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성전 문턱을 넘었는가?
사도행전강해(15)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3:1-10)
기적에 대한 신자의 반응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것은 교회행사에 열심이었다기보다 아직도 유대의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경건한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로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성전이었기에 전도하기에도 가장 좋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생활상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에 그런 삶의 실제적 결과로 바로 등장한 것이 본문이다. 사도들이 행한 첫 번째 기사와 표적이기도 한데 그들이 성령의 권능을 입었음이 여실히 드러난 구체적인 증거였다.
본문을 접하는 신자들마다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사도가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는 기적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잘 믿으면 얼마든지 병도 낫고 기적도 맛보겠다고 기대한다. 기독교 신앙이 갖는 기적적 치유와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면서 위로와 힘을 얻는다.
그러나 정작 우리 중 대부분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기적은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나는 왜 초대교회 사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아니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런 권능으로 병 고침이나 이적의 은혜를 받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텐데”라고 소원하지만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기도, 찬양, 말씀, 나아가 은사 집회에 쫓아다니는 등 온갖 노력을 다 경주해보아도 특별한 능력을 맛보지 못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믿음이 모자라는가보다 실망하다가 그런 실망이 겹쳐져 아예 기적에 대한 소원과 기대를, 아니 기적에 대한 믿음조차 포기해 버리고 만다. 비유컨대 대부분의 신자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별거와 결합을 반복하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혼해서 따로따로 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열심히 기도와 금식 해보고 철야도 했는데 기적이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야. 심지어 응답 되지 않은 기도가 더 많아.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바르게 살고 믿음만 성장시키면 돼.”
그럼 결국 어떻게 되어 버린 셈인가? 하나님의 권능은 포기하고 자기 인격과 믿음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성숙하고 좋은 신앙이 되었다. 오랜 기간 대체 무엇을 위해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한 것인가? 신앙으로 이뤄낸 것이 하나님의 권능을 포기하는 꼴 밖에 더 되었는가? 그러려면 아예 미리부터 포기하는 것이 좋지 왜 괜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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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성적으로 깨어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이적은 아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는 과학이 발달되지 않아 사람들이 무지했고 미신적인 종교관마저 가졌기에 그 수준에 맞는 계시의 방식으로 기적을 허락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꼭 눈으로 봐야만 믿을 것이기에 큰 능력을 겉으로 드러내보였던 것뿐이라고 해석한다. 요즘처럼 과학과 의술이 발달되어 사람들이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때는 기적은 아무 의미가 없기에 하나님이 구태여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적이라는 초자연적 현상 자체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 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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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 현대의 신자들은 기적을 가능한 신앙과 결부시키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의 기록을 신화로 이해하여 상징적 의미만 찾으려 하고,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고대의 역사로 보고 그 교훈만 깨달으면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심정적으로는, 믿음이 아니라, 그런 초자연적인 신령한 능력이 자신과 지기 주변에도 나타나주길 은근히 기대는 하지만, 실제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했기에 짐짓 관심을 다른 곳에 돌려버린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이나 신약 서신의 교리에 관한 부분만이 신앙 성숙에 가장 도움을 많이 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에 관해 보이는 이런 잘못되거나 부적절한 반응은 너무 기적의 외적인 면만 보기 때문에 생긴다. 설교도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가 보라, 그 능력을 믿어라, 간절히 기도하여 체험하라는 단순한 권면이 주를 이룬다. 여전히 신자로 하여금 기적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권면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데 구태여 그 점을 다시 강조해 봐야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역설적으로 따지면 신자들이 자기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만 하는 데서 오히려 더 기적을 맛볼 수 없다. 기적은 신자가 소원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당신의 전적 주권에 따라 당신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어떤 기적을 꼭 일으켜야만 했던 당시 상황과 그분의 뜻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 신자에게 기적을 베푸실 리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는 기적을 소원하기 이전에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시기 원하셨던 목적과 영광을 성경을 통해 반드시 탐구해야 한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그분의 능력 외에 정말로 풍부한 영적인 은혜를 성경의 모든 기적 속에서 발견해낼 줄 알아야 한다.
성경말씀을 더 깊이 깨닫는 법
성경은 참으로 우리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는 생수의 무궁무진한 보고다. 파면 팔수록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깊이와 넓이가 더욱 커진다. 다른 말로 파지 않으면 항상 얕은 채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팔수록 더 깊어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배워서 알고 있는 의미보다 성경이 실제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최소한 성경을 그런 열린 귀와 눈으로 보아야 매일 매일 새롭고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된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말씀의 심오한 깊이를 비교적 쉽게 맛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자신이 어떤 기사의 실제 인물이 되었다고 가정해서 묵상해보는 것이다.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서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면 예사로 지나쳤던 사실들이 새삼스레 깨달아진다. 예컨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장면에 자신을 대입시켜 보라.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수치가 더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본문에는 1절에서 10절까지 베드로, 요한, 앉은뱅이,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자들, 성전 안에 있는 인물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누구라도 되어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먼저 베드로에 대입하려 들 것이다.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가?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신실하게 기도하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나타나겠지. 아니 제가 꼭 남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까지 가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제 가족이 아플 때만이라도 간절히 기도할 테니 낫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될 줄 알고, 아니 된 줄 믿고 감사합니다. 아멘!”
그런데 가만히 따져 보면 이런 묵상 내지 기도는 너무 엉터리다. 당당히 베드로가 되고 싶다고 소원해 놓고 어느새 자신을 앉은뱅이의 자리로 내려 앉혀버렸지 않는가? 베드로는 기적을 베푸는 자였지 받는 자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기적을 베풀고 또 그 기적을 받는 자가 되겠다고 덤빈 것이다. 한 사람이 능력 있는 사도였다가 동시에 아직 믿음도 없는 걸인이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그저 바라는 것이라고는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니 기도라는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행했다는 핑계로, 하나님이 반드시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셈이다. 어려운 자를 위해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섬기기보다는 종교적 겸손을 가장해 자기만 기적적 은혜를 받고 싶은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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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요한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곁에 가만히 서있는 조연은 아무 생색이 안날 뿐 아니라 이 기적에 어떤 역할도 맡은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능력도 없고 생색도 나지 않는 자를 본받으려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베드로가 말로써 능력을 나타낼 때에 틀림없이 속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본문이 “요한으로 더불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베드로 혼자만의 믿음과 수고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어쩌면 요한이 함께 있지 않았다면 기적이 안 일어났을지 모른다. 율법이 증언의 효력을 규정하는 대로 그는 이 사건을 후대에 전해야할 증인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나중에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에 당사자 베드로 혼자만의 간증으로선 객관성을 입증하지 못할 것 아닌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성취하는 자로, 즉 합심 기도의 능력을 보증하고 증언의 효력을 입증하는 자로 현장에 있었다.
신자는 요한 같이 은밀히 일하는 자에 더 초점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제대로 부흥하려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행하는 신자들이 더 많이 나와야, 아니 모두가 그래야 한다. 스스로 낮추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큰일을 맡기시고 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정작 더 문제는 정말 거의 모든 신자가 성전 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에 자신을 대입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앉은뱅이 같은 장애자가 아닌 다음에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기사를 성경에 포함시킨 뜻은 오히려 그를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서다. 실제로 신자들 중에 베드로 같은 자는 거의 드물다. 우리 모두 앉은뱅이와 방불한데 어찌 자꾸만 베드로의 자리에 자기를 대입시키려 드는가? 물론 베드로처럼 되기를 소원은 해야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엉터리로 소원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앉은뱅이에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기사마다 사도들 외에 그 사건 특유의 주역이 따로 있다. 연극에 비유하면 사도는 주로 예수님을 대신하거나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는 입장이다. 신자가 자기를 대입시켜 맡을 역할은 우리와 비슷한 자들이어야 한다. 아무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 본문의 실제 주인공인 앉은뱅이가 되어서 성전 미문 앞에 앉아 보기로 하자.
앉은뱅이가 되어 보아라.
본문에는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시간은 제 구시 기도시간이었으며,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 불구였으며,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했고, 매일 자기를 들어 메어 성전까지 데려다 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고,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경배하러 오는 자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본업이었다.
우선 유대시간 제 구시는 성전에 기도하러 모이는 오후 3시를 뜻한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나가기에 구걸하기에는 황금시간대였다. 바로 그런 시각에 자기 앞을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청했다. 평소에도 성전을 들락거렸던 사도들인지라 아마 이 걸인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무심코 지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 구걸 요청을 듣고는 비로소 그의 존재에 관심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걸인더러 도리어 자기들을 주목해 보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앉은뱅이는 아주 많은 돈을 주려는가보다 기대했을 것이다. 다들 기도시간에 쫓겨 동전 몇 개 던져주고 계단을 오르기 바쁠 텐데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은 거지로선 특별한 사건이었다. 우리도 거지에게 돈만 던져주지 말을 거는 법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사실상 일반인이 거지에게 볼일이라고는 돈 주는 것 말고는 없으니 특별한 사건이란 바로 특별히 많은 돈을 받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돈은커녕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 한마디뿐이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돈이나 한 푼 주고 말 것이지 나면서부터 불구자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걸으라니,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들이다대면서 말이다. 그의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했는가? 거기다 억지로 잡아 일으켜 세워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쉽게 일어서진 것이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라는 표현은 발바닥과 복숭아 뼈가 있는 발꿈치에 갑자기 새 힘이 솟아났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걸은 정도가 아니라 뛰기도 한 것이다. 아무런 보조기구, 약품, 의술, 심지어 주술이나 주문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에게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두 사도가 그에게 준 것은 은과 금, 옷 같은 물품, 따뜻한 위로의 말 등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었다.
아마도 사도들로선 이 일을 결코 사전에 의식하고 계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리부터 그 앉은뱅이를 두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시면 그와 주변 사람들 전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도들과 걸인의 최초 접촉이 앉은뱅이의 요청에 의해 일어났음이(3절) 그 사실을 입증한다. 사도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인도에 따랐을 뿐이다. 두 사도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걸인을 주목하며 예수의 이름을 담대하게 선포하였더니 하나님의 큰 역사가 그 자리에서 즉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이미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녀가 되었고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땅에서 매기를 자주 하고 있는데도 어지간해선, 아니 평생토록 남을 일어서게 하거나 자신이 일어서거나 간에 기적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남에게 주지도, 지금 앉은뱅이의 입장에서 따져야 하니까 받지도 못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예수의 이름 자체에는 아무 권능이 없는 것인가? 둘 다 아니지 않는가? 그럼 도대체 우리는 왜 그런 기적을 맛보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솔직히 그저 건성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진심으로 간절히 빌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아가 우리의 정욕으로 쓰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선한 뜻으로 구하는 데도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의 신자가 기적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문제가 많다. 기적은 하나님 스스로 당신이 만드신 섭리와 자연법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런 기적이 필요한 자에 한해서만 일어난다. 다른 말로 신자들이 무조건 아무 때나 기적을 달라한다고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적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에게 그 기적이 왜 꼭 필요해야 하는지 확신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 기도를 하더라도 그런 확신을 붙들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본문의 앉은뱅이의 경우도 그에게 기적이 꼭 필요했던 이유부터 살펴야 한다.
그럼 당장에 이런 반발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그렇게 어렵게 말할 것이 있는가? 아니 앉은뱅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일어나 걷는 것 말고 무엇이 있는가? 그 필요를 하나님이 아시니까 일으켜 세운 것 아닌가? 우리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병이 낫는 것이요, 지금의 경제적인 쪼들림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안정된 직장이 생겨야 되는 것인데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아시고도 해결 안 해주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입장에선 충분히 이해가 되고 어느 정도 타당한 반발이긴 하지만 결국 처음 의문을 제기했던 입장, 즉 왜 신앙에 아무 하자가 없는 우리에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의아심에서 하나도 진전된 것이 없다. 그러니까 더더욱 앉은뱅이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면밀히 묵상해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팔자 편한 거지
성경을 볼 때에 기록된 문자, 즉 내용만 보고 그 행간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신앙이 항상 그 자리에 머물거나 맴돌고 만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본문의 앉은뱅이에게 가장 필요했던 일이 사실은 일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로선 일어서서 걷고 싶은 마음이 단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자는 그 상태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의 큰 불편 없이도 살 수 있다. 아무리 남들이 걷고, 뛰고, 구르는 것을 볼 때 부러운 마음이 들고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겠지만 걷고 뛰는 실제의 상황을 정확이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지금껏 앉아만 지내온 상태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얼마나 더 좋은지 비교할 수 없다.
예컨대 나면서 봉사인 경우 빛이 어떤 것인지, 본다는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상상도 못할 것 아닌가? 그저 세상은 다 컴컴한 줄 알고 거기에 길들여져 사는 법이다. 정상인이 갑자기 시력을 잃거나 다리가 불구가 되면 미치지만 태생적인 불구는 그 상태에 적응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앉은뱅이는 당시에 40세였는데(행4:22), 나자마자부터 그만큼 불구로 지냈으면 불편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일어서보겠다는 꿈도 이미 포기한지 오래일 것이다.
나아가 금과 은도 사실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매일 구걸하면서 살지만 돈이 궁할만큼 어렵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또 매일 그를 메고 와서 성전 앞에 자리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미문은 사람들이, 그것도 돈 많고 경건한 자들이 가장 많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 열심히 실천한 일이 세 가지 있었다. 모세오경에 나온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면서 문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외면할 리가 없었을 것 아닌가?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서울 명동입구의 지하도 앞에서 구걸하는 것과 같다. 그 자리는 그런 세계에서는 권리금만도 어마어마한 곳으로 소문나 있다. 심지어 그 거지들이 자가용으로 출퇴근한다고 하지 않는가? 성전 미문은 말하자면 유대 전국에서 구걸하기에는 제일 좋은 요지였다. 당시에도 거지조직은 있어서 서로 나눠먹기를 했을 것이기에 매일 들어 메고 나오는 사람이 따라붙을 만했다.
바꿔 말해 이 앉은뱅이는 사실 이스라엘에서 제일 팔자편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40년간 일 하나 할 필요 없이 남의 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았던 자다. 일어나 걸을 필요도 사실 없었다. 일어나 걸으면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기 생업을 포기하고 남들처럼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지 않는가? 솔직히 제 같아도 한 40년 그렇게 살아 왔으면 구태여 일어서느니 그냥 그대로 편하게 살기로 마음먹었을 것 같다. 물론 일어서고 싶은 소원은 항상 있었겠지만 최소한 무조건 그 소원만 붙든 것이 아니라 현실적 안락에 더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앉은뱅이의 평생소원
이 앉은뱅이가 절실히 소원했던 것이 일어나 걷는 것도 아니요, 금과 은도 아니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성전 문턱을 한번 넘어 보는 것이었다. 레위기 21:17‐20을 보라.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그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비록 이 말씀이 아론 제사장의 자손에게 하는 말씀이지만 일반백성도 율법에 규정한 부정한 상태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반드시 부정을 제거하는 결례를 규정대로 거쳐야만 했다. 말하자면 앉은뱅이 같은 핸디캡은 그 평생이 율법 상으로는 부정한 상태라는 의미로 성전의 미문 앞에까지는 와도 그 문턱을 넘어 본 적도 볼 수도 없었다.
그가 40년간 가슴 속 깊이 눈물 흘리며 바라고 바랐던 소원은 성전 문턱을 한 번이라도 넘어서 제단에 하나님의 성물을 바쳐보는 것이었다. 물론 구체적 기록이 없어서 그의 여호와 신앙의 수준이 온전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태어나 그 사회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한에는 기본적인 믿음과 율법의 규정을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을 두고 그 신앙공동체에 소속원이 되기는커녕 한 번이라도 제대로 교제를 나누지도 못했다. 나아가 절대 제사조차 못 드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혔을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성전 제사를 못 드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영영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선 현실에서 겪는 환난의 원인을 윤리적 죄 탓으로 돌렸다. 또 불구도 조상이나 본인의 죄가 원인이라고 간주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나면서 소경인 자를 두고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2)라고 물었을 정도다.
물론 그로선 자기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평생토록 부정한 죄인이라 사람들이 자기를 상대해주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만은 결코 편할 리가 없고, 아니 항상 찢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새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이 완전 상실된 채 계속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먹고 살기에는 불편한 것 없고 심지어 가장 팔자가 편한 셈이었지만 도무지 인생에 의미와 가치라곤 없었다. 육신의 껍데기만 하루하루 유지하고 있을 뿐 텅 빈 내면은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맹인가수 모씨가 절규하듯이 부른 노래 제목 “어머님 왜 날 낳으셨나요?”가 그의 뿌리 깊고도 처절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꼭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오래 전 서울시내 소공동의 한 포장마차 주인은 최고급 승용차를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다. 워낙 요지에서 장사를 한지라 그만큼 돈은 잘 벌었다. 가게의 주요 고객인 무역회사 직원들은 아예 자가용을 살 꿈도 못 꾸던 시절에 말이다. 차를 가까이 있는 주차장에 세워두고선 혹시 단골손님이 취해 인사불성이 되면 자기 돈으로 대리 운전기사를 붙여서 집까지 태워주곤 했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고객관리 차원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기가 월급쟁이들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할지라도 무역회사 말단 직원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해외출장 갔다 온 여행담, 바이어를 만나 씨름하여 오더를 따낸 무용담, 간간히 영어 일어를 섞어가며 알지도 못하는 전문용어로 시국과 경제를 토론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자기 신세와 비교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우동국물이 따뜻해도 자기의 텅 빈 가슴은 데울 수 없었던 것이다. 돈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열등감을 자가용으로 선심 쓰는 우월감으로 조금이라도 삭혀보려던 것 아니겠는가?
성전 문턱을 한 번이라도 넘어보고 싶은 소원, 신앙공동체 안에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정죄감에서 벗어나고픈 열망, 자기도 자신을 용납할 수 있는 열등한 심리상태,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급함 등등 그의 가슴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은과 금을 다 채워 넣어도 더 채워야 할 곳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한마디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궁극적 존재 즉,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던 것이다. “그 분께 용납만 된다면 이제껏 빈껍데기같이 아무 의미 없이 살았던 내 인생의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을 텐데... 아니 한 번이라도 그런 기쁨을 누려 봤으면... 내가 다른 모든 이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만이라도 인정받아 봤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모든 이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며 특별히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애통해 하는 이의 곁에 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 그 걸인의 평생 소망을 보고 구원을 베풀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적절한 방안으로 자신의 자연법칙마저 잠시 깨트리기로 하셨다. 나면서 불구 즉 평생 죄인으로선 그 불구가 나으면 바로 그 죄책에서 벗어났다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에서 구원이 먼저였고 기적은 다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시에 베드로와 요한을 성령으로 인도하여 순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선포하도록 하신 것이다. 구세주의 이름을 그에게 주라고 베드로의 내면에 전할 말을 심어 주었다. 말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그에게 준 것이다. 단순히 일으켜 세워서 이제 마음 놓고 활동하라고 걷게 해 준 것이 아니었다. 성전 문턱을 넘기게 하기 위해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권능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증인이 많은 장소와 시간에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일어난 앉은뱅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지 않는가? 운동장에 가서 시험해 보는 것도, 자기 부모나 가족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도, 동료나 이웃 사람에게 자랑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두고 마음 놓고 목청껏 불러보고 싶었던 여호와를 불렀다. 성물을 드려보고 싶었던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부정이 제거되고 죄가 씻긴 자기 자신부터 드렸다. 특별히 그들(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들어갔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체험했음을 함께 증거 하러 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재차 강조하지만 기적은 하나님의 당신의 법칙을 깨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그 자연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역으로 말해 자연법칙 안에서 가능한 일은 아무리 굳건한 믿음으로 뜨겁게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본질적으로 기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병원에서 완전히 포기한 말기 암의 경우처럼 기적이 아니면 다른 대책이 아예 없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만약 그런 이유만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신자가 말기 암으로 죽는 법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부가 조건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순교자가 생길 리도 없어야 한다. 기적에는 무엇보다 하나님 당신만의 온전한 뜻과 계획이 반드시 내포되어야 한다. 그것도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신자가 암으로 죽어도, 성실한 주의 종이 억울하게 순교 당해도 우리는 미처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고 고유의 뜻과 계획도 완벽하게 달성된다. 사방이 완전히 막힌 것이 기적의 필요조건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은 충분조건이다.
이제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힘이 없고 또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오히려 기적을 지레 포기부터 하게 된 이유가 밝혀졌다. 하나님의 능력만 바라보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서 능력만 빌리려 한 것이다. 요컨대 서두에서 밝힌 대로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소원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상적인 일에서 자기 실력으로 최선을 다해 스스로 피 흘리기까지 싸우되 믿음으로 인내하며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소망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저 편안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하루 빨리 환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방적 욕심을 너무나 자주 믿음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다. 기적의 필요조건도 만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치 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믿음을 의지적으로 키우면서 기도라는 종교행위를 했다고 기적이, 더 정확히는 기도의 응답이, 일어난다면 의지가 굳센 신자는 세상에서 벌써 슈퍼맨이 되고 남지 않겠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눈에는 기적같이 보이는 일을 일으키거나 우리 기도제목을 응답해 주는 것쯤은 정말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는 능력을 달라고만 했지 하나님이 반드시 그 특정한 능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이유는 모른다. 열심히 울부짖기는 하는데 기도하는 제목부터 어쩐지 담대함과 자신감이 없다. 분명히 선한 제목이긴 해도 그 진짜 속내가 세상의 향락을 즐기고자 하는 습성과 재물을 탐하는 욕심과 자기가 다른 사람 위에서 군림하려는 교만의 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영은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사랑에서 나온다. 단순히 신자니까 하나님이 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다. 앉은뱅이를 들어서 성전문턱을 넘겨주는 그런 사랑이다. 심령이 가난해져 애통해 하는 자에게만 천국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영원한 뜻이자 당신의 영광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사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7‐9)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껏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을, 또 잠시 하나님을 잊고 있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그 이름으로서 하나님 품안에 넘어 오게 하는 데에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바로 그런 사랑이 나타날 때에는 큰 능력이, 기적도 나타나는 것이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4‐6)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뤄질 때에, 정확히는 그 구원을 위해서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가 치료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지방을 넘었는가?
문지방을 완전히 넘어서 여호와의 궁정에서만 살고자 하는 소망은 없이 그저 자기의 생각과 욕심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목청껏 부른들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는 그런 식의 푸닥거리를 하는 데가 아니다. 그냥 단순히 병이 낫고 돈을 벌고 싶으면 차라리 의사와 투자전문가에게, 심지어 무당에게 가는 것이 더 효과가 빠를 수 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에서 형통케 해주는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궁핍하게 해주는 종교는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로 얼마든지 돈을 벌게 하고 병도 낫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뜻은 우리로 항상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 하게 하는 것이다. 문턱을 넘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성전 문턱을 우리 기분대로 수시로 넘나들면서 성전 안에서 얻은 돈과 능력으로 세상에 다시 나가 자랑하거나 복수하려는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한에는 기적은커녕 기도의 응답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자들 중에서도, 아니 일부 목사들조차 성전의 문지방을 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열심히 기도하여 금과 은을 얻고 일어나 걷게 되면 비로소 성전 문턱을 넘고 들어와 감사헌금 조금 바치겠다는 생각뿐이다. 지금 베드로는 금과 은을 준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었다.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은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품안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토록 들어오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가? 잘 아다시피 창녀, 세리, 죄인,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나면서 앉은뱅이, 나면서 봉사, 12년간 혈루병을 앓던 여인, 38년 된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수가성의 여인, 십자가상의 강도, 에디오피아 내시,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 등이었다. 그들 모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예수님의 개인적 관심과 치유를 받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가?
우선 돈이 없는 자는 아니었다. 또 일어나 걷는 기적이 꼭 필요한 자도 아니었다.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아직도 성전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했고 자기도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해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다. 한 번도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학식이 높고, 인격이 고매하며, 건강하더라도 하나님을 가슴 속에 모시고 있지 않다면 이 앉은뱅이와 똑 같다. 비록 그 서있는 장소는 성전미문 같이 제일 멋지고 아름다울지라도 영적으로는 여전히 구걸하는 거지일 뿐이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뻥 뚫린 구멍을 세상 어는 것으로도 메울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참 사랑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도 권세 있는 그 이름 빼고는 말이다.
바꿔 말해 그분의 이름만 붙들고 성전문턱을 이미 넘어선 신자는 비록 금과 은이 없고 앉은뱅이일지라도 세상의 어느 것도 부럽지 않게 된다. 삶에 불편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도 돈이 없으면 여전히 힘들고 때로는 짜증도 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 드리는 데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되찾아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에 의지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된 것 말고는 이 세상에 더 귀한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정말로 신자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환난과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성전문턱 밖에서 구걸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이 교회 안에서 기도하고 찬양하여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일어났다고 치자. 그것만으로 세상은 절대 감동하지 않는다. 이단종교도 가끔 그런 기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어쩌다 그럴 수 있었겠지 하고 넘어간다. 아예 그런데 관심을 갖지 않는 자도 아주 많다. 모든 인간에게, 신자도 포함하여,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 내면에 과연 예수님의 참 사랑이 있느냐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성전 문턱 밖에 있는 예수를 모르는 영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문턱부터 스스로 낮추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은과 금을 줄 수 있다고 과대 내지 허위 광고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육체를 대해야 한다.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꼭 드러나야 할 때만 나타난다. 예수님의 능력만 바라보는 것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 받은 것조차 아니다.
당신은 정말로 성전 문턱을 이미 넘었는가? 아니면 수시로 들락날락 하고 있는가? 넘었다면 어떤 근거와 공로로 넘었는가? 다른 말로 평생토록 붙들 소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도 권능에 찬 이름인가 아닌가를 묻는 말이다.
12/10/2008
(1996/6/2 유타대학촌 교회 주일설교)