?
화해의 세 가지 방안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고 구원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 불화했던 자와 화해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협상을 하는 것이다. 양쪽 당사자들이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배상할 것은 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이다. 상호간에 제시된 모든 조건들이 서로 용납되고 만족할 수준이 되면 합의서를 작성해 서명하면 끝이다.
그러나 서로 협상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두 당사자가 대등한 자격과 조건을 가져야 한다. 자녀와 부모 간의 관계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더더욱 아예 그럴 사이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감히 무엇을 약속하고 어떻게 손해 배상할 수 있단 말인가?
두 번째 방법은 제3의 중립적인 중재(仲裁) 기관이 개입해 객관적으로 판단해 양쪽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양 당사자가 합의가 안 될 때는 필요하다면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 첫째 둘째 방안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인간의 방법으로는 그분과 화해를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방법은 당사자들이 무조건적인 화해를 선언하는 것이다. 만약 쌍방 간에 잘못이 있다면 양쪽이 동시에 화해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쪽이 전적 피해자이고 다른 쪽이 전적 가해자일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가해자가 아무리 용서를 구해봐야 피해자가 용납하지 못하면 그만이다. 반드시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일방적 용서의 선언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구원은 바로 이 세 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마저 무시 배반하여 그분이 은혜로 베푸신 선악과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피해자였고 둘 사이 불화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었다. 하나님 쪽에서 화해의 조치를 반드시 먼저 취해야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조치를 받아들여 무조건적인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하나님과 꼭 화해해야 할 만큼 그분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믿으면 이런 용서가 전혀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비논리적으로만 여겨진다. 만약 지금 자신이 선하거나 스스로 선해질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로선 구태여 하나님을 끌어넣을 필요가 없고 자기 노력으로 쟁취하는 구원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정말 스스로 희희락락(嬉嬉樂樂)하고 있었다. 영혼이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악에 빠져 죄를 즐기고 있었다. 인간 쪽에서는 화해를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았고 할 이유도 없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방식을 죄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자진해서 화해의 손길을 보낼 필요도 없고 그 반대로 하나님이 내민 손길을 잡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판국을 하나님이 오히려 더 불편하고 안타까워 하셨다. 인간이 처한 참혹한 실태와 궁극적인 결과를 다 아시는 당신께선 도저히 가만 두고 보실 수 없었다. 인간과의 화해 방안의 논리성을 떠나, 당신의 애끓는 긍휼 때문에라도 먼저 구원을 베풀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의 일방적이며 적극적 사랑이 십자가 화목제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근본 본체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일방적 화해로 초대했다.(빌2:6‐8).
하나님과 예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중재 조건으로 그 어느 것도 서로 상담(Negotiation)한 것이 없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잔뜩 화가 나있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이 한 일을 가상히 여기어 용서해 준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용서해줄 마음이 없었지만 예수님이 제가 대신 죽겠으니 저를 봐서라도 제발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식(式)이 아니었다. 하나님 스스로 당신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킬 중재자(仲裁者) 역할까지 맡았던 것이다. 죄로 타락한 영혼들이 사단의 노예로 묶여 있는 참혹한 상태를 너무나 안타까워하신 당신의 진심을 인간이 보아 알 수 있도록 십자가에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태초부터 작정하신 구속 계획을 때가 차매 당신의 아들을 통해 실현하신 것이다. 잃어버린 당신의 양떼를 다시 찾는 방법은 목자이신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는 것뿐이었다.
자력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절대 바꾸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죄(罪)를 취급하는 원리다. 죄악과는 근본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코 타협 양보 절충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거룩하신 그분과 죄는 아예 공존조차 하지 못한다. 더럽고 추하고 바르지 못한 어떤 것이라도 그분 앞에 가는 즉시 소멸되어버린다.
이미 죄로 완전히 물들어 있는 인간을 그 원리로 대하자면, 즉 죄를 완전히 없애자면 인간을 몽땅 죽여야 했다. 그러나 당신이 지으신 인간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선 그럴 수는 없었다. 죄의 권세만 파멸하고 대신에 죄인인 인간은 살리기로 했다. 당신의 절대적 원리를 적용하면서도 인간을 구원키로 한 최선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죄악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인간에게 제시함으로써 그 길을 따르는 자를 구원키로 한 것이다.
실제 사단에 묶여 있던 인간으로선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풀려날 수도 죄책을 갚을 길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권세를 깨트리고 건져 주고 죄책마저 탕감해주어야 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전 인류의 죄 값을 자신이 완전히 치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인간에게 부여하여 비록 죄악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더라도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하여 더 이상 죄의 권세에 묶이지 않도록 했다. 메시야만 죽이면 모든 인간을 자기 노예로 계속해서 부려먹으리라 속단했던 사단의 흉계를 완전히 깨트려버린 것이다.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회개하고 고쳐서 선해질 수 있음에도 기독교가 괜히 예수를 신격화 시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될 일을 구태여 심오한 종교적 용어로 포장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 스스로 죄를 극복하거나 죄의 권세에서 자유스러워질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기 훨씬 전인 수도승 시절에 스스로 구원을 얻어 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지은 모든 죄들을 생각나는 대로 계속해서 회개하였다. 얼마나 회개에 열심이고 할 것이 많았던지 고백을 받아주던 수도원장이 나중에는 귀찮아져서 너희 어머니를 죽인 죄만 안 지었다면 이제 충분하니 그만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루터는 하나님께 자신이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도무지 들지 않아서 회개를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하루는 6시간도 넘게 회개를 하고나니까 이제는 용서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쁜 마음으로 일어서는데 바로 그 순간 또 다시 회개 못한 죄가 생각나서 주저앉았다. 그는 영적 구도의 길로 고행, 선행, 성경연구, 가능한 다른 모든 방식도 다 동원해봤지만 한 결 같이 실패했다.
과연 우리가 루터보다 선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니 그만큼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회개하고 또 자기 죄 값을 갚기 위해 선행을 해보았던가? 인간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감히 주장하려면 실제 루터보다 더한 노력을 해본 후라야 한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든 후라야 그 주장이 실효성을 가진다. 그러나 지금껏 인류 역사를 통 털어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한 자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아니 진짜 루터처럼 했다면 예수를 믿어 구원은 몰라도 최소한 인간 자력으로 구원을 취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실토만은 나오기 마련이다.
예수 믿는 것이 자기에 적합한 구원의 길로 기독교를 선택한 것과 동의어가 되어선 절대 안 된다. 나로선 도무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오니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한다는 철두철미한 고백과만 동의어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공로가 오직 그분에게만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죄가 그냥 정상에서 얼마간 빗나간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만큼 어리석은 생각은, 정확하게는 죄는 없다. 인간이 조금씩 고치고 나아져 의로워질 수는 절대 없다. 우리의 죄 된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죄인이 무엇을 한들 이미 죄 된 본성에서 베어 나온 오염된 행위일 뿐인데도 그 죄 된 행위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구원은 오직 죄가 없으시며 우리와 화해하고 용서를 해주어야 할 피해 당사자이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다. 그분이 일방적으로 계획하고, 일방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일방적으로 죄 값을 치르시고, 일방적으로 부활하셔서, 일방적으로 택하신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예수님을 보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분이 오셔서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다. 인간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고 죽여버렸다. 그것도 죄를 회개하라는 한 마디 외침이 너무나 듣기 싫었던 것이다. 죄를 지적해주면 회개하면 될 것이지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거꾸로 분노를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회개하면 완전해진다고 우겨댔다.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였다.
하나님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보이셨다. 너무나 완악했던 우리를 오히려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씀과 행동으로, 결정적으로는 당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보장하셨다. 십자가에서 양팔을 벌리신 것은 아무 조건 없이 화해하자는 뜻이었다. 그 전에 당신께선 누구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그 모습 그대로 당신께로 나오면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인간은 내 쪽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체면과 자존심을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비록 하나님 앞이라도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를 없애버렸다. 그것도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다는 사람들이 율법도 없는 이교도의 손을 빌려서 말이다. 그러나 그분은 죽어서도 벌린 당신의 두 팔을 오므리지 않으셨다. 아니 죽어서 벌린 팔로 인해 비로소 구원을 확정지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의 영혼은 세탁하거나 표백해서 깨끗해질 수 없을 만큼 처음부터 더럽고 부패되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사고는 오직 자신만을 아끼고 최고로 내세우려는 습성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창조 당시의 하나님 영으로 채워졌던 자아가 사단의 지배를 받는 영으로 완전히 왜곡되어버렸다. 불완전하고 부패된 본성의 테두리 안에 인간이 갇혀 있는 한 거기서 나오는 자질, 능력, 인격, 양심, 감정, 이성, 지성 모든 것들 또한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는 영원히 구원을 절대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루터가 정말 열심히 회개하여 이제 되었다 싶었는데 또 다시 실패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불완전한 양심과 부패한 영혼으로는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간단한 진리를 몰랐던 것이다. 구원은 우리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뜻 아래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바로 그런 진리를 인간에게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대신 죄책을 맡아주지 않고는 루터처럼 영혼의 쉼이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뜻이다. 천하의 탕아였던 어그스틴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비로소 영혼의 쉼을 얻었다고 실토했지 않는가?
왜 예수여야만 하는가?
예수님은 전 인류를 향해 선언했다. "내가 길이요 진리와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분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가?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에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그가 미쳤거나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서 기록을 살펴보아도 그분은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순전한 정신과 죄에 오염되지 않은 영혼을 지니신 의로움 그 자체였다. 말씀과 행동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유일한 분이었다.
나아가 본인이 미치기는커녕 오히려 귀신 들린 미친 자를 고쳐 주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한다고 비방하자 주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마12:25) 요컨대 미친 자가 미친 자를 어떻게 좇아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고 선포했다.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면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당신께서 하나님이라는 선포는 그것이 맞는지 분석해 납득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아니 그런 선포 자체가 어떤 분석도 허락하지 않는다. 당신께서 미쳤다면 그냥 아무렇게나 허공을 치고 지나가는 한갓 잡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라면 진짜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임을 제발 알아먹으라는 뜻이다. 단순히 지식적 도덕적 종교적 깨우침에 속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오직 온전한 결단과 헌신만 요구하는 것이다. 죄에 찌든 인간을 향한 일방적인 용서와 화해의 선언이다. 다른 종교가 다 가치 없고 기독교만 바르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더러 자기에게 나오라 그러면 내가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겠다고 만천하에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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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물론 미쳤을 리는 만무하지만, 정말로 미친 짓을 딱 하나 했다. 유일하게 정신 나간 짓을 한 것이다. 바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것이다.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로 로마제국을 당장 무너뜨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을 배척한 자신이 선택하신 유대인과 그 백성을 대적한 이교도 로마인과 다른 모든 종족들이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때에, 한 마디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 원수를 위해 자기 스스로 한마디 변명과 반발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야말로 진짜 미친 짓이 아닌가?
인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인간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못 본체 눈감아 준 것이 아니다. 그냥 한번 용서하는 인심을 베푼 것이 아니다.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 죄를 아주 심각하게 간주했다. 철두철미 죄를 저주하고 분노하셨다. 죄를 그냥 잊어버리는 정도로는 유효한 용서와 화해가 이뤄질 수조차 없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심지어 자신의 진노와 저주마저 함께 안고 죽으신 것이다. 스스로 죽으심으로 하나님 자신과도 스스로 화해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씀처럼 죄의 문제를 더 이상 다른 구원의 길이 없도록, 애당초 다른 길은 없지만, 완전하게 근본적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후로는 어떤 흉악한 죄인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화해 후에 다시 죄를 짓더라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 것이다.
인간이 선행, 공적, 회개, 심지어 믿음으로 스스로 깨끗해져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교만이요 죄요 부패된 생각은 없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스스로 죽으시기로 작정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아주 고상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가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정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는 처음부터 더럽고 추하고 구제 불능이었다. 하나님 스스로 피를 흘리시고 살이 찢기는 길 외에 인간을 죄에서 구해낼 길은 없었다.
예수님을 영접하시오, 기독교를 믿으시오, 그러면 그 분의 피가 누구라도 구원해 주신다는 초청이 혹시라도 너무 싱거우며 납득이 안가는 방법이라고 여겨지는가? 여전히 미련하고 미친 짓으로 보이는가? 그럼 예수님이 미쳤는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여기는 인간이 미쳤고 멸망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모든 사랑이 완전하게 나타나 있다. 인간을 향하신 열심과 사랑 때문에 창세전부터 이어져 온 그분의 한숨과 고뇌와 뼈를 깎는 고통이 십자가의 핏방울로 승화되어 이 땅의 모든 죄인의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이다.
예수님 이후로 인간의 구원은 절대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이 100% 온전하게 드러난 십자가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다. 구원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결정할 일은 스스로 교만하여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 노력하던지 아니면 겸허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다. 아니 그 전에 평생을 두고 스스로 노력하여 온전한 영적 평강을 얻을 수 있을 지부터 판단해야 한다. 잘 판단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루터처럼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봐야 한다.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 정말로 죄 안 짓는 성자로 살든지 그럴 자신이 없으면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지 찾아는 봐야 할 것 아닌가?
재삼재사 말하지만 예수님은 미쳤거나 하나님의 진정한 독생자 둘 중 하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인간도 그 분에 대해선 배척하든지 영접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 밖에 할 수 없다. 그분을 단지 위대한 스승의 자리에 모셔두려는 것은 그분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욕하는 짓이다. 아니 그분이 인간에게 어떤 취급을 받든지 사실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그 짧은 생애 동안에도 전혀 괘념치 않으셨다. 어차피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도 그분은 미쳤든지 하나님이든지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분을 이 둘 중의 하나로 확실하게 판단하지 않는 인간이 오히려 비겁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분을 온전한 하나님의 독생자로 영접하는 자는 그분이 말씀하신 모든 은혜와 권능을 반드시 받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10/30/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